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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강해 제 18장 갈멜 산상의 엘리야
엘리야가 긴 침묵을 깨고 다시 이스라엘 역사의 전면에 나선 후 갈멜 산상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정면 대결을 벌인다. 엘리야의 사르밧에서의 3년은 이 대결을 위한 인내의 시간이었다. 대결의 주재는 이스라엘이 당하고 있는 국가적 재난의 원인을 가리는 데에 있는데 이 가뭄이 이스라엘 신이 진노한 결과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으나 그 신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쟁점이 된 것이다. 엘리야의 입장에서 볼 때 가뭄은 이스라엘을 질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이지만 바알 선지자의 입장에서는 정반대로 바알의 경쟁자 여호와와 그의 추종자들을 제거하지 못한 데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뭄 기간 동안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고 박해했던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서로를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는 것이며, 두 입장의 대립은 이제 결판을 내어야 할 시국에 이르렀던 것이다.
1. 엘리야와 오바댜 (18:1-15절)
마침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고 엘리야가 일어나 아합을 만나러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아합은 마침 물을 찾으러 나섰고, 궁내 대신 오바댜와 동행하다가 각각 다른 길로 갔으며 엘리야는 오바댜를 만나 아합에게 자신의 동정을 전하게 했다. 오바댜는 아합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그의 신실한 여호와 신앙은 놀랍다. 박해가 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여호와 선지자들을 피신시켰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틀림없이 보호하신다는 믿음을 가졌으며, 어려서부터 돈독한 신앙 훈련을 쌓았던 것이다.
‘많은 날이 지나고 제 삼 년’이라는 표현은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 체류한지 제 삼 년이 되는 때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만 삼 년이 되었다는 말은 아니고 삼 년이 되어가는 시점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이스라엘로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고 했는데 이 말의 뜻은 ‘가서 만나라’는 의미이다. 이는 가뭄 종식의 예언을 위해 다시 아합과 만나도록 명령 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엘리야가 가뭄 종식의 선포를 해야만 자연의 고삐를 잡고 계시는 분은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 가뭄 종식을 선포하는 날에 비를 지면에 내리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말씀을 들고 아합에게 가는 것이다. 그때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했다고 하는 것은 바알 신을 섬기는 중심지인 사마리아가 기근이 가장 심했다는 것이다. ‘심하였더라’라는 말 ‘하자크’는 ‘아주 맹렬했다.’는 말로 최악의 가뭄이 사마리아를 덮쳤다는 것이다.
아합은 마지막 물 한 방울이라도 찾기 위하여 왕궁을 나섰는데 그의 궁내대신 오바댜를 불러 동행하였다. ‘오바댜’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를 섬기다.’라는 의미로서 이 이름 속에 담긴 ‘아바드’는 ‘노예처럼, 종처럼 섬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실상 오바댜는 그의 이름 그대로 지극히 열심히 여호와를 섬긴 인물이다. 바알 숭배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아합 궁중의 고위직에 있었던 자임에도 그가 여호와의 선지자 일백 인을 숨겨주었다는 사실은 그의 신앙의 순수성과 열정을 짐작하게 한다. ‘지극히’라는 말은 하나님을 섬기는 바람직한 태도를 나타내는 말로서 구약에서 300회 정도 사용되었다.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기서 ‘다하고’라는 말과 동일한 단어이다.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였는데 ‘경외하다’라는 말 ‘야레’는 하나님을 접해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체험적 신앙에서 나오는 ‘두려움’ ‘놀라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오바댜는 이미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고 체험했던 것이다.
엘리야가 가뭄을 선포한 이후에 이세벨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다 멸했는데 그 이유는 엘리야의 정면 도전에 대한 보복 조치였으며, 가뭄이 시작되자 그 원인을 여호와 선지자들의 저주 탓으로 돌리려는 정치적 계산 때문이었다. 당시 사마리아 주변에 있는 갈멜 산에는 석회석 동굴이 약 2000개나 있었으며, 오바댜는 이 동굴 어디에 선지자 일백 명을 숨겼고 날마다 떡과 물을 가져다가 먹였다. 오바댜가 선지자들을 '가졌다‘라는 말 ’라카흐‘는 ’움켜쥐다.‘ ’채어가다‘라는 의미로 대단히 역동적인 말이다. 즉 이세벨의 마수가 시시각각 닥쳐오는 절박한 시기에 재빠르게 선지자들을 빼돌리는 오바댜의 스릴 있는 움직임을 연상시켜 준다. 요즈음 말로 표현하면 순식간에 빼돌렸다는 것이다.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던 아합은 자신이 물 근원을 찾기 위하여 길을 떠난다. 그런데 아합이 물 근원을 찾으려는 궁극적 목적은 사람을 살리려는 것이 아니라 혹시 꼴을 얻어서 자기의 말과 노새의 굶주림을 면하고 짐승들을 다 잃지 않으려는 궁여지책이었던 것이다. 왕으로서 아합의 일차적 관심은 백성들의 기갈이나 굶주림이 아니었다. 그의 권력 기반은 말과 노새가 상징하듯이 군사력과 상업에 있었지 여호와로부터 위탁받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안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합은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저 길로 갔는데 아합이 왕의 신분으로 호위 군사나 수행원도 없이 홀로 탐색에 나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오바댜가 길을 갈 때에 엘리야를 만나게 되었다. 오바댜와 엘리야가 이전부터 교감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서로의 소문을 듣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오바댜는 엘리야의 특이한 복장을 보고 쉽게 식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바댜는 그 자리에서 땅에 엎드려 엘리야에게 절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언행은 그가 엘리야에 대하여 품고 있는 존경심의 정도를 엿볼 수 있다. 오바댜는 당대의 고관이지만 엘리야는 일개 야인에 불과했는데 그러나 여호와 신앙인인 오바댜가 여호와의 선지자이며 신앙의 전사인 엘리야를 존경하는 것은 타당한 일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엘리야가 행한 권능은 놀라운 것이었기 때문에 엘리야에게 선지자의 최고의 예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 주 엘리야여’라고 부른 것이다.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고 하는 말을 원문을 보면 단순히 ‘힌네 엘리야후’이다. ‘보라 엘리야’ 라는 의미로 아주 극적이고 생생한 표현이다. 당시에 엘리야는 전국 수배령이 내려져 있었기 때문에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것은 아합에게 박력 있는 정면 도전장을 낸 것이나 다름이 없다. 엘리야는 오바댜에게 ‘네 주 아합에게 가서 엘리야가 여기 있다.’고 전하라고 했는데, 오바댜는 엘리야에게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아합의 손에 넘겨 죽이려고 하는가를 물었다. 즉 자기가 아합에게 엘리야를 만났다고 하는 순간 엘리야가 다른 곳으로 사라진다면 자신의 생명이 위태롭게 된다는 것이다. 오바댜는 사르밧 과부와 동일한 맹세를 한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러나 이는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하지 아니했던 과부의 맹세와는 그 성질이 전혀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오바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합은 그동안 수많은 사람을 다른 나라나 족속에게 보내어 엘리야를 찾았다. 그 이유는 가뭄의 근거가 엘리야의 저주 때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 저주를 해소하려면 저주를 선포한 사람을 찾아 주술적으로 이를 해소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나라나 민족에게서 엘리야를 찾지 못했고 혹시라도 그들이 엘리야를 숨긴 사실을 은폐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로 맹세를 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바댜가 아합을 찾아가서 ‘엘리야가 여기 있다.’고 할 때에 여호와의 영이 돌연히 신비한 방법으로 엘리야를 다른 곳으로 이끌어 가실 것은 명백한 일이며, 그렇게 되면 자신은 아합에게 거짓말을 한 죄로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오바댜는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자신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하였다. 실제로 오바댜는 한 인간의 개체가 거의 완성되어 가는 시점부터 여호와를 향한 신앙 훈련을 받았고 따라서 그의 신앙은 안정되었으며 확고한 신앙을 가졌던 것이다. 그 신앙의 힘이 그를 선지자들을 숨기게 하고 보살피게 한 것이었다. 오바댜는 엘리야에게 이 사실을 털어 놓고 자신의 신앙의 순수성을 알아 달라고 했다. 그러나 오바댜는 자신의 신앙을 자랑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을 피난시키고 숨긴 것은 극비밀에 붙여진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자신은 엘리야와 같은 여호와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며, 엘리야는 여호와의 계시로 말미암아 그의 선행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합에게 가서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고 보고하는 것은 그것은 아합의 손으로 자기를 죽이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바댜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이기는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아직도 모르는 영적 어린아이와 같은 자였던 것이다. 오바댜의 두려움과 근심의 말을 들은 엘리야는 그를 안심시키는 말을 해 주었다. 엘리야는 다시 한 번 맹세는 하는데 그 맹세는 자신이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하는 맹세였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말은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군대를 지휘하시는 여호와를 지칭했지만 후에는 점차 천군 천사를 거느리고 다스리시는 여호와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말의 핵심은 여호와께서 온 세계를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그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것이다. 엘리야는 ‘내가 오늘 아합에게 보이리라.’고 하였다. ‘오늘’이라는 말 역시 오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합을 꼭 만날 것이라는 그의 결의에 찬 표현인 것이다.
2. 엘리야와 아합의 상면 (18:16-19절)
오바댜로부터 엘리야의 전갈을 받은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던 중 두 사람이 길에서 상면하게 된다. 아합은 엘리야를 보자 곧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결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맞서는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가뭄이 아합과 그의 집안의 죄악이라고 반박한다. 이처럼 예봉을 피하기 어려운 두 사람의 설전은 그 해답을 얻기 위하여 결국 갈멜 산 대결을 통한 실제적 승리를 요구했던 것이다.
아합은 물의 근원을 찾고 짐승을 위한 꼴을 얻는 일을 포기하고 엘리야를 만나려고 걸음을 돌렸다. 이는 그에게 있어 엘리야가 차지하는 비중이 큼을 알 수 있다. 아합은 엘리야를 향하여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했는데 ‘괴롭게 하다’라는 말 ‘아카르’는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아합은 엘리야를 나라 전체에 해악을 끼치는 국적으로 몰아붙이기 위하여 이러한 언행을 했던 것이다. 사실 아합 편의 논리로 본다면 우상 숭배를 장려하고 바알을 섬기는 일에 엘리야는 국정을 어지럽히는 훼방꾼이었다. 또한 이스라엘을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은 가뭄은 그의 저주 때문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합의 눈에 엘리야는 가시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엘리야는 아합의 비난에 ‘아카르’라는 동일한 말을 사용하여 힐난한다. 즉 가뭄이라는 국가적 재앙에 대한 책임은 아합과 그의 왕조라는 것이다. ‘당신의 아비의 집’이라는 말은 ‘오므리 왕조’를 가리키는데 아합의 부친 오므리는 우상 숭배 정책을 폈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켰다. 따라서 엘리야는 아합 개인을 비난하는데 그치지 않고 당신의 아버지의 집까지 공격했던 것이다. 거기에다 아합은 바알까지 섬겼기 때문에 더욱 악한 짓을 했던 것이다.
‘그런즉’이라는 말은 지금 서로를 비난하고 있으니 기필코 시비를 가리자는 것이다. 이는 대단한 도전으로 아세라 상에서 먹은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 선지자 사백 병을 갈멜 산에 모아 엘리야와 대결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갈멜’은 ‘정원’ 이라는 의미로 각종 식물이 무성하고 석회 동굴이 많았으며, 이 산이 여호와 종교와 바알 종교의 대결 장소로 선택된 것은 이스라엘과 두로의 중간에 위치한 산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산은 여호와 신앙인은 물론 바알 종교인들에게도 특별한 장소였던 것이다.
3. 갈멜 산상의 대결 (18:20-46절)
엘리야가 홀로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을 벌렸다. 다수를 상대하면서도 도리어 여유가 있고, 자신에 넘치는 엘리야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춤을 추며 광란하는 바알 선지자들의 소란스러움은 그럴수록 침묵하는 바알의 허구성을 부각시켜 준다. 이에 반해 인위적 조작이 불가능하도록 모든 조치를 다한 제단을 말끔히 불살라버리는 여호와의 응답의 불은 가히 압권적이다. 이로써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진정 이스라엘의 참 신임을 깨닫고 바알 선지자들을 모조리 처단한다. 마침내 3년 반의 가뭄을 끝나고 큰 비가 내렸다.
당시에는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들이 전국에 산재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므로 아합이 저들을 불러 모이기 위하여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기별해야 했다. 그렇다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이전에 여호와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역할을 모두 장악했던 것이다. 엘리야는 모든 백성에게 나아가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호수아 당시에 백성들은 ‘우리가 여호와만 섬기겠다고.’고 대답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이들은 바알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겼으며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다.’는 말은 엘리야 한 사람뿐이라는 말이 아니라 지금 선지자로서 활동하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말이며 자신이 홀로 바알 선지자와 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알의 선지자는 450명이라.’는 말 역시 의견이 분분하나 아합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갈멘 산 대결에 참석한 바알의 선지자는 450명뿐이라는 것이다.
엘리야는 참 신을 가리는 방법으로 ‘희생 번제’를 제의했는데 이는 모두에게 합리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여졌다. 즉 그 방법은 송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와서 각각 각을 뜨고 제단 위에 놓고 쌍방이 인위적인 불은 붙이지 말고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부를 때에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이스라엘의 신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백성들의 반응은 ‘그 말이 옳다.’는 것이었다. 바알은 자연을 지배하는 신이자 동시에 태양과 불의 신이었다. 그러므로 불로 응답하는 일은 바알이 참 신이라면 그의 전문 분야인 것이다. 그러나 바알은 끝내 침묵하고 말았다. 이처럼 그 신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를 공격하여 허구성을 드러내는 방식은 일찍이 모세가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림으로써 애굽의 거짓 신들의 정체를 폭로하여 저들을 무색하게 만들었던 것과 동일하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에게 우선권을 양보하고 저들이 숫자가 많으니 저들의 신의 이름을 먼저 부르되 절대로 불은 붙이지 말라고 하였다. 이로써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신앙으로 확고한 자신감을 나타낸 것이다. 바알 선지자들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저들은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으나 아무 응답이 없었으므로 자신들이 쌓은 제단 주위를 뛰놀았다. 이는 광란의 춤을 추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장시간 곁에서 보고 있던 엘리야가 저들을 향해 조롱을 말을 하였다. 큰 소리로 부르라는 것이며, 저가 신이기 때문에 묵상하고 있는지, 잠깐 외출했는지, 길을 행하는지, 잠이 들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던 것이다. 이는 무소부재하시며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여호와와 크게 비교되는 말이다. 바알 선지자들은 광란의 춤도 모자라서 피가 흐르도록 자해를 가하며 미친 듯이 떠들며 소란을 피웠으나 저녁까지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도 없고 돌아보는 자도 없었다. ‘전혀 없다’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되어 있는 것이다.
엘리야는 이제 백성들을 자기에게 가까이 오게 하였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이제까지 바알 제단 근처에 모여 있던 백성들을 여호와의 제단 주위로 불러 모으기 위함이다.
둘째, 이제부터 시도하려는 모든 행위에 추호도 조작이나 거짓이 없음을 증거하게 하기 위함이다.
엘리야는 백성들을 가까이 부른 후 무너져 있던 제단을 수축했는데 이는 전혀 새로운 제단을 쌓은 것이 아니라 ‘예라페’라는 이 말은 부서졌던 것을 고쳐 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갈멜 산상에는 여호와의 제단이 있었던 것이며 아합과 이세벨이 여호와의 제단을 할고 선지자들을 죽이는 일들을 행했던 것이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한 후 여호수아가 했던 일과 같은 열두 돌을 취하고 제단을 쌓았다.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것으로 비록 남북이 분단되었지만 이스라엘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었음을 엘리야가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라고 했는데 야곱은 이스라엘의 조상이며 그 후손은 혈통적 단일성을 가진 존재들이다.
엘리야는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제단을 쌓았는데 ‘브쉠 여호와’는 ‘여호와의 이름으로’라는 의미이다. 이는 여호와께만 드려지는 제단이라는 의미이다. 단 주위에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줄 만한 도랑을 팠는데 두 세아는 15리터 정도이다. 그러므로 종자 15리터를 부을 만한 도랑을 판 것이다.
제단위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를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통 넷에 물을 떠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붓고 그것을 세 번이나 반복하여 행하였을 때 물이 제단 위에서 흘러 도랑에도 가득 찼다. 엘리야가 율법에도 없는 이러한 행위를 한 것은 인위적인 협작이 없었음을 명백히 하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제물이 물에 흠뻑 젖은 것에 불을 붙이는 것은 오로지 여호와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었다. 물을 네 통에 떠오고 그것을 세 번 반복한 것은 도합 열두 통이 된다. 이는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것이다. 극심한 가뭄 속에 이렇게 많은 물을 어디서 떠온 것일까. 아마도 갈멜 산 옆으로 흐르는 기손 시내에서 길어왔을 것이다. 저녁 소제를 드릴 때에 엘리야가 기도하기를 시작했는데 이때까지 바알 선지자들의 광란은 계속되고 있었다.
엘리야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불렀다. 그가 조상들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를 부르는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여호와는 조상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로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그 결과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전히 여호와 한 분 뿐이시다. 엘리야의 기도는 세 가지 요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다.
둘째, 엘리야 자신은 단지 하나님의 종이라는 고백이다.
셋째, 엘리야 자신의 모든 행위는 오직 주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라는 고백이다.
이 세 가지를 오늘 백성들이 알게 해 달라고 한 것이다. 엘리야는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라고 반복했는데 이는 바알 선지자들의 광란의 기도에 비하면 너무나 짧은 기도이다. 그러나 그의 간명한 기도 속에는 진실 되고 순전한 정력과 굵직한 뚝심이 들어 있다.
이어서 엘리야는 두 가지 내용을 간구한다.
첫째,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해 달라는 것이다.
둘째, 주는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분임을 알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 말은 은총의 회복, 즉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를 회복시켜 달라는 청원이었던 것이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이적의 불을 내려달라고 빌은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은총을 내려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여호와의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까지 다 핥았다. 여호와의 이적의 불은 대개 네 가지 경우에 내린다.
첫째, 당신의 언약을 보증하실 때,
둘째, 하나님께서 친히 현현하실 때,
셋째,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증거하실 때,
넷째, 인간의 제사를 열납하실 때이다.
여호와의 불이 모든 것을 다 태웠다는 것은 여호와의 불이 얼마나 강렬했던 가를 보여 주며, 거기에는 어떤 인위적인 것이 없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불’의 이적을 접한 백성들은 경악과 두려움이 대단했다. 저들은 즉각적으로 땅에 엎드렸으며, 엘리야의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점을 명쾌하게 시인했던 것이다. 바알이 거짓 신이라는 사실이 판명되자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기손 시냇가에서 다 죽였다. 엘리야의 승리는 너무나 완벽하여 바알 선지자들이 한 사람도 항변하지 못했다. 이들은 도망하기에 바빴고 엘리야는 백성들을 동원하여 저들을 모두 잡아들였던 것이다.
대결이 끝나자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기손 시내로부터 갈멜 산으로 올라가서 먹고 마시라고 했다. 아합은 바알 선지자들의 처형 장소에 동참하였고 이제 모든 처형이 끝나자 식사를 하게 한 것이다. 대결의 긴장감 때문에 하루 종일 식사를 하지 못하고 있었던 왕에게 긴장감을 풀어 주고 위로를 한 것이다. 그동안 아합에게 근심이 되었던 것은 가뭄이었다. 그러나 엘리야의 입장에서는 가뭄이란 우상 숭배를 척결하기만 하면 자연히 해결되는 문제로서 이는 다만 하나님의 징계였을 뿐이다. 따라서 우상 숭배자들을 처형한 후에는 가뭄도 끝나리라는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엘리야의 귀에는 지금 큰 비의 소리가 들려왔을 것이다. 그는 믿음의 귀로서 아직 누구도 듣지 못하는 비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아합은 먹고 마셔도 된다는 것이다.
아합을 뒤에 두고 엘리야는 갈멜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자기 얼굴을 무릎 사이에 두고 기도했다. 야고보 기자는 본 절과 관련하여 ‘엘리야가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었다.’고 한 것이다. 사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집을 떠날 때에 하나님은 이미 그에게 비를 지면에 내리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 약속만 믿고 가만히 있은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의 실현을 위하여 다시금 기도했던 것이다. 엘리야가 무릎 사이에 머를 파묻고 기도한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복종을 나타내는 겸손과 간절함이다.
둘째, 외부로부터 오는 시각을 차단하여 깊숙한 내면의 경지로 몰입하기 위함이다.
엘리야는 사환을 지중해 바다를 바라보게 하고 구름이 이는지를 확인하게 했는데 ‘일곱 번’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이며, 승리의 수이기 때문에 엘리야는 기도의 씨름에서 응답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다부진 결의를 나타내었으며 하나님께서 끝내 응답하신다는 완전한 신뢰를 나타낸 것이다. 사환이 일곱 번을 확인했을 때 지중해 위에서 사람의 손바닥 만한 구름이 일어나 것을 보았다. 엘리야는 이미 큰 비가 올 것을 확신하고 아합에게 다시 가서 비에 막히지 않게 마차를 타고 빨리 산을 내려가게 하였다. 손바닥만한 구름에서 엄청난 양의 비를 예상한 엘리야의 확신을 보여 주는 것이다. 기손 강은 갈멜 산 아래를 흐르며 여러 갈래의 시내가 합류하였다. 그러므로 큰 비가 내릴 때에는 기손 강의 범람으로 그 주변 일대의 통행이 금지되었다. 엘리야는 아합을 염려하여 강물에 길이 막히지 전에 빨리 산을 떠나게 한 것이다. 참으로 엘리야는 이스라엘과 왕을 괴롭게 하는 자가 아니라 염려하고 걱정하며 위로하는 자였다.
엘리야의 말을 듣고 큰 비가 올 것을 대비하여 준비하는 동안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렸다. 손바닥만한 구름이 폭우로 변한 것이다. 아합은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갔는데 이스르엘은 솔로몬의 다섯 번째 행정 구역에 속한 곳으로 아합, 아하시야, 요람 당시 왕의 궁궐로 사용했던 곳이다. 아합의 마차가 달릴 때에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했는데 엘리야를 마차보다 더 빨리 달리도록 하나님의 권능이 임했던 것이다. 엘리야는 이스르엘 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성 어귀에 머물렀는데 이는 아합의 반응을 보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아합은 엘리야를 마차에 태우지 않고 홀로 도망하듯이 궁궐로 돌아왔고 성 안에는 악한 왕비 이세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갈멜 산에서 왕궁까지는 약 23km 정도의 거리였는데 엘리야는 시종 아합 왕 앞에서 달린 것이다. 이는 종이기 때문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달린 것이다. 갈멜 산 대결에서 바알 선지자들은 다 죽었고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야만이 승리의 귀환을 한 것이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전달하기 위하여 엘리야는 아합 왕 앞에서 신나게 달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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