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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쫓겨 무덤에 던져진
열왕기하 17장 1-23
시 작 기 도
나도 내 삶을 주님께 드립니다. 오직 주님만이 필요합니다. 현재 내 상태를 보고 한심하다고 좌절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내 삶을 조정하여 나아갑니다. 나에게 믿음을 부어 주소서. 주님을 더 알게 하소서. 다윗에게 부으신 주님을 향한 마음과 그가 드린 진정한 예배를 나에게도 부어주소서. 그래서 나를 주님의 성전으로 온전하게 세워주소서.
본 문 요 약
호세아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9년을 다스렸습니다. 그는 주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행하였으나, 이전 왕들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왕이 침공하자 호세아 왕은 항복하여 봉신국이 되어 조공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이집트에게 도움을 구하면서 조공을 바치기를 멈추었을 때에 호세아를 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후 앗시리아 왕이 이스라엘 전역에 밀고 들어와 사마리아를 3년간 포위하여 마침내 점령(호세아9년)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끌고 가, 앗시리아 제국의 전체 여러 곳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사 바로 왕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신 주 하나님을 거역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내쫓으신 이방민족들의 관습과 역대 왕들의 잘못을 따르면서 온 지역에 산당과 돌기둥과 아세라 목상들을 세워놓고 제사와 분향을 하는 우상숭배를 한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분노를 산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이스라엘과 유다에 예언자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계속 경고하셨습니다. ‘너희는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서 너희 조상들에게 명하고 예언자들을 시켜서 준 율법과 명령을 지켜라’하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듣지 않고 완고하여져서 주님이 조상들과 맺은 언약과 율법과 경고를 무시하고 헛된 것들을 좇고 금지한 이방민족 풍습을 본받았습니다.
그들은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별들에 절하고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심지어 자식을 불에 제물로 바치고, 복술, 주문 등 주님 보시기에 악한 일들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이스라엘에게 크게 진노하여 그 면전에서 내쫓으신 것입니다. 남은 것은 유다 뿐이었지만, 유다도 이스라엘의 영향을 받아 주님의 명령에서 멀어졌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이스라엘을 징계하여 침략자들에게 넘기셨고 주님의 면전에서 내쫓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집으로부터 갈라졌으며,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아 주님을 버리고 떠나서 큰 죄를 짓고 거기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주님은 그 종 예언자들을 통해 경고하신대로 이스라엘을 그 면전에서 내쫓으시사 앗시리아로 사로잡혀 가 있게 하셨습니다.
본 문 의 뜻
봉신국 위치에 있다가 끝내는 북왕국 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했습니다. 사마리아는 점령당하고 그리고 백성들은 앗시리아로 전역으로 끌려가서 거기서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호세아 왕은 이집트를 의지하여 앗시리아로부터 헤어나려하다가 오히려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심판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악이란 주님을 떠나서 우상숭배를 한 것입니다. 본문은 더 이상 설명하고 언급할 필요없이 그들의 심판을 받게된 죄악의 내용을 나열하고 설명하고 있습니다(7-12절).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주님의 종 예언자들과 선지자들을 보내서 주님의 율법을 지키고 세우신 언약을 지키라고 경고하였음에도 계속 우상숭배에서 돌이키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13-16절). 그리고 그 우상숭배의 죄악의 시작은 다윗의 집에서부터 갈라져 나오고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았고, 그는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 이끌었고 그 백성들과 자손들이 그 죄를 본받았으며 돌이키지 않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참담한 장면입니다.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주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주님이 임재하시는 성막을 소유한 백성들이 그들의 우상숭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언약에 불성실한 판결을 받아 주님 앞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이제는 북왕국 이스라엘은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과 사마리아성은 멸망받아 주님으로부터 끊어진 것입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그들과 비슷하게 우상숭배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도 엄청난 실망감으로 깊이 좌절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인자와 신실(사랑과 성실; 헤세드와 에무트)는 그들의 죄악을 이겼습니다. 그들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그 열쇠는 같은 성경 열왕기하 13장에 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활동하던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에 의해 바알신앙 척결의 지도자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여호와 언약신앙을 남은 자들을 통해서 이어갈 것을 예언하고 보여주셨습니다 (왕상19.15-18). 그래서 예후를 중심으로 바알신앙이 실제로 척결되었고, 그 영향과 개혁이 남왕국 유다에까지 퍼져서 바알신앙척결과 여호야다 제사장의 개혁이 일어나서 백성들은 주님과 다시 언약을 맺고 새롭게 일어 납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상을 척결하고 여호와 언약신앙으로 회복하는 남은 자 신앙을 어어가시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죽음을 맞이할 때 남은 것은 언약신앙의 남은 자가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엘리사의 죽음 장면에 이어 그의 무덤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왕하 13.20-21). 어떤 사람의 주검을 장사를 지내고 있을 때, 갑자기 도적떼의 습격에 놀라서 사람들이 엘리사의 무덤에 그 주검을 ‘내던지고’ 달아납니다. 이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죽은 사람의 주검이 엘리사의 뼈에 닿자마자 그 사람이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선 것입니다. 여기서13장의 본문 ‘내던지다(히, 살라크)가 오늘 본문에 20절 주님 면전에서 ’내쫓기다‘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본문이 연결되는 것을 알리는 열쇠같은 것입니다. 즉, 죽은 자를 살린 엘리사(왕하4.8-37)의 무덤에 ’내던져진‘ 그 사람의 뼈와 엘리사의 뼈가 맞닿는 순간 그 죽었던 사람이부활하듯이, 우상숭배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 멸망받아 적국의 땅에 ’내던져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죽음의 무덤에서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다시 살아날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 이것은 에스겔 37.1-14에서 마른 뼈가 살아나서 큰 군대가 되는 환상을 보이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거기서 그 뼈들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다 라고 선포하시면서, ‘뼈가 마르고 희망이 사라져 망했다고 말하는 내 백성아, 내가 무덤을 열고 너희를 이끌어내고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살게 하고 너희의 땅에 데려다가 놓겠다. 그 때에 비로소 내가 주님인 것을 알고... 나 주는 말하고 그대로 이루는 줄을 알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로 그들을 심판에 처하게 하시지만, 바로 그 심판의 무덤에서 그들에게 부활하는 생명도 계획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 심판의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는 소망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온전히 영원히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고 예수님의 무덤에 내던져져서 같이 장사된 사람은 주님과 뼈와 뼈가 맞닿아 부활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처럼 우상숭배의 죄악으로 멸망받을 우리의 운명을 아시고 새 언약을 선포하셨습니다. (렘31, 겔36) 그 언약의 내용을 요약하면 언약관계를 깨고 실패한 이스라엘이지만 새 언약 아래에서는 그들이 언약을 완전히 지키는 당사자로 회복하여 완전한 언약관계 속에서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우상숭배를 제거하고 새 영을 주어 주님을 경외하게 하고 그 마음판에 율법을 새기고 실천하게 하고 하나님을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이것은 말로만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 장사된 예수님은 엘리사가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 주님과 같이 죽고 같이 무덤으로 내 던져진 자가 예수님과 그 뼈가 맞닿으면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그는 새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그에게 부어진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상숭배의 죄악으로 이스라엘백성들처럼 멸망받을 자가 어떻게 부활하여 새 언약의 완성을 이루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장사복음’입니다. 우상숭배의 죄악을 회개하지 못하여 결국 심판으로 내던져진 자들이 주님의 십자가와 주님의 무덤에 내던져지고 그곳에서 주님과 그 뼈와 뼈가 맞닿아 부활의 능력으로 새 생명을 얻는 과정이 장사복음입니다. 그 과정을 거치면 에스겔37장에서처럼 주님의 새 언약이 말로 만이 아니라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나에게 미치지 않고 그 신비를 느낄 수 없습니까? 그러면 주님과 함께 내가 무덤에 들어가 장사된 것을 잘 묵상해 보십시오. 오늘 말씀이 보여주는 결론에서 음울한 절망을 느끼며 신앙에 회의를 갖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넌지시 비추시는 산 소망을 보십시오. 죄악으로 인해 심판받아 내던져지지만 거기서 부활하는 능력이야 말로 진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입니다. 지금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습니까? 지금이 장사복음을 체험하여 새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할 때입니다.
더 나아가 교회전체가 이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는, 모세와 여호수아의 관계 그리고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능력을 이어받은 엘리사처럼, 모세의 중보와 중재를 이어받은 여호수아처럼,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이어받아야 합니다.
복음으로 우상숭배를 드러내야 하며, 그 죄악으로 인해 심판에 절망하는 사람들을 부활의 능력으로 살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도 새언약안에 영원히 거하며 살아가게 해야 합니다.
나 의 묵 상
(비참함)우상숭배와 죄악으로 인해 이스라엘백성들처럼 심판받을 운명이었습니다. 어떻게 해도 우상숭배가 제거되지 않습니다. 우상숭배는 결국 ‘나’를 섬기는 것인데, 이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내가 죽어야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답은 죄악 가운데 죽어 영원한 심판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보다 더 많이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마찬가지로 우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신앙의 절망이 찾아왔습니다. 우상을 버리기도 불가능하고, 우상숭배로 심판받아 영원한 형벌에 들어갈 두려움 속에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구원)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우상숭배자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이 승리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육신의 ‘나’를 죽음으로 심판하시고, 무덤에 내던져 장사지내게 해 주셨습니다. 나는 그대로 있으나 주님이 실제로 십자가와 죽음과 무덤에 장사되시고 나는 값을 치르지도 않고 그 효과를 누리고 있습니다. 주님이 무덤에서 ‘나’와 뼈와 뼈를 맞대시고 새생명을 불어넣어 주셔서 살리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부활입니다. 부활하시어 성령을 보내시어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나는 더 이상 우상숭배자가 아닙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새언약의 당사자가 되어 주님과 완전한 언약관계 안에 영원히 거합니다. 이것이 나의 구원입니다.
(아버지품)예수님이 주신 새 생명의 힘으로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나는 아버지 품에서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사랑의 언약으로 그 안에 거합니다.
기 도
끊을 수 없는 우상숭배자인 내가 주님과 십자가에 함께 달려 죽고 장사되어 무덤에 함께 들어가 그 주님의 뼈와 뼈가 맞닿아 부활하는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나는 우상숭배자가 아니라 주님의 아들입니다. 주님의 영원한 언약으로 주님의 법을 실천합니다.
주님의 모든 교회들이 십자가와 장사복음을 경험하여 부활의 생명을 얻게 하소서. 이렇게 우상숭배의 죄악을 완전히 처리하게 하소서.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십자가 복음이 온전하게 전파되게 하소서. 무덤에 장사된 후 부활하는 복음을 들려 주소서. 자기(‘나’)를 개선하여 의롭게 만드는 것이 십자가 복음이 아님을 알게 하소서.
마지막때가 가까이 왔음을 깨닫게 하소서. 그러나 전쟁과 기근과 염병과 기후변화 속에서도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거두지 마시고 복음을 더 강력하게 전하게 하소서.
생 명 일 기 (10월 1일 화)
함께 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중요함을 그리고 모든 댓가를 지불하고 우선순위를 조정하여 그렇게 실행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또 모임에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함께 하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잊혀져 있음도 나누었습니다. 우리 신앙은 거룩하게 ‘급진적’이어야한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급진적 삶은 당시에 유대인과 지도자들의 급진적인 종교와 정치와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이 아버지께 집중되어 있어서 당시 사회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웠습니다. 사회에 불만이 있어서 그러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고 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때문에 그려셨습니다. 어찌보면 사회부적응자에 속하셨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정결한 마음과 믿음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기 위한 절제된 삶입니다. 비록 사회와 교회에서 부적응자로 비춰질지라도 그렇습니다. 이제 삶을 다시 조정하여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