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갯길은 경계이면서도 소통의 공간이다. 흔적이 남아 있든 없든 우리 주위엔 아직도 숱한 고갯길들이 있다. 험한 산으로 갈라졌지만 주위에 기대 사는 사람들의 삶을 이어주는 고갯길에는 숱한 희로애락과 역사가 묻어 있다. 갈수록 옛 모습과 지역 주민이 사라져가는 경남과 울산의 고갯길을 찾아 숨겨진 이야기와 변화상 등을 시리즈로 소개한다.
지그재그 고갯길은 추억의 사진을 남길 수 있는 더없는 배경이다. 오도재 길은 국내 자동차타이어 업체의 텔레비전 광고를 통해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도 했다. 또 이 도로는 건설교통부가 선정한 '아름다운 길 100선'에 들었다.
오도재는 함양군 함양읍 구룡리에서 함양군 마천면 구양리까지 12.1km 구간에 구절양장 이어진 고갯길이다. 함양읍에서 오도재를 넘어 고개 끝지점에서 좌회전하면 지리산 칠선계곡과 벽송사로 향하고 직진하면 함양읍 마천면 소재지가 나온다. 한마디로 지리산 심심산골로 향하는 마지막 고개였던 셈이다. 지금은 이처럼 유명해지고 차로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2차선 도로가 개통된 2003년 전까지만 해도 그야말로 '울고넘는 고갯길'이었다.
오도재 12.1㎞ 고갯길 양쪽에는 조동 촉동 창원 등구 청원 금계 등 6개의 자연마을이 지금도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 중 가장 큰 마을은 창원마을로 105가구에 232명의 주민이 산나물 옻순 호두 등을 재배하거나 토종꿀을 키우며 살고 있다.
오도재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예전에도 지리산으로 향하는 관문이었다. 함양읍내나 거창 등 내륙사람들이 오도재를 넘어 지리산으로 향하고 지리산 주변 사람들은 함양읍내 등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서 이 곳을 반드시 지나야 했다.
팍팍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까마득한 고갯길도 마다할 수 없었다. 달리 길도 없었다. 지금은 등산로로만 알려져 있지만 예전 지리산 장터목은 그 이름처럼 경남 하동과 전라도 광양 등에서 나는 소금과 해산물 등을 구하기 위한 장터로 유명했다. 함양읍내 등 내륙 사람들은 생활필수품인 소금과 해산물 등을 장터목에서 물물교환하기 위해 지역 특산물을 이고지고 오도재를 넘어야 했다.
김쌍수(80·함양군 마천면) 씨는 "60여년 전까지만 해도 장터목에서 물물교환이 이뤄졌다"며 "당시 함양읍 주민들이 목기 쌀 등을 지게에 지고 그 먼 오도재를 넘은 뒤 다시 몇 시간을 올라가 장터목에서 물건을 교환했다"고 회상했다.
반대로 벽촌 산골인 함양군 마천면과 휴천면 등 지리산 주변 주민들은 도로 개설 전인 지난 2003년까지 오도재를 걸어서 넘어 함양읍내에서 생필품을 구입해 왔다. 오도재 길에 사는 조석제(76·휴천면 촉동마을) 씨는 "읍내에 가기 위해서는 오도재 길밖에 없었고 밤늦게 돌아올 때면 호랑이 등 맹수가 무서워 한참을 기다렸다가 여럿이 함께 고갯길을 넘곤 했다"고 말했다.
지리산 제일문 | |
지리산 벽송사로 향하는 고승들의 발걸음도 끊이지 않았다. 벽송사는 예로부터 유명한 선종사찰이었다. '오도재'란 이름도 당시 벽송사를 오가던 고승들이 험하고 험한 이 고갯길에서 '도를 깨우쳤다(悟道)'는 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함양군지에 따르면 마천면 영원사 도솔암에서 수도하던 인오조사(1548~1623)가 이 고개를 오르내리며 득도했다고 해서 오도재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김윤오(52·휴천면 촉동마을) 씨는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함양읍내 장에 갔다 오면서 고갯길 입구 주막에서 국밥을 먹곤 했는데 당시만 해도 고갯길을 넘어 벽송사를 오가는 스님들을 많이 봤다"고 회상했다.
함양 향토사학자 곽성근 씨는 "오도재 정상은 가야의 마지막 왕이 은거할 때 중요한 망루지역이었고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등이 이끄는 승군이 머물렀던 곳으로 전한다"며 "당시만 해도 많지 않았던 지리산을 오가는 길로서 오도재는 역사적으로도 큰 가치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수많은 사연을 안은 오도재도 2003년 2차선 도로가 완공되면서 엄청난 변신을 했다. 꼬불꼬불 뱀처럼 이어진 도로와 오도재 정상에 거대한 성곽 모양으로 함양군이 세운 지리산 제일문도 유명한 관광상품이 됐다. 지리산 제일문을 지나 지리산 쪽으로 조금 내려온 고갯길에는 지리산 조망공원 휴게소도 조성됐다. 이 곳에서는 하봉~중봉~천왕봉~반야봉에 이르는 장대한 지리산 주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지금은 차로 쉽게 이 장관을 볼 수 있지만 지리산 유람에 나선 옛 사람들이 힘든 고개를 넘어 마침내 장쾌한 능선의 모습을 보며 느꼈을 감동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다.
■ 오도재 정상 '지리산 제일문'의 공원
- 지리산 관문 마지막 쉼터
- 15편의 詩 바위에 새기고, 변강쇠-옹녀 사랑이야기 40여점 장승·솟대에 담아
지금은 경남과 전남·북에 걸쳐 지리산으로 가는 길이 많아졌다. 하지만 적당한 상징 관문이 없던 차에 함양군이 2006년 오도재 정상에 지리산 제일문을 만들었다.
지리산 제일문은 삼봉산과 법화산 사이 오도재 정상에 우뚝 솟아 있다. 예나 지금이나 오도재를 넘어 지리산으로 향하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쉬어가던 자리다. 성곽 길이 38.7m 높이 8m, 폭 7.7m 규모로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며 이제는 지리산 상징물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제일문에서 지리산 방향으로 조금 내려간 곳에 조성된 조망공원에는 지리산을 노래한 15편의 시가 바위에 새겨져 있어 운치를 더한다. 영남학파의 종조 김종직, 조선시대 5현인 일두 정여창, 충효의 표본 유호인, 탁영 김일손 선생 등 조선시대 최고의 시인·묵객들이 이 곳 등에서 지리산을 노래한 시다.
정여창은 지리산 유람을 마치며 '갯버들 하늘하늘 부드럽게 흔들려도/ 사월이라 화개땅 보리 이미 익었더라/ 두류산(지리산) 천만봉을 두루 다 구경하고/ 조각배에 흔들려 큰 강 따라가네'라고 노래했다.
이에 김일손은 '창파는 망망한데 노 젓는 소리 부드럽고/ 소매에 스민 맑은 바람 문득 가을철 같구나/ 머리를 돌려 다시 보니 참으로 모습 좋은데/ 한가한 구름은 흔적없이 두류산을 지나네'라고 화답했다.
변강쇠와 옹녀의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지리산 제일문 바로 아래 조성된 테마공원(사진)도 눈길을 끈다. 판소리 변강쇠전에는 지리산에 들어가 살게 된 변강쇠가 장승을 뽑아 불쏘시개로 사용하자 전국 장승들이 회의를 열어 온몸에 108개 병을 주입시켜 죽인다는 내용이 있다. 또 변강쇠전에 등장하는 초군들이 부르는 노래 속에 '저 건너 행화촌'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오늘날 오도재 정상에서 600여m 아래에 행화동이란 마을이 실존한다. 함양군은 이를 근거로 오도재에 변강쇠와 옹녀의 이야기를 담은 테마공원을 조성했다. 테마공원에는 변강쇠전을 주제로 성기와 성행위 장면을 익살스럽고 해학적으로 표현한 40여점의 장승과 솟대가 세워져 있어 눈길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