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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불륜남에게 철퇴 대신 ‘도깨비방망이’
간통 현장 보고도 노래와 춤, 이방인에 대한 반감 녹여
악귀 물리치는 제웅, 신라에 꼭 필요한 존재로 자리매김
▎처용무는 처용의 가면을 쓰고 추는 무용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 궁궐에서 열렸던 일종의 의식이었다.
"서울 밝은 달에 밤새 노닐다가 / 들어와 자리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의 것인가. / 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긴 걸 어찌하리.”([삼국유사] 기이 ‘처용량과 망해사’)
처용은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방 밖으로 나왔다. 아내가 외간남자와 자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표정이다. 달밤에 훨훨 소맷자락 휘날리며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남자. 나지막이 읊조리는 향가에는 구슬픈 한숨이 깔렸었다. 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긴 걸 어찌하리? 와락 달려들어 흠씬 두들겨 패도 모자랄 판에 못났다.
그런데 불륜남이 별안간 처용에게로 와서 무릎을 꿇었다. 놀랍게도 그는 자기가 역신(疫神)이라고 했다. 역병을 퍼뜨리는 귀신이라는 것이다. 처용의 아내가 워낙 미인이라 평소 흠모하던 중에 사람으로 변신해 몰래 동침하게 됐단다. 갑자기 정체를 밝히면서 간통의 내막을 실토한 것이다. 어쩐지 ‘막장 드라마’ 보는 것 같다.
뜬금없는 고백은 1000년의 맹세로 이어졌다. “내가 공의 아내를 탐했는데도 화를 내지 않으시니 감격스럽고 아름다운 일이오. 오늘 이후로는 공의 모습을 그린 것만 봐도 그 문에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하겠소.” 이 이야기를 들은 신라 사람들은 너도나도 처용의 얼굴을 그려 대문에 붙였다.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아들이기 위해서였다.
효험이 있든 없든 이야기는 재미있었고 노래와 춤은 특별했다. 그것은 일종의 제의(祭儀)였고, 그게 먹히는 시대였다. 처용은 신라에 꼭 필요한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신라 사람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어쩌면 계획적으로 벌인 일인지도 모르겠다.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것이 이방인에게는 절실한 숙제였을 테니.
그는 어디서 온 누구인가
▎1145(인종 23)년 김부식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사기].
879년 신라 헌강왕이 나라 동쪽의 주군(州郡)을 둘러봤는데 이상한 사람 넷이 나타나 임금 앞에서 노래하고 춤췄다. 그들은 생김새가 기이하고 옷차림도 해괴했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어 ‘산과 바다의 정령’이라고 여겼다([삼국사기] 신라본기 ‘헌강왕 5년’).
나라에서는 이 만남을 불교식으로 포장해 백성들에게 전파했다. 헌강왕이 개운포(울산 울주)에 행차했다가 물가에서 쉬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몰려와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었다. 임금이 어찌 된 일인지 물으니 일관(日官)이 길흉을 점쳐보고 아뢰었다. “이는 동해 용이 부린 변괴이니 선한 업을 쌓아 풀어야 합니다.” 헌강왕은 담당 관리에게 명해 근처에 사찰을 짓도록 했다. 그러자 곧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졌다. ‘구름이 걷힌 포구’라는 뜻을 가진 개운포(開雲浦)의 지명 유래다.
이때 동해 용이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임금의 수레 앞에 나타났다. 헌강왕이 쉰 곳이 물가인데 개운포 근처 태화강 상류 지역에는 절벽과 바위가 장관을 이룬 곳이 있다. 예로부터 기암괴석을 용의 형상이라고 했으므로 이 경관에 빗대 동해 용과 일곱 아들을 지어냈을 것이다(실제로 울주군 범서면 선바위 일대를 ‘백룡담’이라고 부른다).
헌강왕은 동해 용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를 데리고 서라벌에 돌아왔다. 그는 스스로 처용(處容)이라 일컬었다. 임금이 처용을 각별히 총애해 아내로 삼으라고 미녀와 짝을 지어주는가 하면 급간(級干)이라는 벼슬을 내려 정사를 보필하게 했다. 급간은 신라 17관 등 중 9번째에 해당하며 진골이나 6두품이 맡는 자리였다. 철저한 골품 사회인 신라에서 출신이 불분명한 자가 차지할 벼슬이 아니었다. 헌강왕이 얼마나 처용을 아꼈는지 알 수 있다. 왕은 그의 마음을 붙들어 오래 곁에 두려고 했다([삼국유사] 기이 ‘처 용량과 망해사’).
처용은 과연 어디서 온 자일까? 우선 그의 생김새를 살펴보자. 고려 문신 이재현은 시적으로 표현했다. “조개 같은 이와 붉은 얼굴로 달밤에 노래하며(具齒頳顔歌夜月) / 솔개처럼 으쓱한 어깨에 붉은 소매로 봄바람에 춤을 춘다(鳶肩紫袖舞春風).”(성현, [용재총화]) 서역 인의 모습이 살짝 감지된다. 고려가요의 묘사는 더 구체적이다. “넓은 이마, 무성한 눈썹, 우묵한 코, 삐죽 나온 턱” 등 전형적인 서역인의 얼굴이다([악학궤범] ‘처용가’).
여기에 그가 나타난 곳이 개운포임을 고려하면 페르시아만에서 신라까지 뻗친 해상교역과도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이미 1세기에 유럽·아라비아·인도·벵골만·동남아시아·중국을 잇는 해상로가 개통돼 교역이 이뤄지고 있었다. 중국 [후한서]에 “대진국왕(大秦國王) 안돈(安敦)이 상아를 바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로마 황제 안토니우스가 보낸 상아가 바닷 길로 중국에 들어온 것이다.
동서 해상로는 비잔틴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오랜 전쟁으로 실크로드가 쇠퇴하자 더욱 활성화됐다. 상인들은 바닷길에 주목하고 아라비아를 경유해 물품을 운반했다. 메카 등 홍해와 가까운 도시들이 중계 무역의 거점으로 성장했다. 7세기에 이곳에서 이슬람 제국이 일어서며 아랍 상인들이 약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8세기 후반에 바그다드를 본거지로 삼고 페르시아만에서 출발해 중국 남동 연안에 이르는 바닷길을 열었다.
아랍 상인들의 범선 다우선은 삼각돛을 갖춰 역풍을 헤치고 나아갈 수 있었다. 큰 배의 적재량은 180t 정도였는데 이는 낙타 600마리가 실어나르는 것과 맞먹었다. 향료·카펫·유리·상아·대모 등 중동 특산품과 이 지역의 수준 높은 과학 문명이 중국으로 건너갔다. 아랍인들의 중국 진출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광주(廣州)·복수·양주 등 연안 도시에 아랍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자연히 현지 신라방에 정착한 신라인들과의 접촉도 많아졌다. 아랍과 신라가 중국 당나라에서 운명적으로 조우한 것이다.
“중국의 맞은편에 신라가 있다. 산이 많고 여러 왕이 지배하는 나라다. 금이 많이 생산되며 기후와 환경이 좋아 (아랍인이) 살아보면 떠날 줄을 모른다.” 중동 지역에 신라를 소개한 기록이 845년 이분쿠르다드비가 편찬한 지리서 [왕국과 도로 총람]에 나온다. 이 책에는 당대의 바닷길과 교역품도 자세히 실려있다.
봄에 페르시아만에서 남서 계절풍을 이용해 출항한 다우선은 인도 서부, 스리랑카, 동남아시아를 거쳐 가을 무렵 중국 광주에 도착한다. 여기서 북상한 배는 항주를 찍고 구로시오 해류를 탄다. 긴 항해는 흑산도 근해에서 우회해 대한해협을 거쳐 포구로 들어오면 마침표를 찍는다. 아랍 상인들은 유향·몰약·장미수·안식향 등 고급 향료로 신라 사람들을 유혹했다. 특히 유향은 불교 의식에 쓰이는 훈향이라 ‘불국토’ 신라에서 인기가 높았다. 돌아갈 때는 인삼·비단·검·말안장 등을 가지고 갔다.
향료 팔러 온 아랍인이었을 듯
▎아랍어로 쓰인 설화집 [천일야화 (아라비안나이트 )], 영국 화가 아서 보이드 휴턴(1836~75)의 목판화 작품이다.
처용의 생김새와 해상교역 상황을 놓고 보면 그는 향료를 팔러온 아랍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개운포는 아랍 상선이 들어오는 포구였을 것이다. 처용 일행이 항해를 무사히 마친 것을 자축하며 포구 근처에서 노래 부르고 춤추다가 순행 중인 임금의 눈에 띄었을 수도 있다. 기이한 생김새와 해괴한 옷차림으로 이색 가무를 펼치니 참으로 볼만한 구경거리가 아닌가. 그들을 지칭한 ‘산과 바다의 정령’은 가무의 제목이거나 향료 브랜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처용은 왜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 정착했을까? 우선 헌강왕이 아내와 벼슬을 내려주며 호의를 베푸니 한번 살아보자는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기후와 환경이 좋아 살아보면 떠날 줄 모른다”는 앞의 기록도 참고할 만하다.
신라에 들어온 시기 또한 의미심장하다. 신라 왕과 만난 879년은 당나라에서 황소의 난(875~884년)이 절정으로 치닫던 때였다. 전란 중에 많은 외국인이 제대로 보호를 못 받고 약탈의 표적이 됐다. 만약 처용이 사업상 중국에 거류하고 있었다면 신라로 피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었다. 신라에 정착한 처용은 일약 유명인사로 떠올랐을 것이다. 사람에게 명성이 생기면 보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게다가 임금이 총애하는 인물 아닌가. 난다 긴다 하는 귀족들이 그를 불렀다.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연회를 즐겼다. 처용이 “서울 밝은 달에 밤새 노닐다가” 늦게 귀가한 이유다. 과연 신라는 살기 좋은 곳이었다. 경주에서 동해안까지 집과 담이 이어져 있고, 풍악과 노래가 길에서 끊이지 않았다([삼국유사] 기이 ‘처용랑과 망해사’).
처용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미녀 아내를 얻고 높은 벼슬에 올랐다. 겉보기엔 남 부러울 것 없는 삶이었다. 하지만 속내는 달랐을 것이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자를 임금이 너무 우대한다는 불만이 커졌다. 앞에서는 웃는 낯으로 환대하지만 돌아서면 깔보고 멸시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이방인의 비애다. 외부인이 특정 집단에 들어가려면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다. 자기가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처용은 역신, 곧 역병 귀신을 물리치는 데서 존재 이유를 찾았다.
이와 비슷한 예가 300년 전에도 있었다. 신라 진지왕은 정치가 어지럽고 음란하다는 죄목으로 쫓겨나 죽었다(579년). 2년 후 그가 생전에 탐냈던 민가 여인 도화녀가 남편을 잃자 진지왕의 귀신이 나타나 관계를 맺고 비형을 낳았다. 비형이 자라자 귀신들이 무서워하며 도망쳤다. 이에 사람들이 노래했다. “성스러운 임금의 넋이 아들을 낳았으니 / 비형랑의 집이 여기로세. / 날뛰는 온갖 귀신들이여 / 이곳에는 함부로 머물지 말라.” 민간에서는 그 가사를 써 붙여 귀신을 쫓았다([삼국유사] 기이 ‘도화녀와 비형랑’).
이 일화는 신라 사회에서 이단적인 존재를 어떻게 다뤘는지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비형은 진평왕이 거둬 궁중에서 길렀는데 밤만 되면 어딘가로 사라졌다. 왕이 날랜 군사들을 붙여 지켜보니 매일 월성을 넘어 서쪽 황천 언덕에서 귀신들을 거느리고 놀았다. 비형과 귀신 무리는 여러 절의 새벽 종소리를 듣고서야 흩어졌다.
보고를 받은 진평왕은 비형을 시켜 귀신들에게 임무를 맡겼다. 신원사 북쪽 시내에 다리를 놓으라는 것이었다. 귀신들은 왕명을 받들어 돌을 다듬고 하룻밤 사이에 다리를 놔줬다. 사람들이 그 다리를 ‘귀교(鬼橋)’라고 불렀다. 귀신들의 능력을 본 왕은 그 가운데 정치를 도울 만한 자가 있으면 천거해 달라고 했다. 비형은 길달이라는 자를 데려왔는데 과연 충직하여 진평왕의 신임을 얻었다.
이단적 존재로 돌아가 죽음 당한 길달
▎경주 안압지의 야경, 연못 위에 반사된 누각이 마치 두 개인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이벌찬 임종에게 자식이 없자 임금은 길달을 아들로 삼게 했다. 임종은 양아들을 시험했다. 흥륜사 남쪽에 누각 문을 지으라고 한 것이다. 길달은 문을 만들고 매일 밤 그 위에서 잤다. 어느 날 그가 여우로 둔갑해 달아나자 비형은 귀신을 시켜 잡아 죽였다. 귀신들은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서 도망쳤다.
비형은 귀신 진지왕과 인간 도화녀 사이에서 났다. 그는 인간이면서 귀신이었고, 왕족이면서 평민이었다. 인간과 귀신의 중간자, 도깨비였다. 이것에도 저것에도,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않는 이방인이었다. 실제로 비형은 도깨비의 원형인 두두리(豆豆里)의 시초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서라벌 남쪽 왕가수(王家藪)라는 숲에서 두두리를 제사 지내고 성대하게 섬겼다([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비형의 무리도 도깨비, 곧 이방인이었다. 그들도 체제에 속하지 못하는 중간자였을 것이다. 비형처럼 지배층과 백성 사이에서 난 서자들이었을 수도 있고, 쫓겨나 죽은 진지왕의 추종자들이었을 수도 있다. 여러 절의 새벽종 소리에 흩어진 것으로 보아 불교와 대척점에 선 토속신, 예컨대 두두리를 섬겼는지도 모르겠다. 이방인들이 신라 체제에 속하려면 통과의례를 거쳐야 했다.
설화에서 도깨비는 방망이를 휘두르며 신통한 능력을 발휘한다. 비형 무리는 진평왕의 명을 받들어 신원사 북쪽 시내에 다리를 놓았다. 선덕여왕 때도 두두리들이 영묘사 못을 메워 불전을 세웠다고 한다. 그것도 ‘하룻밤 사이’라고 할 만큼 빨리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방인들이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으려면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그래서 다리를 놓고 절을 짓는 능력을 보여줬다. 이도 저도 아닌 중간자의 서러움을 씻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도깨비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러나 통과의례는 만만치 않았다. 국왕이 허락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귀족 세력의 인준도 받아야 한다. 진평왕은 비형의 무리 가운데 길달이라는 자를 발탁했다. 이는 이방인이라도 능력이 있으면 쓰겠다는 신호였다. 그것은 임금들이 곧잘 쓰는 정치적인 책략이기도 했다. 귀족 세력을 견제하려고 신진 세력을 등용하는 것이다. 귀족 세력은 반발했다. 길달은 귀족 대표 격인 이벌찬 임종에게 시험을 받아야 했다. 흥륜사 남쪽에 누각 문을 세우라는 요구는 길달의 허를 찌르는 임종의 안배였을 것이다.
만약 그가 불교와 대척점에 선 토속신을 섬겼다면 정신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흥륜사는 이차돈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절로 신라 불교를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그곳에 누각 문을 짓는다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거스르고 불교의 파수꾼으로 변신한다는 뜻이었다. 두두리 숭배자들이 볼 때 그것은 배신이자 변절 행위였다.
결국 길달은 통과의례를 포기하고 여우, 곧 이단적인 존재로 돌아갔다. 비형은 고심 끝에 그를 잡아 죽였다. 이미 진평왕의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이상 길달을 제거해 충성심을 증명하는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 때문에 도깨비 무리 가운데 상당수가 돌아섰다. 비형은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도깨비들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회유가 통하지 않으니 공포로 이방인들을 다스린 것이다.
'아라비안나이트'의 마신(魔神)을 소환하다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출토된 목간. 그 내용이 통일신라시대 향가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렇다면 300년 후 처용에게는 어떤 통과의례를 줬을까? 그것은 아내의 간통이었다. 헌강왕은 처용을 신라에 잡아두려고 미녀를 골라 아내로 삼아줬다. 사실 외지인을 정착시키는 데 이만큼 좋은 방법도 없다. 결혼하고 애 키우다 보면 세월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르는 게 인생이다. 바로 그 아내가 외간남자와 바람난 것이다. 이거 큰일이다. 밤에 싸돌아다니느라 임금이 맺어준 상대를 잘 간수하지 못했으니 나라님 뵐 면목이 없다. 또 관직에 앉은 자로서 집안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으니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게 뻔하다.
사실 아내의 간통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앞뒤 정황상 그는 이슬람 세계에서 온 아랍 상인 아닌가. 당시 중동에서는 남자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아내를 얻을 수 있었다. 무슬림이든, 기독교인이든, 아프리카인이든, 유럽인이든, 검은 머리든, 곱슬머리든, 금발이든 마음대로 결혼할 수 있었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아내를 4명까지만 두라고 했지만, 칼리프(이슬람 교단의 지배자)·고관·부자의 하렘(harem)에는 수백 명의 여자가 득실댔다. 아내와 첩과 여성 노예들이었다. 남편들에게 잊힌 여자들은 불륜으로 시름을 달랬다. 간통 사건이 워낙 흔했다.
무함마드는 일찍이 간통죄에 대한 형벌을 정해뒀다. 남녀 모두 채찍 100대로 다스린다고 못 박았다. 하지만 예언자도 총애하던 아내 아이샤가 간통 혐의를 받자, 존경할 만한 여성은 예외로 한다는 조항을 만들어 처벌을 모면케 했다. 무슬림들은 남성 노예를 거세해 하렘의 파수꾼으로 삼았지만, 간통을 근절하지 못했다. 거세 노예들은 아내들에게 갖가지 정보와 기회를 제공하며 오히려 하렘에 군림했다. 도구를 사용해 여자들을 위로하고 파수꾼 급료와 봉사의 대가를 이중으로 챙겼다(파울 무료샤워, [세계풍속사]).
처용에게 아내의 간통은 소유물이 잠시 타인의 손을 타는 것으로 비쳤다. 소소하게 “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긴 걸 어찌하리”라고 푸념할 정도의 일이었다. 애초 아내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랍인에게 여성은 성적으로 불성실하며 신뢰할 수 없는 존재였다. [아라비안나이트]만 해도 왕비가 노예들과 간통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왕이 매일 같이 잔 처녀들을 죽이는 데서 출발한다. 아름답고 영리한 처녀 셰에라자드가 1001일 동안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서야 왕의 믿음이 회복됐다.
더구나 처용은 밤마실 다니느라 아내와 데면데면했다. 애초 믿음이 없는데 정을 쌓지도 못한 것이다. “들어와 자리 보니 다리가 넷”이어도 무덤덤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은 따로 있었다. 아내의 부적절한 행위로 인해 자신과 맺어준 임금의 체면이 구겨질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집안도 다스리지 못하는 자로 낙인찍히고 조롱당할 것이다. 신라에 정착하고 싶었는데 이러다간 망신살만 뻗치게 생겼다. 이 상황을 반전시킬 묘안이 필요했다.
처용은 이방인의 ‘도깨비방망이’를 쓰기로 했다. 그가 잘하는 것, 노래와 춤이었다. 그가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서 속된 간통 현장은 성스러운 제의 무대로 바뀐다. 제의에 신이 빠질 수는 없다. 처용은 불륜 상대를 역신(疫神)으로 만들어버렸다. 역병을 퍼뜨리는 귀신이자 사악한 기운을 대표하는 존재다. 그것은 [아라비안나이트]에 곧잘 등장하는 마신, 즉 재앙을 주는 신의 변용이다.
이프리트는 이슬람 세계의 난폭한 마신이다. 여성을 좋아하기 때문에 탐나는 처녀가 있으면 데리고 가서 취하려고 한다. 지니는 고대 아라비아에서 숭배한 정령으로 코란에도 나온다. 인간·동물·사물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다. 디바는 페르시아의 전설적인 괴물이다. 야행성으로 밤에 활동하며 강한 자에게는 무조건 복종하고 은혜를 입으면 신세를 꼭 갚는다. 처용의 아내와 동침한 역신은 이프리트처럼 여자를 무척 밝혔고, 지니처럼 변신에 능했으며, 디바처럼 신세 지면 도움을 줬다. 역신은 곧 마신이었다.
고려가요 ‘처용가’는 화끈한 복수의 노래
▎[삼국유사]의 저자로 알려진 일연의 화상.
신라 사람들은 처용에게서 강력한 쓰임을 찾아냈다. 그는 역병 귀신을 퇴치하는 정신적 부적이 됐다. 사악함을 물리치고 경사(慶事)를 맞아들이는 제웅이기도 했다. 비형이 공포로 도깨비를 다스렸다면, 처용은 덕으로 마신을 감동하게 했다. 이방인은 신라의 대문과 기왓장에 자기 얼굴을 그려 넣었다. 이보다 더 멋진 통과의례가 어디 있겠는가.
처용은 그 후 어떻게 됐을까? 달 밝은 밤마다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더니 나중에는 종적을 감췄다고 한다. 푸른 바다에서 왔으니 신드바드처럼 다시 모험의 바다로 나섰을까? 자신을 아껴주던 헌강왕이 세상을 떠난 뒤(886년) 다우선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라가 망해가고 있음을 간파하고 어디 물 좋은 곳을 찾아 떠났을 수도 있겠다. 당시 사람들은 처용을 신인(神人)이라 여겼다고[고려사] 악질 ‘처용’ 편은 전한다.
▎[삼국사기]의 대표 저자인 김부식의 화상.
‘처용가’와 ‘처용무’는 그 후 오랜 세월 궁중 나례 의식에 쓰였다. 섣달 그믐날 나쁜 귀신들을 쫓아냄으로써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해지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가사가 화끈해졌다. 아내를 빼앗겼는데도 고작 푸념하는 듯했던 신라 향가와 톤이 다르다. 고려가요로 재탄생한 ‘처용가’는 분노에 차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한국적 정서가 배어든 것이다.
“동경 밝은 달에 새도록 노닐다가 / 들어 내 자리를 보니 갈래가 넷이로구나 / 아으 둘은 내 것이거니와 둘은 뉘 것이뇨 / 처용 아비 곧 보시면 열병 신이야 횟갓이로다 / 천금을 주랴 처용 아비야 칠보를 주랴 처용 아비야 / 천금 칠보도 말고 열병 신을 날 잡아주소서 / 산이요 들이요 천 리 외에 처용 아비를 비껴가고자 / 아으 열병 대신의 발원이시도다.”([악학궤범] ‘처용가’)
처용은 복수심에 불타서 열병 귀신을 들들 볶는다. ‘횟갓’이라는 표현이 눈에 밟힌다. 회를 치겠다는 뜻이다. 식칼 들고 세상 끝까지 쫓아갈 기세다. 열병 귀신이 천금·칠보를 들먹이며 살살 회유하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 처용을 피해 걸음아 날 살려라, 줄행랑을 놓는 수밖에 없다. 남의 아내를 건드리면 이렇게 된다. 한국 사람들은 사생 결단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람이 온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1000년 전 푸른 바다를 건너온 이방인은 저 혼자가 아니었다. 또 다른 세계를 짊어지고 이 땅에 온 것이다. 그 기이한 노래와 춤과 이야기가 한국인의 삶에 정신적 백신으로 흐르고 있다. 어쩌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못한 중간자의 외로움과 고뇌, 그리고 어긋난 사랑이 1000년을 훑고 온 바람을 타고 뭉클 솟구쳐 오른다.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첫댓글 처용가에 그렇게 많은사연이,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