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오정자 | 날짜 : 08-04-25 12:23 조회 : 2968 |
| | | 1파운드 금화 한 닢의 교훈 오정자
황금빛 이파리가 흩날리던 어느 가을 날, 오스카 와일드의 산문〈모범적인 백만장자〉를 읽었다.
준수한 용모의 후기 얼스킨이라는 청년은 퇴역대령의 딸인 로라 머튼과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런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인이었다. 어느날, 후기는 절친한 친구인 화가 앨런 트레버의 작업실에서 거지 모델을 하고 있는 추레한 행색의 노인을 만난다. 동정하고 싶은 마음에 주머니를 뒤져보니 1 파운드 금화 한 닢과 약간의 동전이 손에 잡혔다. 그는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금화 한 닢을 노인의 손에 쥐어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노인은 유럽에서 가장 부자인 하우스버그 남작이었는데, 그는 1만 파운드 수표를 넣은 봉투를 결혼선물로 후기에게 건네준다는 줄거리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감명 깊게 느낀 점은 백만장자가 쾌척한 거금 1만 파운드 수표가 아니라, 후기라는 청년의 타인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 그의 베풂이었다. 하우스버그 남작의 선행도 훈훈함을 더해주지만, 그는 물질적으로 부유한 사람이니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가 가진 것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기는 빈털터리로 1파운드가 없으면 보름동안을 걸어 다녀야하는 형편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가진 것 모두를 아낌없이 늙은 거지에게 적선했다는 것은 인간성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커다란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얼마 전의 일이다. 빨랫감을 들고 세탁기가 놓여 있는 우리 집 지하실로 내려갔다. 계단 바로 옆, 한 모퉁이에 크고 까아만 비닐봉지가 있었다. 남편에게 물어봤더니 겨울옷을 정리했는데 버릴 거라고 했다. 암만 생각해도 수상쩍어 비닐봉지 안을 들춰보니 그 안엔 몇 해 전 친정집에서 보내준, 아직 상표를 떼지 않은, 오리털 잠바 두 벌과 스키바지 등 여러 종류의 옷가지들이 들어 있었다. 깜짝 놀라, 혼자 구시렁거리며 새 옷을 골라 간이용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남성용 오리털 잠바와 스키바지는 필요한 사람을 찾아 줘야겠다는 요량에서였다. 다음날, 무심코 지하실에 내려가 보니 전날 걸어둔 옷은 온데간데없고 비닐봉지는 다시 불룩해져 있는 게 아닌가. 남편은 집어넣고 나는 빼내고 몇날 며칠을 눈만 마주치면 그 일로 티격태격했다. 지난해 허리를 다치지 않았어도 그것들을 구세군에 갖다 주었을 텐데 그저 답답한 마음으로 바라만보고 있어야 했다. 남편은 새 옷이라도 입지 않으면 버리라는 것이었다. 정곡을 찔린 느낌이었다. 작은 것 하나도 선뜻 버리지 못하는 나는 얼마나 더 살아야 소유의 집착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려나. 생각해보면, 그동안 내게 필요 없는 물건을 대단한 자선을 베풀기라도 하는 양 선심 쓰듯 남에게 준 건 아닐까. 자기도취에 빠졌던 나르시스처럼 어리석은 내가 거울에 비치듯 훤히 비춰지는 것 같아 흠칫 놀랐다.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오리털 잠바와 스키바지를 숨겼다. 언뜻 노숙자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 교회에 갖다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금자리 없이 거리를 헤매는 그들이 입게 되면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어찌 달랑 의류만 가지고 갈 것인가. 구제금도 함께 전달하면 좋으련만. 이런 저런 궁리만 하다보니 가을은 어느새 저만치 달아나고, 눈발이 날리는 겨울이 왔다. 숨겨둔 오리털 잠바가 문득 생각이 났다.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쭙잖게 가상한 마음을 먹었던 적이 더러 있었다. 언론보도를 통해 형형색색의 슬픔과 고통에 처한 이들을 접하면 가슴이 아려와 어디엔가 연락처를 적어놓곤 했었다. 어쩌면 번지르르한 마음은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은 무심한 마음보다 못할지도 모른다. 작고 사소한 일이라도 몸소 실천하는 것만이 진정한 나눔과 섬김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공수래공수거란 말처럼, 잠시 머물다갈 인생여정에서 진정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인간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 주위에 있는 어렵고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고 베푸는 일일 것이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해질 것이라’는 성경말씀처럼 나는〈모범적인 백만장자〉의 작중인물인 후기 얼스킨에게서 ‘나누는 삶은 복된 삶’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가진 것의 전부인 1파운드 금화 한 닢을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거지 노인에게 나누어준 그의 쾌거를 생각하면, 이제껏 내 안에 허울 좋은 그림만 잔뜩 그려 놓은 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부끄럽기만 하다. - 《아침 향기》게재 2007년 7월호 - |
| 최복희 | 08-04-28 23:58 | | 오정자 선생님! 이곳에 글을 올리셨군요. 참 감동적인 글입니다. 컬럼이기보다 좋은 수필에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신작수필' 란에도 글 올려주십시오. 작중 인물의 선행도 감동적이지만 오선생님의 따뜻한 마음도 일품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 |
| | 오정자 | 08-04-29 10:13 | | 최복희 선생님, 반갑습니다. 이곳은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지상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소리가 음악처럼 들리는 봄밤입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시니 힘이 솟아납니다. 고맙습니다. 아무쪼록 늘 건강하시고, 복된 나날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매사추세츠에서 오정자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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