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일날,상주아동문학회에서 의성 최치원 문학관을 다녀왔다. 의성의 유적지 곳곳을 둘러 보기도 했다.
출발 장소는 신봉교회 였다. 8시에 만나서 가기로 했다. 박정우 회장님, 김재수 고문님과 나, 세 명 밖에 못가서 다른 날짜로 바꾸려고 하다가 탐방기를 책에 실어야 해서 더 늦어지면 차질이 생길까봐 셋이라도 탐방을 가기로 한 것이다. 6시에 일어나서 땅콩,계란,밤을 삶고 포도,바나나, 사과,견과류 커피등 이것 저것 서둘러 쌌다. 출발 장소인 신봉교회에서 8시10분 경에 박정우 회장님 차를 타고 의성으로 달렸다. 하늘이 맑고 화창날이라 기분이 상쾌 했다. 먼저 들린 곳은 최치원 문학관었다 문학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선생님에 관한 수많은 시,글,영상,사진,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곳곳을 관람하다보니 영상이 나왔다. 잠시 멈췄다. 이런 내용들이었다. '리삔관장, 최치원기념관(경국 양저우시) 고병高騈 본인도 글재주가 뛰어 났을뿐 아니라 본인들과 교류하기를 좋아 했기때문에 특별히 최치원 선생으로 하여금 격문을 쓰도록 했을 겁니다. 그리고
<토황소격문>과 같이 상당한 호소력을 필요로하는 문장은 뛰어난 글 솜씨를 필요로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용문이지만 예술적으로 승화 시켰다고 하는 것에서 첫 번째 의의를 찾을 수 있고 거기에는 각종 문체가 종합이 되어 있습니다. 모든 문체,서간문부터 시작해서 문학적 장르에 속하는 문체가 포함 돼어 있어서 문학적 전범이라고 할까요? 본보기라 할까요? 김주수군수 (경상북도의성군) 1200년전 중국과 일본에 한류를 일으킨' 원조한류 최치원 선생과'특별한 인연이 있는 의성 고운사의 대내적 위상을 높이고 최치원 사상과 생애를 통해 의성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한국을 넘어 세계 속에 문화도시 의성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 하고자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자현 주지스님, 의성 고운사는 처음 의성 스님께서 신문왕 1년에 창건해서 '높을고''구름운'자를 써서 고운사高雲事라고 하였는데 뒤에,최치원 선생께서 여지 스님과 여사 스님 두 스님과 더불어서 가운루와 우화루를 창건 하시면서 고운 최치원 선생 호를 따서 '높을고' '구름운'자를 써서 고운사高雲事로 개칭하게 되었습니다. 김복순교수 동국대학교는 현재 남아서 온전히 전하는 것은 904년에 저술한 현수법장의 법장화상전이 유일하게 완본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현재 그 법장화상전은 일본의 고산 사본으로 보존 되어 있고요. 그리고 법정 화상전이 내용면에서나 구성면에서나 또 문장면에서나 단연 으뜸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당시 글재주로 명성이 높았던 최치원 선생과 중용 할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라고 말하는 영상 이었다. 이 영상을 보고 선생님이 얼마 만큼 훌륭 하신 분이라는것을 알게 되었다. 문학관에는 인쇄 체험 하는 것도 있었다. 나도 체험을 해 보았다. '아동문학회 문학기행을 최치원 문학관에 김재수 선생님, 박정우선생님과 함께 왔다.' 날짜와 사인을 하고 인쇄를 했다. 인쇄기에서 나의 글씨가 인쇄 되어 나왔다. 어린애 처럼 마냥 즐거워 하며 나오는데 그림 전시실이 있었다. 그림에 시를 써서 한 눈에 두 작품을 볼수 있는 전시 였다. 그림과 시가 참으로 잘 어울려 아름다웠다. 이 작품은 신태수申泰洙 1962~ 의성출신의 작품 이었다. 사회 변혁기를 살면서 끝없는 고뇌와 좌절을 겪었던 지식인의 삶과 시를 화가의 시각에서 어떻게 해석되고 표현 될수 있는지 보여 주러 하였다는 것이다. 이 곳을 관람 하고 나와 문학관 입구 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고운사로 갔다. 11시40분경에 일주문 앞에서 간식을 먹었다. 김재수 고문님도 간식을 약밥,견과류,박하스를 챙겨 오셔서 넘 맛있게 먹었다.어릴적 소풍 온 기분이었다. 고운사 일주문을 지나다 보니 안내센터가 보였다. 판플렛을 챙기려고 안내센터로 갔다. 남자(김규선)분이 해설 해 달라고 하지도 안았는데 밖에 나오셔서 친절하게 우화루,가운루, 만덕산마루, 대웅보전,연수전등에 대해 열심히 해설을 해 주셨다. 안내판에 보면 절의 건물들이 붙어 있지 않고 분산 되어 있었다. 다른 절에 가면 건물들이 붙어 있는데 떨어져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박정우 선생님이 여줘 보기도 했다. 고운사 곳곳을 둘러 보다가 대웅보전에 들어 가려는데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49제를 지내는 듯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 왔다. 우리 아버지도 김용사 절에서 49제를 지냈는데. 그때 가족들과 얼마나 울었는지.10년전 일이었다. 눈 시울을 적시면서 대웅보전으로 들어가서 절을 하고 나왔다. 12시 35분경에 들길식당에서 코다리등갈비찜으로 점심을 맛나게 먹고 사촌 마을로 갔다. 크고 웅장한 기와집들이 많았다.푸른잔디가 깔린 광장처럼 넓은 곳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의성:만취당, 보물 1825호 만취당은 퇴계 이황의 제자 晩翠堂 김사원 金士元이 학문을 닦고 후배들을 기르기 위해 세운 건물로 현판은 석봉 한호가 썼다. 김사원이 선조15년 (1582) 에 짓기 시작하여 선조 17년 (1584)에 완공 하였다. 이후 영조 3년 (1727)에 동쪽으로 2칸,영조 40년(1764)에 서쪽으로 1칸을 덧붙여 지어 현재와 같은 'T'자형 평면이 완성 되었다. 처음에 지은 대청과 나중에 지은 온돌방 부분은 문틀을 짜 맞추는 방법이 서로 달라 지은 시기가 다름을 알 수 있다. 기둥 위의 처마나 지붕은 처음 지을 당시의 모습을 손상 시키지 않고 덧붙여 지어 원래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주거와 선비문화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건물이 점점 변화 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라고
잠시 후 대문이 없는 집으로 들어갔다 도평의공고려都評議公古廬 현판을 읽고 있는데 남자분(종손)이 나오셔서 해설을 해 주셨다. ㅁ자형 집에서 살고 계셨다. 해설 내용은 '고려시대 선조가 도평의공 벼슬을 하셨고
이곳은 서애 류성룡 선생이 태어난 곳입니다. 손님 맞이를 했던 별당이었던 만취당에 서애 선생 어머니가 타시던 가마채가 도량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아무나 쉽게 드나들수 있도록 대문 없이 살아 갑니다. 같은 성씨 끼리 대문이 뭐 필요 합니까? 혹시 대문 잠긴 집은 빈집이거나 안동 김씨 집이 아닙니다'라고 말씀 하셨다. 나는 서애 류성룡 선생이 이곳에서 태어나셨다는 말씀에 깜짝 놀랐다. 서애 선생 어머니가 안동김씨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 곳에는 희귀한 수석이 나란히 전시 되어 있었다. 캐나다,럭키산맥등 수집한 수석들을 후손이 기증을 했다는 것이다. 직사각형의 오석에 '여기 꾸며진 돌(수석)은 멀리 캐나다 거주 족친 김태정 1932~2018님께서 평생 수집한 수석을 애끓는 망향의 정으로 보내오신 것입니다. 2019년,봄' 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볼수 있게 해주신 것에 감사 했다. 그리고 머나먼 타국 사실 때 얼마나 고향이 그리웠을까? 하는 마음에 가슴이 찡해 왔다. 소중 여기던 것을 쉽게 기증 하기가 어려웠을 텐데, 아무튼 기증한 후손 김태성님 덕분에 희귀한 돌을 보며 힐링이 되었다. 이곳은 안동김씨 집성촌, 19세기 말에 풍산유씨와 안동김씨가 결혼했다고 했다. 고려 말쯤의 원조 이 어른이 종손이 사시는 ㅁ자형집으로 개축했다고 했다. 조그마한 집 한 채 정도 였는데, 선조 무렵에 새로 지을 때, 이 안의 규모가 70여칸 있었다. 만취당은 사랑채,별당이 있었는데 왜놈이 불 태워 없어져서 새로 지은지 60여년 되었다고 하셨다. 박정우 회장님은 영주 무섬마을에 있는 만죽재도 ㅁ자형이라고 하시면서 회장님의 선조 반남밖씨가 살았다는 말씀도 해 주셨다 '저는 潘南朴家입니다. 제 11대조 입향조 할아버지께서 무섬마을에 처음 와서 사셨습니다. (1666년 경) 할아버지 증손녀가 시집을 갔는데, 예안김씨(선성김씨) 사위를 맞았지요. 그 사위가 처가살이 로 무섬 마을에 살 았는데, 그 후손들 이 지금은 더 번창 합니다.'라고 하셨다 나는 ㅁ자형의 기와집 안을 둘러보고 사랑채 만취당 마루에도 올라가보기도 했다. 우리들은 종손의 해설 듣고 다른집,草海古宅으로 들어갔다. 이 집도 잔디가 깔려 있는 마당 넓은 집이었다. 빨랫줄에 이불, 앞치마,수건이 걸려있다. 단 번에 템플스테이를 하는 집이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넓고 고풍스러운 기와집 햇살에 반짝이는 푸른 잔디 가 포근함을 더해주는 듯 했다. 아늑하고 편안해 보였다. 인기척을 하자 종부가 마루에 나와서 반갑게 맞이 했다. 사랑채의 개조된 부엌과 방도 둘러 보았다. 하룻밤 묵는데 얼마냐고 묻기도 했다. 집을 나오면서 김재수 선생님이 기와집은 잔디가 안좋다는 말씀도 해 주셨다. 비나 눈이 오면 습기가 많이 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로수 숲 찻집도 보였다. 그 곳에서 차를 마시지 못하고 나와서 2시40분경에 킹콩카페에 들러 잠시 눈을 감고 명상을 하면서 휴식을 취했다. 커피,자몽라떼,토마토쥬스 각자 취향에 맞는것을 마셨다. 잠시 앉았다가 해설사가 기다리고 있는 조문국 사적지를 향해 달렸다. 평소 알고 지냈던 박금숙 해설사 한테 점심 맛나는 곳을 추천해 달라고 전화 했다가 조문국 사적지에 있으니까 그곳으로 오라시기에 갔다. 박금숙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 하면서 조문국 사적지에 대한 해설을 귀에 쏙쏙 들어오도록 열정적으로 해주셨다. 우묵하게 아래로 꺼진 곳에 큰 고분들이 군데군데 파란 잔디로 덮혀 있었다.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누워 있 계시는 선조들을 바라보니 평온 했다. 묘 형식의 사적지에서 황남대총에서 나온 유물 만큼 예쁜 금재 장식이 장식이 나왔다는 것이다. 해설을 듣고 감사 인사를 하고 4시경에 조문국 전시관으로 달렸다. 해설사 선생님이 말씀했던 스트로마톨라이트, 삼엽총 미생물등 많은 유물을 보고 5시경에 주차장에서 간식을 먹고 상주를 향해 달렸다. 6시 20분경에 신봉교회에 도착했다.
최치원박물관,고운사,사촌마을,보문국 사적지,보문국 박물관을 탐방 하고 왔다. 이 번 탐방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몰랐던 것 문화 역사를 많이 알게된 것에 천군마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 무엇보다 수많은 글을 쓰신 고운 최치원 선생님을 본 받고 싶다. 나도 더욱더 열심히 글을 쓰야겠다고 다짐했다.
첫댓글 김숙자님 간신 준비하시고, 자료 챙기시랴 글 쓰시랴 수고가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