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旅情에서 상처받은 이야기(2)
韓 吉 洙
공무원이라는 직종은 선망의 대상이 될지 모르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5.16혁명이후에는 조금 나아졌지만 자유당 시절의 공무원들 보수는 겨우 쌀 3말 정도 구매할 정도로 열악해서 시골 본가의 지원을 받아야 생활을 유지 할 수가 있는 한심한 직장이었다. 그러다가 5말, 1가마니 정도의 보수를 받았다. 백성들은 먹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이 있다. 공무원이라고 하는 직종이 아무리 주민에 대한 봉사를 우선으로 하는 직업이라고 할지라도 밥을 굶고 봉사할 수는 없으니 먹는 것만큼은 해결하도록 해줘야 국가의 체면도 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래도 한번 발을 들여놓았으니 일생의 천직으로 알고 성실히 근무하다가 정년퇴임하는 것을 최후의 보람으로 여기며 필자는 하루하루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공직생활 33년의 봉사를 마치고 1993년 말에 정년퇴임을 하였다.
필자는 1976년 6월 17일 총무처에서 시행하는 사무관 시험에 합격하여 초임으로 근무한 곳이 성동구청 민방위과장이었다. 민방위시설(유사시 주민대피시설, 비상 우물 등)의 확충과 관리, 지역과 직장의 민방위대 편성 조직, 예비군 관리, 병사업무 그리고 한강교량 등의 주요시설 경비 등의 업무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처리하던 중에 1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버렸다. 그러자 공무원들 사회에 인사이동의 계절풍이 불어 닥쳤다. 필자와 함께 성동구청으로 발령받은 과장 중에 발 빠른 자는 시청으로 발령이 나서 갔고 또 다른 공직자들도 오고 가고 난리인데 필자는 선천적으로 남에게 부탁하거나 높은 분에게 굽실거리는데 는 문외한이어서 물 흐르는 대로 맡겼더니 누구나 기피하는 부서인 주택과장으로 발령이 났다.
우선 주택과장이라는 자리가 공무원사회에서 왜 기피부서가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첫째로 그 당시 서울의 주거환경은 아주 열악했다. 두 번째로는 주택과는 민원이 많은 부서이었다. 성동구만 하더라도 옥수동과 금호동의 전망이 좋은 높은 곳에는 루핑이나 비닐로 지붕을 덮은 판자 집 등 무허가건물이 난립했고 한양대학 주변의 사근동과 중랑천 변은 무허가 건물로 발을 드려놓을 곳이 없었다. 그러나 이를 손대거나 뜯어 고치는 행위를 엄금했다. 이때 검은 거래가 있을 수 있다. 무허가 건물로 등재되어 있는 무허가건물을 기존 무허가 건물이라 하고 방 한 칸을 늘린다던지 그렇지 않으면 새로 생기는 무허가 건물을 신 발생 무허가 건물이라고 하는데 이를 눈감아 주고 검은 손이 왔다 갔다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기존 무허가건물을 정리하면 아파트 입주권이 아닌 추첨권을 주는데 시민들이 아파트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였으나 물량이 태부족이었던 시대인지라 이 추첨권을 매입하려는 업자들이 수시로 주택과에 들랑거리는데 자주 접하다보면 이들과 어울려 식사도 하고 퇴근 후에 같이 어울려서 소주라도 마시다 보면 이들에게 코가 꿰어 이들이 주인행세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 보니 필자가 주택과장으로 부임하기 직전의 과장은 파면되었고 필자의 후임과장은 촉망을 받는 자인데도 불미스러운 일에 얽혀서 구속되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성동구만의 일이 아니고 서울시내 각 구청의 주택과장 자리가 대동소이한 형편이었다. 그래서 과장들은 주택과장을 기피부서로 낙인찍어 놓았던 것이다.
주택과는 우리인생살이의 3대요소인 衣食住 중의 하나인 주거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로서 20세대 이상의 주거용 건축물의 신축승인, 옥수동과 응봉동에 있는 시영아파트 관리, 무허가 건물의 신 발생 억제와 기존 무허가건물의 철거, 기존 무허가 건물 중 규정에 맞는 주택의 양성화 등의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채소밭으로 유명한 뚝섬지역의 한 농가에서 초가지붕을 기와지붕으로 개량하겠다는 승인 요청이 들어 왔다. 박정희 대통령이 작사하고 작곡했다는 [새마을 노래]중에도 있는 <초가집도 없애고. . . . >하는 바와 같이 초가지붕 개량사업은 거국적인 사업으로서 필자가 부임하기 전해까지만 해도 이 사업을 독려하기위하여 시청에서 각 구청 간에 경쟁을 시키려고 <새마을 필승사업>이라는 평가의 한 항목에 넣어서 한 가구당 20만원씩의 장려금을 지급하면서 까지 독려하고 장려하던 필수사업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옛날부터 있었던 찌그러진 초가집 대부분이 벽을 판축기법으로 세운 흙으로 만든 흙담집이기에 지붕을 뜯으면 벽이 한꺼번에 무너져버려 흙벽돌이나 세멘벽돌로 다시 벽부터 만들어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주택과에서는 집을 다시 짓되 당초의 평수를 넘는지 여부만 감독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채소와 호박을 기르는 허허벌판 뚝섬에 있는 초가는 외국에서 오는 국빈이나 손님들이 주로 이용하던 워커힐 호텔을 왕복하는 길의 가시거리에 있어 청와대와 시청에서 이를 정리하라는 독촉이 성화같은 곳이었다. 이 초가들은 무허가 건물이 아니고 가옥대장에 등재되어 있고 등기까지 되어 있는 건물이어서 함부로 타인의 재산에 대하여 강제철거도 불가한 하나의 혹 같은 존재이었다.
이 문제의 초가건물은 지난해에 장려금을 지급하면서 독려 할 때는 끔적도 하지 않다가 왜 장려금도 없는 해에 신청이 들어왔는지 모르겠으나 일단 접수가 되었으니 사후관리를 철저히 하라는 뜻을 명기한 후 결재를 하고 국장 전결로 승인을 해 주었다.
그런데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더니 하필 이때에 감사원에서 건축과의 건축허가사항과 현장을 대조하는 감사가 나왔다. 그런데 현장을 다니다가 뚝섬 벌판에서 집을 짓는 현장을 목격하고 건축허가증을 제시하라고 하니 <초가지붕 개량승인서>를 제시하는지라 감사원 직원들이 이는 무허가 건물 신축현장이라고 사진을 찍고 수선을 피우더니 정작 건축과의 그 많은 건축현장 조사는 중단을 하고 대어를 낚았다며 구청으로 돌아왔다.
작은 집 잔치에 큰 집 돼지가 죽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거꾸로 큰 집 감사에 작은 집에서 야단이 났다. 주택과에서 승인해준 행위를 불법이라고 걸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갑자기 청천하늘에 날벼락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초가지붕 개량승인한 문서와 현장 사진 등 자료를 몽땅 들고 가서 해명을 했으나 감사 나온 감사관이 고개만 꼬고 앉아서 힘들게 설명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아니하고 동문서답이 아닌 동답서문만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2일간 한다던 건축과 감사를 중단 한 뒤로는 아무소식이 없어 잘 풀리려나? 하는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시청 감사과에서 최종결재권자인 국장은 제외하고 과장인 필자와 정년이 1년 남은 주택계장 그리고 담당직원에게 시청 회의실에서 열리는 징계위원회에 출두하라는 통지가 왔다. 이 징계 건은 사무관인 필자가 낀 징계건 이라서 시청소관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구청 간 경쟁을 시킨 새마을 필승사업 평가자료, 20만원의 보조금 지급대장, 지금까지 해 온 초가지붕 개량사업의 현장사진 등 자료를 모두 갖추어서 징계현장에 출두했다.
그랬더니 어느 위원이 하는 말씀 “왜 무허가 건물을 단속하여야 하는 부서에서 무허가건물을 짓도록 승인했느냐?”고 물었다.
징계위원들은 시청 내 국장들인데 그 중에는 지난해까지 현직구청장을 하신분도 있었다. 그래서 이야기가 통 할 것 같아서 사전에 사진을 보이고 예를 들어 가면서 이는 각 구 공통사항이지 우리 구만의 잘못된 행정은 아니라는 걸 해명하는데 주력했다. 그리고 문제의 건물에 대한 건축물 관리대장도 제시하면서 무허가건물을 봐주는 행정이 아니라는 것도 설명을 하면서 이것은 모든 구청이 다 시행하고 있는 하나의 관행이라고 주장을 했다. 그런데 위원들이 모두 너무나 잘 아는 사항인지라 주택계장의 나이를 묻는 등 별 다른 질문은 없었다. 그래서 잘 처리되려니 생각을 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런 희망사항은 김치 국부터 마신 격이 되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혔다. 옛날에 어느 선비가 서울이 무섭다고 하니 과천에서부터 기어갔다는 말이 있는데 시청의 처사는 현대판 시골선비 역을 하고 있었다. 시의 국장들은 감사원의 요구사항에 대하여는 덥석 엎드리는 예스맨에 불과 하였다. 아니다. 감사원의 요구사항을 무조건 통과시켜주는 통과위원회이었다. 시청의 나으리들이 하는 짓은 정말 가관이었다. 누구보다도 현실을 잘 아는 간부 위원들임으로 하다못해 감사원 처분 요구를 감안하여 징계양정을 조금 낮춰주는 것도 없이 감사원이 처분 요구한 그대로 과장에게는 감봉 3개월, 감봉 6개월이던 계장은 물문처분, 담당직원은 해임처분이 내려졌다. 아마도 정년이 1년 남은 계장은 평생 쌓았던 공적을 감안하여 퇴직 시에 훈장이라도 받고 가라는 얄팍한 선심인 듯 하다. 과부사정은 과부가 잘 안다는 속담이 있다. 시청의 인사위원들은 저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행정통이어서 행정지시사항을 제대로 이행하다가 발생한 하나의 부작용을 자신들도 겪은 사항인지라 잘 이해하고도 남을 처지인데도 이렇게 모질게 묵살하는 처사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아니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괘씸하기까지 했다. 지난해까지 시청에서 다그치고 장려하여 아무 문제없이 처리하던 업무가 법이 개정된 사항도 아닌데 감사원에서 요구한다고 바로 재던 잣대를 구부려 잴 수가 있느냐 이 말이다. 이건 동가식 서가숙東家食西家宿의 줏대 없는 처분이었다.
그래서 필자와 담당직원은 어디다가 하소연 할 곳이 없어서 총무처에 소청심사를 제기했다.
온갖 서류와 사진 등을 갖추어서 소청심사위원회에 제출하고 일구월심日久月深좋은 결과가 있기만을 기다리다가 소정의 날짜에 소청심사위원회에 출석했다.
심사위원들이 우리들의 주장을 다 들어 보더니 마지막으로 더 할 이야기가 없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법과 규정에 따라 열심히 일한 것뿐인데 지난해에는 정당하던 행정이 한 해가 바뀌었다고 다른 잣대를 드리운 다는 것은 행정의 일관성을 벗어난 처사로서 너무나 억울하다고 말 했다. 우리들의 주장을 경청하던 심사위원들 “이 행정의 내용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서울시 징계위원회에서 원안대로 결정을 했으니 우리로서는 뭐라고 이야기하기가 아주 난하다.”는 말을 했다. 그러더니 우리들의 청구를 받아드리지 아니하고 기각했다.
필자는 공무원생활을 하면서 사유서나 시말서 한 장도 쓴 일이 없는데 이 감봉처분의 빨간딱지는 주홍글씨처럼 언제나 필자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필자의 앞길에 커다란 장애역할을 하는 마귀할멈이 되었다. 그러니 우리들은 어디에 가서 이 억울함을 하소연을 하고 답답한 가슴을 열어 보일수가 있는가 이 말이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당하는 사람만 피 말리는 서러움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기가 막히고 원통하고 애달팠다. 끝으로 만인에게 묻고 싶다. 행정이 일관성을 잃고
엿 장사 마음대로 가위질 하는 것 도 타당한 처사인지?
첫댓글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