행복한 학교 만들기 (2) 2012. 6. 22
어제 시흥초등학교를 방문했다. 나의 모교다. 그래서 그런지 시흥초등학교를 방문하면 언제나 가슴이 설렌다. 운동장에서 멀리뛰기를 하고 있는 2학년 아이들을 만나 ‘몇 회냐’고 물으니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는다. 무슨 말인지 모를 것이 당연하다. 옆에 있던 한인수 전 금천구청장이 재빨리 “너희 몇 년생이지?” 라고 물었다. 아이들이 2005년생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너희는 105회야.” 시흥초등학교는 졸업횟수를 계산하기가 참 편하다. 함께 나와 있는 차성수 금천구청장은 56회, 1956년생이다. 친구가 온다고 일부러 나온 한인수 전 구청장과 박성철 전 교장 등 우리 동기는 46회, 1946년생들이다. 나는 47년생이지만 그들보다 한 해 일찍 입학했다.
요즘 아이들은 학교에서 용변을 보지 못하고 집에 갈 때까지 참았다가, 집에 가서야 엄마를 부르며 배를 움켜쥐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간다는 세태를 그린 언론보도가 있었다. 좌변기가 없어 쪼그리고 앉아서 용변을 봐야하고, 냄새나고 더럽고, 화장지도 부족하고…… 비데까지 설치되어 있는 깨끗한 양변기에 익숙한 어린이들에겐 지옥이 달리 없을 것이다. 시흥초등학교는 그래도 나은 편, 화장실이 비교적 깨끗했다. 그래도 좌변기는 다섯 개 중에 하나 정도였고 세면대도 몇 개 없었다. 시설이 오래 되어서 개수도 쉽지 않고, 무엇보다 예산이 없어서 고칠 여력이 없다고 한다. 점심시간에 보니, 밥통과 국통을 옮겨와 교실 안에서 배식을 하고 어린이들은 책상에 앉아 밥을 먹는다. 영양과 칼로리는 충분하나 친환경 농산품을 60% 이상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식자재 구매 비용에 많은 압박을 느낀다고 영양교사가 말한다.
옛날 생각이 났다. 전쟁 직후에 우리는 학교를 다녔다. 우리는 학교에 갈 때 삽이나 곡괭이를 하나씩 들고 갔다. 전쟁 중에 학교 교사는 미군부대에게 내주고 우리는 산과 들판에서 그늘을 찾아 칠판을 들고 다니며 수업을 했다. 겨울이나 비가 오는 날이면 시흥교회에 들어갔는데 학생들로 북적거리니 수업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아침에 등교하면 두어 시간 동산이나 묘지 앞에서 공부를 하고는 모두들 삽이나 곡괭이를 들고 산을 깎아 학교 부지를 고르는 일에 매달렸다. 요새 같으면 중장비로 한 두어 시간 갈아엎으면 그만일 것을, 일곱 살에서 열두 살까지의 어린아이들이 삽질하고 곡괭이질하며 몇 달에 걸쳐 산을 골라 평평한 학교 부지로 만들었던 것이다. 땅을 골라 놓고는 건물을 올릴 돈이 없어서, 전교생이 교장 선생님 인솔 하에 마을마다 다니며 모금을 호소했다. 김군삼 교장선생님,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디서 났는지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에서 썼음직한 그런 모자를 쓰고, 당시는 귀했던 핸드마이크를 용케도 구해 들고 다니며 아이들 앞세우고 ‘관제 데모’를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극성이었다. 그렇게 해서 학교 건물을 갖게 되었다. 우리 스스로 학교 건물을 짓고 그 안에서 공부를 할 때 그 기분! 학교가 그냥 천당 그 자체였다.
학교는 동네의 중심이었다. 가을에 대운동회가 열리면 그날은 온동네 잔치날이었다. 운동장에 만국기가 날리고, 집집마다 있는 것 없는 것 다 가져와서 좋은 것은 선생님들 식사자리에 갖다 드리고…… 사실 싸 온 것이라야 기껏 고구마 찌고 밤 삶은 것이 고작이었다. 과자 부스러기라도 사 오고 계란이라도 삶아 온 집은 그래도 여유가 있는 집이었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모두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었다. 농사일에 매달려 사는 엄마 아버지들도 나와서 모처럼 아이들과 함께 이인삼각으로 달리기를 하다가 넘어지곤 했다. 웃음소리가 운동장 가득 울려 퍼졌다. 학교는 지역사회의 중심이었다.
나는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큰 누나는 입만 열면 나에게 “우리 막내 불쌍도 하지…… 아버지 덕도 못보고,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귀여워했을까?” 라곤 말했다. 나보다 스무 살이 많은 큰 누나는 막내인 나를 항상 측은하게 생각했다.
그러던 아버지가 40년 만에 나타나서 막내아들에게 큰 덕을 베푸셨다. 1993년 광명 보궐선거에 출마했을 때 상대후보들은 일제히 나를 ‘낙하산’으로 낙인찍고 ‘반손연대’를 결성했다. 광명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데 위에서 낙점을 받아 출마 했으니 ‘낙하산’이라는 것이다.
그 때만 해도 합동유세가 있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저는 오늘 이 곳 서면초등학교에 오면서 깊은 감회에 빠졌습니다. 저는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너무 어려서 희미하지만 돌아가시기 얼마 전 아버지 손을 잡고 이 곳 서면초등학교에 놀러왔던 것이 어슴푸레 기억납니다. 저희 아버지가 이 곳 서면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셨거든요. 시흥에서 이리 오려면 솔밭을 지났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딘지 기억이 안 나는군요. 이곳에서 면장을 지내신 노재철 면장님이 아직도 살아계신데, 그 분이 아버지 친구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집에 쌀이 떨어지면 둘째 형이 이곳 소하리에 사시는 노면장님 댁에 가서 쌀을 얻어오곤 했습니다.”
뒤에 서있는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렸다. 이곳저곳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손 교장 아들이래?” “아이고 저 사람이 그 때 그 코찔찔이여? 데모하다가 감옥에 갔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저 사람이 손 교장 막낸가?” “맞아, 솔밭이 저 쪽에 있었어.” 라는 웅성거림에 그 날로 낙하산 얘기는 쑥 들어갔다. 아버지 없이 자라면서 ‘아버지란 어떤 존재인가?’ ‘나도 아버지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주눅이 들어 살던 막내에게 아버지가 40년 만에 환생해 덕을 베푼 것이다. 그것도 한꺼번에 화끈하게!
아버지를 아시는 광명 사람들은 아버지를 회상하며 “손 교장 선생님, 엄하고 약주를 좋아하셨지요” 하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노온사리에 사시는 어느 할머니는 “어느 날 퇴근하시다가 우리 영감이 청해서 약주를 하시고는, 우리 영감이 ‘교장 선생님이 어떻게 혼자 가시겠느냐’고 하며 시흥(동면)까지 바래다 주셨지요. 시흥에 도착해서 이번에는 교장 선생님이 ‘여기까지 와서 어떻게 그냥 가겠느냐’고 권해 약주를 같이 드시고는 ‘어떻게 이 늦은 시간에 그 먼 길을 혼자 가겠느냐’고 하며 여기까지 같이 오셔서는 또 한잔을 하시고, 우리 영감이 또 바래다 드리고 한 일이 있었지요” 라고 회고를 했다. 그 학교가 지금의 광명시 학온동에 있는 온신초등학교다. 온신초등학교는 아버지가 2년제 간이학교부터 시작해서 분교로 만들고, 나중에 4년제로, 뒤에 6년제로 발전해 온 학교다. 아버지는 시흥초등학교와 서면초등학교에 재직할 때 분교를 세 개나 세우고 직접 다니며 가르쳤다고 한다. 어른이 가서 가르쳐야지 어떻게 어린아이들을 먼 길 다니게 하겠느냐고 말씀하시곤 했다는 것이었다. 학교는 마을 공동체의 중심이다. 아이들이 먼 길 다니는 것도 안쓰러운 일이지만, 학교가 있다가 없어지면 마을이 생기를 잃는다. 학교가 있으면 아이들 소풍만 가도 온 동네가 들썩거린다. 선생님은 아이들만의 선생님이 아니라 마을공동체의 정신적 지도자이기도 했다. 경기도지사가 되었을 때 교육지원사업을 꽤나 열심히 했다. 교육부에 특별히 요청을 해서 교육지원관을 파견받았다. 4년간 교육지원사업에 쓴 돈만 9,000억원이 넘었다. 제일 먼저 한 사업이 ‘소규모학교 살리기’였다. 도지사가 되기 전 경기도를 구석구석 돌아볼 때, 도민들이 ‘폐교’를 가장 가슴 아파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 때 결심했다. 경제성과 효율성만을 생각해서 시골 마을의 소규모학교, 분교를 없애지 말자고, 학교가 없어지면 마을의 젊은 부부들이 아이들 교육에 절망하게 된다, 학교가 없으니 마을이 마을 구실을 못하는 법이다. 스쿨버스로 아이들을 학교로 실어 나른다고 하지만, 이것은 학교를 아이들의 수업장소로만 생각했지 학교가 마을공동체의 중심이 되고 마을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는 점을 생각지 못한 것이다. 학교의 폐교와 더불어 근처의 마을도 서서히 생명력을 잃어가는 것을 나는 여러 곳에서 보았다.
아무리 작은 규모라도 학교가 있으면, 근처의 마을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고 긴 생명력을 이어갈 터였다.
‘소규모학교 살리기’사업은 농어촌학교의 교육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것을 목표로 100개 학교를 대상으로 학교당 약 7억원을 지원했다. 이 돈은 도서관, 다목적 교실 설립 등 시설 현대화에 쓰여졌고 교원 사택을 건립해 교사들의 주거환경 개선을 통한 사기진작에도 힘썼다. 그러나 시설투자는 나의 주된 목적이 아니었다. 나는 교육프로그램이 새로워지고 활성화되기를 원했다. 대도시를 능가하는 최고수준의 교육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우선 ‘소규모학교 살리기’에 선정된 모든 학교에 1명 이상의 원어민 교사를 배치했다. 이어 국악, 영재수학, 연극, 승마, 골프 등 총 77개 특기적성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으며 모든 학생이 한 가지 이상의 특기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했다. 사업은 좋은 성과를 냈다. 가평의 마장초등학교를 필두로 작은 학교의 열정적 노력으로 학생 수가 급증되는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5년 6월을 기준으로 했을 때, 작은 학교 살리기에 선정된 초등학교의 학생 수 증가는 40%가 넘었고 중학교도 평균적으로 25%가 넘었다. 사업 실시 후 학교에 대한 학부모, 학생의 만족도가 크게 상승한 것은 물론이고, 농촌의 작은 학교에 대한 학부모의 의식이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아울러 대도시 학교로 전학하려고 하는 학부모의 숫자도 크게 줄어들었다.
폐교 위기에 내몰린 농어촌학교에서 학생들이 찾아오는 우수한 작은 학교로 변화되고, 농어촌에 있는 작은 학교지만 얼마든지 우수한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매우 보람찬 교육사업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나는 농촌이나 도농복합지역에 있는 고등학교에도 시, 군마다 한 개 내지 두 개의 학교를 지정하여 ‘농어촌 좋은학교 만들기’사업을 했다. 이 사업도 지역마다 최소한 한 개 이상의 지역거점학교를 지정하여 교육 때문에 서울이나 인근의 도시로 나가는 것을 억제하기 사업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는 도내 농어촌지역이나 도농복합지역의 23개 학교에 학교 당 약 23억원 정도를 지원했다. 이 지원사업으로 각 학교는 필요에 따라 기숙사, 도서관을 짓거나 시청각 교육 기자재를 개선 하는 등 시설 현대화를 추진하고, 원어민 교사나 특별교사를 채용해서 교육의 내용을 다양화하고 수준을 높일 수 있었다. 이 사업은 지역별로 거점 학교의 경쟁력을 높여, 이를테면 가평고등학교의 경우 (대입 실적이 교육의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학생과 학부모들의 가장 큰 관심이 여기에 쏠려있는 현실에서), 이 사업 시행 2년만에 개교 이래 처음 서울대 입학생을 내고 다음 해에는 서울대를 비롯한 소위 SKY대와 주요 대학에 10명 이상 진학하여 지역의 교육 분위기가 한껏 고무되었다. 지역민이 교육 때문에 서울로 도시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지역 학교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시킨 것은 물론이다. 경기도의 교육지원사업은 다양했다. 공업학교를 비롯한 실업계 고교 지원도 적극적으로 했고, 애니메이션고등학교, 디지털고등학교와 같은 특성화 고등학교나, 부천의 진영정보공고처럼 소위 문제학생들을 집중적으로 돌보거나 두레학교와 같이 결손가정 아이들을 주로 돌보는 대안학교, 또는 이우학교와 같이 중산층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대안학교에 대한 지원도 적극적으로 했다. 논란의 대상이 되는 사업도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특목고 벨트 구축사업이었다. 나는 경기도를 8개 권역으로 나누어 과학, 외국어 분야 등에 특화된 ‘특목고 벨트(Edu-Belt)’를 구축하는 사업을 시행했다. 과학고를 육성 지원한 것에는 후회가 없고 그 성과 또한 나쁘지 않다고 판단하지만, 외국어고를 지원하고 육성한 것은 수월성 교육에 대한 나의 안이한 판단에 기인한 바가 적지 않았다. 내가 지원한 외고 중에는 용인외고와 같이 톱을 달리는 학교도 있지만, 문제는 외고의 설립목적은 간데없고 결과적으로 ‘일류대학 입시학원’으로 전락한 현실에 있다.
핀란드에서 보았듯이 교육은 ‘사람’을 길러내는 인성교육이 되어야 하며, 학생들을 행복하게 만들면서 학업성취도를 세계 최고로 유지하는 창의교육이라는 점을 재확인했다. 이를 위해서는 역시 공교육을 강화해야 하고, 공교육 강화를 위한 교육재정의 확충이 핵심적 과제다. 결국은 투자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집같이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이야말로 공교육 강화의 기본이다. 학교에서는 화장실에 갈 수 없다면 학교는 더 이상 행복한 삶의 터전이 될 수 없다. 공포와 불행의 장소에서 어떻게 높은 학습능력이 나오겠는가? 급식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아니면 어떻게 학교생활에 마음을 붙이고 공부에 열중할 수 있겠는가? 동산이나 수풀은커녕 학교운동장이 코딱지만 해서 100m 달리기도 못하는 환경에서 어찌 호연지기를 키울 수 있겠는가?
‘소규모학교 살리기’도 투자였고, ‘농어촌 좋은학교 만들기’도 투자였다. 경기도의 시범사업은 교육부의 사업으로 확대 발전되었지만 예산의 태부족으로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화장실 환경 개선을 통해 아이들이 학교에 마음을 붙이게 하고, 점심시간이 아이들에게 행복한 시간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쾌적한 환경의 식당이라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교사에 대한 처우개선을 더욱 높이고 불필요한 문서작성 및 잡무에서 해방시켜 교사들이 더 높은 수준의 자부심을 갖고 아이들 교육에 전념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핀란드가 스웨덴 식민지에서 벗어난 후 빈곤에서 탈피하기 위한 길을 교육에서 찾고 1970년대 초부터 교육개혁을 시작하여 교육에 전 국력을 경주하여 과감히 투자함으로써 오늘의 교육강국을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의 강소국을 이루었듯이, 우리도 교육으로 나라의 미래에 승부를 걸어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교육에 과감하게 투자를 늘려 지금 GDP의 3.5%에 지나지 않는 교육비를 OECD 수준인 6%로 상향 조정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학교에 가는 것이 행복하고 학교에 보내는 것이 안심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만들어 갈 새로운 사회, 2013체제의 또 하나의 핵심적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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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한민국 손학규 원문보기 글쓴이: 손학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