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단편영화제 감상문 패션마케팅 4739232 나은지
<즐거운 나의 집><소행성 325호><2분><쪼다멜로><참!잘했어요>
120분의 감동과 20분의 감동.. 장편이건 단편이건 각각의 스타일이 다를뿐더러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영화적 묘미도 같을 수 없다. 지금까지는 단편을 접할 기회가 없어 쭉 보던 대로 장편만 봐왔다. 사람의 지각능력이라는 것이 참으로 독특하고 묘한 것이라서 그런지, 반복학습의 성과나 농사를 지어 수확을 얻는 것과는 달리 감동은 시간에 좌우되지 않는다. 단 몇 초안에, 반면에 2시간이 지나도 카타르시스를 전혀 느낄 수 없음에서 더 나아가 불쾌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도 있다. 또한 사람에 따라 느끼는 것이 다양한지라 같은 영화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감동을 줄 수 있다. 사람의 눈과 귀는 자신의 관심사에서만 아주 민감해지며 사고하고 논점을 던지기 때문이다. 특히 이것은 의무적인 관람이 아닌 자발적인 오직 즐기기 위한 목적일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감독의 의도보다 더 심오하게 영화를 바라보거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이해하여 오히려 영화를 만든 사람의 말문을 막아서는 사람들을 보면서 20분 30분의 위력을 새삼 실감했다.
미래의 3D(: Digital, Design, DNA)를 향한 이미지 시대인 지금, 모든 것들이 단편영화처럼 보인다. 시각적인 정보를 통해 본질을 재구성하는 것이 바로 이미지의 효과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 까지만 해도 벌써부터 ‘영화’는 관객들에게 막연한 오락이나 흥미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패턴, 본받아야할 모델을 제공했다. 하지만 근대로 갈수록 표면들이 만들어내는 세계, 그리고 그것이 삶의 모델이 되는 세계로 변모하여 사회의 절대적 이념은 사라지고 삶의 기준이나 판단의 척도가 모두 개인의 몫으로 돌아갔다. 이에 따라 각자의 삶의 지표인 신념은 상대화되고 타락해서 유행수준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TV 모회사의 광고용 멘트로 쓰여 유행화되어 마치 사회 전체의 이념인 것처럼 보여 지기도 한다. 즉, ‘소비자는 특수한 유용성에서 이러저러한 사물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적인 의미 속에서 사물의 세트와 관계’하게 된 것이다. 문화적 자본을 통해 자신의 위세를 유지하던 이들이 그 문화적 자본을 잃었을 때에는 속수무책으로 이 코드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영화 하나하나에 대한 생각이나 느낌도 물론 있었지만, 거기에서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다들 생각하는 일반적인 것들 뿐이었고, 내가 이어나가고 싶었던 생각은 ‘ 관람한 5편의 영화(즐거운 나의 집/ 소행성 325호/ 2분/ 쪼다멜로/ 참!잘했어요)가 하나로 엮어 진다. ’라는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이다. 각 시대에 따라 그 시대의 ‘대중적 감수성’이 있다. 지금의 우리들이 학습을 거치지 않고서는 조선시대나 고려시대 등 여타 다른 시대와 문화를 쉽게 이해할 수 없듯이 말이다.
예를 들자면, 아래의 내용을 들 수 있다.
‘팔과 목덜미를 드러내 놓고 거리를 거니는 아라사 미인, 온천물에 철벅거리는 아라사 미인’ ~ ‘안개 깊은 바다 인어의 무리같이 깊숙이 물에 잠겼다가 샘전에 나와 느릿한 허리를 척척 누이는 풍류, 옛적 양귀비의 그것보다도 훨씬 정취가 깊을 것 같다. 창으로 새어드는 햇빛에 비쳐 김 오르는 살빛, 젖가슴, 허리, 배, 두 다리 할 것 없이 백설같이 현란하다. 미끈미끈한 짐승의 무리, 하아얀 짐승의 무리.’ ⌈이효석 전집⌋
위의 내용에 대해⌈대중적 감수성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글쓴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효석이 보여주는 이와 같은 백계 러시아 여인에 대한 도취를 작가의 이국취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위에 인용한 러시아 여인에 대한 관능적인 묘사에서 특징적인 것은 ‘백설’과 ‘하아얀’의 강조다. 이와 같이 여성을 하나의 대상으로 에로틱하게 묘사하는 방식은 1930년 대를 전후해서 신문이나 잡지의 광고나 서양 영화가 불어넣은 서구 이미지의 주입으로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개인의 특이한 이국취향이나 서구지향이 아니다. 이효석으로 하여금 서구를 미의 기준으로 추앙하게 했던 것은 당대 사회의 대중적인 감수성이었다.’
위의 내용처럼 내가 본 단편영화 5편에서도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지금의 현대인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무의식적인 대중적 감수성이 어떤 형태로든 내포되어 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이야기를 전개시켜 본다.
첫 번째)
이야기의 주제들이 하나같이 의지와 무관한 상황들의 반복과 진실의 순간에 대한 가정과 거기에서 오는 여운에 대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런 상황들에 대해 영화는 감독 각자의 개성 있는 시각으로 전개 되며, 하지만 해답은 미로 속에 남겨둔 채 영화는 끝이 난다. 그런 점에서 이야기의 주인공은 완전한 결론을 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두 번째)
영화 속 인물들 각자의 행동이나 말투, 생각 등이 자기 주관적이라는 것과 또한 그런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 부분에서 오는 고통을 받는다. 이것은 즉, 각자가 가진 가치들의 투쟁이주안점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
주인공들이 갈망하는 욕망들의 종류나 그 원인이 사회나 인간의 근본적인 관념에 대한 고찰이나 선악에 대한 것들 이라기보다는 흑백논리를 가릴 수 없는 유형의 것들이며, 이야기의 전개 또한 감독이나 작가 나름대로의 어떤 시사점에 대한 정확한 풀이 없이 관객들과 같이 각자 생각해보자라는 식의 가치중립적, 방관적 형태이다.
이 이야기들 속에서 나는 나름대로의 현대인들의 모습을 본다. 여러 가지 물질적 편리함과 풍족함 속에서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른 수많은 법들도 생겨났지만, 범죄 아닌 범죄는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문제들보다는 인간과 기계적인 물질들과의 문제, 사회적 여러 상황들에 대한 문제들에 더 많이 부딪히게 되었다. 이런 상황들은 현대인들을 혼자 아닌 혼자만의 여러 가지 가치판단의 시험에 들게 하며, 이런 것들은 오직 혼자만의 가치판단에 맡겨지게 되는 것이다.
꼭 범죄라는 가정이 아니더라도 앞서 본 영화의 이야기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즐거운 나의 집에서의 아이가 아픈 상황에서 일터로 나가야만 하는 아버지인 김민기의 범죄는 과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선택 불가능한 행동이었나?’, ‘쪼다멜로에서의 불량고래와의 헤어짐에서 사랑하는 그녀를 다시 잡지 않은 쪼다의 행동은 관객이 알 수 없는 순전히 그의 판단이었다.’, ‘참! 잘했어요 에서 스무 살이 되어 우연히 재회할 뻔한 미자 언니와의 마주침 속에서 울부짓으며 뛰어가던 상황과 그 뒤 수아의 행동은 그녀 자신의 몫인 것이다.’
영화의 시작과 전개에 있어서의 배경은 어쩔 수 없는 사회나 삶의 굴레 속의 흔한 이야기 일지라도 그 속에서의 주인공들의 가치판단에 따라 상황은 역전되고 클라이막스로 치닫는다. 더 이상 예전처럼 영화 속 능력 있는 주인공들이나 또는 영화 속의 사회에서 결말을 제시하거나 선과 악을 구분지어 주지 않는다. 이제 선과 악이 구분되어지는 식상한 스토리의 영웅 영화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물론 오락성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영화에서 이런 부분이 없어진다는 말과는 무관하다. 단순한 스토리의 이야기로는 관객들에게 여운을 남길 수 없음을 뜻한다. 이 시대 대부분의 대중이 가지고 있는 ‘대중적 감수성’은 벌써 그러한 시점을 지났으며 지금의 상황에 알맞은 그들이 요구하는, 즉, 자극 할 수 있는 내용과 요소를 담고 있어야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단편 영화들을 보면서 내가 발견한 현대 사회의 대중들의 단편적인 모습들은 여러 가지 주관적인 가치판단에의 상황속에서 마치 문이 없는 미로 속을 헤매듯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모두들 마치 심각한 탐정들이 되어 빡빡하게 파헤친 느낌들도 없잖아 있었다. ‘유쾌하고 위트있는 영화로 세상을 바라볼 수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물론 가벼운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으면 하는 바램은 아니다.. 또한 영화를 보는 내내 ‘20분,30분 만으로 어떻게 이런 느낌과 생각들을 연출할 수 있었을까?’ 하며 감탄을 했었다. 하지만 누구나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정리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좀 더 다양한 시각에서의 신선한 영화 스토리와 영화 연출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