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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순 쌍봉사 대웅전. 3층 목탑 형태의 전각으로 눈길을 끄는 절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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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빠듯한 일정이다. 새해 들어서도 숨 돌릴 겨를이 없다. 육신이 피곤하다. 마음도 허하다. 벌써 지쳐만 간다. 모든 것으로부터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다. 몸과 마음이 자연스레 절집으로 향한다.
전남 화순 쌍봉사로 간다. 지난 3일이다. 쌍봉사는 편안한 절집이다. 여느 절집처럼 깊은 산속에 들어앉지 않았다. 논두렁과 이어지는 평지에 자리 잡았다. 절집 분위기도 은은하고 소박하다. 근엄하거나 위압적이지 않다. 소소한 아름다움이 묻어난다.
쌍봉교차로에서 구불구불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간다. 느긋한 마음으로 산과 들에 눈 맞추며 하늘거렸다. 마을이 냇가와 잘 어우러진 쌍봉마을도 지난다. 논두렁 너머로 절집이 모습을 드러낸다. 길옆에서 마주치는 시골의 한옥마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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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봉사로 가는 길에 만나는 쌍봉마을. 마을 풍경이 소박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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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봉사 전경. 논두렁 너머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평지에서 만나는 절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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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봉사는 선종 사찰이다.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다. 신무왕 원년(839년)에 적인선사가 여름을 지냈고, 문성왕 때 철감선사가 10년 동안 머물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 문종 35년(1081년)에 중건했는데,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사라졌다. 인조(1628년) 때 다시 중건했다.
창건과 소실, 중건의 과정을 거쳤다. 3층 목탑의 모습을 간직한 유일한 절집이었다. 절의 앞과 뒤 산봉우리가 두 개여서 '쌍봉(雙峰)'으로 이름 붙었다. 한국전쟁 때 대웅전과 극락전만 남기고 대부분 소실됐다.
30년 전(1984년) 봄엔 3층 목탑 형태의 대웅전까지 불에 타버렸다. 촛불로 인한 화재였다. 1936년 지정된 보물(제163호)에서도 자동 해제됐다. 지금의 대웅전은 1986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3층 목탑 형식을 그대로 되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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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봉사 대웅전. 3층 목탑의 대웅전으로 널리 알려진 절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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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조 석가삼존불. 쌍봉사 대웅전 안에 모셔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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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은 웅장하거나 위압적으로 다가서지 않는다. 고목이 된 감나무와 어우러져 정겹다. 대웅전 안에는 당시 화마를 피한 목조 석가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석가모니와 두 제자인 가섭존자, 아난존자의 상이다. 삼존불이 모셔진 자리를 빼면 비좁은 방이다. 한두 사람 겨우 들어앉을 만한 공간이다. 이렇게 좁게, 그리고 높게 대웅전을 배치한 발상이 별나다.
대웅전 뒤편의 극락전도 눈길을 끈다. 아미타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안에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목조상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극락전으로 오르는 돌계단에서도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돌계단 아래에는 단풍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흡사 극락전의 문지기 같다.
"화재를 막아준 나무예요. 불이 극락전으로 옮겨 붙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고 해요. 극락전 보호의 일등공신이라고 할까요." 절집에서 만난 우영애 화순군 문화관광해설사의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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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봉사 극락전. 단풍나무 두 그루가 문지기처럼 전각을 지키고 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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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봉사 공양간 풍경. 절집이라기 보다 옛집처럼 편안한 느낌을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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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 오른편에는 나한전이 자리하고 있다. 왼편엔 지장전이 있다. 지장전의 조각상도 진흙이 아닌 나무로 만들어져 특별하다. 그 뒤로 대밭이 무성하다. 호성전은 절집에서 보기 드문 모양새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한 T자형의 맞배지붕으로 된 전각이다. 넓지 않은 절집인데도 눈 맞출 전각이 많다. 공양간도 우리네 옆집처럼 편안해 보인다.
이제 쌍봉사를 빛내주는 문화재를 만나러 간다. 철감선사탑(국보 제57호)과 철감선사탑비(보물 제170호)를 볼 차례다. 별난 3층 모양의 대웅전에 가려진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절집의 주인공이다. 발걸음을 대웅전 뒤편으로 옮긴다.
대숲길이 반겨준다. 무성한 대숲에 내려앉은 바람이 밀어를 속삭이는 것 같다. 연녹색 대나무가 마음속까지 청량하게 해준다. 대숲을 굽이돌아 오르는 돌계단도 단아하다. 차나무도 자유분방하게 자라고 있다.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감도 마음을 넉넉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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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봉사 대숲. 철감선사탑과 탑비를 보러 가는 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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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봉사 철감선사탑과 탑비를 보러 가는 길. 야생의 차밭이 길섶으로 무성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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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감선사의 탑과 탑비는 통일신라 경문왕 8년(868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선사가 71세의 나이로 입적한 때다. '철감'은 선사가 입적한 뒤 경문왕이 내려준 시호다. 탑과 탑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철감선사탑은 8각의 둥근 집 형태를 띄고 있다. 원당형(圓堂型)이다. 한눈에 봐도 조형미가 빼어나다. 누구라도 금세 감탄사를 연발한다. 신라시대 부도 가운데 조각과 장식이 가장 화려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려함의 극치는 지붕돌인 옥개석에 있다. 기왓골을 타고 내려오는 선이 흙으로 빚은 것처럼 자연스럽다. 돌에다 기왓골을 만들고 서까래와 처마, 암막새와 수막새도 새겨 놓았다. 옛 건축물의 지붕보다도 더 섬세하다. 그 안에 새겨진 연꽃도 살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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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봉사 철감선사탑. 8각의 둥근 집 모양을 하고 있다. 한 눈에 봐도 빼어난 조형미를 확인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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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감선사탑의 지붕돌. 기왓골을 타고 내려오는 선이 아주 자연스럽다. 마치 흙으로 빚은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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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감선사탑비도 살아 움직인다. 거북이 오른쪽 앞발을 들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것 같다. 생동감이 느껴진다. 한 치의 허점도 드러나지 않는 석조건조물의 극치다. 탑과 탑비를 보면서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옛 사람의 공력이 불가사의할 뿐이다.
석공이 얼마나 많은 밤낮을 보냈을까. 상상하기 어렵다. 한편으로는 첨단기술이 발달한 현대의 사람들이 과연 이렇게 만들 수 있을까, 설사 만들더라도 수많은 세월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백 번을 생각해도 걸작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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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오른발을 들어올린 거북의 모습이 위풍당당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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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불재 앞길. 이불재는 역사와 불교에 얽힌 사실에다 문학적인 상상력을 가미한 글을 주로 쓰는 소설가 정찬주가 사는 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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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을 찬찬히 돌아보고 나왔다. 건너편 산자락에 집 한 채가 눈길을 끈다. 소설가 정찬주의 집이다. 처소에다 '이불재(耳佛齋)'라고 이름 붙여 놓았다. 솔바람으로 귀를 씻어 진리를 이루는 집이란 의미란다. 정찬주는 불교적 사유가 배어 있는 소설과 명상적 산문을 주로 써왔다. 지난해 말엔 한글 창제의 주역이 승려 신미대사였다는 도발적인 내용을 담은 소설 <천강에 비친 달>을 펴냈다.
정찬주는 새해 들어선 전남도청 누리집에 대하 역사소설 <이순신의 7년>을 연재하고 있다. 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까지 7년 동안 이순신 장군의 삶을 호남민중의 역할과 함께 재조명하는 역사소설이다.
가까운 쌍봉리에서 학포당도 만난다. 조선 중종 때 학자이면서 서화가인 학포 양팽손의 서재다. 1920년에 그의 후손들이 원래의 자리에 원형대로 복원해 놓았다. 마을 풍경도 쌍봉사만큼이나 소박하다. 나그네에게 해탈을 안겨주는 절집과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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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포당. 조선시대 서화가였던 학포 양팽손의 서재다. 후손들이 원래의 자리에 복원해 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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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