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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 (대한제국 친일파) [乙巳五賊]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을 가리킨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면서 한국을 보호국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같은 해 10월 일본의 총리대신 가쓰라[桂太郞], 주한공사 하야시[林權助], 외무대신 고무라[小村壽太郞]는 을사조약 체결을 모의하고, 11월 9일 추밀원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파대사로 한국에 파견하여 고종에게 '한일협약안'을 제출하게 했다. 또 하야시는 조선주둔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와 협력하여 궁궐을 포위하고 고종을 감시하는 한편, 11월초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로 하여금 보호국화 찬성의 선언을 발표하게 했다. 11월 14일 이토는 고종을 다시 알현하고 조약원문을 제시, 체결을 강요했고 다음날에는 대한제국의 각 대신들과 원로대신들을 숙소에 납치하여 조약체결을 강권했다. 11월 17일 이토와 하세가와는 일본군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가운데 군신회의를 개최하게 하여, 회의는 오후 3~8시까지 열렸으나 조약거부로 결정이 났다. 이에 이토는 귀가하는 대신들을 위협하여 다시 강제로 회의를 열게 하여 대신 한 사람마다 조약체결 찬성 여부를 물었다. 주무대신으로 처음 지명된 박제순이 "만약 명령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라고 하자, 이토는 "당신은 절대적으로 이 협약에 반대한다고는 볼 수 없다. 폐하의 명령만 내린다면 조인할 것으로 본다고 믿는다"고 못박았다. 이후 회의는 이완용과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이 대세를 장악하여 "조약의 체결을 거부하면 일본이 무력으로 한국을 침략할 것이므로 차라리 체면을 살리면서 들어주자"는 명분과 왕실의 안녕과 존엄은 유지할 수 있다는 조건을 들면서 조약 체결을 주장했다. 대신들 중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만이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며, 나머지는 체결이 불가피함을 시인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하여 박제순과 일본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을사조약 반대의 함성이 전국적으로 드높은 가운데, 이들 오적에 대한 응징 기도도 빈번했다. 기산도(奇山度)·구완희(具完喜) 등이 이근택을 암살하려 했고, 1907년 3월 오기호(吳基鎬)·나인영(羅寅永) 등 '을사오적 암살단'이 이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삼엄한 경비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또 1909년 서울 종현성당에서 이재명(李在明)이 이완용을 암살하려 했으나, 부상만 입히고 말았다. 이들은 한일합병 후에 모두 친일의 대가로 '조선귀족령'에 따라 일제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을사오적
'을사오적' 이란 을사년인 1905년 11월 17일에 조선을 일제침략자들에게 팔아먹은
다섯놈의 매국 역적이란 뜻이다.
'을사오적'은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란 매국 조약에 찬성한 당시 이조 봉건정부의
외무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내무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다섯 매국노를 가리키는 말이다.
매국노의 괴수 이완용은 1887년에 주미공사를 했고 귀국후 친미파로서 나섰으나
그후 조선에서 러시아 세력이 우세한 듯해지자 친로파로 바뀌어 졌으며.
그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우세해지자 친일파로 넘어가 매국조약에 선참으로 도장을 찍은 역적이다.
일제 침략자들이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을 강요하였을때 참정대신 한규설을 비롯한 일부 대신들은
이를 완강히 반대하였으나, 친일역적으로 전락된 오적들은 매국조약 체결을 적극 지지 찬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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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씨년스럽다.
'을씨년스럽다'의 '을씨년'은 일제가 이조 봉건통치자들을 위협 공갈하여
'한일협상조약'(을사 5조약)을 강압적으로 체결한 해이다.
박제순(1858∼1916) - '을사조약' 체결 도장을 찍은 외교책임자.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충청감사로 농민군 진압.
1905년 외부대신으로 '을사조약' 체결.
1910년 '한일합병' 후 자작, 중추원 고문, 경학원 대제학
권중현(1854∼1934) - 친일에 한 평생 걸은 대세영합론자.
1904년 육군부장으로 러일전쟁중인 일본군 위문 공로로 일본의 훈1등 팔괘장 수여 받음
1905년 농상공부 대신
1910년 자작, 중추원 고문
이지용(1870∼1928) - 나라를 판 돈으로 도박에 미친 백작
1904년 외부대신 서리로서 '한일의정서' 협정·조인
1905년 내부대신으로 '을사조약' 체결
1907년 중추원 고문
1910년 백작
이근택(1865∼1919) - 근황주의자에서 친일매국노로의 변신
1905년 군부대신으로 '을사조약' 조인
1910년 한일'합방' 공로로 훈1등 자작
1910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이완용(1858∼1926) - '한일합방'의 주역이었던 매국노의 대명사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공로로 의정대신 서리 겸 외부대신 서리
1920년 '한일합방' 공로로 백작
1921년 후작,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
출처 : http://bbs2.agora.media.daum.net/gaia/do/kin/read?bbsId=K153&articleId=31263
이들로 인해 우리나라가 36년간 일본의 식민지로 노예생활을 했다
이들 을사오적을 죽이기 위해 오기호. 나인영 등은
박제순. 이지용 집에 폭발물을 선물로 가장하여 보내 암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다시 하수인을 매수하여 오적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가택의 경계가 삼엄하여 또한 불가하였다.
오적을 암살하기 위한 자신회(自新會).기산도(寄山度) 등의 결사대가 조직되었고
이근택과 권중현은 결국 저격당하였다.
오적의 집이 민중에 의해 소각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몇몇 매국노에 의해 하루 아침에 나라를 잃은 민중은 다시 나라를 찾기 위해 무력과 문력(文力)을 불사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재명의사는
교회당 앞길에 변장을 하고 잠입한 뒤 이 자리에 참석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10년 사형 선고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의 전신인 경성감옥에서 순국하셨다
(1886.10.16~1910.9.30)
이 사건으로 이동수, 조창호, 김정익 등 11명의 관련자들도 중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재명의사 입니다
적도(敵盜)들이 쓰러지는 것을 지켜 본 안중근은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대한만세'를 세 번 불렀다
안중근은 손뼉을 치고 큰 소리로 웃으며, "내가 도망칠 줄 아느냐? 내가 도망칠 생각을 했다면
죽음 터에 들어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1932년 중국 상하이에 건너가셔서 일본 전승기념 축하식장에서
일본군 수장들이 서있는 단상에 수류탄을 투척하셨다
25세의 꽃다운 나이에 일본의 가나자와시 교외에서 총살형을 당하셨다
"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실제 그렇게 당했고, 시신은 머리 몸통 사지 등 6토막으로, 코와 귀도 잘려 있었답니다
만17세 소녀의 마지막 유언은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한국대표들에게 강한 인상을 받은 스테드는 이들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
그리고 이준. 이상설. 이위종에 대한 기사를 평화회의보에 실었다.
회의기간중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매체였던 만국평화회의보 일면엔 한국에 관한 기사가 대서특필된 것이다. 신문에는 한국대표들의 사진과 함께 이위종의 인터뷰내용이 상세히 소개되었다.
우리나라는 36년간 노예생활을 했다
아마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일 것 같은데, 작두로 무참히 참수당합니다ㅠ.ㅠ
위는 빙산의 일각이고 셀 수 없는 만행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한 편
국민은 노예인데, 나라 판 돈으로 이완용의 처는 그 당시에도 호화 생활을!!
출세한 식민사학자 이병도 (이완용의 조카)
2008년 6월 20일 현재 서울대학교 총장
(이장무는 이병도의 손자,이완용의 증손자, 이건무의 친형 )
이건무. 2008년 3월 제4대 문화재청장 임명
(이장무의 친동생, 이병도의 손자,이완용의 증손자)
일본 와세다 대학교 졸업, 3대에 걸쳐 교수가 11명. 문교부 장관, 학술원 회장 역임
학부대신 이완용( 李完用, 1858∼1926 )
경술국치(庚戌國恥)의 주역이었던 매국노의 대명사
△ 소년시절의 이완용
△이완용(1905년~1915년경)
△이완용
△노년의 이완용
△이완용의 처
△2006년 8월에 발견된 이완용의 장남 이승구와 며느리 임걸구의 묘소가
이완용 땅 이었던 고양시 향동동에서 발견되었다.
해방 후 친일행각에 분노한 주민들에 의해 크게 훼손된 후 방치된 상태
△ 이완용의 형인 이윤용(흥선대원왕의 사위이기도하다.)
△ 친일 매국노 이완용내각에 둘러쌓인 영친왕
△ 이완용의 3대 가족사진
△ 판교 이완용 생가터
외무대신 박제순( 朴齊純, 1858∼1916 )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 도장을 찍은 외교책임자
△ 박제순
△ 박제순
△ 이인면 사무소 앞에는 동학농민전쟁 당시 충청도 관찰사였던 을사오적 박제순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 이인면 사무소 앞에는 동학농민전쟁 당시 충청도 관찰사였던 을사오적 박제순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군부대신 이근택 ( 李根澤, 1865∼1919 )
근황주의자에서 친일매국노로의 변신
△ 이근택
△ 충청남도 공주시내 외곽 모처에 있는 이근택의 묘지. 1979년에 조성된 이근택의 묘지를 시작을 4대가 누워있다.
내무대신 이지용 ( 李址鎔, 1870∼1928 )
나라를 판 돈으로 도박에 미친 백작
△ 이지용
△ 이지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權重顯, 1854∼1934 )
친일 한 평생 걸은 대세영합론자
첫댓글 저 중에는 전주이씨도 있다지요..(물론, 모든 전주이씨가 다 잘못된것은 아니지만..)
참고로, 이명박(이 ㄸ ㅂ)이는 경주 이씨, 이회창은 전주 이씨입니다..
이승만은 전주 이씨 양녕대군 후손입니다.. (현 이명박과는 본은 틀리는데 ,다른 부분은 닮은 점도 은근히 많습니다..)
세종대왕(전주이씨),이순신같은 좋은 이씨(한산 이씨)분들도 계시고..
참고로, 일제시대때 국내(조선)지역 성매매춘은 의외로 엄히 (아주 예전에 모 주간지 읽어보니, 일제가 총칼까지 동원해서..)단속했다고 그랬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일제시대 성매매춘등 유흥업에 관해 자세히 아시는 분 계시는지요?.. 사실, 이런것도 역사교과서에서 작게라도 다루어야 한다고 전 봅니다..)
지금은 친일파인 것을 자랑하는 시대인대 . . 친일파 현대좃주영이 밥빌어쳐먹던 쥐세기가 대통령이 됫으니 개한민국이 될일은 뻔하고
삼성이씨 이건희일가도 경주이씨..
참고로 이순신장군은 덕수 이씨 입니다....율곡도 마찬가지 구염...덕수이씨 승지공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