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오웬 하그리브스는 1981년 1월 20일 캐나다 알베르타 캘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그의 부모인 마가레트와 콜린 하그리브스는 1980년에 캐나다로 이주했다. 최근 영국에서 캐나다로 국적을 바꾸었다.
그의 아버지 콜린은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볼튼 원더러스와 캐나다 축구 팀인 캘거리 킥커스에서 젊은 시절 선수로 활약했다.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하그리브스 삼형제는 어린 시절부터 스포츠에 발군의 실력을 과시했다. 특히 장남인 대런은 캐나다 청소년 대표를 역임하며 상당히 유망한 선수로 캐나다 전역에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알베르타 지역의 작은 클럽인 캘거리 푸트힐즈 소속으로 있었던 오웬은 상대적으로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청소년 대표팀과 같은 높은 레벨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킬 기회 역시 갖지 못했다.
그러던 그에게 엄청난 행운의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바이에른 뮌헨의 스카우터가 그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그를 적극적으로 바이에른 유소년팀에 추천한 것. 결국 그는 그의 나이 16살이었던 1997년 7월 1일 독일 바이에른 뮌헨에 입단했다.
독일에서의 초년 시절
그는 바이에른 유소년팀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으며 괄목할만한 성장을 계속했다. 그리고 어느덧 바이에른 유소년팀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선수로 발돋움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1998년 하그리브스가 이끄는 19세 이하 바이에른 유소년 팀은 독일 유소년 챔피언쉽 결승에 진출했지만 도르트문트에게 승부차기 끝에 아쉽게 패해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이 때부터 그의 이름은 독일 축구 팬들과 전문가들 사이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2년 6개월의 유소년팀 생활을 마치고 바이에른 아마추어팀(2군)으로 승격한 그는 6개월 뒤였던 2000년 8월 12일 분데스리가 개막전인 헤르타 베를린과의 경기에서 83분경 카르스텐 얀커와 교체되어 감격적인 분데스리가 데뷔전을 치뤘다.
사실 그의 데뷔전은 이른 감이 있었지만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인 옌스 예레미스가 부상을 당해 그를 급히 호출할 수 밖에 없었다.
한달 뒤 SpVgg 운터하잉과의 경기에 처음으로 선발 출전한 오웬 하그리브스는 엘버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며 분데스리가 첫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다. 하지만 감격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예레미스가 부상에서 복귀함에 따라 그는 다시 2군팀으로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분데스리가에서 높은 수준의 축구를 경험한 그는 이후 장족의 발전을 계속해 나갔고 시즌 후반 다시 예레미스가 부상을 당하자 이번엔 주전 자리를 완전히 꿰차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하그리브스와 함께 2000/01 시즌 바이에른은 분데스리가와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캐나다에서 태어나고 잉글랜드 출신인 아버지와 웨일즈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4개의 영국령 국가(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 아일랜드)나 캐나다 중 아무데서나 국가대표를 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2년만 더 있었으면(2000년 기준) 독일 거주법에 따라 독일 국적 획득이 가능해 독일 국가대표를 선택하는 것 역시 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국가 영국을 선택했고, 하워드 윌킨스 감독이 이끄는 21세 이하 잉글랜드 청소년 대표팀에 차출된 그는 2000년 8월 31일 미들스브러에서 있었던 그루지아와의 경기에서 잉글랜드 유니폼을 입고 첫 데뷔전을 치뤘다.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 청소년 대표팀은 6:1로 승리했다.
명성에 오르다
하그리브스는 바이에른 뮌헨에서 데뷔 시즌이었던 2000/01 시즌, 19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스타덤에 올랐다. 당대 최강 레알 마드리드와의 챔피언스 리그 4강전에서 깜짝 선발 출장한 하그리브스는 당시 세계 최고의 측면 미드필더였던 루이스 피구를 꽁꽁 묶으며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독일의 축구 전문지인 키커가 선정한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기도 한 그는 스티브 맥마나만(레알 마드리드 시절)과 함께 비영국 클럽들과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한 두 명의 잉글랜드 선수가 되었다.
2001년 8월 15일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열린 네덜란드와의 친선전에서 처음으로 잉글랜드 성인 대표팀에 풀타임으로 출장한 그는 '잉글랜드에서 살아본 적도 없고 잉글랜드 축구 클럽에서 뛰어본 적도 없는' 첫 잉글랜드 국가대표가 됐다.
그리고 2001년 그는 그 해의 21세 이하 올해의 유럽 선수로 선정됐다.
이후 하그리브스는 바이에른 뮌헨의 주전 자리를 계속 유지해왔다. 물론 2004/05 시즌 후반기에 마르틴 데미첼리스에게 주전자리를 내주며 2005/06 시즌 전반기까지 주로 교체 선수로 뛰었던 적이 있으나, 이 때는 바이에른 뮌헨의 에이스인 미하엘 발락을 공격에 전념하게끔 하기 위해 중앙 수비수 출신인 데미첼리스를 발락의 파트너로 점찍으면서 생겼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후 다시 그는 데미첼리스와의 주전 경쟁에서 승리하며 자신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었다. 데뷔 시즌인 2000/01 시즌을 제외하고 6년의 기간동안 그가 주전 자리를 내준 건 부상 기간을 제외하면 8개월 남짓에 불과하다.
다재다능한 능력
그는 좌우 측면 수비수와 좌우 측면 미드필더도 볼 수 있는 다양한 포지션이 가능한 멀티 플레이어이다.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중앙 미드필더의 소양을 갖춘 선수다. 많은 활동량을 자랑하는 그는 정확한 패스 능력과 강력한 중거리슛을 겸비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로이 킨의 후계자로 하그리브스를 점찍은 이유기도 하다.
퍼거슨 감독이 로이 킨 이후를 대비해 영입을 원했던 중앙 미드필더는 2명이다. 바로 젠나로 가투소와 오웬 하그리브스. 둘 모두 많은 활동량과 열정적인 경기를 펼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하그리브스와 가투소는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물론 가투소 역시 패스 능력과 공격적인 재능을 갖추고 있지만, 대부분 가투소는 수비에 전념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 안첼로티 감독 역시 AC 밀란에서 가투소에게 요구하는 역할은 철저히 수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하그리브스는 가투소나 마케렐레처럼 수비적인 미드필더만을 맡을 수 있는 수비력을 갖추고 있진 않다. 물론 하그리브스의 수비력은 상당히 수준급이지만 세기에서 부족한 느낌이 없잖아 있다. 도리어 하그리브스는 독일 대표팀의 주전 미드필더인 토어스텐 프링스를 비교하는 게 더 적합해 보인다.
분명한 건 하그리브스는 로이 킨처럼 슈퍼맨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짝은 마이클 캐릭이고, 그는 로이 킨보다 전술적으로 유연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여차하면 좌우 측면 수비수는 물론 좌우 측면 미드필더까지 커버할 수 있기에 상황에 맞게 활용할 수 있다.
본 기자는 독일에서 오랜 기간 오웬 하그리브스를 지켜봤다. 그는 바이에른 뮌헨에서 2000/01 시즌과 2001/02 시즌을 제외하곤 어느 한 자리에 고정적으로 나온 적이 없다(위의 두 시즌은 에펜베르그의 보디가드로 나왔었다). 하지만 그는 어느 자리에 나오건 자기 몫을 100% 해내는 선수였고, 바이에른의 그 어떤 선수보다도 정확한 킥을 자랑하는 선수였다(메멧 숄을 제외하곤. 발락은 정확하기 보단 파워가 넘치는 슛을 구사했다). 그러하기에 간접 프리킥이나 코너킥은 메멧 숄이나 다이슬러(부상으로 거의 나오지 못한)가 없을 때면 하그리브스가 전담하곤 했다(숄과 다이슬러는 그리 많이 출장하지 않았기에 거의 대부분의 경기에서 그랬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만약 하그리브스에 대해 과거의 로이 킨이나 혹은 아스날에서의 패트릭 비에이라,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와 첼시에서의 클라우드 마케렐레처럼 하그리브스가 바이에른에서 영향력이 있었는가라고 한다면 이는 거짓이지만, 그는 언제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여전히 발전의 여지가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의 다재다능한 능력과 기술적 문화적인 적응력은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서의 그의 변화를 가능케 한다.
대표팀 경력 및 수상 내역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하그리브스는 프리미어 리그에 소속되지 않은 유일한 잉글랜드 대표팀 선수였고, 이어서 2004년 유럽 선수권 대회와, 2006년 독일 월드컵에도 연달아 참가했다. 특히 그는 2006년 독일 월드컵 포르투갈과의 8강전에서 그 경기 최고의 선수로 이름을 올리며, 유난히 부진했던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유일하게 성공적인 월드컵 캠페인을 보낸 선수였다.
월드컵에서 보여준 활약을 인정받아 하그리브스는 2006년 올해의 잉글랜드 선수로 선정했고 잉글랜드 축구협회(FA) 여론조사에서 월드컵 최고의 잉글랜드 선수로 뽑혔다. 그는 한 해에 이 두 부문을 동시 수상한 첫 잉글랜드 선수가 됐다.
이어서 2006년 8월 18일 맥클라렌 호의 첫 경기였던 그리스와의 친선전(4대0 잉글랜드 승)에서 前 대표팀 주장이었던 데이빗 베컴의 등번호 7번을 이어받은 그는 또 다시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됐다. 하지만 그는 이후 무릎 부상을 당해 6개월 가까이 재활에 전념해야 했다.
바이에른에서 하그리브스는 7년간 챔피언스 리그와 토요타컵을 1회 우승했고, 분데스리가 우승 4회, 독일컵(DFB Pokal) 우승 3회, 그리고 리그 컵 우승 1회를 차지하는 등 화려한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 기간동안 총 210회 출장해 10골을 넣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잉글랜드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39경기에 출장했다.
Did you know?
현재 런던 곳곳에 220장의 하그리브스 포스터가 붙어있다. 이는 독일 정부 관광청, 에어 베를린(베를린 항공), 루프트 한자(독일 최대의 항공사), 도이치 반(독일 철도청), 그리고 독일 이민성에서 벌이고 있는 휴가철 독일 관광 캠페인의 홍보를 위한 것이다.
이 포스터에서 하그리브스는 "나는 독일의 팬입니다 - 독일과의 경기가 없을 때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독일 관광켐페인을 위한 광고에 가장 적절한 모델이다.
런던 주재 독일 정부 관광청장은 하그리브스가 표지 모델로 선정된 데 대해 "하그리브스는 단지 독일에서 가장 대중적인 관심을 일으키는 유명한 영국인이 아니라 뮌헨에서 성장한 국제적인 생활 배경을 가진 젊은이이다. 또한 그는 독일의 현시대상을 표방할 뿐만 아니라 폭넓은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출처 골닷컴>
첫댓글 하그리..대단하구나..아..하그리 눈이..너무 이뻐..~_~
아 나의 뽀그리브스.... 이번 시즌 활약 기대하겠어.....
아 나 뽀그리브스라는 말 왜이렇게 웃기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잉글랜드에서 한번도 살았던적이 없었다는건 정말 몰랐네요.....~ 신기해라..
삭제된 댓글 입니다.
캐나다 억양이라고 해야하나..암튼 미국식 억양에 가깝더라구요...(발락선수를 마이클 발락이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있더군요..)
아 이런 자료 정말 고맙다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