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복집 별집 제12권 / 부록(附錄) / 또 [허용(許蓉)]
예안(禮安)에 있는 도산서원(陶山書院)의 유생 허용(許蓉) 순흥(順興)에 있는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원임(院任)인 진사 진익형(秦益亨), 안동(安東)의 유생인 생원 정유번(鄭維藩), 삼계(三溪)의 유생인 권첨(權詹), 경주(慶州)의 후학(後學)인 권응생(權應生)ㆍ이의잠(李宜潛), 대구(大邱)의 화민(化民)인 서시립(徐時立), 유생인 이찬(李瓚), 예천(醴泉)에 있는 정산서원(鼎山書院)의 유생인 진사 이경남(李慶南), 용궁(龍宮)의 교임(校任)인 이장길(李長吉), 도일서원(道一書院)의 유생인 정영후(鄭榮後), 함창(咸昌)의 유생인 이각민(李覺民), 성악(城岳)의 유생인 채득해(蔡得海), 영천(榮川)에 있는 이산서원(伊山書院)의 원임인 전 정랑(正郞) 권성오(權省吾), 성주(星州)의 유생인 생원 최항경(崔恒慶), 보은(報恩)에 있는
중현서원(衆賢書院)의 원임인 생원 이정(李晶) 등의 제문은 많아서 싣지 않는다.
생각건대 돌아가신 선생께서는 / 恭惟先生
강과 산의 정기 모인 분이었었고 / 河嶽精英
나라의 주석 같은 신하였었네 / 邦家柱石
지닌 기도 드넓고도 깊숙하였고 / 氣宇宏深
지닌 자품 우뚝하고 특출하였네 / 資稟挺特
서애 선생 문하에서 공부하여서 / 從事厓門
공정하고 반듯한 도 얻어 들었네 / 得聞直方
깊은 생각 묘하게도 계합 이루어 / 精思妙契
나간 조예 갈수록 더 빛을 발했네 / 造詣彌光
맨 처음에 벼슬길에 진출하여서 / 爰初拔跡
중요하고 화려한 직 두루 거쳤네 / 歷敭要華
대각에서 나라 위한 계책 올리어 / 謨猷臺閣
임금 지혜 틔워 준 게 아주 많았네 / 啓沃弘多
얼음과 숯 서로 용납되기 어려워 / 氷炭難容
몸 거두어 산속으로 물러났다네 / 卷懷林壑
소요하며 첨에 먹은 맘 이루고자 / 婆娑初服
전에 배운 학문 다시 궁구하였네 / 紬繹舊學
좌우에다 서책 높이 쌓아 놓고서 / 左圖右書
글 읽다간 깊은 생각 잠기었다네 / 俯讀仰思
형문 깊이 숨어 살며 덕을 기르매 / 棲遲衡門
맘 즐거워 배고픔도 모두 잊었네 / 樂而忘飢
혼란했던 광해조에 이르러서는 / 逮至昏朝
곤경당해 더욱 뜻을 얻지 못했네 / 轉益坎坷
어려움에 처해서도 형통했나니 / 處困愈亨
지조 지켜 행실 더욱 조심하였네 / 操履冞加
성상께서 다스리던 가장 처음에 / 聖上初載
모셔다가 경연에다 앉히었다네 / 擢置經席
돌봐주는 은혜 더욱 깊기만 하여 / 眷注隆深
매일처럼 세 차례씩 인접하였네 / 日勤三接
임금 곁에 모시고서 논사를 하매 / 論思密勿
나라 한번 잘 다스릴 만하였다네 / 庶幾有爲
몸이 한번 병들어서 고질이 되매 / 一疾沈痼
마침내는 치료할 수 없게 되었네 / 竟至難醫
임금께선 마음 놀라 애도를 하고 / 九重震悼
사류들은 혀를 차며 탄식하였네 / 士類齎咨
군자들은 믿을 바가 없게 되었고 / 君子失恃
후학들은 기댈 바가 없게 되었네 / 後學無依
용은 죽고 범은 멀리 떠나갔나니 / 龍亡虎逝
어느 누가 비통스러운 내 맘 알리오 / 孰知我悲
영구 실은 상여 이제 길을 떠나니 / 靈輀載駕
먼 길 길이 떠나갈 날 정하여졌네 / 卽遠有期
제수 갖춰 통곡하며 전을 올리매 / 哭奠菲薄
하염없는 눈물 줄줄 흘러내리네 / 淚落懸泉
사라지지 아니하는 영혼 계시면 / 不昧者存
어서 와서 저의 정성 살펴 주소서 / 鑑此微虔
[주-D001] 형문(衡門) : 나무 막대기를 가로질러서 대문을 만든 것으로, 오두막집의 초라한 사립문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은자(隱者)가 사는 곳을 말한다. 《시경》 〈형문〉에, “형문의 아래여, 쉬고 놀 수 있도다.〔衡門之下 可以棲遲〕”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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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報恩)에 있는 중현서원(衆賢書院)의 원임인 생원 이정(李晶) ->象賢書院
*祠院: 象賢書院。 明宗己酉建, 光海主庚戌賜額。 ○金淨,【見淸州。】 成運,【字健叔, 號大谷。 昌寧人。 官司贍寺正、贈左承旨。】 成悌元,【見公州。】 趙憲,【見金浦。】 宋時烈。【見文廟。】
<大東地志 卷六 / 忠淸道 / 報恩>
三十四年 本朝恭憲大王十年 乙卯。建象賢書院于報恩。卽先生生長之地也。初名三年城書院。萬曆庚戌。賜額。
<冲庵先生集年譜 上 / [年譜]>
명종 10 1555 을묘 嘉靖 34 - 報恩 象賢書院에 享祀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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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집 부록 / 강계부 사묘기〔江界府祠廟記〕
강계부의 회재 선생 사당은 이 문원공(李文元公)을 제사 지내기 위해 지은 것이다. 강계부는 선생이 유배 생활을 한 곳이다. 선생이 유배된 것은 가정(嘉靖) 정미년(1547, 명종2)인데, 7년간 유배 생활을 하고도 끝내 풀려나지 못하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에 변방의 고을 사람들이 선생을 존경하여 마음에 잊지 못하였다. 그 뒤 만력(萬曆) 병자년(1576, 선조9)에 희천(熙川)의 학자 김생 현(金生鉉)이 한 고을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을 수렴하여 묘사(廟祠)를 건립하기를 청하였다. 관찰사 김계휘(金繼輝) 공이 그 말을 듣고 너무 늦은 것을 한스럽게 여기며 신속히 사당을 지으니, 이에 단아한 사당 건물이 하루아침에 향교의 왼쪽에 서게 되었다. 아, 선생의 높은 도덕이 아니었다면 누가 이런 일을 했겠는가. 사람 마음의 동일한 바를 여기에서 또한 징험할 수 있다.
대개 선현(先賢)을 제사 지내는 것은 더할 수 없이 중대한 예(禮)이다. 백성의 교화(敎化)와 국가의 기운(氣運)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합치하고 듣는 이들이 기뻐해야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그 사람이 평생 생활한 지역이나 출입하며 벼슬한 곳이라도 감히 사당 건립을 쉽게 의논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구나 사막 지대에 가까운 궁벽하고 황폐한 땅이 오랑캐 지역과 인접해 있는데, 몸이 촘촘한 법망(法網)에 걸려 얼음이 두껍게 얼고 날리는 눈이 쌓인 곳에 유배되었다가 홀연히 눈을 감았으니, 사람들이 슬피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만도 다행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존모(尊慕)하고 공경할 줄을 알고 제향을 받들고자 하여 영구히 이어 가게 할 계책을 강구하였으니, 이 어찌 깊이 감화되어 흥기되는 마음을 억제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영남 지방의 걸출한 인재로서 순수한 자질을 타고나,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초연히 홀로 학문에 정진하였다. 깊이 연구하고 힘써 실천하여 성역(聖域)의 바른 길을 환히 보았고, 한순간도 쉰 적이 없어 체용(體用)을 겸비하는 경지에 이르고 물(物)을 넉넉히 이루어 주는 단계로 미루어 갔다. 인묘(仁廟)와 같은 성스러운 임금을 만나 백성에게 거의 지치(至治)의 은택을 입힐 수 있을 듯했으나,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인묘께서 갑자기 붕어하심에 따라 선생은 먼 변방의 떠돌이 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아, 인사(人事)와 세변(世變)이 무상(無常)하여 우리 도를 행하지 못하는 것이 이와 같다.
관서(關西) 지역에서 사우를 지어 선현을 제사 지내는 곳은 이 강계부와 희천(熙川)뿐이다. 희천의 사우는 김한훤(金寒暄 김굉필(金宏弼))과 조정암(趙靜菴 조광조(趙光祖)) 두 선생을 제사 지내는 곳이다. 선생은 두 선생과 도(道)를 같이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사숙(私淑)한 분인데, 능히 그 뒤를 따라 관서 지역에 배향되었다. 이 세 선생은 태산 교악(泰山喬嶽)과 같이 우뚝하게 국조(國朝)에서 나란히 정립(鼎立)하였으므로, 얼마 전 별도로 《유선록(儒先錄)》을 편찬하여 특별히 인쇄해 반포할 것을 명한 바 있다. 그리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건으로 사람들이 모두 답답하게 여기며 상소하여 부르짖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아동이나 노복들조차도 모두 익히 듣고 능숙히 말할 정도이다. 그러니 그 높은 도와 성대한 덕이 어떠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생전에 혹독한 역경을 만나 멀리 유배되는 처지가 되었으니, 아! 너무도 심하다.
100년 사이에 대현(大賢)이 몇 분이나 배출된 것을 보면 하늘이 사도(斯道)에 무심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하늘이 이미 낳고도 뒤따라 비운(否運)을 내려 내면에 축적한 바를 펼치지 못하게 함으로써, 난초가 꺾이고 옥이 불타 버린 뒤에 단지 적막한 물가에 빈 사우를 세우게 했을 뿐이니,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하겠는가.
옛날 이천(伊川) 정 부자(程夫子 정이(程頤))는 도(道)가 이미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으나 《역전(易傳)》이 완성된 것은 오히려 한 번 부주(涪州)에서 귀양살이한 것에 힘입어서였다. 선생이 변방 고을에서 저술한 것으로는 《구인록(求仁錄)》, 〈진수팔규(進修八規)〉,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가 있는데, 정력을 기울인 바가 모두 콩과 조, 베와 명주처럼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것들이었으니, 앞 시대의 성현을 계승하고 후대 학자를 계도(啓導)하는 것이 여기에 있었다. 그렇다면 선생은 참으로 해동(海東)의 정씨(程氏)라고 할 수 있겠고, 넘실거리는 압록강은 실로 선생의 부강(涪江)이었던 것이다.
멀리 떨어진 변경 지역에서 환란을 겪은 것이 실로 철인(哲人)의 불행인 듯하지만, 놓인 상황에서 평탄한 도리를 행한 것이 도리어 그 아름다운 사공(事功)을 드러내는 것을 도와 은미한 말과 지극한 가르침을 백세에 남기게 된 것은 전현(前賢)과 후현(後賢)이 부절(符節)을 맞춘 듯 일치하였다. 하늘의 뜻을 알 수는 없지만 어쩌면 그 뜻이 여기에 있었던 것은 아니겠는가.
다만 이천은 살아서 돌아왔는데 선생은 돌아오지 못하고 객지에서 별세하고 말았다. 옛사람이 “능히 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선생의 도에 누가 될 것이 있겠는가. 또 이천의 서원이 중국의 서쪽 오랑캐 지역에 건립되고 선생의 새 사당은 동국의 북방 고을에 세워졌으니, 사람의 마음이 동일한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고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차이가 없다 하겠다. 이것은 과연 누가 그렇게 시킨 것이겠는가.
선생의 손자 이준(李浚)이 경주에서 올라왔다가 마침 김생을 한양에서 만나 이 사당을 건립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슬픈 감회를 억누르지 못하였다. 김생이 말하기를 “희천군의 사당에는 이미 기문이 있는데 강계부의 사당에만 기문이 없으니, 어찌 도모하여 후대 사람들이 상고할 수 있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준은 내가 선생과 인척 관계라는 것을 알고 찾아와서 정황을 말하고 기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놀라 탄식을 하며 일어나서 김생을 맞아들여 상세한 내막을 물었다.
그렇지만 나는 선생을 제대로 아는 자가 아닌데 어찌 감히 한마디인들 기리는 글을 지을 수 있겠는가. 다만 이른바 ‘하늘의 뜻은 헤아리기 어렵고 사람의 마음은 속일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일찍이 느낀 바가 있었다. 그래서 글재주가 변변찮은 것을 혐의하지 않고 다 기술하는 바이다.
김생이 이때 강계의 향교(鄕校)를 맡고 있었는데, 외모는 꾸밈이 없고 인간성은 돈후하며 말은 근실하고 충성스러웠다. 그는 서북 지방의 인재 가운데서 빼어난 자로 선생이 생존해 계실 때 1년 정도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두 사당을 창건한 것은 그 공적이 매우 가상하지만, 이미 희천군의 사당 기문에 서술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 쓰지 않았다.
[주-D001] 강계부 사묘기(江界府祠廟記) : 한국문집총간 36집에 수록된 박승임(朴承任)의 문집인 《소고집(嘯皐集)》 권3에 〈강계부회재선생사당기(江界府晦齋先生祠堂記)〉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주-D002] 희천의 사우 :
희천의 중현서원(衆賢書院)으로, 1576년(선조9)에 건립되고 1694년(숙종20)에 사액(賜額)되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54 平安道 熙川郡》[주-D003] 유선록(儒先錄) : 1570년(선조3) 유희춘(柳希春)이 선조의 명을 받들어 편찬한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으로,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등 사현(四賢)의 행적을 모아 놓은 것이다.[주-D004] 이천의 …… 건립되고 : 사천성(四川省) 부주(涪州)의 북암(北巖)에 이천의 사우가 건립된 것을 말한다. 《宋史 卷427 道學列傳 程頤》
ⓒ 한국고전번역원 | 조순희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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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천의 중현서원(衆賢書院)으로, ->象賢書院
*象 : 底本에는 “衆”으로 되어 있다. 《輿圖備志・熙川郡》 祀典, 《增補文獻備考・學校考》, 《靜菴集・煕川象賢書院奉安寒暄堂靜菴二先生文》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大東地志 卷二十三 / 平安道淸北 / 熙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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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54권 / 평안도(平安道) / 희천군(熙川郡)
《대동지지(大東地志)》
【사원】 중현서원(衆賢書院) ->象賢書院
*희천의 중현서원(衆賢書院)으로, ->象賢書院
*象 : 底本에는 “衆”으로 되어 있다. 《輿圖備志・熙川郡》 祀典, 《增補文獻備考・學校考》, 《靜菴集・煕川象賢書院奉安寒暄堂靜菴二先生文》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大東地志 卷二十三 / 平安道淸北 / 熙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