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선사禪師가 제자에게 말했다.
“신이란 무엇인가?”
제자는 깊게 절을 하고 침묵했다. 선사는 그에게 축복을 내리며 이렇게 말했다.
“좋다. 나는 기쁘구나.”
다음 날 선사는 제자에게 다시 물었다.
“신이란 무엇인가?”
제자는 어제와 같이 더욱 깊게 절을 하고 침묵했다. 이번에는 눈도 감았다. 그런데 선사가 그를 세게 내려치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멍청한 녀석!”
제자는 너무나 놀랐다.
“왜 그러십니까? 어제는 스승님이 기뻐하셨습니다. 똑같은 대답을 드렸고, 어제보다 더 정성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선사가 말했다.
“바로 그 점에 네가 틀린 부분이다. 어제는 어제이고 오늘은 오늘이다. 그런데 너는 똑같은 공식대로 대답할 뿐이다. 지금의 너는 진실하지도 않고 즉흥적이지도 않으며 책임감도 없다. 이제 너는 잔꾀를 배웠다. 그 똑같은 답변이 어떻게 오늘도 옳을 수 있단 말이냐? 스물네 시간이 흘렀고, 이미 강물은 바다로 흘러가버렸단 말이다!”
존재계는 정체된 연못이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역동적인 강물이다. 그 어떤 대답도 고정될 수 없다. 그러나 사회는 그대를 그런 식으로 기만한다. 고정된 답변들을 준다. 고정된 답변들은 딱 한 가지 좋은 게 있다. 그런 정해진 답변들은 그대에게 확실성, 안정성, 안전성을 부여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에 매달리는 것이다. 그대는 자신이 옳다는 확신의 상태로 머물 수 있다. 그러나 삶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그대의 ‘옳은’ 답변들은 고정되어 있다. 그러면 그대의 삶 전체가 불행해진다. 그대가 가진 답변들이 질문들을 해결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대는 평생 둥근 원형의 구멍에 사각 플러그를 꽂으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계속 시도하지만 결국 좌절만 남고 만다. 그 원인은 삶이 변한다는 사실을 그대가 모른다는 데 있다.
진정으로 의식적인 사람은 삶과 함께 변해간다. 진정으로 의식이 깨어있는 사람은 일관성을 유지할 수 없다. 일관성은 평범한 마음의 일부분에 속한다. 나는 그대가 의도적으로 일관적이지 않게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일관성이 어리석다는 뜻이며 과거에 머물고 현재에는 눈먼 상태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대가 진정으로 현재를 바라본다면, 삶과 함께 변해가는 게 마땅하다.
오쇼의 <네멋대로 살아라> 중에서
첫댓글 오쇼의 주장인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그것이 네 마음에 있다'는 주장은 불경의 "변하지 않는 것은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만이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불이(不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3일전에 만난 사람을 다시 만날때는 3일전 만남의 기억을 버리고 만나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미 그 사람은 3일전 사람이 아니고 변해 있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지요. 우리가 나이먹어 늙어가는 것도 낡아서 못쓰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젊었을 때의 빠른 변함에 비해 천천히 느리게 변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도 조금씩 변하고 있는데 그것이 긍정적인 발전으로 변해가기를 소망해봅니다.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