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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해김씨 삼현파(판도판서공 휘 관파) 원문보기 글쓴이: 강남
신미년(辛未年, 1691년 숙종 17년)에 김군(金君) 자회(子懷, 김홍복)가 아내를 잃고 스스로 행장(行狀)을 서술하여 나에게 묘갈명(墓碣銘)을 써달라고 요청하였는데, 그 말씀이 슬펐으므로 허락만 해 놓고 미처 저술하지 못하였다. 그 뒤 얼마 안되어 내가 상(喪)을 당하였고 상복(喪服)을 벗은 뒤 몇 년이 되지 않아 김군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김우집(金宇集)이 또 김군의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 묘갈명을 써달라고 요청하였는데, 내가 비록 매우 보잘것없지만 차마 사양할 수 없었다.
김군의 휘(諱)는 홍복(洪福)이고 호는 동원(東園)이며 자(字)는 자회(子懷)인데,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의 후손이다. 7대조 김진손(金震孫)은 교리(校理)로 판서(判書)의 벼슬을 추증(追贈)받았고, 6대조 김영견(金永堅)은 두 번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고, 증조 김희우(金希禹)는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로 사복시 정(司僕寺正)의 벼슬을 추증받았고, 할아버지 김진선(金盡善)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이조 참판(吏曹參判)의 벼슬을 추증받았고, 아버지 김덕승(金德承)은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으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의 벼슬을 추증받았으며, 어머니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현감(縣監) 윤정(尹珵)의 딸이다.
김군은 문예(文藝)가 일찍 성취되어 임술년(壬戌年, 1682년 숙종 8년) 봄에 춘당대(春塘臺)의 정시(庭試)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승문원(承文院)에 선발되어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임하고 실록(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추천을 받아 한림원(翰林院)으로 들어갔다. 병인년(丙寅年, 1686년 숙종 12년)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전적(典籍)으로 옮기었다가 감찰(監察), 예조 낭관(禮曹郞官), 병조 낭관(兵曹郞官), 정언(正言), 지평(持平), 직강(直講)을 역임하면서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고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연경(燕京)에 갔다.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 뒤로 정주 목사(定州牧使)가 되었다가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옮기어 절도사(節度使)와 사이가 좋지 않아 체포되어 귀양 갔다. 이보다 앞서 추천을 받아 영관(瀛館, 홍문관)에 기록되었는데, 곧바로 비복(緋服)을 하사하였으나 시사(時事)가 갑자기 변한 바람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갑술년(甲戌年, 1694년 숙종 20년)에 폐비(廢妃) 민씨(閔氏)를 복위시키고서 특별히 승지(承旨)로 임명하였고 황해 감사(黃海監司), 예조 참의(禮曹參議), 여주 목사(驪州牧使)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김군은 기축년(己丑年, 1649년 인조 27년) 정월 28일에 태어나고 무인년(戊寅年, 1698년 숙종 24년) 6월 29일에 세상을 떠나 양주(楊州)의 치소(治所) 동쪽 율북리(栗北里) 선영(先塋) 임좌(壬坐)에 묻히었는데, 부인과 합장하였다.
김군은 어버이를 섬길 때 지극한 정성이 있었다.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성인(成人)처럼 슬퍼하였는가 하면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고 돌아가시자 게을리하지 않고 슬퍼하다가 야위었다. 젊었을 때 상당히 급한 상황을 잘 판단하여 다스려 평온하게 만들었는데, 항상 말하기를, “도량이 있어야 성품을 함양할 수 있고, 이해심이 있어야 사물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장엄하고 묵중하였다. 자제를 가르칠 때 반드시 행실을 우선으로 삼았고 벗과 사귈 때 친압하지 않았으며, 궁핍한 일가붙이를 구제해 주면서도 생색을 내지 않았다. 문장이 풍부하고 민첩하여 지필(紙筆)을 잡았다 하면 곧바로 완성하였고, 글을 볼 때 한꺼번에 몇 줄씩 보았다. 그러나 항상 겸손하여 아무 것도 잘한 것이 없는 것처럼 하였다. 처음에 기거주(起居注)가 되어 매우 빨리 사건을 기록하여 붓을 날으듯이 놀리자 보는 사람들이 너나없이 칭찬하였다. 대각(臺閣)과 측근에 있을 때 많이 건의하여 바로잡았으나 과격을 일삼지 않고 충후(忠厚)에 힘썼다. 그러나 시비(是非)를 분간하는 데 엄하고 사론(士論)을 부축하려고 마음먹어 비록 귀양을 가게 되어도 회피하지 않았다. 김 청성(金淸城, 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이 입대(入對)하여 청류(淸流) 조지겸(趙持謙) 등 여러 사람을 축출하였을 때 김군이 우사(右史)로 같이 경연(經筵)에 모시고 있다가 나와서 그의 방자한 짓을 말하자, 공훈을 세운 의정(議政)이 그 말을 듣고 임금에게 고해 바쳤다. 그러자 김군이 상소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기를, “신이 전에 없는 잘못된 일을 보고도 월권(越權)이 혐의스러워 붓을 잡고도 말하지 못하였으니, 붓을 잡고 간하는 선배들에게 매우 부끄럽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내한(內翰) 채세영(蔡世英)의 고사(故事)를 인용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거듭 당국자(當局者)의 비위를 거슬려 심리(審理)를 받은 뒤에 관작을 삭탈당하고 축출되었다. 학생(學生) 김성대(金盛大)가 명재(明齋) 윤공(尹公, 윤증(尹拯))을 비방할 때 김군이 사관(史館)에 있으면서 그의 과거볼 자격을 정지할 것을 주장하자, 당시 의정(議政)이 노하여 파직(罷職)할 것을 요청하였다. 현석(玄石) 박공(朴公, 박세채(朴世采))이 차자(箚子)를 올려 임금의 노여움을 촉발하고 조정을 떠날 때 김군이 사헌부(司憲府)에 있으면서 차자를 올려 박공을 간곡히 부를 것을 요청하였다가 특별히 파직되었다. 중전(中殿)이 물러날 때 양곡(陽谷) 오공(吳公, 오두인(吳斗寅))이 동지(同志)를 이끌고 항의의 상소를 올려 죽기로 간할 적에 김군이 그 상소에 연명(聯名)하였다가 연루되어 파직되었고 그해 여름에 안동(安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김군이 복잡한 업무를 잘 처리하여 고을에 임하였을 때 책상에 적체된 문건이 없었다. 정사를 할 때 간이(簡易)와 관대(寬大)를 숭상하였으나 간사한 관리가 또한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정주(定州)에 있을 때에는 풍속이 질박하고 변방에 가깝다고 하여 문교(文敎)를 진작하였으므로 선비들이 비석을 세워 칭송하였고, 여주(驪州)에 있을 때에는 큰 흉년을 만나 구황(救荒)의 정사를 부지런히 펼쳤으므로 고을의 백성이 비석을 세워 추모하였다. 항상 세상 사람들이 허명을 숭상하고 실상을 무시하는 것을 경계로 삼아 명예의 길을 추종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으므로 비방과 칭찬이나 영화에 고생에 대해 담담하였다. 조정의 의논이 날로 엇갈린 것을 보고 더욱더 벼슬할 마음이 없어져 선산(先山)의 밑에다 정자를 지어 ‘침수(枕漱)’로 편액(扁額)을 붙인 다음 언덕과 연못가에 꽃을 심어 놓고 간혹 노닐면서 걱정과 근심을 떨쳐버리곤 하였다. 김군이 이미 현달(顯達)하였으나 수명이 길지 않아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말았으니, 애석하다.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첨정(僉正) 신응징(申應澄)의 딸이다. 단정하고 씩씩하며 민첩하고 자애하여 부덕(婦德)이 잘 갖추어졌으며, 성품이 강하고 깨끗하여 무당이나 요사스러운 것을 멀리 배척하였으며, 고을에 있을 때 자신의 생활이 매우 검소하였고 털끝만큼도 정사에 간여하지 않았는데, 자회(子懷)가 벼슬할 때 근엄한 것은 부인의 내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인이 일찍이 소군(少君) 녹거(鹿車)의 뜻1)이 있어 김군에게 일찍 물러날 것을 권하였는데, 죽음에 임했을 때에 김군이 슬픈 기색을 띠자 부인이 말하기를, “장부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등 하찮은 이야기도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정숙하고 명철한 시누이가 있어 남을 인정한 바가 적었는데, 매양 ‘김군이 훌륭한 내조를 얻었다’고 칭찬하였고, 부인이 죽은 뒤에도 애도해 마지않았다. 4남 3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김우집(金宇集)은 지금 신창 현감(新昌縣監)이고, 둘째 아들 김우채(金宇采)는 세마(洗馬)이고, 셋째 아들은 김우개(金宇槩)이고 큰딸은 박필위(朴弼渭)에게 시집가고 1남 2녀는 어려서 죽었다. 측실(側室)에게서 3녀를 낳아 정의창(鄭義昌), 윤탱(尹樘), 이장휴(李長休)에게 시집갔다. 김우집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김경희(金敬熙), 김성희(金聖熙)이고, 딸은 이해종(李海宗)에게 시집갔다. 김우채는 2녀를 낳았는데 하나는 박씨(朴氏)에게 시집가고, 하나는 이희령(李熺齡)에게 시집갔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아! 자회(子懷)는 모습이 엄숙하고 속에 재능을 간직했는데, 문장은 넉넉히 왕정(王政)을 빛낼 만하였고 지식은 넉넉히 국론(國論)을 조정할 수 있었다. 어찌하여 재상이 되어 조정의 덕을 표시하지 않았으며 어찌하여 장수하여 하늘의 복을 길이 누리지 못하였는가? 자신은 풍족하지 않았으니 후손에게서 징험할 것이도다. 어진 배필과 같이 묻힌 곳 이게 자회의 봉분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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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직 용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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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성 관(판도판서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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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국 -대제학 (50세) 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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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경 목경 익경 항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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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저 수 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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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문 달문 현문 창문 윤문 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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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용 수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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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원 효분 효방 효필 효벽 효장 효전 효순 효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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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 진손(교리) 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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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석 영견(참판공파 參判公派) 영서(횡성공파 橫城公派) 영정(안경공파 安敬公派) 영순(석성공파 파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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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홍 세경 세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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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수 광수 응수 첨수 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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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순 희우(성균관진사) 희남 희경 희복 희율 (6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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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의금부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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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승(金德承)1595∼1658)- 사간원헌납(증, 이조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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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경(청송부사-통정대부) 김홍명 김홍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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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량(온양군수) 김우항 (영의정) 장녀(婚 이행술) 차녀 김우집(현감) 김우채 김우개 장녀(婚박필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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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희 김성희 딸(婚이해종) 郁熙 (6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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亨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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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鉉
묘표는 1716년에 세운 것으로 총 높이 169cm 정도이며 무늬 없는 받침돌 위에 비신(碑身)을 올리고, 그 위로 팔작지붕 모양의 뚜껑돌을 올린 형태이다.
묘갈은 1716년에 세운 것으로 무늬 없는 받침돌 위에 비신(碑身)을 올리고, 그 위로 팔작지붕 모양의 뚜껑돌을 올린 형태이다. 비문은 영의정 최석정이 짓고 글씨를 썼다.
문인석은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입었고 머리부분이 전체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망주석은 꽃잎이 위로 향한 꽃문양과 안상(眼象)문양으로 꾸몄다
김홍복 金洪福 1649(인조 27)∼1698(숙종 24)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회(子懷)이고, 호는 동원(東園)이며, 본관은 김해이다. 아버지는 헌납 덕승(德承)이다. 1682년(숙종 8) 춘당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685년에 봉교가 되었고, 이듬해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해 정언이 되었고, 이듬해 지평으로 승진하였으며 도당록(都堂錄)에 올랐다. 1688년에는 고부사의 서장관으로 청에 다녀왔다. 1694년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며, 이어서 승지·예조참의·여주목사·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시문집으로 『동원유고(東園遺稿)』가 전해지는데, 7권 2책으로 필사본(筆寫本)이다. 그가 죽은 지 200여 년 뒤 후손인 현진(顯眞)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순익(李淳翼)의 서문과 권말에 이기종(李起鍾)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331수, 권2에 『정련록(鼎聯錄)』이라 하여 박태순·이현의 시 56수가 수록되어 있다. 권3에 제문 8편, 축문 11편, 교서·비답(批答)·강량문 각 1편, 조(詔)·잡저 각 4편, 잠 2편, 명 3편, 송(頌) 2편과 권4에 소 32편, 계문(啓文) 16편, 시사(時事) 1편이 있고 권5에 묘표 3편, 묘지 8편, 묘지명·광지(壙誌)각 1편, 광지명 2편이 실려 있다. 권6은 『연행일기(燕行日記)』, 권7은 부록으로 세계·생변(生邊)·사록(事錄)·교서·사제문·제문·만사·비지(碑誌)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규장각도서에 소장되어 있다.
이 중 시에는 최석정·이숙·이의창·남구만·이굉 등이 중국으로 사행 떠나는 것을 전송한 시가 많다. 그리고 과제시(課題詩)인 「화악루(花켍樓)」·「동작대(銅雀臺)」를 비롯하여 윤덕준·유득일·홍가상 등과의 화답시, 그리고 이현조·유성룡·홍계한 등의 시에 대한 차운시(次韻詩)들이 다양하게 실려 있다.
권2의 『정련록』에도 「수마(睡魔)」·「차창려남산시(次昌黎南山詩)」·「춘야연구(春夜聯句)」·「기방중소견잡물(記房中所見雜物)」·「이십팔수체(二十八宿體)」·「육부체(六府體)」·「의한맹성남연구(擬韓孟城南聯句)」·「건제체(建除體)」 등 다양한 시가 실려 있다. 그리고 김해김씨시조릉(金海金氏始祖陵)·왕비릉 등을 대상으로 지은 제문과 헌릉(獻陵)·익릉(翼陵)·장릉(章陵)·숭릉(崇陵) 등의 개축과 교하·평산·이천 등의 향교를 수리한 내력을 기록한 축문이 있다. 또 대작(代作)으로 된 「부체찰사김석주교서(副體察使金錫胄敎書)」와 「영의정유상운삼도정사불윤비답(領議政柳尙運三度呈辭不允批答)」 등이 실려 있어 좋은 자료가 된다. 조(詔)의 「당종천하사수조(唐縱天下死囚詔)」·「송치의창조(宋置義倉詔)」·「한명도화공신기린각조(漢命圖畵功臣麒麟閣詔)」 등과 잡저의 「한부배위상운중수제(漢復拜魏尙雲中守制)」·「한부배제갈량승상제(漢復拜諸葛亮丞相制)」, 그리고 잠의 「무경민사잠(無經民事箴)」, 명의 「목농부명(木農夫銘)」, 송의 「비복즉전공송(卑服卽田功頌)」·「해불양파송(海不楊波頌)」 등과 「대절식어공리판(對?食御供梨判)」 등은 역사적 사실 및 현실적 문제에 접근하여 폭넓은 주제와 다양한 논지를 전개한 것이다. 또 소에는 검열·대교·정언·지평·황해감사·예조참의·승지 등에 대한 수많은 사직소가 있고, 당시의 현실문제를 간간히 언급한 글을 비롯하여 「청소강첨사정후량파직계(請所江僉使鄭后亮罷職啓)」·「청금평군곽삭탈관작지명환수계(請金坪君튞削奪官爵之命還收啓)」·「청경양찰방임대년태거계(請景陽察訪任大年汰去啓)」 등을 포함한 당시 당쟁에 얽힌 관리들의 출척(黜陟)에 관계된 다수의 글이 실려 있다. 그리고 1685년 그가 『갑을록(甲乙錄)』에서 채록한 「한원간통(翰苑簡通)」과 그 외 「재한원시사(在翰苑時事)」 등은 당시의 치열한 당쟁의 면모를 이해하는 데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권6의 『연행일기』는 그가 1688년 10월에 사신의 일행으로 중국에 갔다가 이듬해 정월에 돌아올 때까지 겪은 일과 감상을 적은 것으로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 밖에 부록에는 그의 가계에 대하여 소상하게 서술한 「세계」·「생변」 등과, 왕의 교서를 비롯하여 이덕성·윤증·박세당·최석정 등이 그에 대하여 서술한 글이 있으며 그의 부인인 신씨의 「사록(事錄)」과 「세계」도 수록되어 있다. 묘는 남양주 와부읍 율석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그를 기리는 작은 돌비인 묘갈도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