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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정낭회 演歌村
자유게시판
goldwell 24.08.15 09:12
<오늘은79주년째 광복절입니다>
“1945년8월15일” 누구에게나 그날의 감회가 있을 것이다. 바로 그날 우리 가족 다섯은 오사카 역 대합실에 있었다.
오사카를 목표로 한 공습은 1944년부터 다음 해 8월15일까지 50회 있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1945년3월13일부터 8월 14일까지
8회에 걸친 대공습으로 B29 2,236대가 퍼 부은 소이탄과 폭탄, 그리고 수백대의 무스탕 전투기와 그라망 함재기의 기총소사로 약 15,000명이 죽었고 부상자는 부지기수로 오사카 시내 일대가 폐허로 변했다. 나도 기총소사의 총탄이 1미터 간격으로 옆을 스쳐 지나는 것을 체험했다.
B29는 10,000미터 고공에서 비행하는데, 일본군 고사포의 유효사정거리는 7,000미터이다. 고사포를 쏘아 대지만, B29까지 닿지 않고 밑에서 작열, 불꽃놀이 할 뿐이다. 공습경보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리면 매번 수백대의 B29편대가 날아오는 폭음 소리가 먼 데서 뇌성처럼 들려오고 사람들은 방공호로 숨는다. 그러자 일시에 대도시 오사카는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정적이 흐른다. B29편대가 무차별로 일제히 소이탄을 투하하면, 지상까지 도착하는 몇 십 초는 숨막히는 순간이다.
미공군은 목조건물이 많은 일본에 소이탄을 투하하는 전술을 쓰기 전에, 미국 내에서 일본식 2층 목조가옥을 지어놓고 실험했다. 그 결과 2층에 떨어져 발화하는 것이 효과적이고, 1층에 떨어지면 민간인이 소화하기 쉽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일본에서 제정한 방공법에는 소이탄이 떨어지면 집어 던지거나 물에 적신 거적을 덮어 소화해야 한다고 되어있다. 그러자 미공군은 집어 던질 수 없는 유지(油脂)소이탄을 개발했다. 이것은 떨어지면 바로 발화하고, 불이 붙은 유지가 사방에 튀어 화재를 일으킨다. 결국 이 무모한 방공법은 민간인의 많은 희생자를 낳게 했다. 대화재가 일어나면 오사카시내는 화염에 휩싸이고 연기로 하늘이 어두워지고 한시간쯤 지나면 검은 비가 내리고 지상은 생지옥으로 변한다. 공습경보가 해제되고 방공호를 나와 거리에 나가면 불에 타고있는 건물 그리고 팔 다리를 뻗은 검게 탄 시체가 여기저기 보이고 악취가 코를 찌른다. 무차별 폭격의 원인은 아마도 폭탄 명중률에 있는 것 같다. 제2차대전 당시의 폭탄 명중률은 표적에서 270미터밖에 안 되었다. 베트남전의 융단폭격처럼 투하하면 확실히 효과가 크지만, 무고한 다수의 시민이 희생될 뿐이다.
어느 날밤, 정확히 1945년5월8일 B29 1대가 저공으로 정찰하던 중, 레이더에 포착되어 고사포에 맞아 추락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혼자 집에 있었는데 책을 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 깨 보니 바깥이 환하게 밝았다. 아차, 등화관제를 어기고 전등을 끄지 않았으니 소이탄이 떨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뇌리에 스쳤으나 아무일 없이 없었다. 이튿날 동네사람들이 B29가 떨어진 장소로 구경간다고 하기에 나도 따라갔다. 추락 현장은 집에서 멀지 않은 후세시(布施市)의 한 동네였다. 비행기 잔해가 사방에 흩어져 있고, 엔진이 떨어진 자리에는 작은 연못처럼 크게 패여 기름이 검게 고여 있었다. 탑승병의 찢긴 시체가 여기저기 있고, 구경꾼들은 침을 뱉으며 욕했다. 동체에 그려진 여인의 늘씬한 다리를 보고 저런 정신으로 무슨 전쟁이냐 하면서 비웃었다. 한 명이 낙하산으로 내렸는데 헌병대에서 체포해 갔다고 나중에 들었다. 지금도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우리 가족은 그런 생사를 가르는 와중에도 전쟁 막바지까지 오사카 시내에 버티고 있다가 소개하기로 결정하고 기차표를 구했던 것이 8월15일 오후 1시의 기차표였다. 그래서 그날 12시에 우리 다섯은 오사카역 대합실에 있었다. 장내 방송에서 일왕의 방송이 있다는 알림이 있었다. 대합실은 많은 사람이 붐비고 소음이 커서 일왕의 육성 방송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역 앞 광장에는 여전히 최전선에 나가는 군인들을 환송하는 집회가 있었고, 만세 소리도 들려 요란한 상황이었으니, 방송이 항복 방송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한시간 뒤 우리는1시 기차를 타고 3일간의 기차여행이 시작되었다. 기차는 8월6일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던 히로시마(廣島)를 경유하는 산요선(山陽線)이 복구되지 않아, 동해 쪽에 있는 산인선(山陰線)으로 우회하게 되었다. 기차 안에는 남방전선으로 소집되어 가는 군인들이 많이 타고 있었는데, 좀 지나자 차안에서 항복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군인들은 “그럴 리 없어, 우리가 지금 최전선으로 가는데” 하며 완강하게 부정하고 있었지만 내심 석연치 않은 표정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기차가 의례히 당하는 그라망 전투기의 기총소사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항복이 확실한 것 같았다. 여하간 소개하기로 가재도구를 정리했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대로 산인선의 종점 시모노세키(下關)역에서 내리고 환승 하기 위해 1박하게 되었다. 환승하는 기차는 시모노세키와 모지(門司)를 잇는 간몬(關門) 해저터널을 지나 규슈(九州)로 건너가 구루메(久留米)로 간다. 구루메는 도자기로 유명한 도시로 오이타(大分)시로 가는 규다이선(久大線)의 시발역이다. 여기서 또 1박하고 규다이선 기차를 탔다. 이 3일간의 여행에서 우리 가족 다섯은 볶은 콩 한 되로 견뎌내야 했다(당시 전시 통제로 배급 식량은 주로 대두였다).
드디어 목적지인 오이타켄 구수군(大分縣玖珠郡) 노야(野矢)에 도착했다. 이 역에서 1.5킬로쯤 걸어 들어가야 목적지인 노야 마을이 있다. 가는 산길은 산으로 둘러싸여 하늘 밖에 보이지 않는다. 삼나무가 울창해 낮에도 햇빛이 잘 투과하지 않고, 밤에는 여우 울음소리가 들리는 그런 마을이었다. 거기에 10여 농가가 있었다. 도착하자 오랜 만에 보는 하얀 쌀밥을 앞에 두고, 굶다시피 지낸 며칠 간의 공복으로 위에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 먹을 수가 없었다. 당시 개선(옴)이라는 피부병이 유행했는데 우리 가족도 감염되어 고생했다. 마을 사람들이 온천에 가면 잘 낫는다고 해서 20리쯤 거리에 있는 온천 동네로 산길을 걸어갔는데 길가에도 온천수가 용출하고 있었다. 제법 큰 온천여관 안에 있는 온천탕에 2, 3일 다녔더니 말끔히 치유되어 그 효험에 놀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동네가 유명한 유후인(由布院) 온천의 개발 전 옛 모습이었다.
그렇게 전쟁이 끝난 날에 하필이면 소개하게 되었던 것은 웃지 못할 난센스이다. 어찌되었던 그런 산간벽지에서 벼가 쌀이 되어가는 과정을 알게 된 시골 생활을 몇 개월 보내고 다시 오사카로 돌아왔다. 그리고 4년 후에 귀국했는데 얼마 후 바로 625사변이 터졌다. 돌이켜 보니 전쟁을 쫓아다닌 결과가 되어 내 청소년기는 그런 고난의 시절이었다.
또 하나, 매년8월15일이 되면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 1974년의 광복절기념식전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의 권총으로 박대통령을 저격했다가 함께 단상에 있던 육영수 여사가 피살된 사건이다. 신문에 나온 저격범인 문세광의 이력을 들여다보니 오사카에 있는 구와즈(桑津)소학교를 다녔다고 나와있었다. 구와즈(桑津)소학교는 내가 3학년 때 다녔던 학교로, 같은 학교를 다닌 새까만 후배를 반갑지 않게 신문지상에서 보게 된 것이다. 이 자가 그런 엄청난 사건을 저질은 바람에 착잡한 심경을 느낀 적이 있다.
여담으로 한마디. 해방된 이듬해 교포들이 대대적인 광복경축행사를 오사카 시내에 있는 나카가노시마 중앙공회당(中之島中央公会堂)에서 열렸다. 공회당 안은 초만원으로 경축하는 열기가 대단했다. 그 식전에 당시 일본 가요계를 휩쓸던 인기가수 오바타 미노루(小畑実)가 참석했다. 그런데 식순이 끝날 무렵 돌연 그가 단상에 올라오더니 “저도 조선사람입니다!” 하고 외치면서 한국인임을 밝혔는데 그때까지 일본인으로 알았던 교포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환호했고 나도 열심히 박수 쳤던 적이 있다.
이상이 8월15일을 맞아 생각나는 사건과 해프닝이다.
광복절을 맞으며 gold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