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에 군수물자 댄 현건·현덕승, 오간 편지들 국보 지정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영암 연주현씨 사직공파의 현건(1572~1656), 현덕승(1555~1627)은
민간의 리더로서 충무공 부대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군수 업무를 자발적으로 도맡았다.
충무공의 인척이기도 했기에, 집안살림을 쾌척하는 것은 물론
대동계의 리더로서 나라를 지키기 위한 지역공동체의 수군 지원
조달캠페인을 이끌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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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연주현씨 사직공파 종가 입구에 세워진 충무공의 ‘약무호남 시무국자’ 표석 |
이들은 충무공과 수많은 편지 소통을 했는데,
이순신장군의 친필 편지를 모은 ‘서간첩’은 국보 76로 지정돼 있다.
현씨 가문에서 장군을 후손에게 전해준 이 편지모음은
현재 현충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편지중에는 그 유명한
‘若無湖南 是無國家
(약무호남 시무국가: 호남이 없다면, 나라도 서지 못한다)’는
내용도 기록돼 있다. 종가는 이 글귀를 종택 입구에 큰 표석으로 세웠다.
영암 상대포와 구림마을은 이 고을을 대표하는 찬란한 문명의 국제 전파,
더불어 함께 잘 잘기 위한 대동계의 표상이다.
영암 구림에 입향한 현윤명의 증손자 현건(1572~1656)은 먼저 살고 있던
다른 가문이 창립한 구림 대동계가 전쟁의 혼란 등으로 힘겨워지자,
이를 재건해 동장으로 추대됐다.
종가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수군에 전쟁 물자를 공급했으며,
전후에는 주민의 ‘화민성속(化民成俗·백성을 교화하여 좋은 풍속을 이룸)’과
교육에 힘썼다. ‘연주현씨 사직공파 종가’는 전남 영암군 군서면의
구림마을에 뿌리내려 이웃과 400년 동고동락했다.
연주현씨는 조위총의 난을 평정한 평안도 영변의 호족 현담윤을 시조로 삼으며,
12대손 현윤명(1420~?)은 1450년경 천안에서 영암 구림으로 내려와
3대 현감 집안 난포박씨와 혼맥을 맺으면서 사직공파 종가를 열었다.
당시 구림마을은 진도·완도·제주로 가는 바닷길목이자 일본·중국으로
통하는 국제 포구였던 ‘상대포’를 끼고, 도예 가마터 등 산업단지를 품었다.
‘낭주골 처녀’ 노래에 나오는 낭주최씨를 비롯, 죽정서원의 함양박씨,
서호사의 창녕조씨, 동계정의 해주최씨 등 성씨들이 부락을 이루었는데,
그 중 나주목사를 지낸 선산 임씨 임구령이 입향해 간척으로 조성한
‘지남들’ 농토가 마을의 경제기반이 된다. 선산임씨 장남 임호(1522~1592)와
함양박씨 박규정(1498~1580) 등이 중심이 돼 1565년 구림대동계를 창립한다.
현건이 동장을 맡던 전쟁 후의 구림대동계는 달라진다.
1609년(광해군 원년)에서 1747년 사이에 작성한 구
림동헌(鳩林洞憲)과 동계(洞契) 문서를 보면, 동계규약은
도로 보수·산림 보호·교량 건설 등 전후 복구와 마을
운영 전반에 관한 사항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구림대동계는 사대부의 ‘향규’와 하층민의 ‘촌계’를 일원화해
지역사회 구성원 전원을 참여시켰다는 점에서 혁신적이다.
이같은 민주적 자치체제의 정신은 450여년 지속되고 있다.
현건의 손자로서 광릉참봉을 지낸 현징(1629~1702)은 왕인박사가
배웠다는 ‘문산재’ 서당을 복원하고 학당을 열고
전라도 서남권 인재들을 가르쳤다. 내동리에 있던
취음정을 옮겨지었는데 1678년 영의정 김수항이
‘죽림정’이라 이름짓고 중림정기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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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과 나눔의 뜻이 서린 ‘백성와 화합하고 풍속을 발전시키라’는 의미의 구림대동계의 교훈 표석이 연주현씨 종가에 세워져 있다. |
종택 입구에는 수령 250년된 팽나무 두그루가 대문을 대신하고
대나무, 소나무, 벽오동, 동백나무, 회화나무 등이 죽림정을 포근하게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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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역시 나라도 없었을 것이다 1593년 임진왜란 중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사헌부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 중에 남기신 멋진 글귀로, 호남인에게 자긍심을 심어준 명언으로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역시 나라도 없었을 것이다.] 고향이 충청도인 충무공께서 왜 호남을 극찬한 글을 남겼을까? 임진왜란 당시의 사정을 분석해 보면 각 지방의 의병장들은 주로 향토수비(지금의 향토예비군)를 담당했는데, 유독 전라도의 의병장들은 향토 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김천일(나주출신) 의병장이 진주성을 사수한 것을 비롯해서, 김덕령 장군, 고경명 장군 등이 전 국토방위에 앞장 선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부산이 점령 당한지 20여일 만에 한성이 점령당하자 전라도 의병장 김천일 장군은 지역 의병들을 모집해 진주성을 사수하고, 전라도 관찰사가 권율장군의 의병지원 요청을 받아 들여 전라도 관군과 의병들이 중심이 되어 행주대첩의 대승을 거두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知, 德, 勇을 갖춘 이순신 장군이 23전 23승이라고 하는 불패의 신화를 남긴 이면에는,
거북선을 만든 나대용 군관(나주 출신)을 비롯하여, 남해안 일대의 물때와 물살의 흐름,
지형지세를 꿰뚫고 있었던 전라도 출신 수병(어부 출신)들의 맹활약에
크게 힘입은바 있었기 때문에 충무공으로서는 호남인의 충절과
애국정신에 깊은 신뢰감을 보냈을 것이다. 임란 개전 초 20여일 만에 한양이 점령당하는
(임금은 의주, 평양, 신의주까지 몽진) 참담한 상황에서 전라도만은 軍.官.民 혼신을 다해
호남평야를 지켜낼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전쟁의 필수적 요소인
軍糧米의 조달이 가능했었기 때문에 若無湖南 是無國家란 말이
저절로 충무공 마음에서 우러나왔을 것이다.
임진, 정유의 양란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무훈은 대부분 전라좌수사에서 비롯하여
노량대첩에서 숨질 때까지 다도해 일대에서 세운 점으로 보아 이 고장 호남은
충무공과 가까운 인연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임란 중에 호남출신 의열 만도
그 이름을 남긴 분으로 근천을 헤아리니 호남은 義士의 고향이다.
특히 당인의 모함에 빠져 면사한 무인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靑由曲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한산섬 시름]과 더불어 길이 임진 당시의 애끓는
애국 충신들의 정서를 추모하는 좋은 재료로서 우리의 가슴을 에인다.
[춘산에 불이나니 못 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끝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의 내 없는 불 일어나니 끝물 없어 하노라.]
若無湖南 是無國家也(약무호남 시무국가야)
李忠武公 全書(卷13) 附錄(5) 紀實(上) 서한문(書翰文)편
舜臣每戰勝 輒戒諸將曰 ;勝必驕 諸將愼之 (순신매전승 첩계제장왈 뉴승필교 제장신지)
時賊屢窺湖南 舜臣以爲 國家軍儲 皆靠湖南 (시적루규호남 순신이위 국가군저 개고호남)
若無湖南 是無國家也(약무호남 시무국가야)
先時 賊將平行長 到平壤投書曰 舟師十餘萬 又從西海而來未知 大王龍馭 自此何之
(선시 적장평행장 도평양투서왈 주사십여만 우종서 해이래미지 대왕용어 자차하지)
盖賊本欲 水陸合勢西下 賴此一戰 遂斷賊一臂
(개적본욕 수륙합세서하 뇌차일전 수단적일비)
行長雖得平壤 勢孤不敢更進 (행장수득평양 세고불엄경진)
※ 순신은 언제나 싸움에 이길 적마다 모든 장수를 훈계하되,
사람이 이기기만 하면 반드시 교만이 생기는 법이니 여러 장수들은 조심하라 하였다.
그때 왜적이 자주 호남지방을 노리고 있음으로, 순신은 우리나라의 군비는
다 호남을 의존하고 있는데 만일 호남이 없다면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일찍이 적의 장수 行長(소서행장)이 평양에 이르러 편지를 보내 말하길
수군 10여만 명이 또 서쪽 바다로 올라온다 하니 대왕의 행차는
언제 어디로 갈 것이오? 본래 적의 본심은 수륙으로 합심하여 서쪽으로
내려갈 계획이었는데 이 한 싸움으로 말미암아 적의 한 팔이 끊겼으니
행장 비롯 평양을 차지했지만 세가 고립되어 감히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전라감영은 189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전라북도 도청의 행정업무 공간으로 사용되다가
근대화 과정에서 전라감영 건물 대부분은 없어지고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감사 집무실
선화당도 1951년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었다.
전라감영이 있던 장소는 조선시대 전라도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농민군 자치기구인 집강소의 총본부 대도소가 설치되었던 장소로 2015년
옛 도청 건물을 철거하고 2017년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국가군저계고호남 약무호남시무국가
舜臣以爲 國家軍儲 皆靠湖南(순신이위 국가군저 계고호남)
靠=기댈고.
- 순신은 우리나라의 군비는 다 호남을 의존하고 있는데
若無湖南 是無國家也(약무호남 시무국가야)
- 만일 호남이 없어진다면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국가의 물자가 다 호남에서 나오니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 -이순신
선화당(宣化堂)은 전라감사의 집무처로 '왕명을 받들어 교화를 펼친다' 라는 승류선화
(承流宣化)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주부성내에서는 객사 다음으로 큰 건물이었다.
관풍각은 감사가 정무를 처리하는 제2의 정청으로 감사의 직무인 '풍속과 민정을 살핀다
(관풍찰속, 觀風察俗)'에서유래되었다.
연신당(燕申堂)은 전라감사의 처소로 논어 술이편에 나오는 '자지연거 신신여야 요요여야
(子之燕居 申申如也 夭夭如也), 공자께서 집에서 쉬고 계실 때는 마음이 온화하고
너그럽고 즐거우신 듯 보였다'에서 나온 것으로 경상감영은 징청각(澄淸閣)이라 했다.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을 이끈 권율장군이 전라감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