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나는 이들 부부와 작별하고 속초가는 버스에 올랐다. 속초
시외버스 터미날에서 백담사(百潭寺) 입구인 인제군 북면 용대리까지 가는 버스는 시간마다 있다. 나는 양평 경유 의정부행 버스를 타고 중간에
용대리에서 내렸다. 옛날 내가 젊었을 때 육군에 입대해 인제군 원통리에 있는 12사단에 배치된 친구들은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하는 타령을 불렀다. 그만큼 벽지 산골이라는 뜻일게다. 저녁이라 숙소를 정하는 것이 우선이다. 다행히 민박촌 간판이 모여있어 그럴듯한
집을 골라 전화했다. 산중이라 춥기 때문에 난방이 중요하다. 전화로 숙박비를 흥정하고 집을 찾아갔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전국 어디서나 민박이든
모텔이든 흥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정해진 요금에서 5천원에서 만원까지는 단 한마디로 조정이 가능했다. 비수기니까 그랬을 것이다. 주인도
친절하고 방은 깨끗하고 따뜻했다. 주인에게 저녁식사할 곳을 추천해 달라고 하니 이곳 별미는 황태찜인데 인근 음식점에는 수제 순두부까지 서비스하기
때문에 먹을 만하다고 한다. 나는 배낭을 풀어놓고 그가 추천한 식당을 찾았다. 그곳에서 토속막걸리를 반주삼아 식사하고 나오니 커다란 보름달이
환하게 산천을 비추고 있다. 울타리마다 활짝핀 매화와 벚꽃이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환상적인 시골마을 정취를 더하고 있다. 하늘에서는 둥근달 속에
토끼가 방아를 찧고 옆에서는 이태백이 놀고 있다. 땅에는 먼길 떠나 온 나그네가 한잔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고 있다. 무릉도원이 따로 있을 것
같지 않다. 벌써부터 내일이 기대된다.
이튿날 새벽 나는 동이 트기도 전에 짐을 놓아두고 지팡이만 짚고 길을 나섰다. 이곳에서
백담사까지 8킬로 구간은 유명한 백담계곡이다. 길은 말끔히 포장되어 있으나 일반 차량통행은 금지되고 있다. 이 계곡은 설악의 모든 계곡을 합친
것보다 더 깊고 아름다워 설악계곡의 어머니 격이다. 백담(百潭)이라는 이름 그대로 넓은 계곡에 깊은 소(沼)가 많다. 동녘하늘은 희붐한데 새벽
안개가 자욱하다. 오랜 세월 물에 씻겨 하얗게 변색된 깨끗한 암반과 맑은 물, 울창한 숲과 아름다운 산세는 한 폭의 동양화같다. 나는 지금
이글을 쓰면서도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을지 고심한다. 왜 사람들은 잘 그려진 그림 앞에서는 "진짜같다"라고 감탄하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대자연의
경관 앞에서는 "그림같다"라고 표현하는지 모르겠다.언어구사의 패러독스다. 안개 짙은 새벽길 맑은 공기를 마시며 백담계곡을 걸으면서도 왜 커피한잔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세속에 찌든 속물이라는 증거다. 나는 수 많은 스님들이 염주를 굴리며 염불하며 오르던 길을 묵주를 굴리며 선정삼매에
빠져 황홀한 느낌으로 오르고 있다. 이대로 이곳에서 돌이 되고 싶다. 나는 문득 750년 전 고려말 선승 나옹선사(1320-1376)의
'청산혜요아이무어'(靑山兮要我以無語)라는 시가 떠올랐다. 내가 인생길에서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던 어린시절 애송했던
시다.
청산혜요아이무어(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은 나를 두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혜요아이무구(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료무애이무증혜(聊無愛而無憎兮)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여수여풍이종아(如水如風而終我)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청산혜요아이무어(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은 나를 두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혜요아이무구(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료무노이무석혜(聊無怒而無惜兮) 성냄도 벗어놓고 아낌도 벗어놓고.
여수여풍이종아(如水如風而終我)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어린시절 한때 이 시가 너무 좋아 이렇게 한 인생 살고 싶었다. 그러나 아예 세속을 떠나 중이 되면
모를까 복잡한 세속에서 식구들 생계를 걱정하는 가장으로 그렇게 살기란 애당초 불가능했다. 이제 늙어서야 물같이 바람같이 흘러가는대로 가는 인생을
잠깐이라도 맛보려고 이렇게 모든 것을 집어던지고 방랑길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벗어놓고 티없이 살기에는 너무 탐욕에 찌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왜 갑자기 백담계곡에서 이 시가 떠오르는지 모른다. 선계(仙界)와 같은 백담계곡 새벽 경관에 도취한 탓인지 모르겠다. 내설악
깊은 산중에 있는 백담사는 매우 작은 절이었다. 백담사가 유명해진 것은 바다(海)를 호로 삼은 두사람 때문이다. 한 바다는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선생이며 다른 바다는 전직 대통령이었던 일해(日海) 전두환이다. 한용운은 이곳에서 득도했고 전두환은 이곳에서
귀양살이하고도 모자라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한 분은 시인이요, 독립투사로 역사에 존경받는 인물로 길이 남아있으며 대통령까지 지낸 다른 한 사람은
전재산 29만원으로 호화호식하는 불가사이한 전설을 만들면서 살아있다. 두분 다 국민들이 배워야 할 분들이다. 만해에게는 민족사랑과 변함없는
지조를, 일해인지 일본해인지에게는 29만 원가지고 요술방망이처럼 호화롭게 사는 비결을 배워야 한다. 아뭏튼 두 사람의 바다가 깊은 산속의
백담사를 일약 유명한 명승대찰로 만들었다. 백담사의 뿌리는 647년 진덕여왕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자장율사가 한계리에 한계사를 창건한
것이 시초인데 그 후 열차례 가까이 불에 타 그때마다
위치가 바뀌었으며 명칭도 한계사, 운흥사, 심원사, 선구사, 영취사, 백담사, 다시
심원사라 했다가 또다시 백담사가 된 것은 1783년 정조 때부터다.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진 백담사에는 두가지 전설이 내려온다. 옛날
낭천현(지금의 화천)에 비금사란 절이 있었다. 절 주위 산이 험해 사냥꾼들이 몰려 들었다. 그러다보니 산수가 더러워졌다. 중들은 샘물을 부처님께
공양했는데 짐승 잡은 불결한 물을 바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산신령이 밤새 절을 설악산 대승폭포 아래 한계사터로 옮겼다. 다음날 새벽 예불을
드리려고 깨어난 스님들은 절은 분명 그대로인데 주변 기암괴석과 폭포들은 처음 본다. 스님들이 놀라 두리번거리는데 파랑새가 날아가면서 "낭천의
비금사를 옛 한계사로 옮겨 놓았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런 전설과 함께 백담사 명칭에 관한 것으로는 영취사 시절 또 다시 화재로 절이 소실되자
주지가 다시 절을 짓고 이름을 붙이려 하는데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대청봉에서 절까지 담(潭)이 몇개인지 세어보라고 했다. 주지가 세어보니
정확히 백 개였다. 그래서 백담사로 지었다는 것인데 거듭된 화재를 물의 힘으로 막아보려 했던 의도가 보인다. 백담사로 이름을 바꾸고 한동안
화재가 없었는데 1915년 160칸 절집이 다시 불타버렸다. 4년 후 그 자리에 75칸을 다시 지었는데 6.25때 잿더미로 변했다. 지금
백담사는 1957년 재건되고 지금도 계속 보수 중건되고 있다. 민박집부터 2시간 쯤 걸은 셈이다. 이제는 아침 햇살이 밝게 비친다. 새벽에
지저귀는 새들의 합창과 거센 계곡의 물소리가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이룬다. 계곡에 설치된 다리를 건너자 멀리 차단막으로 가려진 일주문이 보인다.
보수공사 중이다. 두터운 비닐 차단막 뒤로 '내설악백담사'라 쓰여진 현판이 보인다. 일주문을 지나고 마음을 닦는 수심교(修心橋)를 통해 계곡을
건너야 비로소 백담사다. 백담사는 온통 공사중이었다. 공사차량과 인부들이 이른 아침부터 들락거린다.
금강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섰는가 했는데 또 하나의 문이 있다. 백담사와 설악산이라 쓰인 옛날 정문이 그대로 보존된 것이다. 이 문을 통해 경내에 진입했다. 이른
아침이라 조용했다. 나는 범종각을 둘러보고 대웅전인 극락보전(極樂寶殿)으로 향했다. 극락보전에는 보물 1182호 아미타불상이 주불로 모셔져
있다. 영조 때 만들어진 불상인데 우수하게 제작된 불상 자체보다는 1928년 복원당시 발견된 복장유물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불상 안에 발원문과
함께 내장된 유물들은 만(卍)자 소화문 노란색 저고리와 보자기에 싼 수정 파편인데 저고리는 당시 복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현재
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나는 극락보전의 문살 무늬에 한참 시선을 고정한다. 만자 테두리 아래 형형색색으로 활짝핀 연꽃 문양 무늬가 사방으로
배열되어 있다. 또한 극락보전 측면에 새겨진 원상무늬 불화는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히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은데 나의 짧은
불교지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원은 시작과 끝이 없는 그대로의 원이다. 해탈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 원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원불교도 이를 상징으로 삼는다. 극락보전 좌측에는 산령각(山靈閣)이 있다. 산신령을 모신 곳인데 원래 불교와는 전혀 관계없다. 한국 불교가
민속신앙을 흡수하면서 산신각, 삼성당, 칠성당이니 하는 전각들을 세우게 되었다. 산신이 가장 영험하다 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인데 깊은
산속에 있는 백담사 특성상 령(靈)으로 격을 높인 것 같다. 또한 극락보전 우측에 나한전이 있는데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5백 나한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내 눈에는 좀 무질서하게 보인다.
극락보전 전면 양쪽에는 법화실과 화엄실이 있다. 화엄실은 전두환이 2년 간 스스로
유배생활을 택한 곳이다. 화엄실 현판 밑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머물렀던 곳입니다'라고 써 붙여 놓았다. 실내에는 그들 내외가 사용했던 집기와
옷들이 걸려져 있고 백담사 생활을 찍은 사진들이 설명과 함께 진열되었다. 사진에서 전두환은 불경도 필사하고 장작도 패는 등 열심히 참회생활을
했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렇게 참회하고 도를 닦았기에 많은 재산을 여기저기 꼭꼭 숨겨놓고 검찰과 숨박꼭질하면서 전재산 29만원에 호화생활할
수 있는 법력이 생긴 모양이다. 부처님은 참으로 자비하시다. 어쨋든 한용운의 발자취가 담긴 이곳을 엉뚱한 사람이 더렵혀 놓았다는 느낌이다. 나는
발길을 만해기념관으로 돌린다. 마당에는 만해 한용운의 반신상이 세워져 있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내가 첫번 째 입장객으로 들어섰다. 실내에도
만해의 좌상동상이 놓여 있었다. 기념관에는 만해의 저서와 서예작품 그리고 그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었고 그의 어록들이 붙어
있었다. 나는 그의 어록 가운데 "우리는 현실적으로 재물을 중시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관념적으로 재물보다 더 귀한 깨달음의 지혜를 사회적
가치의 우위로 두지 않는 사회는 곧 부패하고 패망한다. 이것은 역사의 정칙이다"라는 글이 와 닿았다. 물질만능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따끔한
경책이 아닐 수 없다. 또 유수인생(流水人生)이란 그의 서예작품도 나옹선사의 시와 맞물려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만해는 근대의 큰 인물이다.
위당 정인보는 "인도에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라고 했다. 벽초 홍명희도 "조선의 7천 승려를 합해도 만해 한 사람 못 당한다. 만해
한 사람 아는 것이 다른사람 만 명을 아는 것보다 낫다"고 평했다. 나는 만해가 이곳 백담사에서 지었다는 '님의 침묵'을 입속으로 중얼거려
본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만해 한용운은 1879년 충남
홍성군에서 한응준과 온양 방씨 사이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하급관군으로 몰락한 양반가문이었다. 한용운은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한동안
향리에서 훈장으로 학동을 가르쳤다. 그는 조혼풍습에 따라 열 네살 때 혼인했다. 그는 기울어 가는 국운 속에서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을 목격하고
17세에 집을 나와 여러 곳을 전전하다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가 불교 기초지식을 배우고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시베리아 등지를 여행했다. 귀국
후 1904년 첫아들을 본 그는 이듬 해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연곡(蓮谷)선사를 은사로 출가해 승려가 된다. 머리가
비상하고 문재(文才)가 뛰어났던 그는 빠른시일에 한국 불교 전반을 꿰뚫게 된다. 만해는 1910년 모순과 부패가 만연하던 한국 불교의 개혁방안을
담은 '조선불교 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하고 3년 후 이를 발간함으로싸 불교계에 일대 혁신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1911년 친일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의 원종(圓宗)과 일본 조동종(曹洞宗)과의 합병을 발표하자 이를 정치적 상황에 편승한 친일매불(親日賣佛) 행위로 단정했다. 만해는
친일승려 이회광 일파를 종문난적으로 규정하고 송광사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했다. 그는 원종에 대응하는 임제종(臨濟宗)을 창립하여 송광사에
종무원을 두고 전국에 격문을 돌려 큰 호응을 받았다. 만해는 방대한 고려대장경을 독파하여 1914년 '불교대전'을 간행하고 1918년에는
불교잡지 '유심'을 발간했다. 그는 1919년 종교계를 중심으로 거족적으로 추진된 3.1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백용성 선사와 함께
불교계의 33인 민족대표가 되었다. 그는 거사당일 학생들을 시켜 독립선언문을 뿌렸으며 태화관 모임에서 개회사를 했다.
만해는
독립선언식 식사에서 “오늘은 우리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해 모인 영광스러운 날이며, 민족대표로서 선언하게 되어 책임이 중하니 차후 협심하여
조선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연설을 하고 만세삼창을 선창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체포될 경우 행동강령으로 첫째, 변호사를 대지 말
것. 둘째, 사식(私食)을 취하지 말 것. 셋째, 보석(保釋)을 요구하지 말 것을 제시했다. 독립선언식을 가진 뒤 33인 민족대표들은 모두
체포되었고 만해는 옥중에서도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일부 겁에 질려 소란스러운 대표들에게 호통을 쳐서 경종을 울려 주었다. 만해는
재판과정에서 검사장의 요구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란 논설을 집필해 논리적으로 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그는 1921년 연말 석방된 후에도
민족계몽과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만해는 물산장려를 통한 민족경제 육성과 민족교육을 위한 사립대학 건립운동에 앞장섰다. 또한 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한 뒤에는 총독부에 대해 당당하게 사찰령 폐지를 요구했다. 그는 불교 중앙 행정기관의 불합리한 법규를 개정케 하고 대중 불교의 전통을
되살리는 많은 성과를 올렸다. 1927년 좌우합작으로 신간회 창설이 추진되자 발기인으로 참여한 후 경성지회장으로 피선되어 활동했다.
1930년에는 청년 불교도들을 중심으로 항일운동단체인 만당(卍黨)을 조직 당수로 취임해 8년 후 일경에 발각되어 와해될 때까지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와 함께 그는 1931년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불교 대중화와 민중계몽,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한국문학사에서도 만해는
근대적 시인이자 소설가, 3.1운동 세대가 낳은 최대의 저항 문학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
만해는 1926년 88편의 시를 모아
'님의 침묵'이라는 첫 시집을 발간했고 시조와 한시를 포함해 3백여 편에 달하는 시 작품을 남겼다. 또한 그는 소설로도 '죽음', '흑풍',
'후회', '철혈미인', '박명' 등을 남겼다. 나는 한용운의 일생을 보면서 그가 불교 스님이라기 보다는 정의감에 불타는 독립운동가이며 문학가로
더욱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스님이 된 것도 자신의 구도보다는 민중운동의 방편으로 택한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는 끝까지 승려로
살지 않았으며 일생에 두번 결혼했다. 첫 부인 방 씨 소식은 알길이 없다. 그 사이에서 낳은 아들 한보국(1905-1977)은 아버지가 타향으로
떠돌아 다니자 공산주의자가 되어 6.25때 월북해 1남 5녀를 두었다. 장남은 어려서 죽고 세째 딸 한명심이 2001년 말 북한잡지
'통일신보'에 기고하면서 만해의 손녀 다섯과 후손이 북한에 산다는 것이 알려졌다. 만해는 1933년 55세 되던 해 벽산(碧山) 스님이 기증한
성북동 집터에 심우장(尋牛莊)이라는 택호의 집을 짓고 1944년 별세할 때까지 여생을 보냈다. 그는 이곳에서 유숙원(1898~1965)씨와
두번째 혼인했고 딸 영숙을 낳았다. 딸에게는 2남 1녀가 있다. 만해는 집을 지을 때 주변에서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볕이 잘드는 남향으로 터를
잡을 것을 종용했지만 총독부 청사가 보기 싫다며 끝내 동북방향으로 틀어 버렸다. 그는 교우관계에 있어서도 좋고 싫음이 분명했다. 만해는
동지들에게는 깊은 의리를 보여 주었지만 변절한 친일인사는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3.1운동 당시 동지였던 최린이 변절한 뒤 심우장을 방문했으나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무안해진 최린이 그의 딸에게 돈을 쥐어주고 갔다. 만해는 부인과 딸에게 호통치고 그 길로 명륜동 최린의 집으로 달려가
돈을 집어 던지고 되돌아 왔다고 한다.
그는 어느 날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변절한 최남선이 아는 체를 하자 "내가 아는 육당은
이미 죽어 장례지냈는데 당신은 누구냐!"고 일갈했다. 또한 만해는 총독부 어용단체인 31본산 주지회의에서 "송장보다 더러운 주지놈"이라
호통쳤다. 그는 단재 신채호의 유고집 발간 준비를 하던 제자가 감옥에 갇히자 축하 꽃다발을 보내 '의기'를 북돋아 주었다. 또한 그는 "나는
조선사람이라 왜놈이 통치하는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끝까지 호적 등재를 거부하면서 '나는 민적이 없어요'라는 시를 남겼다. 우리나라
3.1운동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중국에서는 5.4운동이, 인도에서 비폭력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33인 중 많은
사람이 변절하거나 불투명한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만해는 끝까지 민족독립과 반일정신을 지켰다. 독립선언문 발표 후 체포되어 일본 검찰
조사에서부터 "독립운동을 계속하겠는가" 하는 질문에 대부분 인사들이 우물쭈물하거나 집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겠다고 대답한데 비해 당당하게
"그렇다"하고 밝힌 사람은 만해 한용운 뿐이었다고 한다. 만해는 일제말기 총동원체제 아래 자행된 황민화정책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그는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과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폈다. 그러던 중 만해는 1944년 6월 29일 애타게 그리던
조국광복을 눈앞에 두고 별세했다. 그의 장례는 불교의식에 따라 화장되고 망우리 묘지에 묻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만해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나는 만해 한용운의 일생에 감동하면서 기념관을 나서는데 들어 올 때 못보았던 그의 시 '나룻배와 행인'을 새긴 시비가
보인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당신은 물만 건느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어갑니다 /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2014.9.2 뉴욕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