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 36-1]필이 꽂히는 '좌우명 인장印章'
<학산당인보學山堂印譜와 전각篆刻>이라는 제목의 졸문을 지인 100여명에게 보내자, 몇 분이 반향反響의 댓글을 보내와 반가웠다. 주로 인장에 새겨진 구절을 유심히 본 느낌을 적은 것이다. 분량 때문에도 줄였기에 속편을 쓸 이유가 생겼다.
중학생 아이를 둔 동생은 “자식은 손님처럼 떠나보내야 할 존재로서 섬겨야 하는 사랑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주신 것에 감사하다”고 썼다. 영화평론가 친구는 ‘人知相知 貴在知心’이란 구절에 필이 꽂혀 그 인장 사진을 트리밍해 다시 보내주었다. 그렇다. 서로 알고 지낸(친구가 된) 햇수가 뭐가 중요한가? 한번 마음을 허락했다면 몇 년을 못본들 뭔 상관이랴. 마음 먹기에 달려 있는 것을. 한 여자후배는 “전각이 종합예술인 것을 처음 알았다”며 고마워했고, 한 선배는 “도서 구입목록 맨 위에 ‘돌 위에 새긴 생각’을 올려놓았다”고 해, 나를 기쁘게 했다. 전주의 한 여성지인은 “와우! 이런 책도 있구요. 샘의 독서 지평에 감탄할 따름입니다”라는 댓글을 보내왔으며, 화가지인은 "지식세계의 범위가 자꾸 넓어진다"며 좋아했다.
아무튼, 책장을 다시 넘기다 아주 멋진 인장을 발견했다. <夕佳軒석가헌>. 풀이하자면 ‘저녁이 아름다운 집’이라 해야 되겠다. 정민 선생의 풀이는 더욱 그윽하다. “사람은 저녁이 아름다워야 한다. 젊은 날의 명성을 뒤로 하고, 늙어 추한 그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민망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하면 되겠는가?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 5년 전에 그 구절을 알았으면 우리집 사랑방 당호로 할 걸 그랬다.
또 하나 특이한 인장 두 개가 눈에 띄었다. <白石淸泉冷笑人>(흰 돌 맑은 샘, 씩 웃는 사람)과 <志士惜浪死> (뜻 있는 선비는 허랑되어 죽지 않는다) 인장은 여느 것과는 조형미가 남달랐다. 곧게 한 치의 흔들림없이 내려그은 필획의 글자를 꼼꼼히 봐도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한없이 멋지다. 문화가 이 정도는 고급져야지 않겠는가.
또 하나의 인장을 말하자. 고교시절 서당에서 배운 <명심보감>의 한 구절이다. <天網이 恢恢하나 疎而不漏니라>. 하늘그물이 하도 넓어 성글게 보이지만 ‘1도’ 새지 않느니라. 恢恢는 넓다, 疎는 성글다, 漏는 새다는 뜻이다. 그러니, 어찌 역사 앞에 한 치의 거짓이 통할 것같은가. 어림 반푼어치도 없음을, 저 사이비 정치인(僞政者)들은 각골명심할진저!
이밖에 돋보이는 몇 개의 인장은 사진으로 보면, 정 교수의 친절한 ‘쏙쏙 뜻풀이’가 있으니 감상하면 되리라.
한편, 정교수의 저서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에 실린 이덕무(1741-1793)가 이서구(1754-1825)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을 소개한다.
“내 집에 좋은 물건이라곤 단지 <맹자> 일곱 편뿐인데, 오랜 굶주림을 견딜 길 없어 2백전에 팔아 밥을 지어 배불리 먹었소. 희희낙락하며 유득공(1749-?)에게 달려가 크게 뽐내었구려. 유득공의 굶주림 또한 하마 오래였던지라, 내 말을 듣더니 그 자리에서 <좌씨전>을 팔아서는 남은 돈으로 술을 받아 나를 마시게 하지 뭐요. 이 어찌 맹자가 몸소 밥을 지어 나를 먹여주고, 좌씨가 손수 술을 따라 내게 권하는 것과 무에 다르겠소. 이에 맹자와 좌씨를 한없이 찬송하였더라오. 그렇지만 우리가 만약 해를 마치도록 이 두 책을 읽기만 했더라면 어찌 일찍이 조금의 굶주림인들 구할 수 있었겠소. 그래서 나는 겨우 알았소. 책 읽어 부귀를 구한다는 것은 모두 요행의 꾀일 뿐이니, 곧장 팔아치워 한번 거나이 취하고 배불리 먹기를 도모하는 것이 撲實함이 될 뿐 거짓 꾸미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오. 아아, 그대의 생각은 어떻소?”
기가 막히다. 당시 200전은 지금 돈으로 얼마일까? 선비이자 학자들의 赤貧(적빈)이 눈물겹지 않은가. 추위를 막으려 漢書를 이불로 하고 論語를 병풍으로 했다는 말과 孟子와 左氏傳을 팔아 밥과 술을 해결했다는 말을, 이들에게서 말고 그 누구에게 듣는단 말인가? 규장각의 각신 이서구는 이 편지를 받고 무어라고 답신을 했을까? 그것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