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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기쁨을 주고 한시름 잊게 하는...
가끔씩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명대사를 접하면 대본 작가님들의 민중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에 감탄하게 됩니다.
“우리 같은 서민들 하루하루의 삶은 위에 앉아있는 분들이 상상못할 정도로 힘겹답니다. 그래서 감동적인 한 편의 연극이나 드라마를 보며 박수를 치고, 대리 만족합니다. 힘겹게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는 백성들에게 잠시나마 기쁨을 주고 한시름 잊게 하는 것이 예인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니 저희 같은 사제와 수도자들에게 주어지는 사명도 막중한 것 같습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영혼을 돌보는 존재로서 전례나 성무를 더 잘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잘 연습된 아름다운 성가로 교우들이 마음을 활짝 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상처입은 마음들을 부드럽게 위로하고 고통 속에서도 힘차게 살아갈 에너지를 제공하는 멋진 강론도 필요하겠습니다. 한명 한명 교우들과 눈을 맞추고 진심으로 환대하고 경청해야 하겠습니다. 더 많은 사랑을 관대히 나눠야 하겠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요한 복음 사가가 그랬습니다. 사도 성 요한 복음 사가는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주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고, 또한 그 사랑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의 인생에 타이틀을 하나 붙인다면 사랑의 사도입니다. 나이든 그는 만년에 말하기 조차 힘들었지만, 그 와중에도 틈만 나면 외친 단어가 사랑이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스승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넘치는 사랑을 듬뿍듬뿍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 어떤 시련과 고통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 뜨거운 사랑 체험을 바탕으로 죽음조차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으며, 그 사랑의 체험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건장한 남성이었던 그가 스스로를 소개하면서 이런 표현까지 썼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이 세상 안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주고받는 사랑은 언제나 한계가 있고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연인들 사이에서 오고 가는 영원할 것 같던 불같은 사랑도 세월과 더불어 식어갑니다. 마치 산같이 든든했던 아버지의 사랑도 초라하고 구차한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이 있으니 바로 주님 사랑입니다. 결국 우리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사랑, 최종적으로 추구해야 할 사랑은 주님 사랑입니다. 영원한 사랑, 불멸의 사랑, 한계가 없는 사랑, 마지막 날까지 변하지 않을 사랑, 오직 주님 사랑 뿐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사람은 자기가 믿는 하느님처럼 이웃을 만난다
어제 외국에 있는 큰형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형은 오랜 냉담 끝에 성당에 다시 나가기로 했는데 고해 때 그 사제가 또 냉담할 걸 뭐 하러 고해하러 왔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르신들에게 하는 행동도 마치 깡패 같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더 죄짓지 않기 위해 다시 냉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본당신부가 바뀌어서 귀국하면 다시 나가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자비이시고 사랑인데, 왜 어떤 신앙인들은 그런 모습이 아니라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일까요? 한 마디로 실제로는 하느님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사도 성 요한의 축일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장 친밀하게 만났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주님, 주님 한다고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누구든 내가 창조자를 만나는 방식으로 이웃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면서 영향을 주고 싶어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은 내가 영향을 받아 성장할 때와 같습니다.
사람은 본 것만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두 발로 걷는 존재를 하나도 보지 못한 아기는 절대 두 발로 걷고 싶은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짐승들에게 키워진 아이들은 하나같이
그것들을 흉내 내지 두 발로 걷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본 것을 따라 하는 것이 가장 쉽습니다.
자신이 사랑이 없는 부모에게 길러졌고, 그래서 항상 불안하고 힘들었다고 해서 자녀를 키울 때
그것과 다르게 키울 수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본 것을 따라 하는 것이 가장 쉽습니다.
그래서 엄한 부모에게 자란 자녀는 엄한 부모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내가 불안한 감정과 억압된 감정을 가지면서도 지금처럼 자랐기에 다른 사람들도 성장하기 위해서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영향을 받을 때 느꼈던 감정을
타인에게도 미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자 한다면 선한 창조자를 만나야 합니다.
영국에서 시작된 퀘이커교가 있습니다. 이단입니다.
세례도 없고 성체성사도 없고 성직자도 없습니다. 그런 종교적 형식 없이도 자기 마음 안에서
하느님의 빛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가슴 깊은 곳에서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체험한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이들은 세상에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존 울먼(John Woolman)과 루크레샤 모트(Lucretia Mott)와 같은 인물은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주요 인물들이었습니다.
자신 안에서 만난 하느님은 자유였기 때문입니다.
또 미국친우봉사회(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와 같은 여러 단체를 설립했는데,
이 단체는 194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들이 만난 하느님은 평화였습니다.
엘리자베스 프라이(Elizabeth Fry)는 교도소 개혁을 한 여성입니다.
영국 지폐에까지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등장합니다.
1800년대 여성이 인권운동을 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못했습니다.
초기의 엘리자베스는 사교 모임을 좋아하고 외적인 삶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으며, 자신이 가진 부와 특권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나눌지에 대한 뚜렷한 의식이 없었습니다.
이런 삶의 방식은 퀘이커 설교자인 윌리엄 세이버리를 만난 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1798년, 세이버리의 설교를 들은 엘리자베스는 깊은 영적 각성을 경험합니다.
엘리자베스는 이 만남 이후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하느님이 계시며, 그분은 그분의 피조물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진실하게 그분을 찾으면 그분을 발견하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체험은 엘리자베스를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1813년, 엘리자베스는 처음으로 런던의 뉴게이트 감옥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본 장면은
그녀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감옥은 과밀하고 비위생적이었으며, 여성과 아이들은 비참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죄수들은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며, 사회는 그들을 완전히 잊은 듯했습니다.
그녀는 단순한 동정을 넘어, 이들이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임을 깨달았고, 그들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습니다.
그녀는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설립하고, 기본적인 위생과 의류를 제공하며, 여성 죄수들에게 재봉과 뜨개질 같은 기술을 가르쳐 출소 후 삶을 준비하도록 도왔습니다. 또한 죄수들과 함께 성경을 읽고 영적 지침을 제공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의회 앞에서 감옥 개혁을 주장하며, 영국 전역의 감옥 환경 개선을 목표로 한 1823년 감옥법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당시 여성으로서 매우 대담하고 특별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단도 진짜 하느님을 만나면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고 자유롭게 하고 평화롭게
하고 사랑을 해 줍니다.
만약 정상 종교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이들보다 못한 존재가 됩니다.
그렇다면 개인적 체험이 중요하고 세례와 성체성사, 고해성사 등은 다 필요 없다는 말일까요?
그들은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을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거의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많은 도움을 받아 하느님을 만나기 더 쉽습니다.
씨앗을 발견하기는 어렵지만, 열매를 찾기는 쉽습니다.
장 발장은 자신에게 촛대까지 내어주는 주교의 사랑에 감동하여 억울한 도둑에서 선하고
정의로운 일을 하는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쫓던 경관은 여전히 도둑은 착해질 수 없다고 믿었고 장 발장에게서 도움을 받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살합니다.
종교는 하느님을 만나게 해 주는 도구이지 그 자체가 구원을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가장 하느님을 만나기 좋은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를 지닌 가톨릭 신자라도 예식에 치중하여 진심으로 가슴에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타인에게 안 좋은 영향만 끼치고 맙니다.
반면 하느님을 사랑으로 만난 사람은 오늘 요한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20,2-8: 부활 날 아침 무덤에 간 제자들
오늘은 사도 요한의 축일이다. 본시 전례는 성탄 다음 날을 성 스테파노 축일로 정하였고 그다음 날을 사도 요한의 축일을 지내게 하고 있다. 스테파노 성인은 교회사에서 첫 번 순교자이시다. 교회는 예수님을 처음으로 생명을 바쳐 증거하신 성인을 먼저 지내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다음 당신의 일생을 통해 그분이 사랑이심을 증거한 요한 사도를 오늘 기리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우리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도 증거해야 하는 것이며, 우리의 삶이 항상 사랑의 삶으로써 증거의 삶이 되어야 함을 말해 주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은 베드로보다 먼저 달려가 무덤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무덤에 먼저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 사도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베드로의 으뜸 수위권이 나타난다. 베드로가 먼저 무덤에 들어가고 자신은 그 뒤를 따라 들어가 주님의 부활을 믿은 첫 사람이 된다. 무덤 안에는 수의가 흩어져 있었는데 예수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한 곳에 잘 개켜져 있었다고 한다. 이 수건은 얼굴에서 치워진 것이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고, 하느님을 만난 모세의 얼굴도 수건으로 가려야 했다. 얼굴이 너무나 빛나서 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얼굴은 인간으로서 관상할 수가 없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봄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으므로 더는 수건이 필요 없게 되었다. 요한은 실제로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고 복음에서 말하고 있다. 이제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영광을 사랑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과 나누었던 친교는 제자들만 누리는 특권은 아니었다. 요한은 이 친교를 전 교회 공동체가 나누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그분과 진정한 친교 안에 살고 있는가? 또 나의 형제자매들과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게 산다면 이것은 우리의 특권이 아니라, 우리가 누리는 이 특권을 다른 사람들도 누리게 하여야 한다. 이 특권은 끝까지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 특권을 계속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매 순간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해 나를 주님 앞에 낮출 수 있는 삶,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을 살고 실천하면서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을 낮추셔서 사람이 되신 그분을 닮을 수 있다. 우리도 성탄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신비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삶 속에서 그분과 나누고 있는 친교의 기쁨이 나의 것으로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이에게 전할 수 있는 사랑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 사도 요한의 축일을 지내는 의미이다. 주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며 우리의 삶을 이어나갈 수 있어야겠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사제 모임이 있을 때, 책 한 권을 들고 갔습니다. 제 옆에 앉은 신부님은 제가 들고 간 책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책 이해가 돼? 나는 도대체 무슨 말 하는 줄 모르겠더라.”
이 신부님은 저보다 훨씬 똑똑하고 책도 많이 읽었지만, 이 책을 읽기가 힘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렵기는 했지만 다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더 똑똑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어쩌면 제가 더 이 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두 이해한다면 굳이 읽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공부를 왜 할까요? 모든 것을 알고 또 이해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고 있고 또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기에 계속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책도 그렇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앎을 갖게 되었다면서 호기심을 가지고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종종 주님을 도대체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주님 믿는 것을 포기해야 할까요? 모르기 때문에 알기 위해 끝까지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노력을 통해 조금씩의 ‘앎’이 자기에게 다가옵니다. 그 앎으로 기쁨과 함께 주님과의 간격이 점점 좁혀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신 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중요한 사건에 늘 요한 사도가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간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에 놀라서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인 요한에게 알립니다. 그리고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빈 무덤을 보고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몰래 다른 곳에 옮겼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이 믿음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직접 평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새겨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예수님께 대한 앎을 키워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우리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 온전히 알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알기 위해 노력하면서 조금씩 알게 됩니다. 이 앎을 통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주님과 더 가까운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노력한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 다 노력을 하였습니다(스티븐 코비).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우리를 사랑하는
하느님의 애틋한 사랑이 없었더라면,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야 했던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이 없었더라면,
우리를 위해
아기 예수님으로 탄생하는 강생으로
우리에게 오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를 위해
병들고 아픈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지 않으셨더라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돌무덤에 누워있지 않으셨더라면,
예수님은 사흘 날 부활하여
이 세상에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분의 부활의 신비를 보고 믿기 위해
애틋한 마음으로 저는 누구보다
더 빨리 돌무덤으로 오늘도 뛰어가겠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사도 요한은
말씀으로
우리 삶을
끌어안습니다.
말씀으로
우리 일상생활이
빛나고 깊어집니다.
살아가는 이시간이
바로 신비입니다.
말씀으로
사도 요한이
간직한 사랑이
하느님께로부터
왔음을 깨닫습니다.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는
말씀의 힘입니다.
생명의 순간들은
이와같이 말씀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은
하느님 사랑입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우리를 우리답게
만들며
십자가의 상처까지
사랑의 놀라운 선물로
변화시킵니다.
요한 복음시가는
말씀으로 힘을 얻는
우리들이길
간절히 바랬습니다.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하느님 말씀을
향해 두레박을
힘껏 던집니다.
삶의 의미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사람이 되신
말씀을 사랑하는
말씀의 자녀들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살아계신 말씀이
샘솟는 성탄의
기쁜 삶입니다.
말씀으로
우리의 가면을
벗어 던집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요한20,4)
'사랑의 사도가 되자!'
오늘 복음(요한20,2-8)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을 목격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부활은 생각 못하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20,2)
그러자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습니다.
성탄 팔일 축제 3일째인 오늘은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요한 사도는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야고보 사도의 동생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이며,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던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성모님을 맡기셨습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1927)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요한 사도, 그것이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예수님 무덤에 다다를 수 있었던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 사도가 쓴 성경이 요한복음과 요한1.2.3서와 요한 묵시록입니다. 요한의 말씀들 안에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체험된 사랑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 체험이 있어야 요한이 전한 말씀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1요한1,1.3)
'우리가 살아야 할 신앙생활의 본질'은 '먼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리고 체험된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4,16)
하느님의 사랑을 먼저 체험하고, 체험된 사랑을 함께 나눕시다!
복음말씀
제1독서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 요한 1서의 시작입니다.1,1-4
사랑하는 여러분, 1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2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3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4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2-8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2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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