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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일(수)
* 시작 기도
(엡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주님...
주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를 살리셨습니다.
거기에는 나의 어떠한 행위나 의가 1도 가입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은혜로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2:8).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사오니 그 은혜가 오늘도 나에게 임하였습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나의 의는 쓰레기입니다.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성령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성전으로 서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호 2:2-13
제목 :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그를 벌거벗겨서
2 너희 어머니와 논쟁하고 논쟁하라. 그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라. 그가 그의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3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그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그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4 내가 그의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5 그들의 어머니는 음행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 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
6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7 그가 그 사랑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을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그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9 그러므로 내가 내 곡식을 그것이 익을 계절에 도로 찾으며 내가 내 새 포도주를 그것이 맛 들 시기에 도로 찾으며 또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릴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10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사랑하는 자의 눈 앞에 드러내리니 그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11 내가 그의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12 그가 전에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에게 먹게 하리라.
13 그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가 사랑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내가 그에게 벌을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나의 묵상
본문의 시대적 배경은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 말기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삶을 살던 시대였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영적 도덕적으로는 타락하여 점점 더 부패하여 가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평안과 풍요를 깨닫지 못 한다.
오히려 그들이 섬기는 신들이 그 소유물들을 주었다고 하면서 그것들을 우상을 섬기는데 사용한다(5, 8절).
그렇게 음란하고 불의한 이스라엘을 본문에서는 어머니로 묘사하면서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어머니와 논쟁하고 탓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남편으로 이스라엘은 당신의 아내로 관계를 맺으셨다.
하지만 음란하여 남편을 버리고 바알 등 사신 우상에게로 떠난 아내인 이스라엘을 향하여 더 이상 나의 아내가 아니요 또한 하나님 당신은 그의 남편이 아니라고 선언하신다.
그러면서도 자녀들로 하여금 어머니 이스라엘이 음란을 제거하도록,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거하도록 촉구하시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편되신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을 벌거벗기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태어나던 날 벌거벗은 것처럼 수치스럽게 할 것이며, 마르고 황량한 사막처럼 만들어 목이 말라 견딜 수 없게 하시겠다고 경고 하신다.
또한 그가 낳은 자녀들이 부정하여 주님을 떠났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자녀들 역시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음란과 음행을 하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여 가시를 엮어 그가 가는 길을 막고, 높은 담을 쌓아서 그들이 가는 길을 찾지 못하도록 하시겠다고 하신다.
그가 아무리 사랑하는 우상과 신들을 찾아 헤맬지라도 그 우상들을 만나지 못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 길을 막고 그들로 하여금 수치스럽고 비참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그제야 그가 본 남편인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인데 그 때 그가 하는 말이 “내가 내 남편과 함께 있을 때가 좋았구나.” 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고 혹독하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혹독하고 철저한지 보라(3,6,9,10,13절).
그의 심판 앞에서 어느 누구도 거부하거나 이겨낼 자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택한 자에게는 죽이기 위한 진멸이 아니라 징계이다.
따라서 이 심판을 견디는 자는 다시금 하나님의 아내의 자리로, 또한 주의 자녀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의인의 모습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은 그 영혼이 죽었으므로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며, 그는 언제든지 주님을 떠나 쾌락을 좇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그들을 택하셔서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하면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
심판 중의 가장 혹독하고 강력한 심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신 사건이다.
이 사건이 그저 나와 상관없는 예수님의 사건으로만 치부한다면 그 십자가의 은혜는 내 것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십자가가 바로 나의 십자가요 내가 져야 할 십자가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날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생명이 곧 나의 생명이 되며 나 또한 그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십자가와 무덤은 곧 하나님의 심판의 전형이다.
이를 믿음으로 받는 자는 그 심판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 곧 새 생명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자는 여전히 옛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범죄하는 순간 그의 눈이 밝아져 자신의 부끄러움을 보게 되었다.
그는 무화과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가리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피하여 동산에 있는 나무 수풀 사이로 도망가서 숨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아담을 추적하여 찾아 가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직접 그가 입고 있는 무화과 옷을 벗기셨다.
내가 내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는 것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운데 내가 아니라 타인이 나의 옷을 벗기고 벌거벗은 모습을 본다는 것은 수치 중의 수치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무화과 옷을 벗겨내실 때 겪는 아담의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부끄럽고 자신이 비참하여 그 자리를 떠나 아무도 모르는 그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에게 심판을 내리신다.
그 심판은 고통스럽고 혹독하며 철저하다.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심판을 위한 심판, 고통을 위한 심판, 부끄럽고 비아냥거리는 심판자가 아니시다.
그 심판을 통하여 당사자가 비록 부끄럽고 비참하여 죽고 싶을지라도 그것을 감당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그것이 바로 가죽옷의 은혜이다.
이 가죽옷은 짐승의 피를 흘려 얻은 옷이지만, 이처럼 피를 흘려 가죽옷을 내준 짐승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시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흘리신 보혈의 옷이요, 그리스도의 옷이다.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이 옷, 곧 그리스도의 옷을 입을 때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 아니 평안의 호흡을 할 수 있다.
이 안도의 한숨 곧 평안의 호흡은 이제 겨우 살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을 얻은 기쁨의 호흡이요 새 생명의 호흡이다.
오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토록 혹독하게 대하시는 이유는 그들을 죽이거나 진멸하시기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이 새 생명으로 거듭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 심판을 견디는 자가 바로 의인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이 심판을 견디어 낸다.
그 심판이 비록 고통스럽고 숨 쉬기 힘든 고난의 연속일지라도 말이다.
무엇보다 의인들은 그 심판을 기뻐하며 감당한다.
(시 97:8)여호와여 시온이 주의 심판을 듣고 기뻐하며 유다의 딸들이 즐거워하였나이다.
(시 101:1) 내가 인자와 정의(미쉬파트, 심판)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그러나 악인들은 그렇지 못하다.
(시 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하나님의 뜻은 진멸에 있지 않다.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생명)을 얻으리라.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이 범죄하여 하나님과 분리되었으나 하나님의 뜻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금 하나님과 연합되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인 십자가와 무덤을 통하여 새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지는 자가 아니라 그 십자가를 타고 신나게 놀러 다니는 자였다.
십자가의 의미도 모른 채, 그것이 그저 무슨 훈장이나 되는 양 그 십자가를 자랑하되 복음으로써의 십자가가 아니라 나의 인격과 나의 외적인 모습, 그리고 내가 이룬 외적인 업적들을 자랑하는 십자가였다.
예수 믿어서 이처럼 부자가 되고, 이 십자가의 은혜로 내가 이런 자리에까지 올라왔고, 예수 믿어서 내가 여기까지 왔노라고 자랑하는 수단으로써의 십자가였던 것이다.
일견 틀린 말은 아니나 십자가의 은혜는 결코 우리를 부자로만 만들어 주고, 건강하게 만들어 주며, 내가 뜻하는 바를 다 이루어주는 알라딘의 요술램프가 결코 아니다.
십자가는 내가 가장 낮고 천한 자리, 나의 부끄러움을 가리고 보란 듯하게 살던 그 무화과 옷이 찢겨져 가장 수치스럽고 비참한 자리로 내려가게도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수렁에 빠지지만, 그 어두컴컴한 무덤의 자리에서 이성이 아닌 말씀으로, 그리고 그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갈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와 평안 그리고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은 나의 이성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 주님의 뜻을 믿는 믿음은 다름 아니라 주님의 존재 자체이신 말씀이다.
이 말씀이 나를 강권하시며 그 말씀에 순종할 때 내가 비록 고통스러운 무덤의 가장 밑바닥에 처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넉넉히 견뎌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요, 이 복음을 통하여 새 생명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생명은 결국 나로 하여금 이 땅에서 영생을 누리는 은혜와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이런 은혜를 주신 주님께 오늘도 다시 한 번 감사와 찬송으로 영광을 올려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늘 예수 믿어 이 땅위에서 호가호위하려던 자였나이다.
예수 믿어서 복 받는다는 그 말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이 땅, 곧 만물 안에서 가지는 육신적 욕망을 채우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나를 주님은 심판하셨고, 나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으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존재 자체이신 말씀으로 다가오셔서 빛을 비춰주셨나이다.
이제 이 종은 주님의 구속사건으로 이루어진 복음을 통하여 오늘도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나 비록 연약하여 때로는 넘어지고 순간순간 수렁에 빠지기도 하지만, 다시금 일어나서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예수를 힘입는 담대함, 곧 파레시아 때문입니다.
이처럼 연약하고 부족한 종을 당신의 자녀 삼아주셨사오니 이제 음란과 음행 그리고 내 안에서 나를 주장하는 정욕을 제하게 하소서.
주의 십자가에 이런 것들을 못 박아버리고 오직 예수의 심장이 뛰게 하소서.
주의 보혈의 옷을 덧입기 위하여 그동안 나를 보란 듯하게 포장했던 온갖 무화과 옷들은 벗겨 주옵소서.
내가 스스로 벗기가 힘드오니 주의 공의의 심판으로 벗기사 완전한 주의 옷, 그리스도의 옷, 보혈의 옷, 공의의 옷으로 입혀 주소서.
그것이 바로 주의 심판의 은혜입니다.
오직 주의 은혜로만 되오니 나를 은혜의 그릇, 긍휼의 그릇으로 덮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