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130104/52043486/1
“고전문학의 주제는 단 두 개로 압축된다. 하나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 또 하나는 우비 순트(Ubi sunt)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온 것처럼 카르페 디엠은 ‘오늘을 즐겨라’라는 뜻의 라틴어다. 우비 순트는 ‘우리 앞에 있던 그들은 어디에 있나(Ubi sunt qui ante nos fuerunt)?’의 앞 단어로 과거에 대한 회상, 회한을 의미한다.
우비 순트
Ubi sunt = Where are..? (그것들은 어디에) 라는 뜻으로, 덧없이 사라진 과거를 고찰하는 것. 라틴어 문장 Ubi sunt qui ante nos fuerunt? 의 축약.
https://naver.me/5rZ5wD7P
인생의 큰 주제는 카르페디엠과 우비순트이다. 현재를 즐기라는 카르페디엠( carpe diem). 현재를 즐기고 나면 사라지는 청춘의 아름다움 우비 순트(Ubi Sunt). 인생은 이 두 갈림길에서 헤메는 불쌍한 영혼과 같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지난해 순백의 눈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 아름답던 선남선녀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늙고 병들어 모든 사람들이 사라졌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397874.html#cb
‘공생의 운명’ 망각해선 안될 망각
박혜영/인하대 교수(영문학)
현대인에게 ‘운명’이란 대단히 구태의연한 말이거나 아니면 그저 자조적 탄식일 뿐이지만 먼 옛날 고대인들에게 운명이란 보이지 않게 얽힌 삶의 신비를 느끼고, 그 공생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다. 아직 인류가 어둠 속을 헤매던 시절, 도처에서 벌어지던 잦은 전쟁과 죽음, 가난한 농민들의 결실을 쉴 새 없이 약탈해 가는 권세가들의 횡포, 약자에게 너무나 가혹했던 형벌과 무서운 흑사병에 이르기까지 삶의 변화는 인간의 손을 떠나 있었고, 조금도 예측할 수 없었다. 고대 영시에 빈번히 등장하는 ‘우비 순트’(ubi sunt: 함께했던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오래된 물음은 옛사람들의 삶의 여정이 얼마나 고달프고 험난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고대 영시에서 셰익스피어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저렇게 얽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삶의 변화를 신의 섭리로 이해하려던 노력이 바로 ‘운명’이다. 운명을 뜻하는 영어인 destiny나 fate가 신이 정해준 길이나 신의 말씀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나왔듯이 고대영어로 운명을 뜻하는 wyrd도 바로 모든 존재가 동시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성스러운 힘이란 뜻에서 나왔다. 다시 말해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존재의 힘을 믿는 것이며, 자신을 낮추고 그 힘에 겸손하게 복종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이 나눠준 운명을 뛰어넘으려는 오만(hubris)이야말로 옛사람들에겐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불경죄였다.
모든 운명은 실처럼 연결되어 있다. 실이라는 은유는 운명이 서로 얽혀 있음을 암시한다. 수많은 끈이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고, 한 영혼과 다른 영혼을 이어준다는 생각, 이런 생각이 바로 도덕심을 낳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역사상 거의 처음으로 운명에 대한 도덕적 성찰을 멈춘 세대라는 점이다.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면 자기 시대의 불의와 부패 앞에서 고결한 영혼을 가진 존재인 인간은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가?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운명의 불가사의한 힘과 그 앞에 선 인간의 고결한 선택을 성찰한 작품이다.
햄릿은 선왕을 살해하고, 자신의 어머니를 아내로 맞아들인 숙부 클로디우스의 악행이 만연한 곳에서 어떤 길을 택하는 것이 영혼의 고결함을 지키는 것인지를 저 유명한 독백에서 물어본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참고 견디는 것이 더 고결한 정신인가, 아니면 무기를 들고 고난의 바다에 대항하여 끝장을 내는 것이 더 고결한 정신인가?” 운명에 맞서는 것이 더 고결한 것인지, 아니면 운명을 견뎌내는 것이 더 고결한 것인지는 여전히 답을 내리기 어렵다. 왜냐하면 한 존재는 언제나 다른 존재로, 현재의 행동은 언제나 미래의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햄릿이 신속히 복수를 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은 이렇듯 모든 존재가 시간과 공간 속에 함께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 즉 보이지 않는 “거대한 존재의 사슬”에 함께 묶인 운명의 힘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한 존재의 선택은 언제나 다른 존재의 운명에 가닿게 되기에 인간은 참고 견디는 것이다.
“이 육체의 굴레를 벗어나 죽음이란 잠에 들었을 때
어떤 꿈을 꿀 것인가, 이것이 우리를 망설이게 하는구나.
한평생 재앙을 견디는 것은 이런 생각 때문이로다.
그렇지 않다면야 그 누가 참고 견디어 낼 것인가,
시간의 조소와 채찍을, 압제자의 횡포와 오만한 권력자의 멸시를,
버림받은 사랑의 고통과 재판의 지연을,
관리들의 오만과 유덕한 인사들이 소인배로부터 받는 모욕을.”
시간이 만드는 변화는 고통스럽고 모욕적이며, 사랑은 변하기 쉽고, 재판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지연된다. 예나 지금이나 약자들은 마치 영혼도 없는 것처럼 권세가들로부터 멸시와 모욕을 받는다. 하지만 인간은 고결한 영혼을 지녔기에 자신의 결정이 다른 존재에게 미치는 운명의 힘에 대해 성찰할 수 있다. 비록 햄릿은 많은 무고한 죽음을 야기하고 한 순결한 영혼마저 파멸시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햄릿이 고결한 것은 다른 존재와 필연적으로 얽힌 자신의 운명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깊이 성찰하기 때문일 것이다.
희랍신화에서도 세 명의 운명의 여신이 하는 일이 각각 실을 잣는 것과, 실의 길이를 재는 것, 그리고 그 실을 자르는 것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모든 운명은 실처럼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실이라는 은유는 운명의 덧없음과 동시에 운명이 서로 얽혀 있음을 암시한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끈이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고, 한 영혼과 다른 영혼을 이어준다는 생각, 인간이 텅 빈 우주 속에 홀로 떠도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신비로 이렇게 서로 얽혀 있다는 생각, 이런 생각이 바로 도덕심을 낳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 세대가 인류 역사상 거의 처음으로 운명에 대한 도덕적 성찰을 멈춘 세대라는 점이다. 인간이 영혼을 가진 존재임을 망각하지 않고서 우리 사회에서 지금과 같은 터무니없는 일들이 일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결식아동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만들고서도 급식비 지원마저 중단하는 사회에 살고 있으며,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일 년이 다 돼가도록 산 자도 죽은 자도 인간답게 죽음을 애도하지 못 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https://naver.me/xLJglyYQ
우비 순트, 삶의 방향타를 잃고
📝 정연진 지음
📌 키워드
에세이, 죽음, 일상, 감정, 삶의 의미, 인간관계
📕 줄거리 소개
5개월 간 연속적으로, 갑작스레 닥친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겪은 작가의 이를 애도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이야기와 이를 통해 되돌아보는 삶의 의미에 대한 에세이.
🎓 Review
우리는 '죽음'이라는 개념을 잊은 채 삶을 살아간다. 죽음은 생명체로 태어난 이상 반드시 맞이할 확정적인 사실이고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매우 가까이에 도사리는 개념임에도 그것을 잊고 단지 활기, 열정, 자극만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어느 날 재앙처럼 가까운 이에게 죽음이 닥치게 된다면 그 순간 커다란 충격을 받아버린다.
죽음에 대해 전혀 대비하지 않고 있었으니 갑작스레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맞은 것처럼 충격이 큰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 위해서 항상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삶을 너무도 우중충하고, 비관적으로 만든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길어지면 대부분 '어차피 죽어 잊힐 삶인데,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봐야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으로 이어지게 되니까. 물론 굳건하고 빛나는 사람들은 그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잊힐 삶 속에서도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내고 이를 다져나가기 위한 삶으로 방향을 잡지만, 이는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버거운 현대인들에겐 너무나 어려운 과제다.
책에서는 작가가 딱 이런 일을, 그것도 5대 연속으로 뒤통수를 후려맞은 일을 이야기한다. 이야기를 읽어보면 '어떻게 삶이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안타까운 이야기다. 그럼에도 작가는 어떤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다시 눈물을 닦고 일어나 삶을 걸어 나가는 인간의 끈질긴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이미 떠난 이들을 계속해서 슬퍼하기만 하는 것이 진정으로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스스로 깨닫고 이전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조금 더 성숙한 일상의 궤도로 다시 올라오는 모습을 통해 독자도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