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1장
너희 가운데서 종교적으로 보이는 어떤 자라도 자기 혀를 제어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마음을 속인다면, 이 사람의 종교는 헛된 것이라.
If any man among you seem to be religious, and bridleth not this tongue,
but deceiveth his own heart, this man's religion is vain
KJV 야고보서 1장 26절
말씀보존학회에서는 religious 와 religion을 종교로 번역하였습니다.
religion
발음미국/영국 [rilídʒən]
뜻① 종교 ② 신앙
religious
발음미국/영국 [rilídʒəs]
뜻① 종교의 ② 신앙의 ③ 독실한
bridle
발음미국/영국 [bráidl]
뜻① 굴레 ② 굴레를 씌우다 ③ 속박
bridleth는 bridle의 고어로 보입니다.
religion에 종교라는 뜻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종교란 여러 종교중에 하나를 지칭하는 것으로 말씀을 종교들중에 하나로 세상에 사람들이 만든 종교들중의 하나로 격하시키는 것이 되므로 기존의 한글개역개정의 신앙, 신앙의, 혹은 경건으로 번역하는 것이 말씀에 적합하다고 보입니다.
이처럼 말씀보존학회의 킹제임스는 개역개정의 번역의 문제가 있는 부분을 문제제기하고 개선하려 하였으나 한글개역개정의 좋은 번역을 오히려 훼손하는 경우가 발생한 것입니다.
[하나님] 곧 [아버지] 앞에서 순수하고 더럽지 않은 신앙 행위는 이것이니
즉 고난 중에 있는 아버지 없는 자들과 과부들을 돌아보고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지켜 더럽혀지지 아니하는 것이니라.
KJV 흠정역 야고보서 1장 26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개역한글 야고보서 1장 26절
흠정역은 신앙으로 개역한글은 경건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믿음의 행위 = 종교 행위라고 번역하는 것은 곧 말씀이 종교중에 하나라는 의미로 읽히게 만드는 것입니다.
믿음의 행위는 신앙생활을 의미하고 곧 그것은 믿음으로 열매맺어지는 경건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혀를 절제하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 곧 양심을 속이는 행위는 그의 경건이 무의미하고 헛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단이나 죄를 합리화하는 자는 하나님이나 사람들을 속이기 이전에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속이는 데 성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이단들은 다른 사람에 의하여 속기도 하지만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스스로가 속이는 것으로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즉 그들의 양심과 마음은 잘못된 것을 알지만 그것을 자신이 나서서 합리화하고
회피함으로 그들의 교주와 함께 같이 망하여 사망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곧 아버지 앞에서 순수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종교 행위는 이것이니, 즉 고난 중에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아보는 것과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흠 없이 지키는 것이라.
히브리서 1장 26절 27절
Pure religion and undefiled before God and the Father is this,
To visit the fatherless and widows in their affliction,
and to keep himself unspotted from the world.
KJV 야고보서 1장 27절
affliction
발음미국/영국 [əflíkʃən]
뜻① 고통 ② 고뇌 ③ 불행
undefiled
발음미국/영국 [Λndifáild]
뜻① 더럽혀지지 않은 ② 순결한
unspotted
발음미국 [ʌnspάtid]
뜻① 얼룩이 없는 ② 반점 없는 ③ 결백한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종교행위보다 신앙행위 또는 경건이 더 좋은 번역입니다.
사실 십일조보다 주일성수는 말씀에서 직접적으로 지키라고 드러나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롭게 완성이 되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우리가 구약에 율법에 매달리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십일조와 주일성수는 구약의 조건에 속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위 말씀이 지키라고 적접적으로 나온 과부와 고아를 돌아보고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지키라고 하신것은 직접 나온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더 지키기 어렵습니다.
고아와 과부들의 고통을 살펴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고 할수 있는 것이지만 이 세상으로부터 흠없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십일조와 주일성수는 형식으로 완성되지만 고아와 과부들의 고통을 살펴보고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흠없이 지키는 것은 본질의 성격에 더 가까워서 쉽고 자유롭지만 동시에 더 어렵고 눈앞에 당장 드러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은혜되는 것은 우리가 신앙과 경건의 행위로 하여야 할것의 최소한을 정해주었다는 점입니다.
만약에 이런 정의가 없다면 우리는 본질의 무거움으로 짓눌렸을 것입니다.
약자의 고통을 돌아보고, 자신을 세상의 죄로부터 분리하는 것 이것이 믿음으로 맺어지는 열매의 최소한이며, 이러한 열매가 있다면 그는 그의 믿음을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부와 고아들의 고통을 to visit라고 하셨습니다.
visit라고해서 그냥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의 양식조차 없는데
너희 중에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라. 몸을 따듯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라."고 하면서 그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히브리서 2장 15장 16절
야고보서는 믿음과 행함에 대해서 정의해주는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행함에 대한 최소한을 정의해주셨으므로
우리가 끝없는 의무에서 벗어나 기본적인 이웃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방법이 제시된 것입니다.
본질의 기초는 작은 행위로 비롯되는 것이며, 본질은 마냥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일부의 형식으로 본질은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은 우리에게 은혜와 평안을 주는 가이드라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에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아서 불안하다면 약자와 자신의 흠을 돌아보는 시작부터 하는 작은 시작이 본질로 믿음으로 구원을 이루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작은 시작은 곧 거대한 영광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작은 본질은 큰 본질과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약자를 돌봄과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인내는 시작과 동시에 마지막이기도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