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 피는 꽃
신노우
선운사 동백림 앞에 섰다. 세상의 색이 잠시 멎는다.
겨울은 모든 빛을 삼켜버린 계절이다. 나무는 잎을 떨구고, 들판은 숨을 죽이며, 바람은 그 침묵에 매서운 결을 더한다. 그 한가운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붉은 숨결이 살포시 피어난다. 동백꽃이다.
동백은 계절을 거슬러 피어난다. 봄의 향연에도, 여름의 짙은 푸름에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모든 것이 얼어붙고 마음마저 움츠러드는 겨울 끝자락에서, 비로소 자신의 불빛을 세상에 내민다. 그 모습은 오래된 편지 한 장처럼, 깊은 기다림 끝에 도착한 이름처럼, 뜨겁고도 고요하다.
그렇게 동백은 첫 번째로, 나무에서 피어난다.
선운사 동백림의 붉음은 화려하지 않다. 절제된 열정 속에 묵묵한 생이 깃들어 있다. 꽃잎은 두껍고, 빛은 깊다. 바람이 지나도 흔들림이 적다. 그 모습이 마치 한 생을 견뎌낸 이의 얼굴을 닮았다. 웃음과 울음을 모두 품은 눈매처럼, 그 붉음은 단단하고 온순하다.
그러나 동백의 아름다움은 피어 있을 때보다 질 때에 있다. 꽃잎이 흩날리는 대신, 한 송이 통째로 떨어진다. 툭, 하고 땅에 내려앉는 그 순간, 아무 소리도 없다. 그 조용한 낙화의 형상은 마치 자신을 끝까지 지켜낸 자의 마지막 몸짓 같다.
그렇게 동백은 두 번째로, 땅 위에서 다시 피어난다.
떨어진 꽃송이는 죽음이 아니라 완성이다. 흙 위에 붉은 원을 그리며, 또 하나의 생으로 돌아간다. 그 붉음은 피처럼 뜨겁지만, 그 속엔 해탈의 빛이 스며 있다.
선운사 스님들은 오래전 이 숲에 삼천 그루의 동백을 심었다. 부처의 교화권이 미치는 삼천대천세계를 상징하며, 그 씨로 짠 기름은 법당의 등불이 되고, 나머지는 백성의 생활을 도왔다. 동백은 그렇게 빛을 나누며 자신을 비웠다.
동백은 절의 방화수이기도 하다. 사철 푸른 잎이 수분을 품어 불길을 막는다. 불조차 그 앞에서는 잠시 숨을 고른다. 그것은 생명으로 지켜낸 불심(佛心)의 모습이다. 불타는 세상 속에서도 자신을 태우지 않는 꽃. 선운사 동백림은 그 믿음을 오랜 세월 품어왔다.
봄이 오면 이 숲의 붉음은 절정을 맞는다. 그해의 날씨에 따라 이르거나 늦지만, 대체로 삼월 말에서 사월 중순 사이, 동박새가 날아와 꽃 속으로 머리를 들이민다. 향기 없는 꽃에 새를 부르는 것은 오로지 색이다. 동박새는 꿀을 먹으며 수정의 일을 돕는다. 그 덕분에 동백은 다시 세상에 생명을 나눈다. 그리고 수정이 끝난 꽃만이 통째로 떨어진다.
다른 꽃을 위한 배려, 그것이 동백의 붉은 윤리다.
그리하여 동백은 마지막으로, 사람의 마음속에서 세 번째로 피어난다.
나무에서 한 번, 땅 위에서 한 번, 그리고 인간의 내면에서 다시 한번.
나는 겨울 숲에서 동백 앞에 서면, 언제나 한 가지 물음을 받는다.
“당신은 어떤 계절에도 자신의 붉음을 잃지 않고 설 수 있는가.”
그 물음 앞에서 나는 늘 잠시 숨을 고른다. 삶의 겨울은 언제였던가. 나는 그때 무엇을 지키려 애썼던가. 그리고 지금, 여전히 나만의 붉음을 간직하고 있는가.
선운사의 동백은 오늘도 고요히 선다.
그 붉음은 꽃의 색이 아니라, 견디는 마음의 빛이다.
모든 빛이 꺼진 듯한 세상에서도, 자신의 빛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동백이 세 번 피며 전해주는 말 없는 시(詩)다.
첫댓글 나무에서 피고, 땅에서, 사람의 마음에서...
이장희 작가님,
예,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완성하기까지 제법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자료를 수집하는 데에도 정성을 기울였고,
현장을 몇 차례 찾아가 살펴보며 퇴고를 거듭한 끝에 완성한 작품입니다.^^
자신의 낙화로 다음 세대의 꽃을 기약하는 동백.
동백이 붉은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정충양 산행대장님,
내용을 알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꼴찌 했네요
장수영 자문위원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글
가슴에 와 닿아요
사람의 마음에서도 피는꽃
감사합니다.^^
글의 여운이 더위도 식힙니다.
선운사 500년 된 동백이 삼천그루인 줄 자문님 덕분에 알았습니다. 수천 그루인 줄은 알았는데
역시 박사님.
ㅎㅎㅎ, 공부 좀 했습니다.^^
저도 오래전에 동백을 비련의 꽃이라는 작품을 썼었습니다.
저 작품보다 실감납니다.
예, 교수님.
시간을 두고 공을 들여 한 작품이라도
제대로 써 보려고 애써 보았습니다만,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동백은 그렇게 자신을 나누며 자신을 비웠다.
거듭 읽습니다. 선운사 동백의 깊은 사면
좋은 문장으로 읽게 해주시어 감사합니다.
역시 잘 쓰십니다.
감사합니다.
더위에 건강 관리 잘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