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쉬가르에 있는 이드 카Id Kah 모스크. 중국에서 가장 큰 모스크>
1759년 청이 신장 지역을 점령할 당시, 신장의 인구는 약 37만명으로 추산됩니다. 즉 서부의 카쉬가르, 야르칸드, 호탄 등의 주요 도시에 24만(실제 호구조사로는 23만)명, 그리고 동부의 악수, 쿠차 지역까지 합쳐서 37만의 인구가 살고 있었죠. 청이 준가리아 지방을 점령할 때는 대대적 살육이 있었지만, 이 지역에서 청은 종교적 차이라는 문제점에 봉착하게 됩니다.
<다시 한번 올리는 지도>
1. 민간통치
청의 황제는 티베트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전륜성왕-불교를 보호하는 세속군주-이라고 칭함으로써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건륭제 스스로가 독실한 티베트 불교 신자이기도 했죠. 또한 몽골을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도 같은 유목민족으로서 몽골 제국의 권위를 이어받았음을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장 지역은 그러한 방법이 모두 먹히지 않았죠. 기존의 몽골 제국의 권위보다는 이슬람의 권위가 새로운 권력의 원천이 된 신장 지역에서, 이교도인 청의 황제가 통치를 하는것은 어려웠습니다. 특히 기존에 카쉬가리아(신장지역. 청의 점령 이전 이 지역을 말할 때는 이 용어를 사용합니다)를 다스렸던 호자들의 무리가 쫓겨가고, 그들의 수장 부르한 웃 딘의 손자 자한기르(Jahangir)가 1826년 코칸드의 지원으로 신장을 공격할 때 많은 도시들이 이교도인 청의 황제에 반발하여 그에게 협력했죠.
이러한 점때문에 청은 이 지역에서 이원화된 통치를 합니다. 즉 민정(民政)은 현지 지배자들에게, 군정(軍政)은 청에서 파견한 장군들이 담당하게 했습니다. 또한 하미, 우루무치 등 명나라 시절부터 한인의 이주가 많았던 동로 지역은 중국의 다른 지역과 같이 주현(州縣)을 설치하고 섬감총독(陝甘總督)으로 다스리게 했죠. 그러나 새로 정복된 지역은 현지 지배자를 이용해 다스렸습니다.
이러한 현지 지배자 계급으로는 먼저 벡(Beg)이 있습니다. 이는 유목제국의 시대부터 내려오던 칭호로, 이 지역에 있었던 모굴 칸국이 천산산맥 북부의 목초지를 오이라트 등 다른 세력에게 잃고 유목민에서 정주민으로 바뀐 이래에도 계속 내려왔죠. 청 이전 시기 벡이라는 칭호는 특정한 관직명이 아닌 존칭이었습니다.
도시의 무슬림 사무를 총괄하는 하킴 벡(Hakim Beg), 그를 보좌하는 이식아가 벡(Ishikagha Beg), 창고, 재무를 관리하는 카자나치 벡(Khazanachi Beg), 수리시설 등을 담당하는 미랍 벡(Mirab Beg), 이슬람 율법과 재판을 담당하는 카디 벡(Qadi Beg)등 35개의 직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1826년 자한기르의 침입 이후 시골 지역에 대한 통제의 강화를 꾀했던 청조는 이들 벡 중 많은 수를 시골로 가서 통치하게 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의 칭호와 실제 업무는 점차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들 벡은 주로 청의 신장 지배에 협력했던 현지 지배층과 그 후손으로 이루어졌으며, 청의 관품으로는 최대 3품에서 7품에 해당했습니다. 특히 3, 4품의 높은 자리에 있었던 하킴 벡들과 같은 벡들은 자신들의 연고지에서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예로 카쉬가리아 지역(남로)의 주요 도시들의 하킴 벡은 주로 투르판, 하미의 친청 가문에서 나왔죠.
하킴 벡들은 또한 다른 특권과 의무를 지녔습니다. 자기들만의 궁전을 지었고, 술탄, 파디샤(Padisha-페르시아어로 왕), 아미르 알 무미닌(Amir al-Mu'minin)-사실 이 칭호는 칼리프만 칭할 수 있는 칭호입니다-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취했으며, 청조의 관복을 입고 몇 년에 한번씩 북경으로 가 황제를 만나야 했습니다. 또 특이한 점은 신장 지역은 다른 중국과 달리 일반인의 변발이 금지되었는데, 이들 하킴 벡은 변발이 가능했습니다.
벡의 업무를 보좌하는 관리로는 바쉬(Bashi)가 있었습니다. 이들 바쉬는 기존 유목민족의 관습에 따라 십호장-온바쉬(Onbashi), 오십호장-엘릭바쉬(Elligbashi), 백호장-유즈바쉬(Yuzbashi), 천호장-밍바쉬(Mingbashi)라고 불리웠죠. 이들은 각각 일정의 호(戶)를 통제했는데, 물론 백호장이 실제로 100호, 천호장이 실제로 천 호를 담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벡들과는 달리 품계를 받지 못했으며, 토지 등도 제공받지 못한 조력자에 불과했기에 자주 벡 계급과 이해관계가 많은 면에서 달랐습니다. 벡과 바쉬 말고도 다루가(Darugha)라 불리는 직인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통역, 마부, 아전, 전령, 서기 등이었죠.
청은 신장 지역의 종교적 문제에는 거의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현지인들끼리의 종교적인 문제나 재판 등은 청이 개입하지 않고 카디 벡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했으며, 이 외에도 무흐타십 벡(Muhtashib Beg)이라는 벡은 경전 교육, 풍속의 교화 등을 담당하였죠. 1850년 신장을 방문한 발라하노프는 당시 신장에 여전히 이슬람 성직자들의 위계질서가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시기 신장 지역의 경제가 안정되고 농업이 확대되며 인구가 증가하긴 했지만, 이처럼 이원적 통치체제는 주민들의 이중고를 가져왔습니다. 즉 토착 민간 지배계급에도 시달리고 청의 군사 지배층에도 지배를 받아야 했죠. 또한 현지 지배층이 주민의 불만이 있을 때 이를 대표해 주지 못했다는 점은 큰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역할을 맡게 되는건 종교적인 백산당계 수피 장로들이었고, 결국 청과 지속적인 충돌을 가져오게 되죠.
2. 군사통치
<현재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신장의 최고 지배자는 총통이려등처장군(總統伊犁等處將軍)-줄여서 일리 장군-이었습니다. 이들은 청의 종실에서 파견되었으며, 일리 강변의 혜원(惠遠)성에 주둔했습니다. 그 밑에는 세명의 참찬대신(參贊大臣)은 북로의 일리와 타르바가타이, 남로의 카쉬가르에 주둔하면서 군을 지휘했습니다. 동로의 경우는 우루무치 도통(都統)이 일리 장군의 밑에 있는 구조였는데, 동부 지역이 다른 카쉬가리아 지역과 다른 이유는 중국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역사적 배경에 기반한 것이죠.
이들 군사 지배자 대부분은 만주족, 몽골인이었습니다. 1760년부터 1874년까지 신장 지역에 파견되었던 고관 235명을 조사하면 5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만주족, 몽골인이었으며, 그 다섯명도 한족일 가능성이 '있는'것에 불과했습니다. 1884년에 이르러야 한인인 유금당(劉錦棠)이 감숙신강순무(甘肅新疆巡撫)로 임명되죠.
신장 지역의 병사는 두 종류로 나뉘었습니다. 가족을 데리고 와서 사는 병사와 홀로 3~5년만 근무하다 본대로 돌아가는 병사 두 종류였죠. 북로와 동로는 주로 가족과 함께 사는 병사가 많았지만 현지인 인구가 압도적이었던 남로에는 순환 근무를 하는 병사 위주였습니다. 병사들의 출신은 팔기병 출신의 만주인과 몽골인, 녹기병 출신의 한인, 차하르 부와 같은 몽골인과 멀리 흑룡강에서 이주된 만주 부족인 다구르 부, 솔론 부, 시보 부 등이었습니다. 특히 카쉬가르, 야르칸드, 양기히사르 등의 도시에는 500명의 팔기군도 있었죠.
건륭시기에 전체의 54%인 1만 6300명이 북로에, 동로에 25%인 7,400명이 남로에 5~6,000명(17~20%)가 주둔 신장 지역에 약 3만명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남로에 병력이 적은 이유는 현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침략이 있으면 북로의 일리나 동로의 우루무치에서 재빠르게 출격한다는 작전이었죠.
그러나 1826년 자한기르의 침입 이후 청에서 파견된 3만 6천명의 대병력 중 만명이 신장에 그대로 주둔하여 신장 지역의 병력 숫자는 늘어나게 되었는데, 남로의 6천명 정도 되는 병력이 1832년 경에는 1만 수천명으로 늘어 남북양로에 약 4만명, 동로까지 합치면 5만의 병력이 신장에 주둔했습니다. 또한 통신이 오래 걸리는(반란 소식을 접한 뒤 청 지역정부에서 군대를 편성해서 신장 지역에 도착하는데 6개월이 걸렸습니다)등의 문제로 남로의 군대가 대폭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3. 세금
이렇게 신장 지역에 주둔한 군대의 운영비는 신장 지역의 세입으로 해결한다가 기본 원칙이었습니다만, 이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정복 직후 1761년 군기대신(軍機大臣)이 건륭제에게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신장에 주둔하는 1만 7천명의 병력의 봉급 총 33만 3400냥 중 신장 지역에서 충당한 금액은 달랑 5만 8천냥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다 내지에서 충당해와야 했죠.
이후 군대가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내지의 지원액은 더 커졌습니다. 자한기르 침공 이후 군대가 급증하자 내지의 지원비도 더더욱 늘어났는데, 병사 유지비만 140~180만냥이 들었으며, 황실 경비인 내폐금(內幣金)에서 지출되는 비용은 300만냥에 달했습니다. 또한 1840년의 아편전쟁, 1851년부터 10년을 넘게 끌었던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청 내지의 군비가 급증하자 신강으로 가는 지원금은 줄어들었고 결국 이는 신강 지역의 세금을 늘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수많은 지원금은 마제은(馬蹄銀)으로, 또는 신장의 동으로 만든 동화인 풀(Pul)의 유통을 촉진시켰고, 이는 신장의 내부교역과 코칸드 등 중앙아시아의 교역을 촉진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건륭제 시기 신장의 우쉬 조폐국에서 발행한 동화>
http://www.calgarycoin.com/reference/china/china8.htm
<1745년 신장 지역에서 쓰인 풀(Pul)>
http://www.chinaunc.com/SIKANG.htm
이러한 교역의 확대는 신장의 주요한 교역 파트너인 코칸드와 주로 이루어졌고, 교역의 문제를 두고 코칸드와 청은 자주 충돌을 벌였습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참고문헌>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고미츠 히사오 외, 이평래 역, 소나무, 2005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김호동 지음, 사계절, 1999
첫댓글 오오 잘 보고 갑니다..이것도 힌님 게시판 따로만들어서 까페에 저장했으면 하는...ㅎㄷㄷ
이쪽지역문제가 요새 계속 나오니..
오~ 이 지역에 대해서는 그저 '내번(內藩)'으로써~ '이번원(理藩院)'의 감독을 받았고, 훗날 '일리지역'을 놓고 러시아와 분쟁이 일어나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상세한 통치구조와 상황을 알게되어 기쁩니다!!!^^;
흠..상세한 설명 감사드리고 앞으로 연재 기대하겠습니다. ^^
자세한 내용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