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여인의 향기, 진정한 어른에 대하여
오래된 영화지만 시간이 지나도 다시 보고 싶은 영화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여인의 향기〉가 그런 영화입니다.
1992년에 개봉한 영화지만 지금 다시 봐도 마음을 움직이는 장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면 이런 생각이 남습니다.
“진정한 어른이란 어떤 사람일까?”
-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한 사람
프랭크 슬레이드 중령은 한때 당당한 장교였습니다.
하지만 사고로 시력을 잃은 뒤 삶의 의지를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그런 프랭크에게 잠시 아르바이트로 찾아온 고등학생 찰리.
처음에는 두 사람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거칠고 냉소적인 프랭크와 아직 세상을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찰리.
하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조금씩 영향을 주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찰리가 프랭크를 돌봐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오히려 찰리가 프랭크를 다시 삶으로 끌어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찰리를 통해 다시 삶을 바라보다
프랭크는 뉴욕에서 호화로운 호텔에 머물고, 좋은 음식을 먹고, 탱고를 추고, 멋진 여인을 만나면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려 합니다.
하지만 그 여행의 끝에는 자신이 삶을 끝내려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결국 프랭크는 권총을 들고 스스로 삶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그 순간 찰리가 그를 막아섭니다.
찰리는 프랭크에게 아직 살아갈 이유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결국 프랭크는 총을 내려놓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영화 전체에서 아주 중요한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의 삶을 다시 이어준 사람이 바로 자신이 돌봐주던 어린 찰리였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잊을 수 없는 탱고
〈여인의 향기〉 하면 역시 프랭크와 도나의 탱고 장면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이 춤을 출 때 흐르는 곡은 카를로스 가르델의 〈Por Una Cabeza〉입니다.
시력을 잃은 프랭크가 도나의 움직임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오히려 누구보다 능숙하게 그녀를 이끌며 춤을 춥니다.
그리고 이 장면은 단순히 아름다운 탱고 장면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프랭크가 삶을 대하는 태도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실수했다고 춤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이어가는 것.
어쩌면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여인의 향기는 어떤 향기였을까요?
영화 제목이 〈여인의 향기〉인 만큼 향기에 대한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시력을 잃은 프랭크는 다른 감각이 매우 예민합니다.
특히 도나에게서 나는 향을 알아채고, 그녀가 사용하는 비누의 향까지 알아맞히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비누는 Ogleby Sisters soap로 언급됩니다.
강한 향수라기보다는 깨끗하고 포근한 비누 특유의 향기를 통해 여인의 존재를 느끼는 것이죠.
볼 수 없는 사람이지만 향기와 목소리, 움직임으로 상대를 느끼는 프랭크의 모습이 영화 제목과도 잘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apnLMe139g
그리고 프랭크가 진짜 어른이 되는 순간
영화 후반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역시 학교 징계위원회입니다.
찰리는 학교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진실을 말하라는 압박을 받지만 끝까지 다른 학생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결국 교장 트라스크는 찰리에게 퇴학을 권고합니다.
그때 프랭크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찰리를 위해 누구보다 당당하게 이야기합니다.
학교가 가르쳐야 할 것은 단순히 자신의 미래를 위해 다른 사람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함과 용기, 그리고 신념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찰리가 자신의 미래를 위해 다른 사람을 팔아넘기지 않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
오히려 학교가 그런 학생을 벌주려 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합니다.
결국 징계위원회는 찰리를 처벌하지 않고, 사건에 연루된 학생들에게는 보호관찰 처분을 내립니다.
찰리는 더 이상 징계 절차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 프랭크는 단순히 찰리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경험과 힘을 이용해 부당한 상황에 놓인 한 사람을 위해 나서는 진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https://www.youtube.com/shorts/antBHwXbR2s
그리고 프랭크는 쿨하게 떠납니다
학교를 나온 뒤 찰리가 프랭크를 리무진까지 데려다 줍니다.
그때 징계위원회에 참석했던 정치학 교수 크리스틴 다운스가 프랭크에게 다가와 그의 연설을 칭찬합니다.
프랭크는 그녀의 향수를 알아맞히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갑니다.
그리고는 특유의 여유와 당당함으로 그녀에게 다시 만날 것을 제안합니다.
이 장면이 참 프랭크답습니다.
거창하게 자신이 누군가를 구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할 일을 했고, 이제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는 사람처럼 쿨하게 떠납니다.
❤️ 그리고 마지막 장면
찰리는 프랭크를 집까지 데려다줍니다.
프랭크는 집에 도착해 조카의 어린 아이들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영화 초반의 프랭크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삶을 포기하려고 했던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가족과 함께 웃으며 아이들을 맞이합니다.
저는 이 마지막 장면이 참 좋았습니다.
프랭크가 갑자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다시 살아가기로 선택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를 만들어준 사람은 자신이 잠시 돌봐주었던 어린 찰리였습니다.
진정한 어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
〈여인의 향기〉를 다시 보고 나니 처음 봤을 때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예전에는 알 파치노의 강렬한 연기와 탱고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면,
지금은 프랭크가 찰리를 위해 나서는 모습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나이가 많다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위해 나설 수 있고,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고,
자신의 힘을 누군가를 지키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사람.
저는 그런 사람이 진정한 어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프랭크 역시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삶을 포기하려 했던 사람이 찰리를 만나 다시 살아갈 이유를 찾았고,
마지막에는 그 찰리를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 다시 극장에서 보고 싶은 영화
〈여인의 향기〉는 시간이 지나도 다시 극장에서 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알 파치노의 연기는 지금 봐도 강렬하고, 크리스 오도넬이 연기한 찰리와의 관계도 참 좋습니다.
그리고 탱고 장면의 〈Por Una Cabeza, 향기를 통해 사람을 기억하는 프랭크의 모습,
찰리를 위해 학교에서 당당하게 나서는 장면까지 영화 곳곳에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공포나 자극적인 재미가 아니라 사람과 삶에 대한 생각입니다.
“삶을 포기하려던 한 사람이 한 소년을 만나 다시 살아갈 이유를 찾고,
결국 그 소년을 지켜주는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이야기.”
그래서 저는 〈여인의 향기〉를 ‘진정한 어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로 기억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다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다면, 이번에는 또 어떤 장면에서 마음이 움직일지 궁금합니다.
- ‘무드준’의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