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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긍휼)
마태복음 9:9-13 2023/1/29 주현 후 제4주
9: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9: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평안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 자녀와 이웃들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장차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
그분이 오신다면, 과연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실까?
이것을 가장 많이 고민한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여호와는 구원하신다. 여호와께서 구원하셨다.’라는
뜻을 가진 이사야였습니다.
하지만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구원과 먼 가장 불행했던 시절을 살아갑니다.
그 때, 선지자 이사야에게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사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41:13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
사41:14 버러지(지렁이, 벌레, 구더기)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그러면 하나님이 왜, 버러지 같은 이스라엘을
자신을 배신한 죄인 이스라엘을 도와주고 구원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 이유가 43장 1절에 나옵니다.
사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이 창조하고 하나님이 지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조 이후 비록 버러지 같은 행동만 하는 이스라엘이었지만
그래서 그 이스라엘의 행위로 인해 창조주의 마음
이스라엘을 지은 이의 마음이 찢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도와주고 구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찢어진 고통 속에서 낳은 하나님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의(심판)의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죄인 이스라엘을
도와주고 구원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온 하나님의 성품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긍휼(라함)입니다.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지요.
긍휼
히브리어 ‘라쿰(아기집, 자궁)’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문자 그대로 풀어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아기집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아이를 낳는 것이 긍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라함, 긍휼로 낳은 자식이 버러지 같은 행동만 하는 죄인 이스라엘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버러지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메시야의 모습이
우리의 기대, 우리의 상상과 무척 달랐다는 것입니다.
첫째 죄인을 구원할만한 고운 모양도, 훌륭한 풍채도,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도, 그 어떤 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새)사53:2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더 큰 문제는 53장 3절입니다.
죄인을 구원해야할 메시야가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을 비롯한
오늘날 많은 지혜 있는 자들이
예수님을 거부했던 이유 중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어떻게 구원자가 죄인의 모습으로 올 수 있는가? 이지요.
(새)사53:3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죄의 시그니처)
(따라서)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면 죄인을 구원하시는 메시야는 왜 이런 모습으로 오셔야만 했을까요?
죄인 이스라엘이 라쿰, 긍휼로 낳은 자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던’ 것입니다.
사53:4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하지만 라함, 긍휼의 신비를 알 수 없는 이들은 이 생각에 멈춥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에 동의 했던 사람 중에 하나가 오늘본문의 주인공
세리장 마태였습니다.
마태
원래 이름은 레위였습니다.
알페오의 아들 레위이지요.
하지만 마태는 자신의 본명 레위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버러지 같이 살았던 죄의 과거를 잊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반면 마가와 누가는 마태의 본명인 레위를 아주 명확하게 밝힙니다.
(병행구절)막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2: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병행구절)눅5: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5: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5: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알패오의 아들 레위
그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세리 덕분에 어려운 시절, 밥걱정 없이 살았지만
문제는 그가 세리질 해서 먹은 밥이
가난한 백성들의 고혈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창녀처럼 죄인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레위는 가기 배만 불리는 버러지 같은 인생
죄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세관에 앉아 버러지와 같은 일만하는 레위를 찾아 온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누구였을까요?
바로 메시야,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이었습니다.
마9: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여기서 버러지 같은 레위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살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어진 새 이름이 마태였습니다.(시몬→베드로)
마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마태는 라함, 하나님의 긍휼이 낳은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그러니 마태가 볼 때, 하나님의 긍휼(라함)만큼 좋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곳곳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강조합니다.
오늘본문 9장 13절 볼까요?
마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사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병행 본문인 마가복음 2:13-17
그리고 누가복음 5:27-32절에서도 동일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신의 회심을 직접언급하면서
다른 복음서에 없는 말씀 하나를 덧붙여 기록합니다.
그것이 바로 호세아 6장 6절입니다.
이것을 덧붙여 기록함으로 자신의 간증으로 삼지요.
호6:6 나는 인애(긍휼/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리고 호세아 6장 6절의 말씀은 바리새인과 시비 속에서 나온 말입니다. 바리새인의 주장, 이런 것입니다.
결코 메시야, 그리스도는 버러지 같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실 수 없다는 것이지요.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하지만 마태는 자신의 회심을 근거 삼아 호세아 6장 6절로 재반박합니다.
마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호6:6)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와 같은 논지는 12:7절에 가서 한 번 더 반복됩니다.
바리새인의 주장입니다.
‘메시야, 그리스도는 안식의 규례를 범할 수 없다’
하지만 마태는 호세아 6장 6절의 말씀을 또 들어가며 재반박합니다.
마12: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1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이처럼 마태는 말합니다.
제사의 계명보다
그리고 안식일의 계명보다 더 큰 하나님의 성품(마음)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오늘 본문이 기록된 9장 18절 이후에
버러지 같은 인생들
불쌍한 죄인들에게 행한 긍휼의 이야기를 연속해서 기록했던 것입니다.
첫 번째 주인공, 누구입니까?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이지요.
이 불쌍한 죄인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이야기가 20-22절에 나옵니다.
마9: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9: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두 번째 주인공은 회당 장 아히로의 딸입니다.
꽃도 펴 보지 못하고 죽은 불쌍한 죄인이지요.
그런데 그 불쌍한 죄인을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하십니까?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마9:23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9:24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9:25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9:26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세 번째 불쌍한 죄인은 27절 이후에 나오는 두 맹인이었습니다.
마9: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어떻게 되었을까요?
눈이 밝아지는 고침을 받습니다.
마9:29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9: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9:31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네 번째 주인공은 32절 이후에 나오는 말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참 불쌍한 인생이지요.
그런데 그 불쌍한 죄인에게도 하나님의 긍휼이 봄처럼 찾아옵니다.
마9:32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9:33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의롭다 한 이들은
죄인들에게 베푼 하나님의 긍휼을 이렇게 폄하하지요.
마9:34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그래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긍휼을 배우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호세야 6장 6절에서 배우십시오.
호6:6 나는 인애(긍휼/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둘째 배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긍휼을 행하십시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예수님처럼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마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죄인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것이 예수님이 따르는 제자들이 가져야할 가장 큰 덕목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 마태의 결론이었습니다.
왜냐?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9장 12절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9장 13절입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군인들 목에 걸려 있는 게 뭔지 다 아시지요?
인식표라는 것입니다.
군번과 이름이 동일하게 적혀있는 두 개의 인식표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군대인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식표, 뭐가 있을까요?
십자가표시, 물고기마크, 교패 물론 그것도 좋은 인식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인식표가 있다면
저는 그것이 긍휼,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선물이 될 또 다른 마태를 찾아 나서는 것이지요.
이것이 진짜 전도이겠지요.
바라기는 진짜 전도에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