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먼저 피는 꽃 목련. 3월 21일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찍은 사진이다. photo 이종현 조선일보 기자 |
목련·개나리·벚꽃들이 얼굴을 곧 드러내며 봄의 축제가 시작된다. 서울에서 꽃망울을 제일 먼저 터트릴 봄꽃은 목련이다. 봄의 전령사라고 할까? 목련이 질 때 즈음 개나리가 핀다. 흰색 벚꽃은 노란색 개나리가 꽃잎을 떨어뜨릴 무렵 꽃잎을 비운다. 봄꽃인데도 꽃마다 왜 망울을 피우는 시기가 다를까.
식물이 꽃 피는 시기를 조절하는 과학적 메커니즘은 완전히 밝혀져 있지 않다. 진화생물학자들은 그 이유를 더 많은 자손을 퍼뜨리기 위한 전략으로 보고 있다. 식물은 동물처럼 좋은 환경을 찾아 옮겨 다니지 못하기 때문에 꽃 피는 시간이라도 달리해야 다른 식물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식물은 항상 햇빛, 물, 토양 내 영양분 등의 자원을 얻기 위해 다른 식물과 경쟁한다. 또 수술의 꽃가루를 암술머리에 옮겨주는 곤충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서도 경쟁한다. 따라서 식물은 꽃을 피울 때 새나 곤충의 활동 시기를 고려한다. 자기의 수정을 도와주는 ‘중매쟁이’들의 활동이 가장 왕성할 때 꽃을 피워야만 번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봄에 잎이 나오기 전에 꽃이 피는 목련은 잎으로부터 영양분을 얻지 못해 꽃가루도 적고 꿀도 별로이다. 하지만 다른 꽃보다 일찍 피기 때문에 꽃가루를 퍼뜨릴 곤충을 독차지할 수 있다. 한마디로 먼저 피어난 목련꽃의 탐스럽고 화려한 모습은 중매쟁이 곤충을 유혹하기 위한 전략적 단장이다.
화려한 꽃으로 곤충 유혹
목련은 겨울철에 유난히 꽃눈이 두드러져 보인다. 이 꽃눈들은 두꺼운 털옷으로 미리 갈아입고 그 속에 커다란 꽃망울을 숨긴 채 포근하게 겨울을 보내다 봄이 되면 일제히 꽃망울부터 터트린다. 꽃눈은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라 이미 여름부터 가을까지 준비한 것이다.
이렇게 한 해 전부터 형성된 꽃눈이 개화하기 위해서는 낮은 온도 상태가 필요하다. 겨울 한철 동안의 저온(4℃ 이하) 기간을 거쳐야 꽃을 피우는데, 이것을 춘화(春化) 현상이라고 한다. 목련이 초봄에 꽃을 피우는 이유는 바로 이 춘화 현상 때문이다.
목련이 겨울잠을 깨는 것은 기온 상승에 있다. 바로 온도 인식이다. 주위의 기온이 10℃ 정도의 환경으로 바뀌면 겨울눈의 생장 억제 호르몬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점점 잠의 깊이도 얕아지게 되면서 1∼2개월 후에는 언제라도 눈을 틔울 수 있는 상태가 된다. 하지만 겨울잠을 자기 시작한 목련을 바로 온실로 옮겨서 봄과 같은 조건을 만들어 준다 해도 절대로 금방 깨지 않는다. 겨울철 추위를 겪어가면서 점점 잠을 깨어가기 때문에 겨울이 지난 후에 꽃이 피는 것이다. 춘화 처리를 하면 꽃을 피우게 하는 개화 호르몬 생성이 촉진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꽃이 피는 시기는 햇빛이 비추는 시간으로도 결정된다. 목련이 계절에 반응해 개화를 하는 것은 낮과 밤의 길이(광주기)를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햇빛의 변화에 맞춰 대사를 조절하고, 사계절에 따른 광주기와 온도 변화를 인지해 저마다 일정한 계절에 꽃을 피운다. 광주기성의 감지는 잎에 있는 피토크롬(phytochrome)이라는 감광색소가 담당하고 있다. 낮과 밤의 길이를 광수용체인 피토크롬으로 인지하면 꽃눈의 세포에서 분열이 일어나면서 세포 수가 늘어난다. 또 분열된 세포는 생장을 하기 때문에 조직의 생장이 이뤄지면서 개화를 유발한다.
꽃 피는 시기 개화유전자에 의해 조절
광주기에는 빛(광)과 시간(주기)이라는 두 가지 물리적 개념이 혼재돼 있다. 광을 인식하는 광수용체가 피토크롬이라면, 하루 중 낮의 길이가 짧은지 긴지의 주기를 인식하게끔 하는 것은 생물시계이다. 피토크롬과 주기를 인식하는 생물시계가 결국 식물로 하여금 계절을 인지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광주기에 따라 목련의 개화 시기가 조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생물 시계와 피토크롬에 의해 개화 유전자의 발현이 조절되기 때문이다. 광수용체인 피토크롬에서 빛의 양과 강도 등을 체크하여 그 정보를 개화시기 조절 유전자에 전달하게 된다. 그러면 개화유전자가 온도, 습도, 일조량 등 각각의 요인을 감지하여 꽃눈을 발아시킨다.
꽃이 피는 것에 관련된 유전자는 현재 약 90여종이 알려져 있다. 꽃이 피는 시기는 모두 이들 특정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 이 가운데 피토크롬에서 받아들이는 빛의 양과 밝기를 조절하는 유전자는 ‘PAPP5’임이 밝혀졌다. 피토크롬의 빛 전달 과정에는 인산(燐酸)화 반응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PAPP5 유전자가 인산과 피토크롬이 반응하는 정도를 조절, 받아들이는 빛의 양과 밝기가 달라지도록 한다. 빛이 세포 내로 한꺼번에 너무 많이 전달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인산기가 결합해 활성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FT’ 유전자의 비밀
90여종의 유전자 중 ‘FT’ 유전자가 활성화되면 꽃이 빨리 피고, 그렇지 않으면 늦게 핀다. 미국 솔크연구소의 데트레프 바이겔 박사팀은 식물 유전체에 DNA를 변형시키는 화학약품을 처리해, 인공적인 돌연변이를 일으켰을 때 개화 시기가 늦어지거나 빨라지는 변화를 보이는 돌연변이체를 여러 개 찾아냈다. 만일 어떤 돌연변이체가 꽃이 늦게 핀다면 아마도 개화를 촉진하는 유전자가 고장난 결과라고 추정할 수 있다.
개화 과정에는 여러 유전자가 관여하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유전자들이 개화 조절에 참여하는 이유는 변화하는 외부환경 조건이나 성장상태를 반영해 최적의 타이밍에서 꽃을 피우기 위해서다. 식물이 생식기관인 꽃을 언제 피우느냐는 종이 살아남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FT는 개화과정 네트워크에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 현화식물(속씨식물), 즉 꽃 피는 식물은 모두 FT에 해당하는 유전자가 있다. 목련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유전자가 개화 시기 모두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개화 시기는 대기 온도를 감지하는 유전자끼리의 상호작용도 적용된다. 결국 목련은 광주기, 생장 온도, 춘화(일정 기간의 저온에 노출되어야 꽃을 피우는 생물학적 과정), 개화 유전자의 발현, 식물 호르몬의 조절에 의해 꽃이 피는 시기를 결정해 이른 봄 가장 먼저 피어난다. 탐스러운 목련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소쩍새의 울음소리보다 더 많은 것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