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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나이트여 굿바이
이 홍사
오늘은 바야흐로 역사적인 날이다.
우리 호박나이트에 새로운 역사가 열리는 날이다.
역사는 매일 창출된다.
그러니 역사는 살아있는 항목에 속한다. 역사란 고정된 상태狀態가 아니라 동태動態라는 말씀이다. 역사를 생물生物로 간주하고 얘기하자.
오늘도 누군가는 이야기를 만들고 역사는 새로 쓰이게 된다. 이야기(Story), 즉 픽션(Fiction)은 누가 만드는 것이지만 역사는 논픽션(Nonfiction)으로 그 위에 있다. 역사(History)라는 말의 영어 어원은 이야기(Story)보다 한 차원 높은 것이 아닐까 싶다. 소설, 즉 이야기(story)를 만드는 것보다 한 차원 높은, 하이(Hi)라는 접두어가 붙어 고차원적이 이야기, 즉 역사(History)가 된 게 아닌가 싶다.
대충 생각했는데 말을 하고 짚어보니 일리가 있네.
오늘을 어제로 만드는 시간의 흐름, 즉 현재를 과거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역사는 자연스레 창출되게 마련이다. 그러니 새로운 역사는 매일 쓰이는 것이다. 크게 잡으면 역사이고 적게 잡으면 개인의 인생사인데 오늘이 우리 호박나이트에 새로운 역사가 쓰이는 날이다. 이젠 호박나이트의 수익만 보는 게 아니라 그룹으로 발전을 할 모양이다. 우리의 보스는 단순한 보스가 아니라 이젠 CEO가 되었다.
작금의 중늙은이, 꼰대들은 한국전의 전후 세대로 태어나서 전쟁이 없었던 시대에 잘 먹고 잘 살았다. 어린 시절에는 배가 좀 고팠는지 모르겠지만 조국의 근대화에 발맞추어 일자리가 많은 곳에서 일자리를 골라가며 성장했으니 작금에 와서야 배고픔도 잊고 온통 갖가지 문화의 혜택을 누리고 산 것이다.
그러나 우리세대는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
취직을 할 곳이 없다. 일은 하고 싶지만 일을 할 곳이 없다. 공부는 아무리 해도 밥이 나오지 않는다. 일을 하면 곧바로 돈이 되고 밥이 된다. 이젠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해 편의점에 알바도 쓰지 않는 시대다. 용돈이 궁하면 부모에게 손을 벌리는 방법 밖에는 없다. 서른이 넘어서 장가도 못가고, 돈도 못 벌고 부모에게 손을 벌리다니, 정말 손이 부끄러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하면 욕부터 먼저 나오는 소리지만 이 놈의 정부 일자리 정책에 환멸을 느낀다.
대학을 나온 놈들은 전부가 도서관이나 학원에 틀어박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중이다. 저렇게 공무원 공부를 열심히 하니 장차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이 공무원이 될 날도 멀지 않았지 싶다. 열심히 해라. 공무원 월급이 어디서 나오는지 두고 보자.
어제 지방에서 발간되는 신문을 보니 시청에 청소부 아홉 명을 뽑는데 대학을 나온 인재 마흔두 명이 지원을 했단다. 대학을 나와서 청소부, 아무리 미화시켜 고상하게 불러도 환경미화원 밖에 되지도 못하는 직종에 대학을 나온 인재들이 목숨을 거는 시대다.
나도 대학을 나왔다. 비록 이 호박나이트에 웨이터로 일하고 있지만 꿈은 원대하다. 공무원 시험도 포기하고 대기업 시험도 포기하고, 포기하고 싶어 한 것이 아니라 대기업은 사람을 모집하지 않기에 일찌감치 호박나이트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 대학을 나온 인재는 나뿐만 아니다. 대학이 얼마나 흔한지 이곳에 일하는 녀석들 전부다 대학 문턱은 넘어본 위인들이다. 우리의 보스만 고등학교 중퇴자지 학벌로 따지면 우리 호박나이트 임직원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정도이다. 고등학교 중퇴자가 대학 나온 놈들을 먹여 살리는 것을 보니 살아가는데 학벌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닌 모양이다.
밤에만 일하는 이 세계도 알아가니 그리 나쁘진 않다. 장래가 보장되는 건 아니고 나이 서른에 나이트에서 웨이터를 하고 있으니 다소 쪽이 팔리는 일이지만 최소한 이 나이에 부모에게 손을 벌리진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엄마는 내가 호박나이트에서 웨이터로 일을 하는 줄 모르고 취업준비를 하며 대형편의점에서 야간 알바를 하는 줄로 알고 계신다. 들통이 나기 전에 얼른 끝을 내야 할 것이다.
지금 나는 들어가고 있는 적금이 끝나는 날을 기다린다. 그 적금이 끝나면 이 호박나이트도 굿바이다. 일본으로 건너갈 것이다. 그곳은 지금 호황이라 인력을 구하지 못해 안달이라는데 무작정 건너가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체류를 하다보면 무슨 수가 나겠지. 세계는 넓고 할일은 도처에 늘려있다고 했다. 일을 찾아서 가는 게 순서다. 하여 낮에는 일본어를 공부하느라 어학원을 다니고 있다.
-야그들아! 형님 오신다.
번개가 소리치자 검정색 양복을 입은 깍두기들은 얼른 좌우로 도열해서 선다. 그 모양새가 일사분란하다. 아무자리에나 서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자기 자리가 있다. 그것 또한 서열순서다. 나도 얼른 창가 내 자리에 섰다.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니 큰형님의 검정색 외제승용차가 건물 앞마당에 도착했다. 거듭되는 말이지만 오늘은 우리 호박나이트에 기록될 역사적인 날이다. 오늘은 큰형님이 사업하나를 따서 오는 날이다.
오! 오! 우리의 보스!
참으로 보스답다. 그러나 입찰을 받아서 온 사업이 아니라 우격다짐으로 따온 사업이다. 따온 사업이 아니라 빼앗아 온 사업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수고를 아끼시지 않으니 얼마나 위대한 일이냐는 말씀이다. 저렇게 제 식구를 먹여 살릴 궁리를 저렇게 해야 되는데 작금의 정부가 본을 받아야 할 일이다.
우리의 수입원인 호박나이트는 장사가 시들해진 지 오래 되었다. 하여 큰형님께서 눈을 돌린 것이 건설업이다. 호박나이트의 상징인 누런 호박을 차보다 크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모닝의 지붕 위에 싣고 네 대가 도열해서 시내전역을 돌아다니며 선전을 해대고 초저녁에 오는 여자 손님에 한해서는 맥주 세 병과 기본안주가 공짜라고 벽보를 만들어 온 시내에 도배를 했지만 손님은 현저히 줄었다. 그 옛날 그렇게 흥청대던 무리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이 호박나이트가 잘 나가던 시절에는 밤 열한 시가 절정이 되어 새벽 세 시에 끝이 나는데 손님이 영업을 마쳐도 부킹이 안 되면 나가지 않고 죽치던 시절이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지면 이 호박나이트 앞에 빈 택시 서너 대가 도열을 해서 대기하던 시절이었는데 하루에 마셔대는 양이 거의 맥주 한 트럭이었다. 맥주를 실은 차가 매일 배달을 오던 시절이었는데 지금은 일주일에 한 차씩 들어오는 정도로 매상이 줄었다.
이젠 주머니가 얄팍해졌는지 그런 현상은 찾아볼 수가 없다. 공단에 잔업을 하던 시절에는 근로자들이 생활을 하고도 부스러기 돈이 주머니에 있었는데 그게 줄어든 것이라고 보스는 짐작을 하고 있다. 사실이지 지금 들어서 공단 가동률이 60%대로 떨어졌단다. 기가 막힌 실정이다. 문을 닫은 공장이 태반이라고 했다.
-좆같은 정권이 들어와서 경제를 씹창내서 이 꼴이다.
보스는 이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보스의 논리에 의하면 평생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무리들이 정권을 잡고 경제를 흔들어서 국민들은 그야말로 홍어좆이 되었다는 것이다. 왜 홍어좆인가? 홍어는 수놈에 비해 암놈이 육질이 부드럽고 맛이 있다. 하여 암놈이 값이 더 나간다. 홍어는 수놈의 생식기만 없다면 암수 구별이 어렵다. 하여 어부들이 수놈이 잡히면 바로 생식기를 제거한단다. 거기서 비롯된 말이 홍어좆이라고 했다. 불필요한 인간, 없어도 좋을 위인을 두고 홍어좆으로 지칭하는 것이다.
그대 혹시 ‘딸매이’라는 말을 아시는가?
모르신다면 들어본 적은 있는가?
딸매이!
우리 어릴 적에 쓰던 말이었다. 지방마다 그 말이 다르겠지만 우리가 살았던 지방에서는 그런 용어를 썼다. 지금도 아이들 사이에서 그 말이 쓰이는지 모르겠지만 다투거나 싸우고 서로 원수가 되어 서로를 왕따 시킨다는 말로 통용되었다. 딸매이를 한 다음에는 같이 놀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서로 말도 걸지 않는다. 그렇게 갈라서면 이놈에게 붙는 친구도 있고 저놈에게 붙는 패거리도 있다. 물론 중간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중재하는 친구도 있게 마련이다. 지금 와서 어떻게 보면 그 때 아이들 사이가 지금의 국제사회의 축소판이다. 종북, 반미, 친중, 반일 누구와 딸매이를 하고 누구와 놀아야 이득이 생기는가?
이놈의 정부가 들어와서는 이념에 갈등이 생겨 누구와 딸매이를 해야 하는지 모르고 갈팡질팡 하고 있다. 양다리를 걸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쪽에 붙으려니 저쪽 눈치가 보이고 저쪽에 붙으려니 이쪽 눈치가 보여 갈팡질팡하다가 외톨이 왕따가 된 현실이다. 굳건한 한미동맹은 옛말이고 한일관계도 예전 같지 않다. 국제사회에서 슬슬 왕따가 되어가고 있다. 그건 국민의 보스가 생각과 판단을 잘못한 까닭이다. 하지만 우리의 보스는 다르다. 나가면 뭘 따와도 따와서 우리를 먹여 살리려고 고군분투를 하고 있다. 유람삼아 나가는 게 절대 아니다.
보스가 계단을 올라오신다. 어디서 맞추었는지 새하얀 양복에 백구두를 신어 눈이 부실 정도다. 위층 복도에는 나를 포함해서 검정색 양복을 입은 깍두기 여덟 명이 양쪽으로 도열해서 서 있고 보스의 뒤에는 검정색 양복을 입은 두 명의 수행 깍두기가 따라 올라오고 있다.
-큰형님! 수고하셨습니다.
도열해 선 깍두기 여덟 명은 같이 복창을 하며 허리를 구십 도로 숙여 인사를 했다.
-야! 망치.
인사를 받은 보스가 도열해선 무리 중에서 망치를 부른다.
망치가 대답을 하며 한 발 앞으로 나선다. 보스는 주먹을 쥐고 망치의 복부에 일격을 가했다. 아니다. 일격을 가하는 흉내를 내고는 묻는다. 기분이 극도에 달했다는 표현이다.
-오늘이 뭔 날인지 아냐?
-큰형님께서 사업을 글로벌로 이루어 낸 날입니다.
저 자식은 글로벌이라는 말을 아무 데나 갖다 붙인다.
-응. 좋았어. 글로벌! 그것이 좋은 것이재? 야그들아! 오늘 같이 좋은 날, 자축하는 의미에서 일찍 문을 열고 입가심으로 한잔 하고 일을 시작하자.
-예! 알겠습니다.
깍두기 여덟 명은 같이 복창을 하며 또 구십 도로 인사를 했다. 그런 다음에는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호박나이트는 건물을 지을 적에 나이트클럽을 한다는 생각으로 설계를 한 모양이다. 아래층에는 무대와 춤추는 공간이 있고 그리고 일반 손님 테이블이 있다. 그리고 일층에 빙 돌아가며 이층을 만들어 노래방 시설이 된 방이 스무 개 남짓 있다. 그 방 중에는 사십 명 정도가 들어가 연회를 할 수 있는 대형 룸도 있고 큰형님인 보스의 집무실도 있다. 그런 구조로 만들었으니 일층의 천정은 엄청 높아 조명시설을 하기에 부담이 없었고 이층 방에서 나오면 복도에 서서 아래층에서 춤추며 노는 모습을 고스란히 구경할 수가 있다. 술상을 차리는 게 주업인 깍두기들이 저희들 먹을 것을 차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금세 연회실에는 술상이 차려졌다. 큰형님 자리를 상석으로 하고 서열 순으로 앉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지배인과 기도를 보는 형님들이 보스 앞에 앉고 깍두기 웨이터들은 말석이다. 보스인 큰 형님은 술은 밸런타인 30년산이다. 보스가 가끔 마시던 술을 냉장고에 키핑해둔 것이고 나머지 깍두기들은 냉장고에 있는 시원한 맥주다. 안주는 마른안주와 과일안주가 급조되었다. 보스의 양주잔에는 얼음이 들어가 있었다.
-야그들아! 오늘 계약된 게 몇 세대인줄 아나?
모두들 잔을 채우자 잔을 번쩍 들어 건배를 할 준비를 하자 큰형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건 모두들 모르고 있다.
-에누리 없이 천오백 세대, 대단지다. 자 위하여!
-위하여!
소리 높여 복창을 하고 맥주를 단숨에 마셨다.
보스가 오늘 천오백 세대라고 말하는 건 아파트다. 재개발 지구 신축아파트 단지의 소장과 현장 직원을 구워삶아서, 아니 협박해서 아파트에 들어가는 섀시 창호를 일을 한 공정 따온 것이다. 물론 작업은 직접 하지 않는다. 보스에겐 창호의 전문지식은 고사하고 창호를 잴 수 있는 줄자도 하나 없는 실정이다. 순전히 입으로 하는 사업이다. 도면이 나오면 시내에 있는 중소 창호업체에 던져주고 견적을 받아 두세 군데에 나누어 하청을 줄 것이다. 거기서 발생하는 차액을 노리는 것이다. 며칠 전 그 현장의 소장과 직원들이 호박나이트로 초대 되었다. 연회실에서 한잔을 걸쭉하게 대접을 하고는 다른 노래방에 연락을 해서 도우미까지 불러 이차까지 대접을 했다. 그게 미끼라는 걸 모두들 알고 있었다.
보스의 수완은 대단하다.
대단한 정도가 아니라 보스는 위대하다.
이런 곳에서 호박나이트를 하려면 적어도 시내 주먹계에서는 알아주는 인물이라야 한다. 아무나 돈이 있다고 나이트를 차리지는 못한다. 간이 큰 놈이 널 장사를 하는 것이다. 보스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자유당시절의 시라소니란다. 시라소니는 우리 보스의 전범이다. 시라소니처럼 천하를 평정하고 살아야한다. 자유당시절 무법천지 주먹계의 맨 위에서 군림하던 시라소니에 대한 일화는 보스로부터 많이 들었다.
아무튼, 천오백 세대의 창호를 다 맡았다면 그 금액은 천문학적이 숫자이리라. 거기서 일 할씩만 떼어 먹어도 금액은 장난이 아니리라. 그런데 많이 남기로 소문난 창호에서 일 할만 마진을 보겠는가? 호박나이트가 아니라 당분간은 대박나이트가 될 것이다. 세금계산서는 영세 도급업체에 직접 끊게 하고 결재는 보스가 받아서 견적을 받아서 할인한 금액대로 나누어 줄 것이다. 말하자면 손도 안대고 코를 푸는 격이라 하겠다.
-야! 멸치, 저거 네 손님 아니야?
눈썰미가 있는 갈치가 나에게 소리쳤다. 클럽의 문을 열자마자 손님이 들어섰는데 보니 미야꼬다. 미야꼬는 나이든 웬 남자의 팔짱을 끼고 같이 들어왔다. 남자는 오십대의 빡빡머리였는데 외국인처럼 보였고 풍채가 있어서 그런지 어딘가 모르게 젊잖아 보였다. 오늘의 첫손님이 미야꼬라 내심 반가웠다.
-저 왜년 갈보 아니야? 저 영감탱이도 쪽빠리 같은데?
갈치는 넘겨짚었다.
-그럴 리가 없어! 넘겨짚지 마라.
갈치의 옆구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아직 악단도 나오지 않았고 실내에는 경음악만 틀어놓고 겨우 청소를 마친 초저녁이었다. 손님 맞을 준비가 아직 안된 상태였다. 내가 나서서 아는 척 하며 인사를 하자 미야꼬는 웃으면서 팔짱을 풀고 같이 온 빡빡머리 중늙은이가 자기 아버지라고 했다. 아버지라는 말에 나는 습관적으로 구십 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버지를 모시고 왜 나이트를 와? 일본의 문화는 참 알다가도 모르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홀로 안내해 무대가 잘 보일만한 곳에 자리를 권했더니 미야꼬의 아버지라는 빡빡머리 중늙은이는 텅 비어 컴컴한 홀을 둘러보고는 조용한 방이 없느냐고 물었다. 발음은 좀 서툴고 느리지만 놀랍게도 한국어였다. 있다. 이층에 올라가면 크고 작은 방이 여러 개 있다. 차라리 거기가 낳겠다 싶어, 갈치야! 이층 16호실로 모신다. 갈치에게 소리치고는 이층으로 모시고 올라가 방 중에서 노래방시설이 갖추어진 작은방인 16호실로 안내했다.
일층에서 눈이 맞아 부킹이 이루어진 팀이 원하면 바로 이층 방을 안내해 저희들끼리 따로 양주를 마시며 다른 세상에서 친선(?)을 도모할 수 있도록 만든, 최첨단 시스템의 방이다. 부킹이 된 팀이 다른 노래방으로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만들어둔 방이다.
16호실 방문을 열어 보여주고는 어떠냐고 물으니 미야꼬가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자리에 마주 앉는 둘을 보고 술은 어떤 걸로 하겠느냐고 물으니 맥주라고 미야꼬 아버지가 대답했다. 일단 기본부터 들여야 된다고 생각하고 방을 나와 맥주와 마른안주를 준비하며 갈치에게 소리쳤다.
갈치야! 과일안주도 하나 준비해라.
*
미야꼬가 호박나이트에 나타난 건 일주일 전쯤이었다.
그날따라 홀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고 이층에 연회실에는 보스가 초대한 건설사의 직원들이 보스와 술판을 벌이고 있던 날이었다. 밤 열한 시쯤 되었을까, 이층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갈치가 나를 찾아 올라왔다. 홀에 일본여자가 한 명 왔는데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으니 나를 보고 좀 맡아 달라고 했다. 갈치는 내가 일본어를 조금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호박나이트에 외국인이 왔다? 세계화의 도도한 물결이 우리 호박나이트까지 흘러드는 군, 하고는 갈치와 교대를 하고 내려가서 보니 앳된 일본 처녀였다.
머리를 짧게 컷을 하고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한눈에 보아도 발랄한 처녀였다. 맥주 세병에 기본 안주를 시켜서 혼자서 홀짝이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혼자서 왔느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눈치를 보니 부킹을 위해서 온 처녀가 아니라 일반 나이트클럽인줄 알고 그냥 술을 마시러 들른 처녀가 분명했다. 이런 처녀에게 한국의 취객을 부킹된다면 분명 사고가 터진다. 주위에서 매의 눈으로 힐끔거리는 한국 잡탕들이 집적거리지 못하게 내가 자리를 차고 마주 앉았다. 명찰이 달린 웨이터가운은 벗어두고 일반손님으로 보이게 하려고 티셔츠만 입고 마주앉은 것이다.
이름을 물으니 미야꼬라고 했으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고베에서 왔다고 했다. 막상 말을 붙이니 내 일본어 실력이 영 서툴다는 걸 실감할 수가 있었다. 혼자서 왔느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그때 위에서 보스의 지시가 하달되었다. 갈치가 보스에게 얘기를 한 모양이었다. 다른 놈이 집적거려 사고가 나지 않도록 내가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일본어를 학원에서만 배웠지 써먹기는 처음이다.
맥주를 좋아하느냐고 물으니 한국 맥주가 맛은 있는데 조금밖에 마시지 못한다고 했다. 맥주가 기본으로 세 병이 나왔는데 그때까지 두 병은 뚜껑도 따지 않았고 겨우 한 잔을 가지고 놀며 홀짝이고 있었다.
이곳은 외국인이, 특히나 처녀가 혼자오기에는 굉장히 위험한 곳이라고 말했다. 미찌꼬는 천진스럽게 나이트클럽이 왜 위험하냐고 물었다. 그걸 외국인에서 설명하기에는 민망하고 낯이 간지러운 일이다. 부킹이 잘못 되면 두세 놈이 모텔로 데려가 집단 윤간도 이루어질 수가 있는 일이다. 그런 일이 전혀 없을 거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자칫하면 굶주린 이리떼에게 새끼사슴을 던져주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남녀가 한 무리가 되어 오로지 기분을 풀러 오는 작자들도 가끔 있지만 이 호박나이트에 오로지 술을 마시고 춤을 추기 위해서, 남자들끼리 혹은 여자들끼리 오는 인간은 없다. 모두들 부킹을 은근히 기대하고 오는데 미찌꼬가 그걸 알 턱이 없다.
아무튼, 한국의 나이트는 일본의 나이트클럽과는 달리 여자가 혼자서 오기에는 위험한 곳이라고 했다. 한국의 남자들이 가만히 두지 않는다고 하며 여행을 왔느냐고 물으니 출장을 왔다고 했는데 그 다음 말은 내가 못 알아들었다. 미야꼬가 하는 말의 뜻은 대충 알겠는데 내가 말을 하려니 아는 것도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것이어서 답답했다. 미야꼬와 대화를 하면서도 가끔 나도 모르게 영어가 동원되는 상황이니 내 일본어 실력은 고작 그 정도였다. 내가 맥주를 한두 잔 거들고 나가자고 했다. 미야꼬는 오늘밤은 시간이 있다면서 놀고 싶다고 했다. 여긴 위험한 곳이니 다른 곳에 가서 놀자고 하고는 미야꼬를 데리고 나갔다.
데리고 나이트 문을 나가는데 갈치 녀석이 뒤에서 소리쳤다.
-야! 멸치, 그 년 외국에 와서 많이 굶은 것 같은데 오늘 홍콩 여러 번 보내줘라. 국력을 과시해야지.
미야꼬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턱이 없었다.
미야꼬를 데리고 나와 처음으로 들른 곳은 부근의 편의점이었다. 맥주를 세 병 다 마시진 않았지만 미야꼬가 좀 비틀거려서 편의점에 들러 숙취에 좋다는 드링크를 한 병 사서 권했다. 그리고는 편의점 간이 테이블에 앉아 둘이서 컵라면을 먹었다. 미야꼬가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컵라면을 청한 것이다. 미야꼬는 한국의 라면이 참 맛있다며 국물도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마셨다. 일본에도 라멘이라는 게 있는데 원조는 강꼬꾸, 즉 한국이라며 이 맛을 따라잡지 못한다고 했다. 컵라면을 먹으면서 미야꼬가 내 나이를 물었다. 서른이라고 하자 미야꼬가 못 알아들었다. 나무젓가락으로 라면국물을 찍어 테이블에 30이라고 적었다. 미야꼬도 나무젓가락으로 라면국물을 찍어 테이블에 26이라고 적었다. 제 나이를 말하는 것이었다.
-오빠!
그렇게 적고는 놀랍게도 한국말로 오빠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오빠라는 말은 발음이 정확했다. 그렇게 부르는 게 좋겠다고 했다. 라면을 먹고 난 다음에 모텔로 갔을 거라는 갈치의 짐작을 완전히 뒤엎었다. 내가 미야꼬를 데리고 간 곳은 시내에 있는 심야극장이었다. 최근에 개봉된 할리우드 영화를 보았다. 상영시간은 길어 두 시간이 넘었는데 영어로 자막이 나와 같이 내용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가 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미야꼬는 내 손을 두 손으로 오롯이 감싸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나니 새벽 네 시가 좀 넘었었다. 미야꼬에게 잠이 오지 않느냐고 물으니 영화를 보면서 조금 졸았다고 했다. 나는 영화에 빠져서 미야꼬가 조는 걸 몰랐다.
영화관을 나와서 미야꼬를 데리고 간 곳은 역 뒤에 있는, 심야로 영업을 하는 감자탕집이었다. 감자탕이 진하고 맛있기로 소문난 집이었다. 아무래도 날을 새워서 속이 쓰릴 것 같아서 그곳으로 데리고 갔는데 의외로 미야꼬는 감자탕과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정말 안 데리고 갔으면 서운했을 뻔했다. 나는 감자탕과 소주를 한 병 비웠다. 미야꼬가 딱 한잔을 거들고 내가 다 비웠는데 거기서 많은 얘기를 했다.
내가 장차 일본으로 갈 것이며 한국에서는 취직이 어렵고 한국의 경제사정이 안 좋아서 비전이 없다는 얘기, 어렵게 취직을 하더라도 사십대 중후반이면 잘린다는 얘기를 하며 일본으로 갈 생각인데 미야꼬가 산다는 고베로 가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미야꼬는 그 말에 희색이 완연히 변하며 오빠가 일본으로 건너오면 무조건 돕겠다고 했다.
그 사실은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얘기고 가슴에 담아둔 계획인데 미야꼬가 일본인이라 그 말을 하고 만 것이다. 미야꼬는 고베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다고 했다고 했고 나는 지방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고 솔직하게 얘기를 했다. 미야꼬는 기계공학을 전공했으면 일본에는 일자리가 많을 것이라고 해서 위로를 받았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감자탕집은 한산했으므로 우리는 자리를 차지하고 많은 얘기를 했다. 한국엔 왜 왔느냐고 물었더니 전자부품에 도금하는 화공약품을 생산하는 업체에 다니는데 그 한일 합작회사에 출장 겸 둘러보러 왔다고 했고 한국의 숙소가 어디냐고 물으니 회사 안에 있는 기숙사에서 임시로 생활하고 있으며 약 보름 후에 일본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내가 일본 고베에 가서 전화를 할 것이라고 하며 연락처를 받았고 미야꼬는 내가 들어오기 전에 일본에 가면 내 취직자리부터 먼저 알아보겠다는 눈물겹게 고마운 말까지 했다. 빈말이겠지만 고마웠다. 한국의 연락처도 서로 주고받고 감자탕집에서 나오니 짧은 여름밤은 끝이 나고 먼동이 트는데 드문드문 다니는 청소차외에는 길이 한산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역사로 올라가 역사 안에 있는 편의점에서 카푸치노 커피를 진하게 만들어 나누어 마셨고 역전에 새벽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를 태워서 보냈다. 회사가 어디인지 알고 있느냐고 물으니 핸드백에서 꺼낸 공책에 한글로 적힌 주소와 회사이름을 보여주었다. 얼른 보니 5공단의 도레이케미칼인데 처음 듣는 공장이었다. 아마도 신설된 중소기업인 모양이라 생각하고 택시 문을 열어주며 기사아저씨께 5공단 도레이케미칼을 아느냐고 물으니 안다고 했다. 잘 찾아주라고 부탁을 했다. 미야꼬는 택시 뒷좌석에 올라앉아 나에게 한마디를 하고는 문을 닫았다.
-오빠! 바보.
또렷한 한국말인데 그게 무슨 뜻인지 아리송했지만 달콤한 풋잠처럼 감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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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락처를 주고받았지만 미야꼬에게 여기서 전화를 해보겠다는 생각은 못하고 잊고 있었다. 헌데 오늘 아버지를 모시고 호박나이트에 나타난 것이다. 아마도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작별인사를 하러 온 모양이지 싶다. 아니다. 일본에서 나온 아버지를 모시고 한잔하러 왔을 수도 있겠다. 한국의 문화를 이해하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아무튼, 미야꼬를 다시 보게 되어 반가운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야! 멸치. 저 년 갈보지? 늙은 기둥서장이 있을 줄 모르고. 그날 밤에 저년을 홍콩을 몇 번.......
갈치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강력한 레이저가 발산되는 독한 눈으로 쏘아보았기 때문이다.
-야이 씨방새야. 아버지란다. 말조심해라. 방정 좀 떨지 말고.
-그럼 하룻밤 풋사랑 장인어른이 오셨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과일안주나 하나 준비해.
아버지라는 말에 갈치가 고분고분해졌다. 마른안주를 얼른 준비해서 시원한 맥주를 꺼내서 쟁반에 담아 16호실로 올라갔다. 방에 들어가면서 구십 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버릇이란 참 무서운 거다. 그냥 들어가도 되는데 일반손님과 같이 구십 도로 인사를 해버린 것이다.
안주접시를 내려놓고 뒤주머니에 꽂힌 병따개를 빼서 맥주병 뚜껑을 소리가 나도록 따서 테이블에 올려놓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하고 구십 도로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빡빡머리 아버지란 작자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스터 한데스까?
돌아보니 앞에 있는 좌석을 가리키며 좀 앉으란다. 그러고 보니 마주앉아 있던 미야꼬가 제 아버지 옆에 찰싹 붙어 앉아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나? 앞에 어색하게 마주 앉아 맥주를 한 잔 따라 올렸다. 그러니 옆에 앉은 미야꼬도 잔을 쑥 내밀었다. 천진한 건지 일본 문화가 그런지 모르겠다. 미야꼬에게도 두 손으로 한 잔 따라주었다. 미야꼬아버지가 잔이 하나 모자란다고 하면서 잔을 하나 더 가져오란다. 그 말은 일본어였다. 하이, 대답을 하고 문을 나서는데 갈치가 과일안주를 들고 올라오고 있었다. 과일안주가 담긴 쟁반을 받아들고 잔을 하나 더 가져오라고 갈치에게 일렀다. 내가 과일 안주를 들고 들어가자 갈치가 맥주잔 냉큼 가져와서 구십 도로 인사를 하고 들어왔다. 미야꼬아버지는 갈치에겐 관심도 없고 나를 보고 앉으라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황송스럽게 두 손으로 맥주를 한잔 따라주었다. 그 모습을 본 갈치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구십 도로 또 인사를 하고 나갔다.
셋이서 잔을 들어 건배를 하고 마셨다. 나는 한 모금만 입에 대고 잔을 내려놓았는데 미야꼬의 아버지는 벌컥벌컥 단숨에 다 마셨다. 그리고는 안주를 집을 생각도 없이 나에게 물었다.
집에 어머니 혼자 계시냐고 물었다. 일본어였다.
나도 일본어로 그렇다고 했다. 그건 미야꼬에게 들은 모양이다.
잘못 알아들었지만 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셨냐고 묻는 거 같았다.
고등학교에 다닐 적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간경화로 돌아가셨지만 간경화를 일본어로 뭐라고 하는지 몰라 돌아가셨다는 말만 했다.
다른 가족은 없느냐고 물었다.
대학에 다니는 여동생이 하나 있다고 했다.
정말 일본에 가서 취직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미야꼬에게 들었다고 했다. 왠지 마주앉아 면접을 받는 기분이 들었는데 본론은 바로 이거다. 진정으로 일본에 가서 취직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여러 군데 찾아보았지만 취직할 자리가 없다고 했다. 사실이다. 한국은 기업을 할 분위기가 아니다. 강성노조에 갖가지 기업 옥죄기 정책으로 능력이 되는 회사는 전부가 해외로 이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올해 전반기 해외직접투자가 사상 최고치라는 통계가 있다.
그기까지 들은 미야꼬의 아버지는 내가 입은 옷을 가지고 흠을 잡았다. 보기 안 좋으니 명찰이 달린 윗도리 웨이터 옷을 벗으라고 했다. 그렇잖아도 미야꼬 앞에서 보이기 불편한 복장이었다. 윗도리를 벗으며 이 양반이 혹시 일본 어디에 취직을 시켜주려나? 생각을 잠시 했다.
내일 미야꼬와 일본을 들어간단다.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부산 구경을 하루하고 부관페리로 시모노새키로 건너가서 신칸센을 타고 고베로 올라갈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그러시냐고 하면서 그냥 듣고만 있었다. 미야꼬가 간다니 조금 섭섭한 마음이 일었다. 정작 여기 있을 때는 일주일간 전화 한 통을 안했지만 떠난다니 섭섭했다. 거기까지 얘기를 하고 미야꼬아버지가 빈 잔을 내밀었다. 왠지 분위가가 묵직해서 잔이 비어있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두 손으로 공손하게 잔을 채워드렸다. 또 맥주를 단숨에 마셨다. 그리고는 나를 보고 여기서 월급을 얼마 받느냐고 물었다. 조금 밖에 못 받아서 용돈에 불과하다고 했다. 가끔 부킹을 시켜주면 손님에게 팁을 받지만 그건 말을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내 말을 듣고 고개를 주억이던 미야꼬아버지가 내일 같이 일본으로 건너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일본? 너무 기습적이고 갑작스런 말이라 좀 혼란스러웠다. 아직 적금이 끝나지 않았으니 일본에 체류할 경비가 걱정이었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혼다 오토바이를 아느냐고 물었다. 혼다라면 세계적인 메이커다. 혼다에서는 오토바이와 차가 나오는 세계적인 메이커라고 하면서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차는 다른 공장에서 생산하고 혼다 오토바이를 생산하는 업체가 따로 있다고 했다. 아, 그러냐고 그건 몰랐다고 했더니 나를 보고 일본어를 꽤 잘한다고 했다.
이 양반이 무슨 말을 하시려나?
입이 말라 나도 모르게 앞에 남은 맥주로 입을 축였다. 그러고도 침을 꿀꺽 삼켰다. 미야꼬가 하도 졸라서 도레이케미칼에 알아보니 자리가 없고 고베에서 혼다 오토바이에 들어가는 피스톤과 밸브, 크랭크를 생산해서 납품하는 친구의 중소기업이 있다고 했다. 또 침을 꿀꺽 삼켰다. 미야꼬가 제 아버지의 팔짱을 끼며 웃고 있었다. 작지만 알찬 중소기업인데 그 친구의 아버지에게 물려받아 대를 이어서 경영하는 공장인데 그 역사가 육십 년을 넘는다고 했다. 그 친구에게 부탁을 했더니 기계공학을 전공했으면 한 명을 데려오라는 대답을 받았다고 했다.
내일 출발해서 부산에 가서 여행하는데 가이드를 좀 해주고 같이 건너가면 어떻겠느냐고 묻고 여권은 있느냐고 물었다. 여권은 있노라고 대답하고 망설이는 사이, 미야꼬 아버지는 말했다.
오늘 여기 일이 몇 시에 끝이 나느냐고 물으면서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노라고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인간은 평생을 살면서 기회가 세 번 오는데 그 첫 번째 기회가 오늘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또 침을 꿀꺽 삼켰다. 새벽 세 시에 끝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간다면 지금 나가면 되는 것이다. 오늘 일을 채우더라도 일수를 따져서 월급이나 퇴직금이 나오지는 않는다. 이곳에서 나가는 인간들은 어느 날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지는 곳이 바로 이 호박나이트다. 일용직이고 시간제라 지금 나가면 된다고 둘러대고는 나가자고 했다.
미야꼬 아버지는 나를 보고 성질이 급하다면서 돈을 주고 먹으니 이건 다 먹고 나가자고 맥주병을 들어 보였다. 그 공장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맥주 세 병을 비우는 시간이 왜 그리 길었든지. 일단 그 공장에 기숙사가 있다는 말에 안심을 했다.
술을 다 비우고 미야꼬아버지는 감자탕을 들먹였다. 미야꼬가 그리 맛있게 먹었다는 감자탕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내가 모시고 가겠다고 앞장을 섰다.
나이트 문을 나서면서 갈치에게 소리쳤다.
-야, 갈치야! 오늘 거는 내가 계산할게. 그리고 이 손님들 택시를 좀 잡아드리고 올게.
윗도리 명찰이 달린 웨이터복은 16호실에 그대로 두고 나온 것이다. 역 뒤의 감자탕집이야 걸어서 가면 된다. 미찌꼬는 제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걷는다. 나도 부축하는 척하며 미찌꼬아버지의 반대편 팔짱을 끼었다. 이상하게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컴컴한 골목을 빠져나오며 돌아보니 호박나이트 대형 간판이 허공에서 점멸하고 있었다. 저 간판 아래서 일 년 반의 청춘을 바쳤다. 그 네온간판을 돌아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호박나이트여 굿바이~ 아니, 사요나라 호박나이트
그리고 한마디 더.
갈치야! 역사, 역사는 이렇게 창출되는 것이란다. 이게 역사(History)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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