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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5.18.수)
1.일시: 5월 18일(수) 오전 10:00
2.모임장소: 이촌역3번출구
3.참석자(5명):김창덕.엄영섭.오춘식.유근국.이도경.
4.나들이코스:
*.첫날(5.18):서울(이촌역3번출구.잠실나루역)-중부.중앙.영동고속도로-여주맛있는휴게소-죽령-영주순흥읍내리벽화고분-소수서원-부석사-춘양-주실령고개-박달령-오전약수터(한미식당.054-672-2400)
*.둘째날(5.19):주실령고개-옥돌봉(옥석산정상)-예천바위-철쭉군락지-옥돌봉-박달령-오전약수터-마구령(고치령.늦은목이입구)-김삿갓유적지-제천IC-추풍휴게소-중부.중앙.영동고속도로-서울(잠실나루역.이촌역)
역사유적지를 둘러보고 옥돌봉에서 호연지기를 기르자.
첫날은 죽령-영주순흥읍내리벽화고분-소수서원-부석사-춘양-주실령고개-박달령-오전약수 마시고
둘째날은 주실령고개-옥돌봉(옥석산정상)-예천바위-철쭉군락지-옥돌봉-박달령-오전약수터-마구령(고치령.늦은목이입구)-김삿갓유적지에서 방랑시인을 찾는 날
30도를 오르내리는 여름 날씨.
오늘 5.18 수산노리 5월 1박2일의 나들이 행사 기념비적 날이 되기를 바래야지.
중앙고속도로 단양IC를 빠저나와 30여분 달리니 죽령옛고개 휴게소다.
여기서 비로소 하늘은 맑고 신록의 산이련가.
소백산 자락 죽령고개다.
죽령휴게소에 소백산 자락을 오르며 태양계의 크기 체험을 할 수 있는 탐방로 안내판이 새롭다.
언제 이런 곳을 만들었지?
밤하늘에 별을 관측하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다.
죽령고개를 출발하여 국도변에 초라한 안내판 ‘순흥읍내리벽화고분지’하나를 하마트면 지나칠 뻔 했다.
6세기 신라시대 만들어 젔다는 고분에 불을 켜고 들어가서 본 벽화그림들이 소중하고 신비롭다는 생각에 보고 또 본다.
오랜 세월 벽들이 훼손된 흔적있어도 색깔만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소백로 국도따라 소수서원은 커다란 공원같다.
먼저 박물관 관람하고 선비촌 둘러보는 정도로만 해야지
박물관은 관람하기 좋게 자료와 사진과 동산들로 가득차 있었고
선비촌은 구옥과 초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사람이 거주 하지 않은 것이 안동 하회마을과 다른 모습이다.
초등학교 사회시간에 ‘부석사 무량수전’은 최초 목조 건물이라는 것을 배워서 너무도 유명하지 않는가.
무량수전 건물은 ‘태백산부석사’라는 입구를 통과하여서도 한참을 올라가야한다.
처음 방문객이라면 벌써부터 궁금증은 커지게 만들고 있다.
참 높은 곳에도 있기 때문이다.
무량수전 건물앞에 있는 안양루에서 바라다보이는 소백산은 한눈에 다 들어 온 듯 실로 장관이다.
‘無量壽殿’현판 글씨 색은 바래었어도 공민왕의 혼이 있는데 엄숙한 위용을 느껴 보아야지
무량수전 건물 옆 부석 바위도 흥미롭다.
좁은 틈새도 들어가보고 바위가 떠 있다는 전설이 있기에 점프도 해본다.
이럴때는 동심이다.
이제 부석사를 떠나 옥석산 입구로 가야 한다.
춘양목을 보겠다는 시도해 보았으나 휴양지 공사중이라서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금강송이 바로 춘양목이라는 사실을 알고 금강송 집산지가 이 곳이라니
새로운 상식이 늘게 되었다.
향긋한 솔향 벗 삼아 걷고 또 걷고 바로 `봉화 외씨버선 길`있는 곳
그리고 조선시대부터 우수 약수시합으로 1위를 했다는 오전약수터를 가려면 주실령고개를 넘어야 한다.
주실령고개 확인하고 오전 약수로 향하던중 오른 쪽에 좁은 길하나 있는데....
망거진산이 누구인가.
그래서 우리는 아슬아슬한 곡예운전 맛보며 박달령에 오르게 되었고
다음날 등산으로 박달령 또 오게되니 두 번째 인연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있었던 마구령 가며 겪어야 했던 산길체험은 아마도 일생일대 처음이자 마지막 일 것 같다.
이렇게 높게 구불구불 하며 겨우 차 한데 갈 수 있는 좁고 험한 길이 있다니....
그것도 망산의 애마 17년 무쏘타고 갔었다는 사실은 꼭 부연해야 한다.
이런 곳이 있어 무쏘를 끌고 온 깊은 망산 속을 어이 알았겠는가.
모든 것이 사라져도 그리고 지나간 것은 잊혀저도
사라지고 잊혀진 것이 더 아름답다고 시인은 노래 했었다는데
그래 망산을 만난 인연이기에 이런 체험도 하게 되는 거 아닌가.
여정은 험난하고 힘들어야 더욱 아름답다고 했다.
마구령길이 있어서 고치령 입구가 어디라는 걸 알게 되어서
그리고 백두대간에 서 있었다는 것 때문에 여정은 더욱 아름다웠다는건가.
그리고 하나 더 붙이자면 ‘무쏘네비’보다도 ‘인간네비’ 망거진산이 자기 자신을 더 신뢰한다는 사실.
사실은 죽령휴게소에 땅 7필지 사두었고 김삿갓유적지에 임야 사두었던 축적된 경험으로 초행이 아니라는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기는 하다.
그래서 여하튼 무쏘에 달려 있는 네비는 이미 문명의 이기가 될 수 없음을 우리는 늦게나마 알게 되었다.
옥석산 이름도 보석같다. 산은 작은 보석처럼 빛나는가.
옥돌봉 오르기까지 깔닥고개는 애교다.
옥돌봉 이름이 예쁘듯이 산세도 예쁘다.
550년된 철쭉을 숨기고 있어 옥돌이렸다.
550년 철쭉은 도래기 가는 길 옆에 숨어 있다.
철쭉은 우리 키를 두배 넘게 크기도 하다.
8시 입산시작하여 13시경 하산.
주실령고개에서 옥돌봉까지 1시간, 옥돌봉에서 철쭉군락지까지 왕복 30분,
옥돌봉에서 박달령까지 1시간 30분, 박달령에서 오전약수 한미식당까지 50분은 쉬지 않고 단숨에 하산.
모두 4시간 걸렸다.
오랜 세월동안 김삿갓유적지 참 오고 싶었던 곳이다.
오지중에서도 오지에 있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진천IC에서 오면 초 고속인걸....
명국환의 구수한 노래도 그랬지만
인간 김삿갓.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사랑하고 있는가.
『방랑시인 김삿갓』
김문응 작사 / 전오승 작곡 /명국환 노래
1.죽장에 삿갓쓰고 방랑 삼천리
흰구름 뜬 고개넘어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대문 문간방에 걸식을하며
술한잔에 시한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2.세상이 싫든가요 벼슬도 버리고
기다리는 사람없는 이 거리 저마을로
손을 젖는 집집마다 소문을 놓고
푸대접에 껄껄대며 떠나가는 김삿갓
『난고평생시』
새도 둥지가 있고 짐승도 굴이 있건만
내 평생을 돌아보니 너무나 가슴 아파라.
짚신에 대지팡이로 천 리 길 다니며
물처럼 구름처럼 사방을 내 집으로 여겼지.
남을 탓할 수도 없고 하늘을 원망할 수도 없어
섣달 그믐엔 서글픈 마음이 가슴에 넘쳤지.
초년엔 즐거운 세상 만났다 생각하고
한양이 내 생장한 고향인 줄 알았지.
집안은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렸고
꽃 피는 장안 명승지에 집이 있었지.
이웃 사람들이 아들 낳았다 축하하고
조만간 출세하기를 기대했었지.
머리가 차츰 자라며 팔자가 기박해져
뽕나무밭이 변해 바다가 되더니,
의지할 친척도 없이 세상 인심 박해지고
부모 상까지 마치자 집안이 쓸쓸해졌네.
남산 새벽 종소리 들으며 신끈을 맨 뒤에
동방 풍토를 돌아다니며 시름으로 가득 찼네.
마음은 아직 타향에서 고향 그리는 여우 같건만
울타리에 뿔 박은 양처럼 형세가 궁박해졌네.
남녘 지방은 옛부터 나그네가 많았다지만
부평초처럼 떠도는 신세가 몇 년이나 되었던가.
머리 굽실거리는 행세가 어찌 내 본래 버릇이랴만
입 놀리며 살 길 찾는 솜씨만 가득 늘었네.
이 가운데 세월을 차츰 잊어 버려
삼각산 푸른 모습이 아득하기만 해라.
강산 떠돌며 구걸한 집이 천만이나 되었건만
풍월시인 행장은 빈 자루 하나뿐일세.
천금 자제와 만석군 부자
후하고 박한 가풍을 고루 맛보았지.
신세가 궁박해져 늘 백안시 당하고
세월이 갈수록 머리 희어져 가슴 아프네.
돌아갈래도 어렵지만 그만둘래도 어려워
중도에 서서 며칠 동안 방황하네.
『蘭皐平生詩 난고평생시』
鳥巢獸穴皆有居 顧我平生獨自傷 조소수혈개유거 고아평생독자상
芒鞋竹杖路千里 水性雲心家四方 망혜죽장로천리 수성운심가사방
尤人不可怨天難 歲暮悲懷餘寸腸 우인불가원천난 세모비회여촌장
初年自謂得樂地 漢北知吾生長鄕 초년자위득락지 한북지오생장향
簪纓先世富貴人 花柳長安名勝庄 잠영선세부귀인 화류장안명승장
隣人也賀弄璋慶 早晩前期冠蓋場 인인야하농장경 조만전기관개장
髮毛稍長命漸奇 灰劫殘門飜海桑 발모초장명점기 회겁잔문번해상
依無親戚世情薄 哭盡爺孃家事荒 의무친척세정박 곡진야양가사황
終南曉鍾一納履 風土東邦心細量 종남효종일납리 풍토동방심세양
心猶異域首丘狐 勢亦窮途觸藩羊 심유이역수구호 세역궁도촉번양
南州從古過客多 轉蓬浮萍經幾霜 남주종고과객다 전봉부평경기상
搖頭行勢豈本習 口圖生惟所長 요두행세기본습 구도생유소장
光陰漸向此中失 三角靑山何渺茫 광음점향차중실 삼각청산하묘망
江山乞號慣千門 風月行裝空一囊 강산걸호관천문 풍월행장공일낭
千金之子萬石君 厚薄家風均試嘗 천금지자만석군 후박가풍균시상
身窮每遇俗眼白 歲去偏傷빈髮蒼 신궁매우속안백 세거편상빈발창
歸兮亦難佇亦難 幾日彷徨中路傍 귀혜역난저역난 기일방황중로방
얼마 남지 않은 황혼들이다. 불게 물들이며 살자.
황혼은 수산노리가 있어서 붉게 물들여 지고 있다.
수산노리는 망산이 기획하고 연출하며 우리가 호응하고 동참한다.
5월 1박2일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역사유적지와 호연지기를 체험할 수 있는 여정의 기회를 준 망산께 감사하다는 말 전해야지.
우리들 이틀동안 많이도 돌아 다녔지?. 좀 과했지 않았나?.
모두가 건강하기 때문 아닌가.
어라~~ 88도로 다니면서 이렇게 씽씽 달리기는 참 오래간만인것 같아.
우리들 위해서 하느님이 보살펴 주어서 그런거 아닌가.
지나간 것들은 아름다운 것
그래서 모두의 추억속에 아름다운 여정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모두들 수고 많았습니다.
☗〔여행길 계획〕
3월 매화,개나리, 산수유 꽃 산행
4월 진달래, 벗꽃 산행
5월 철쭉 꽃 산행
6월 섬 산행
7월 계곡 산행
8월 야영
9월 특별히 가고 싶은 곳
10월,11월 단풍, 억새 산행
12월 기차여행, 또는 온천
☗.죽령[竹嶺]
죽령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에 사이에 있는 고개. 높이 689m. 일명 죽령재, 대재라고도 한다. 신라 제8대 아달라이사금 5년(158)에 길을 열었다. 소백산맥의 도솔봉과 북쪽의 연화봉과의 안부에 위치한다.
높이 689m. 일명 죽령재·대재라고도 한다. 신라 제8대 아달라이사금 5년(158)에 길을 열었다. 소백산맥의 도솔봉(兜率峰, 1,314m)과 북쪽의 연화봉(蓮花峰, 1,394m)과의 안부(鞍部)에 위치한다.
또한 고갯마루에서 서쪽의 보국사(輔國寺)까지는 비교적 완사면으로 내려가나 곡저(谷底)의 당동리까지는 다소 굴곡이 심한 내리막길이다. 이와 같이 비록 험한 고갯길이었으나 예로부터 영남 지방과 호서 지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1941년 죽령 밑으로 4,500m의 죽령터널을 뚫어 중앙선이 개통되었고, 터널의 동쪽에 희방사역, 서쪽에 죽령역이 개설되었다.
동쪽 풍기에는 풍기인삼이 유명하며, 희방사역에서 하차하여 북쪽으로 약 3㎞ 계곡을 올라가면 희방폭포와 희방사에 이르고 아름다운 풍경을 접할 수 있다. 서쪽 사면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여 산지의 높은 곳까지 개간되었고, 고갯마루 근처에도 계단식 뽕나무밭이 조성되어 산림이 울창한 동쪽 사면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죽령은 삼국 시대 이래로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조선 시대에는 죽령사(竹嶺祠)라는 산신사당이 있었다. 지금도 용부원리 계곡에 산신당이 있고, 터널 입구 부근에 제2단양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죽령폭포가 있다. 옛날 어느 도승이 이 고개가 너무 힘들어서 짚고 가던 대지팡이를 꽂은 것이 살아났다 하여 죽령이라 하였다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죽령 [竹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영주 순흥 벽화 고분[榮州 順興 壁畵 古墳]
요약경북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비봉산(飛鳳山) 중턱에 있는 신라의 채색 벽화고분.
소재지: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산 29-1 지도
사적 제313호. 평면 직사각형의 돌방무덤[石室墓]이고, 크기는 동서 3.35m, 남북 2.14m이다. 1985년 7월 10일 대구대학교 교수 이명식(李明植)이 발견하였다. 사각형으로 다듬은 돌로 6∼7단씩 쌓은 고분의 벽면에 회칠을 하고, 그 위에 채색으로 북벽에는 연꽃과 구름무늬, 서벽에는 뱀을 손에 쥔 나체 인물화, 동벽에는 나체의 역사상(力士像)과 서조(瑞鳥) 등이 그려져 있는데, 다른 벽화와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는 고구려풍을 띠고 있다. 또 고분의 연대를 밝힌 결정적 고증자료가 된 2행 9자의 검은 붓글씨로 써 놓은 명문(銘文:己未中墓像 人名口口)이 고분 널길[羡道]의 벽면에서 발견되어, 599년(신라 진평왕 21) 기미년(己未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보다 앞서 1971년 이 고분에서 2km 떨어진 순흥면(順興面) 태장리(台庄里)에서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발굴단이 발견한 최초의 신라벽화고분 순흥어숙묘(順興於宿墓)의 석비(石扉)에 “乙卯年於宿知述干”이라는 명문이 있었고, 을묘(乙卯)라는 명문에 의해 595년(진평왕 17)의 고분임이 확인된 바 있어, 이 벽화고분도 진평왕 21년 기미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에서는 그 내용과 문화사적 성격으로 보아 지금까지 남한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벽화 중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한국의 벽화고분은 주로 고구려시대에 널리 유행했던 묘제로서 이제까지 61기가 발굴 조사되었으며, 그 중 57기가 평양 ·안악(安嶽) 및 중국의 지안[集安:輯安]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남한에서는 백제고분 2기(公州 宋山里 6호분 ·扶餘 陵山里 벽화고분) ·가야고분 1기(高靈 古衙洞 벽화고분) ·신라고분 1기(順興於宿墓) 등 모두 4기가 발굴되었을 뿐이므로 순흥벽화고분은 다섯 번째가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주 순흥 벽화 고분 [榮州 順興 壁畵 古墳] (두산백과)
☗.소수서원紹修書院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의 유현(儒賢) 안향(安珦)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1543년(중종 38)에 학사(學舍)를 이건(移建)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그후 1544년 여기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1633년(인조 11)에는 주세붕을 추배(追配)하였다. 1550년(명종 5)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와서 조정에 상주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사액(賜額)과 《사서오경(四書五經)》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내사(內賜)를 받게 되어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공인된 사학(私學)이 되었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를 면한 47서원 가운데 하나로 지금도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서원의 건물로는 명종의 친필로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扁額)이 걸린 강당, 그 뒤에는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 동북쪽에는 학구재(學求齋), 동쪽에는 지락재(至樂齋)가 있다. 또한 서쪽에는 서고(書庫)와 고려 말에 그려진 안향의 영정(影幀:국보 111)과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보물 485)가 안치된 문성공묘(文成公廟)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주 소수서원 [榮州 紹修書院] (두산백과)
☗.부석사의 무량수전
안양루 밑을 지나며 고개를 들어 쳐다보면 마치 네모진 액자틀 사이에 찍힌 ‘예술사진’을 보는 듯 그 자체로 완벽한 구도 안에 석등의 화사석 모습이 화사하게 보인다. 화사석 너머 빠끔히 보이는 ‘無量壽殿’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무량수전은 현재 부석사의 주요 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다. 서방 극락을 주재한다는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닌 분이라 하여 다른 말로 ‘무량수불’이라고도 한다. 그러한 부처님을 모신 전각이니 ‘무량수전’이 되는 것이다.
무량수전 현판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머무를 때 쓴 글씨라 전한다.
마주하는 무량수전은 의젓하면서도 육중하거나 둔하지 않다. 다시 최순우 선생의 말을 빌려보자.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온 목조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에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봐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무게가 적당히 무거워 보이는 팔작지붕, 앞에서 보아 세 칸으로 단정한 격자문이 달린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다. 1916년에 해체·수리할 때에 발견한 서북쪽 귀공포5)의 묵서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왜구의 침노로 건물이 불타서 1376년에 중창주인 원응국사가 고쳐 지었다고 한다. 무량수전은 ‘중창’ 곧 다시 지었다기보다는 ‘중수’ 즉 고쳐 지었다고 보는 것이 건축사학자들의 일반적인 의견이다. 본래 있던 건물이 중수연대보다 대개 100~150년 앞서 지어진 것으로 본다면 1363년에 중수한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나이를 다투니,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보아도 지나치지 않겠다. 이같은 건축사적인 의미나 건축물로서의 아름다움 때문에 무량수전은 국보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랜 건물의 하나로 늠름하면서 완숙한 경지를 보여준다.
정면에서 보이는 무량수전은 칸 사이가 비교적 넓은 다섯 칸에다 옆면은 세 칸이지만 기둥 앞쪽으로도 외목도리6)를 내 11량7)을 인 우람한 팔작지붕집이다. 기둥 위에만 포작8)이 있는 주심포집으로, 이 무량수전의 포작은 간결하면서도 공들여 가구를 짜나간 고려시대 장인정신을 맛볼 수 있는 주심포 방식의 교과서로 손꼽힌다.
이것말고도 무량수전에는 눈여겨볼 수법이 많다. 기둥의 배흘림과 안쏠림, 귀솟음과 평면의 안허리곡 같은 것들이 우리가 미처 모르는 새에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있는 수법들이다. 배흘림이란 기둥의 아래쪽 1/3쯤이 가장 불룩하게 배가 불러보이게 한 것을 말하고, 귀솟음은 건물 모서리기둥을 중앙보다 좀더 높인 것을 말한다. 이는 모두 사람의 착시를 교정하고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려는 보정작용들이다.9) 안허리곡은 가운데보다 귀부분의 처마 끝을 더 튀어나오게 하여, 위나 옆에서 무량수전을 보았을 때 처마 선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을 그리도록 한 것이다.
안쏠림은 그것이 가능하도록 기둥 위쪽을 건물 안쪽으로 경사지게 세우는 것인데, 이것은 단순히 기둥과 처마선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공포와 벽면도 함께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니 벽면의 가운데가 은근히 휘어져 있다. 나무와 흙만으로 지은 집의 이런 교묘한 배려로 인해 우리는 육중하면서도 넓은 무량수전의 지붕이 활짝 펼친 새의 날개처럼 열려 있다고 느끼게 된다. 이처럼 눈에 드러나지 않게 한 옛사람들의 배려가 궁극적으로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으로 조화롭게 피어났던 것이다.
무량수전의 공포기둥 위에만 공포가 설치된 주심포 양식이다. 무량수전의 주심포는 매우 간결한데 주두에 굽이 있는 모습에서 고식의 잔형을 볼 수 있다.
무량수전은 옆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앞면의 경우 세 칸에는 분합문과 광창, 좀 좁은 맨 가장자리 칸은 두 짝 창으로만 되어 있다. 창들은 모두 위쪽으로도 올려 고정시킬 수 있는 들어열개 형식으로 되어 있어 큰 재를 올릴 때에는 활짝 열어 개방할 수 있다. 그러나 원래는 뒷벽처럼 문틀에 널판문을 달고 옆쪽에는 조사당에서처럼 살창을 두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고려 말 중수할 때 이러한 형식으로 바뀐 듯하다.
무량수전의 뒷벽고려시대 건물에 일반적이었던 살창을 다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전각 안으로 들어서면 맞은편(서쪽)으로 아미타여래가 자리잡고 있다.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높게 솟은 배흘림기둥이 엄숙한 분위기를 만들어 절로 숙연해진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위를 보면 기둥과 보가 엮이고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연등천장을 볼 수 있다. 딱딱하지 않은 직선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조화와 함께 다 보여줄 수 있는 당당한 자신감이 드러난다. 그 모든 것이 각각 하나의 ‘디자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러한 결구방식은 ‘아름답게 보이려고’ 치장한 것이 아니라 지붕의 무게를 고루 분산시키는 노력의 과정에서 나온 것이기에 최순우 선생이 말한 ‘필요미’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된다.
기단에 새겨진 마애명무량수전을 든든히 받치고 있는 기단도 예사롭지 않다. 면석과 기둥석, 갑석이 갖추어진 모양이 마치 석탑의 기단부 구조와도 같다. 이는 석탑이 목조건물에서 비롯된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이 무량수전 기단은, 지대석 위에 원형 초석이 드러나고 계단이 돌출된 방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기단을 곧게 이어받은 고려시대의 것이다. 또 계단 동쪽 벽면을 유심히 살펴보면 ‘충원 적화면(忠原 赤花面) 석수 김애선(石手 金愛先)’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건축물에 대한 석수의 애정과 자신감을 드러내준다. 이 이름자는, 마치 이 기단이 600년 전이 아니라 방금 마무리되어 아직도 그 석수의 체온이 돌에 남아 있을 것만 같은 기분까지 느끼게 해준다.
바닥에는 본래 녹유를 두껍게 입힌 전돌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아미타경』에서 극락세계의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고려 때의 것으로 수습된 몇 점이 유물전시각에 진열되어 있는데 그처럼 두꺼운 유리질막의 전돌이 무량수전 바닥 가득히 깔려 있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아주 휘황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녹유전을 걷어내고 마루를 깔게 된 것은 엎드려 절을 하는 풍조가 일반화된 조선시대의 예배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요즈음에는 그 위에 다시 카펫을 덮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석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 경북북부, 초판 1997., 15쇄 2010., 돌베개)
☗.육송, 금강송, 춘양목 | 나무이야기
소나무를 표현하는 명칭이 정말 가지가지다..
먼저 수입소나무를 보면..
소송 : 주로 다루끼(한글명칭을 몰라서리)용으로 많이 사용되는데 러시아(쏘련)에서 수입을 하니까?
미송 : 미국에서 수입한 소나무(미국에 소나무 종류가 한두가지인가? 햄록)
뉴송 : 뉴질랜드에서 수입한 소나무(주로 공사장 토판류에 많이 사용)
카송 : 카나다에서 수입한 소나무
외국에서 수입한 소나무는 그렇다 치고도..
그럼 국내에서 자라는 소나무는 또 어떠한가?
육송은 무엇이고, 금강송은 무엇이고 춘양목은 무엇인가.. 초보자들 헷갈리게 만들죠.
- 육송은 내륙에서 자라는 소나무를 칭하고 그 반대말은 해송(바닷가에서 자라는 소나무)
따라서 통상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소나무를 육송이라고들 합니다.
단, 우리나라에서 자라지만 자라면서 뽄대가 없는 소나무가 있는데 이놈을 "리기다"로 칭하며 엄격하게 육송과는 구분을 하고 있습니다.
금강송 : 육송중의 하나로 곧게 자라는 소나무로 마디가 길고...
경북 과 강원도 지역에서 자생한다고 하는데...
춘양목 : 봉화 춘양면에서 집결하여 전국으로 팔려나간 금강송을 칭하였던 단어..
"금강송" 과연 정의를 내릴수 있을까?
모양에서 곧게 자라는 소나무
(이상하게 자이 아파트에서 많이 보이는 쭉쭉빵빵한 소나무와, 정이품송의 모양은 완전히 다르죠..)
그런데 나무의 모양은 주변환경이 결정합니다.
참나무(활엽수)와 경쟁하면서 자라는 소나무들은 쭉쭉빵빵입니다... 아그러면 지가 죽거던요.
그런데 주변에 경쟁하는 나무가 없으면 정이품송과 같은 육감적이며 우아한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죠..
경상도와 강원도 일부에서 자란다..
충청도 괴산에서도 자라고,안면도 소나무는 그냥 육송인가 ??
개인적으로 알면 알수록 모르겠는 것이 금강송의 정의 입니다.
일단 금강송이라는 단어가 있고 좋다고 하니까 이놈, 저놈 소나무를 금강송이라고 하는데..
아래 사진수준이 되어야 금강송이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요..
목공에서는 나무 모양은 필요없고 마구리...
심재와 변재의 색상구분이 명확합니다..
[출처] 육송, 금강송, 춘양목 (나무로 가는 세상-목공,DIY,원목가구,우든펜,특수목) |작성자 마루돌이 인천
☗.주실령고개
향긋한 솔향 벗 삼아 걷고 또 걷고…
`봉화 외씨버선 길` 도보여행
청송·영양·봉화·영월 4개군 조성 `옛길 탐방로`
5~6시간 소요… 춘양목 군락지 멋스러운 자태 한눈에
자연 경치라면 대한민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풍광을 가진 봉화군이
지역의 특색인 원시 그대로의 산림자원을 활용해 걷기 길을 야심 차게 준비하고 있다.
`봉화 솔숲 길. 그 향기로운 산책`을 주제로 코스를 개발한 봉화 솔숲 길은 팸 투어를 통한 코스의 현실적인 적용 가능성을 모색했다.
조지훈 시인의 승무에서 표현한선보일 듯 말 듯한 외씨버선과 같은 아름다운 길의 모습에서 유래한 외씨버선 길은 우리나라 대표 청정지역인 청송·영양·봉화·영월 4개 군이 연계협력사업단이 3년 계획으로 조성된 전체길이 170㎞나 되는 고요한 사색과 치유의 숲길이며 보부상의 발자국이 오랜 흔적으로 새겨진 백성들의 옛길 탐방로다.
그중에서 걸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신비한 길` 봉화 외씨버선 길로 떠나는 마음을 전한다.
자연의 신비와 역사와 전통이 함께하는 봉화구간인 `봉화 춘양면사무소~ 서동리~애당리~춘양목산림체험관`으로 이어진 17.6km로 약 5~6시간이 소요되는 길이 열렸다.
봉화는 한반도의 허리라 할 백두대간 태백과 거기서 갈비 뼈대처럼 굽이쳐 나온 소백의 틈 약백지간 사이에 자리한 천연의 정토 고요한 분지 속의 땅이었다.
바깥으로는 태백산과 청량산, 소백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안으로는 문수산, 구룡산, 선달산과 옥돌봉의 품에 장독의 물처럼 잔잔히 담겨 있는 춘양면 서벽리 두내 약수터를 출발해 외씨버선 길의 `조붓하고 갸름한 맵시`가 서서히 드러나는 숲길에 접어들면 비로소 그의 순진한 속살을 조금씩 엿볼 수 있다.
백두대간 국립수목원이 조성 중인 아늑한 문수산 자락의 숲에는 곧으며 단단하고, 늘씬한 금강송 소나무인 춘양목의 군락지가 펼쳐 있다. 고고하고 멋스러운 자태는 한눈에 보아도 귀함을 느낀다.
솔향 가득한 숲을 지나 주실령 고개를 걸어본다.
▲ 문수산 자락의 춘양목 군락지인 주실령 고갯길 백두대간의 멋스러움을 한몸에 느낄 수 있다.
고개에서 바라보는 봉화의 산과 숲은 지상의 낙원이요, 그야말로 천국이다.
금강송 그늘을 지붕 삼아 춘양목 숲을 지나고 나면 솔 향기 냄새가 섞인 바람을 벌컥벌컥 물 대신 마신다. 눈이 환하게 뜨이는 듯하다. 마음 또한 편안하게 열리고 혼탁했던 내 안의 어지러운 찌꺼기가 말끔하게 빠져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박달령에 도착해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면, 태백에서 소백으로 백두대간을 잇는 길목임을 알 수 있다.
박달령에서 오전약수탕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봉화 외씨버선 길 걷기 여행은 내 몸과 마음으로 만나고 교감했던 모든 것들의 고마움을 되새길 소중한 기회가 되는 시간일 것이다. 또한, 나의 눈과 마음이 향하는 대로 걸음을 옮겨주었던 다리와 발, 건강한 허파와 심장은 나를 키우고 자라게 하는 에너지가 되어줄 것이다.
◇주변관광지
◆만산 고택 춘양면 의양리 288 연락처 054-672-3206
2000년 4월10일 경북민속자료 제121호로 지정된 것으로, 조선 말기의 문신인 만산 강용(1846~1934)이 고종 15년에 지은 집으로 13실 100명이 체험할 수 있는 고가체험 숙박도 할 수 있다.
◆닭실마을 봉화읍 유곡리 963 연락처 054-674-0963
조선 중종 때 문신 충재 권벌(1478~1548)선생의 유적지로 안동권씨 집성촌이다. 제례 때 사용했던 500년 전통의 한과도 유명하다.
◆도심리 장수마을
도심2리는 자체 생산되는 임업자원을 관광상품화할 수 있도록 목공예품 제작 작업장을 마련하고 목공예 공구를 비치하여 도마, 탁자, 등 목공예 체험장을 연중 개방해 운영하고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달구지 타기, 소죽 끓이기 등 다양한 농촌체험행사를 운영하고 있다.
◇맛집
▷동궁회관 (054-672-2702)엄나무 돌솥밥과 송이돌솥밥을 먹을 수 있는 곳
▷춘양 홍가네 (054-673-3395) 당귀 밥을 먹을 수 있는 곳,
흔하지 않은 당귀 밥은 여성들 에게 좋다고 한다.
▷애당식당 (054-672-8213)
50년 전통을 자랑, 메뉴는 묵 밥과 손칼국수가 전부다. 직접 묵을 쑤
고 묵 밥을 만들고, 직접 반죽해서 손칼국수를 만든다. 가격 또한 저렴하다.
▷인화원 (054-672-8289)
1년 내내 송이돌솥밥을 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식당 중에 하나다.
송이요리를 주 메뉴로 하고 있다.
▷송이식당 (054-673-4788)
전국 최초 송이 국밥을 판매, 값싼 음식의 대명사인 국밥에 고기 음식재료인 송이를 넣을 수 있는 건, 송이 채취가 가능한 송이 산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옥석산[玉石山]
경북 봉화군 춘양면과 물야면에 걸쳐 있는 산. 높이 1,242m. 일명 옥돌산이라고 한다.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의 기부(起部)를 이루는 산이다. 동북쪽으로는 태백산(太白山, 1,567m)·구룡산(九龍山, 1,346m), 서북쪽으로는 선달산(先達山, 1,236m)·어래산(御來山, 1,064m)과 이어지며, 춘양에서 북서쪽으로 약 16㎞, 봉화에서 북쪽으로 약 14㎞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 일대는 경상북도의 소백산지(小白山地)를 이루는 지역으로 높은 산지가 많다. 산정에서 산릉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데 남쪽 사면은 경사가 급하며 남쪽 능선에는 주실령(朱實嶺, 776m), 서쪽 능선에는 박달령(朴達嶺, 1,017m)이 있어 경상북도 영주와 충청북도 단양으로 통한다.
동쪽과 북쪽은 비교적 남쪽보다 경사가 완만하며 많은 계류가 흘러내린다. 동쪽의 계류는 춘양에 달하는 하곡을 이루어 낙동강 상류가 되며, 북쪽으로 흐르는 강은 남한강의 상류를 이룬다.
동북방향 2㎞ 지점의 도래기재[道驛嶺]에는 긴 터널이 있어 경상북도 춘양과 강원도 상동을 연결하는 험한 도로가 통하고 있다. 경상북도와 강원도를 경계 짓는 산간오지에 있어 낙동강과 남한강의 분수령을 이루며, 상동광산을 비롯한 주변 지역의 지하자원개발이 기대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옥석산 [玉石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박달령
봉화 '백두대간 박달령 표지석'
남부지방산림청 영주국유림관리소는 2006.10.8일 봉화 물야면 박달령에서 백두대간보전회 회원과 주민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백두대간 박달령 표지석 제막식을 가졌다. 표지석은 높이 4m, 두께 1m, 무게 12t 규모의 화강암으로 전면에 백두대간 심벌 로고와 '백두대간 박달령'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해 금강산·설악산·태백산·소백산을 거쳐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한반도의 중심 산줄기로 총 길이 1천400km에 이른다
☗.마구령[馬駒嶺]과 고치령
요약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임곡리와 남대리 사이에 있는 고갯길.
높이 820m이다. 소백산(1439m)의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내려 선달산(1236m)으로 이어지기 전에 있는 고갯길이다. 예전부터 태백산맥을 넘어가는 험준한 고갯길로 유명했으며 경상도와 충청도, 강원도를 넘나드는 곳이었다. 길은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있으며 소형차는 통행이 가능하지만 대형차는 통해할 수 없다. 고갯길 남쪽 아래 봉황산 자락에 부석사(浮石寺)가 있으며 북쪽으로 고갯길을 넘어가면 영월 김삿갓계곡으로 이어진다.
고치령과 마구령 한국관광공사의 아름다운 대한민국 이야기 태백이 받치고 소백이 품은 은둔의 고개 태백산이 끝나고 소백산이 시작되는 백두대간의 주능선 고치령(760m).
단종과 금성대군의 애틋한 역사를 간직한 이 험준한 고개 넘어 '영남의 고도(孤島)'라 불리는 마락리가 자리해 있다. 행정구역상 영주시에 속하면서도 고치령 때문에 나 홀로 단양군을 바라고 살아야 하는 마락리의 지리적 형세를 두고 하는 말일 터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구령 [馬駒嶺] (두산백과)
☗.김삿갓유적지
조선 후기 시인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심(性深), 호 난고(蘭皐)이다. 속칭 김삿갓 혹은 김립(金笠)이라고도 부른다. 아버지는 김안근(金安根)이며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하였다.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에 연좌제의 의해 집안이 망하였다. 당시 6세였던 그는 하인 김성수(金聖洙)의 구원을 받아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후에 사면을 받고 과거에 응시하여 김익순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답을 적어 급제하였다.
그러나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전국을 방랑하면서 각지에 즉흥시를 남겼는데 그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아 민중시인으로도 불린다.
아들 익균(翼均)이 여러 차례 귀가를 권유했으나 계속 방랑하다가 전라도 동복(同福:전남 화순)에서 객사하였다. 유해는 영월군 태백산 기슭에 있으며, 1978년 그의 후손들이 광주 무등산에 시비를 세우고, 1987년에는 영월에 시비가 세워졌다. 작품으로 《김립시집(金笠詩集)》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병연 [金炳淵] (두산백과)
☗.김삿갓
흔히 방랑 시인으로 잘 알려진 김삿갓(1807~1863년)의 본래 이름은 병연(炳淵), 호는 난고(蘭皐)이다. 신동이 났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머리가 좋고 글재주가 뛰어나 향시에 나가 급제를 하였으나, 집도 처자도 버리고 방방곡곡을 떠돌며 해학과 풍자의 시를 읊은 그는 천형의 죄인 같은 시인이었다. 삿갓이라는 이름은 신분을 감추고 다닌 그가 김립(金笠)이라는 가명을 쓴 데서 비롯되었다.
그가 죽장에 삿갓 쓰고 미투리 신고 산수를 넘나들며 해학과 풍자로 한세상을 떠돌던 방랑 시인인 줄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뜬 구름 같고 바람 같았던 그의 삶의 궤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묘소가 발견된 것도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1982년 영월의 향토 사학자 박영국의 노력으로 영월읍 와석리에서 그의 묘소가 확인되었다.
김병연은 명문 안동 김씨의 일가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김익순이 높은 벼슬을 지내 남부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김병연이 다섯 살 때(순조 11년, 1811) 평안도 일대에서 홍경래가 주도한 농민전쟁이 일어났다. 이때 가산 군수를 지낸 정시는 포로가 되어 저항하다가 죽임을 당하였으나, 선천에서 부사를 지내던 김익순은 농민군에 항복하여 겨우 목숨을 구했다가 농민군이 관군에게 쫓길 때에는 농민군의 참모인 김창시의 목을 1천 냥에 사서 조정에 바쳐 공을 위장하였다.
그런 이중 인격의 행위가 드러나자 김익순은 참형을 당하였고, 비열한 인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김삿갓의 어머니는 집안 내력을 철저히 숨기고 병연에게 공부를 시켰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병연은 열심히 공부하여 입신 양명을 위해 과거를 준비하였다. 병연은 향시에 나가 장원을 하였으나, 결국 자신이 그토록 의기에 차서 비방하였던 김익순이 자신의 친할아버지임을 알게 되었다.
백일장의 시제가 ‘정시 가산 군수의 죽음을 논하고 하늘에 사무치는 김익순의 죄를 탄식하라’였는데, 그는 타고난 글재주로 ‘한번 죽어서는 그 죄가 가벼우니 만번 죽어 마땅하다’고 한껏 저주하였다. 곧 김익순이 바로 친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자책과 번민에 빠져들었다. 출세를 보장해줄 수단으로 믿었던 과거 시험이 조상을 욕하는 영원한 기념물이 될 줄이야. 그는 어이없이 천형의 죄인이 되고 말았으며 이때부터 고행에 가까운 방랑을 시작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발을 디딘 곳은 금강산이었다. 금강산을 돌고돌며 가는 곳마다 시객을 만나 시를 짓고 술을 얻어마셨다. 당시 그의 금강산 시는 금강산 구경 못지 않게 유명하여, 금강산을 찾은 선비들은 괴벽스러운 성격을 가진 그를 개운찮아 하면서도 그가 써놓은 시구절은 귀중한 보물처럼 간직하였다고 한다.
나는 지금 청산을 찾아가는데
푸른 물아 너는 왜 흘러 오느냐?
(我向靑山去 綠水爾何來)
소나무와 소나무, 잣나무와 잣나무, 바위와 바위 사이를 돌아가니
물과 물, 산과 산이 곳곳마다 기기묘묘하구나.
(松松柏柏岩岩廻 水水山山處處奇)
꼿꼿, 뾰족뾰족, 괴괴한 경개가 하도 기이하여,
사람도 신선도 신령도 부처도 모두 놀라 참말인가 못 믿을 것 같다.
내 평생의 소원이 금강산을 읊으려고 별러 왔으나,
이제 금강산을 대하고 보니 시를 못 쓰고 감탄만 하는구나.
(矗矗尖尖怪怪奇 人仙神佛共堪疑 平生詩爲金剛惜 及到金剛不敢詩)
힘도 안 들이고 즉흥적으로 써갈기는 그의 시구가 김삿갓이라는 이름과 함께 널리 알려지자 괴롭고 뒤틀린 심사를 감추듯 삿갓을 더 꾹 눌러쓴 그는 함경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집에서 잠시 쉬어갈 때였다. 김삿갓이 떠난 뒤에 밥을 먹으려고 제법 유식한 마누라가 파자(破字)로 “인량차팔?”(人良且八) 하자 남편되는 자가 “월월산산”(月月山山)이라고 대꾸하였다. 그러자 김삿갓은 “견자화중(犬者禾重)아, 정구죽천(丁口竹天)이로다” 하고 욕을 하고 껄껄대며 그 집을 나섰다고 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人+良+且+八’은 ‘식구’(食具)이니 ‘밥상 차릴까요?’ 하는 뜻이고, ‘月+月+山+山’은 ‘붕출’(朋出)이니 ‘이 친구 나가거든’이란 뜻이며, 김삿갓이 한 말을 합치면 ‘저종가소’(猪種可笑)가 되니 ‘이 돼지 새끼들아, 가소롭다’는 뜻이다.
어느 땐가 사람이 죽어 부고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유유화화”(柳柳花花)라고 써주었다. ‘버들버들하다가 꼿꼿해졌다’는 뜻이다. 한자를 빌려 교묘하게도 우리 뜻을 표현한 것이다.
한번은 그가 개성에 갔을 때 어느 집 문 앞에서 하룻밤 잠을 청했다. 집주인은 문을 닫아 걸며 땔감이 없어 그런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고을 이름은 개성인데 어찌 문을 닫아 걸며, 산 이름이 송악인데 어찌 땔감이 없다 하느냐”(邑名開城何閉門 山名松岳豈無薪).
하루는 한 농가에서 양반 세도가가 선산의 묏자리를 자기네 딸의 묏자리로 썼다는 하소연을 들었다. 김삿갓은 “사대부의 따님을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에 눕혔으니 할아버지 몫으로 하오리까 아버지 몫으로 하오리까”라는 내용의 시를 써서 양반에게 갖다주도록 했다. 양반 세도가가 당장에 두말 없이 자기네 딸의 묏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겼음은 물론이다. 그의 시에는 이처럼 민중의 응어리 진 한을 시원스레 풀어주는 시원함과 통쾌함이 있었다.
그는 문자를 맞추고 글자의 고저를 따지고 또 화조월석(花鳥月石)이나 음풍농월만을 따지는 한시를 거부했다. 비록 칠언고시 따위의 형식을 빌려 운자를 달았으되 그가 다루는 주제는 모두가 항간의 일이었고, 그의 시어에는 더러운 것, 아니꼬운 것, 뒤틀린 것, 속어, 비어가 질펀하게 깔려 있었다.
그가 쉰일곱에 전라도 화순군 동복에서 죽자, 역시 아버지를 찾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던 둘째 아들이 시신을 거두어 영월땅 태백산 기슭에 묻어주었다.
김삿갓의 묘소는 영월읍에서 동남쪽으로 영월 화력발전소, 고씨동굴, 와석재를 차례로 지나, 와석리 입구 김삿갓상회 뒤쪽으로 난 좁고 깊은 계곡 노루목에 있다. 이 계곡길로만 약 4㎞ 간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삿갓 (답사여행의 길잡이 3 - 동해ㆍ설악, 초판 1994., 21쇄 2011.,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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