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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7월15일 금요일 [(백)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수도회] 변두리에 계신 주님을 사랑으로 모시기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38,1-6.21-22.7-8
† 복음 마태 12,1-8
보나벤투라 성인은 1217년 무렵 이탈리아의 중부 지방 바뇨레조에서
태어났다.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수도자가 된 그는 파리에서
공부한 뒤 파리 대학교 교수로 학문 연구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작은
형제회의 총장으로 선출된 보나벤투라는 자신의 수도회 설립자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전기를 완성하였으며, 철학과 신학 분야의
권위 있는 저서도 많이 남겼다. 1274년 무렵 선종한 그를 1482년 식스토
4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1588년 식스토 5세 교황은 중세의 뛰어난
철학자이자 사상가로 존경받고 있던 보나벤투라 주교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들이대며
시비를 거는 바리사이들과의 논쟁을 통해 그들이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십니다.
법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고, 율법은 사람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규정합니다. 이 법이 우리에게 무섭게 느껴지고 두려움을 줄 때도
있으나, 이 법들은 결국 사람을 옥죄려고 있는 게 아니고 사람을 보호하고,
사람을 하느님께 올바로 이끌도록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나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려는 도구로 사용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협하는 무서운 무기로 돌변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나아가는 영성
생활을 해치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뿐만 아니라,
겉으로는 선한 형태를 띠고 있는 어떤 것도 상대방을 제압하고 나의
선익만을 추구하려고 사용한다면 새로운 형태의 바리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규정보다도,
또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장소인 성전보다도 더 크신 분입니다. 세상의
모든 법규나 성전이 인간을 사랑하시고 위하시는 하느님의 사랑보다 더
클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우리 역시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2016년 다해 7월15일 금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38,1-6.21-22.7-8
복음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8
어느 모임에 참석했다가 저를 당황스럽게 했던 사건 하나가 생각납니다.
이 모임에 참석은 했지만 아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 멀뚱하게 서 있었지요.
정말로 이 자리를 얼른 피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다행히 저를 알아보는 분이 다가오셔서 다른 분들 소개도 받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분들과의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분들이 주로 경영 쪽에 계시는 분이라서
저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를 보셨는지 한 분이 “신부님께서는 이런 이야기가 생소하시죠?
죄송합니다. 우리 다른 이야기를 나눌까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순간에 가만히 있었으면 다른 이야기를 했을 텐데, 이분의 대화를
제가 끊은 것 같아서 이렇게 말하고 말았습니다.
“아닙니다. 저도 관심 있는 부분이라 경청해서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는 척도 하고 가끔 고개도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무슨 관심이
있었겠습니까? 그냥 지나가는 말로 했던 것뿐인데, 이분들은 정말 관심이
있는 줄로 아시고 계속해서 경영에 관한 말씀을 나누십니다. 뭐 아는 것이
있어야 질문도 할 텐데, 아는 내용이 하나도 없으니 그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뭘 물어본다면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할 것이고, 당연히 저의 무지가 들통 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을 간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상황이 우리 삶 안에서 너무나 자주
일어났었고, 그래서 매번 후회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제자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밀 이삭을 뜯어 먹어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밀 이삭을 뜯어서 먹는 것이 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너무
억지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제사 빵을 먹은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이 빵은
사제나 레위인만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따라서 다윗은 죄를 지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사제 아히멜렉은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사람을 돕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제사 빵을 먹은 사건을 바리사이들이 모를 리가 없었지요. 즉,
율법에도 예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확대 해석해서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말합니다.
밀 이삭을 뜯은 것은 추수한 것이고, 먹기 위해 비볐으니 타작의 노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트집을 잡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고, 그 결과 주님의 뜻과 더욱 더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기만 옳다는 억지를 부르면서 거짓과 오류의 길을 향해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했던 제자들만이
주님을 제대로 따를 수 있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기쁨과 슬픔 그 어느 하나라도 부정한다면 삶을 부정하는 것. 그렇기에
기쁨과 슬픔 모두에게 조용히 대답한다. “네.”라고(주디 브라운).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자극이 되는 말
지금 갑곶성지에서는 전국 성지전담사제 회의를 하고 있습니다. 제
소개를 하고 난 후에 몇몇 신부님께서 “빠다킹신부님이 신부님이셨군요.”
라면서 아주 반가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신부님, 신부님 글이 예전 같지 않아요. 예전에는 참 재미있었는데…….”
저에게 자극이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솔직히 16년째 새벽 묵상 글을 써
오면서 약간의 타성에 젖었던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어떤 간절함을
간직하지 못한 채, 그냥 단순히 의무적인 마음으로 매일 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극이 되는 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자극이 되는 말을 들을 때는
어떨까요? 그리 기분은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자기를 변화시키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면 분명히 가장 큰 힘이 되는
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내가 듣는 말에 대해 부정하고 거부하기 보다는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되어 주는 말이라고 굳게 믿어보면 어떨까요? 어떤 말도
소홀하게 여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 보나벤투라 성인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변두리에 계신 주님을 사랑으로 모시기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7월15일 금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
마태 12,1-8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12,7)
Picking grain on the sabbath
변두리에 계신 주님을 사랑으로 모시기
유대인들은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에 율법을 중요시했습니다. 안식일에 관한 유다 율법은 매우
엄격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의
행동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사울 왕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울 때 사제
아히멜렉에게 음식을 구걸하자 달리 아무것도 줄 것이 없었던 사제는
성소의 제사떡을 다윗 일행에게 내어준 일화를 들어 가르치십니다.
존엄한 인간의 생명과 그 인간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율법에 앞서는
것임을 강조하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이 희생제사가 아닌 자비임을
일깨워주십니다. 그렇다고 결코 희생제사 의식을 단죄하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도 율법과 희생제사는 우리를 하느님과 보다 가까이
맺어주기 위한 것이고 그것을 통하여 보다 더 인간다워지고 하느님을
닮을 수 있어야 함을 바라신 것입니다.
오늘의 독서는 우리가 진정 지녀야 할 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임을
알려줍니다. 히즈키야 왕은 범한 죄 때문에 죽어 마땅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엄격한 정의를 적용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왕의
열렬한 기도를 들어주시어 마음을 누그러뜨리시고 그가 살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율법의 본질은 바로 사랑입니다. 따라서 상대방을 자신의 잣대와
편견으로 판단하고 인간을 도외시한 채 문자화된 율법 규정을 지키려
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법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랑의 혼을 지니는
것입니다. 세라핌 박사 보나벤투라 성인은 말합니다.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알려고 하지 마라.”
(Non voglio conoscerti, se non per amarti.) ‘사랑의 일차성’을
강조했던 이 성인을 본받아야겠습니다.
오늘날 이타적 사랑과 사랑에 기초한 인간 존중을 소홀히 여기는 가치
기준의 혼란은 악을 조장하고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영신 생활에
있어서도 살아가는 기준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정한 규칙과 목표를 어김없이 지키면 영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하느님을 자신의 틀 안에 가두고, 예수님을
변두리로 내몰아버릴 뿐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곧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오신 사랑
자체입니다. 이 사랑이야말로 나 자신의 영성생활은 물론이요 가정과
사회생활의 기준과 목표가 되고 한없이 자유롭게 해 줄 것입니다.
우리 모두 교회의 제도나 각종 법규들의 궁극적인 목적과 방향은 하느님
사랑에 바탕을 둔 인간의 존엄성을 살려나가기 위한 것 외에 다른 것일 수
없음을 명심했으면 합니다. 바로 그 사랑을 망각한 채 자기만족이나
자신이 세운 목표에 집착해서 살아간다면 존엄한 인간성도 나의
존재이유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사랑의 혼을 잃지 않고, 형식적인 규범과 제도의 준수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니도록 했으면 합니다. 변두리에서 떨고 계신
예수님을 나를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의 마음으로 내 마음 한복판에,
우리 가정의 안방에, 나의 일터에, 만나는 사람들 한 가운데에 모셔오도록
합시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7월15일 금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이사 38.5)
오늘은 저희 작은형제회의 훌륭한 성인 보나벤투라의 축일입니다.
수도회가 여러가지 내외적 위기에 봉착했읊 때
그의 탁월한 덕행과 지혜로 수도회를 구하여서
제2의 창설자라 불리는 분이십니다.
또한 교회의 개혁과 쇄신을 위해 리용 공의회 준비위원장으로 일하시다
공의회 회기 중에 돌아가신 교회의 큰일꾼이셨습니다.
그는 어릴 때 건강이 아주 안 좋았었는데 어머니가 눈물어린 기도 중에
성 프란치스코가 "좋은 일이 있을지어다"(Bona ventura!)
걱정마라고 격려하고 아이를 축복해 주었답니다.
그래서인지 정말 건강도 회복하였고
수도회와 교회를 위한 큰일꾼이 되었답니다.
오늘 내 주위에
여러가지 이유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이가 있다면 우리도 그를 위해
"보나벤투라!" 하며 격려하고 축복해 주면 어떨까요?
보나벤투라 성인의 전구로 정말 "좋은 일이 있을지어다."
그렇게 기도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Bona ventura!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 8)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7월15일 금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 8)
살아있는 모든 것에는 안식일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저마다를 안식일로
이끌어가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향한 비난을 멈추고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시간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안식일을 통해 생명을 바라보는
시각을 새롭게 수정하게 됩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안에서 안식일을 만나게 하십니다.
안식일의 참된 길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안식일이라는 새 삶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안식일이 있어야 새로운 날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은 우리의 본질적인 삶을
새롭게 일깨워주는 가장 고귀한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시는데 언제나
수시로 변하는 건 우리의 마음입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에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안식일의 기쁨은 단순함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가장 좋으신 사람의 아들과 함께 사랑의 길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의미있는 안식일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사람의 영혼을 기쁘게하는 안식일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습니다.
안식일의 본질은 사람의 아들처럼
진실된 관계를 맺는 사랑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변화와 성화로 우리를 이끌고 계심을 믿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원] 연중 15주간 금요일 - 껍데기를 벗고
2016년 다해 7월15일 금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 마태 12,1-8
저의 동기 신부 하나가 랍스터를 단 한 번 먹어보고 그 이후엔 절대 먹지
않는 사연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 신부가 부자동네 본당에서 제2보좌를 할 때였습니다. 그 신부의
영명축일을 맞이해서 본당 청년들이 신부님께 식사대접을 해 드리겠다고
청했다고 합니다. 그 신부는 학생들이 돈이 어디 있느냐며 거절을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선배 신부인 제 1 보좌 신부님을 통해 청년들에게 잘 좀
이야기를 해 달라고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제 1 보좌 신부님은 신부님이
청년들에게 부담주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니 이해하라고 청년들을
설득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그 신부님은 워낙 럭셔리해서 니들 돈 많이
들걸? 그 신부님은 최고급 호텔 레스토랑 아니면 안 가.”라고 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이 워낙 잘 사는 집 아이들이라 호텔 레스토랑에 랍스터를
예약 해 놓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 신부님은 청년들을 따라 레스토랑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자마자 주눅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몇 개씩
놓여있는 스푼과 나이프, 포크 등을 어떻게 써야할 지 몰랐고, 또 랍스터가
나왔는데 함께 주는 위에는 서로 길이가 다른 가위와 뱀 혀처럼 생긴
꼬챙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서 청년들을 보며 따라하려고 했는데
청년들은 또 신부님이 먼저 드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식은땀을 흘리며 먹고 있는데 이번에는 청년들이 포도주를 시키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어떤 포도주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어? 그냥 다 좋아~”라고 말을 흘렸고 청년들은 자신들이 고른
포도주를 시켰습니다. 웨이터는 포도주를 따고 신부님에게 “테이스팅
하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 어~ 그냥 주세요. 좋은
포도주 같은데...”라고 하였고 청년들은 급기야 자기들끼리 키득키득
대며 웃기 시작하였습니다. 테이스팅은 포도주 숙성동안 공기가 들어가서
맛이 변하지 않았는지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그런 긴장 속에 식사를 마치고 집에 와서 라면부터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결론을 맺었습니다.
“내가 아닌데 그런 척 하려니까 정말 힘들더라. 그냥 음식은 맛있게
먹으면 되는데.”
맞습니다. 본질보다는 형식에 주위를 더 기울이며 살면 인생을 즐기는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 어떤 포도주 전문가가 말했습니다.
“포도주는 마시고 취하면 그만입니다.”
정말 자신을 감추고 잘 보이려고 하는 마음은 자신을 지옥에서 살게
합니다. 특별히 자신을 감추고 잘 보이게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격식을 차리는 것입니다. 상류사회에서 쓰는 언어가 따로 있고 그
사람들이 가는 쇼핑몰이나 레스토랑도 따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자신을 감추는 가식적인 것을 때에는
자신의 삶이 고통스러운 감옥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긁어 비벼서 먹자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이 안식일
법을 어기고 있다고 그들의 스승인 예수님께 따집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며 법의 본질이 중요하지
겉모양을 보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고 또 상황에 따라서는
더 중요한 것을 위해 법도 넘어설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예로, 다윗이 도망 다닐 때 들어가서는 안 될 곳에 들어가고 먹어서는 안
될 것을 먹은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라고 하십니다. 성전은 바로
하느님의 집이고 하느님만이 계시다면 그 성전의 모양이 어떻든 성전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성전은 그 모양이 아무리 아름답고
웅장하더라도 돌무더기에 불과합니다. 성체가 없고 미사가 드려지지 않는
성전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성전의 겉모양이 바로 법입니다. 그러나 그 핵심은 그 안에 계신
하느님이고 예수님인 것입니다. 예수님만 모시고 있으면 그 성전의
모양은 변형되어도 괜찮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그 안에 예수님을 모시지
못하고 그저 가식적으로 보이는 면만을 지켜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율법주의나 형식주의를 저주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열매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예루살렘의 위대한 성전도 저주를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수 없이 복잡한 외형 안에 본질인 하느님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어른들에게 인사 잘 한 다고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인사는 그 어른들을 존경해서 한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칭찬해주니 만나는 어른들에게 인사를 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물론
인사하는 사람을 다 그만큼 존경하고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때보다는 어른들을 더 존경합니다. 하느님은 인사하는 겉모양이
아니라 그 사람 안의 진심을 봅니다.
공자는 덕의 최고의 경지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것들에 그
내용을 채워가다 보면 그 외형과 내형이 같아지는 경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도 더 중요한 것은 겉모양이 아니라 안의 내용인 것입니다. 겉으로
그런 척 하며 살면서 스스로도 자신이 그런 줄 알고 착각하며 사는 것보다,
법도에 어긋나더라도 껍데기를 벗고 솔직한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본질을 완성시켜 나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성 보나벤투라 주교학자 기념일
2016년 다해 7월15일 금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 마태 12,1-8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는 말도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라고 선포합니다. ‘말씀이 빛이었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언어는 인류가 문화와 문명을 키워가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말 한마디 때문에 엄청난 곤욕을 치르기도 합니다. 가정에서
부부싸움이 일어나는 것도 ‘말실수’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유력한
정치인이 ‘말실수’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하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교육정책을 기획하는 사람이 ‘말실수’ 때문에 파문이 있었습니다. 국민을
짐승에 비유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신분제’
를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모든 인간의 권리는 소중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인간은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고, 우리는 모두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첫 번째 본당 신부님을 자상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이들을
포용해 주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에게는 안 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고 그랬습니다. 다만 한 가지 본인에게는 무척 엄격하셨습니다.
하루에도 몇 시간 씩 기도하셨습니다. 신자들이 원하는 것은 가능하면
들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재물에 대해서 청렴하셨습니다. 아주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언제나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저는 잠언의 ‘주사위는 사람이 던지고,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신다.’
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회의 체제와
율법의 규제에 순응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것을 찾았고,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인간이 제도와 조직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조직과 제도는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나병환자, 중풍병자, 소경, 앉은뱅이도 소중한
이웃입니다. 그들의 아픔을 함께하고, 그들이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도, 이방인도, 죄인들도 소중한
이웃입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할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법과 원칙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합니다. 법과 원칙은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것만 잘 지켜져도 우리 사회는 발전하고, 모든
이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또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법과 원칙은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하십니다.
나에게는 엄격하지만 상대방에게는 관대한 법 적용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법의 이름으로, 또는 권위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해
주시려고 하십니다. 남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넓은 마음으로 품어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부처님, 예수님말씀 따릅시다.
2016년 다해 7월15일 금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부처님, 예수님말씀 따릅시다.
말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요즘 깊이 느껴지며 저려옵니다.
정치인들의 위아래, 국민들이나 개개인이 언론자유라며 남용 심합니다.
놔둬보고 믿어줄 사람보다 우선 의심하고 반대하기에 습관 들어버렸죠.
캐고 찌르고 따지고 걷어차고 싸우려는 우리 사회의 진상 무섭습니다.
이제 모두 ‘자비로운 마음’ 갖기 운동하면 어때요? 웃으면 복온다. 듯.
자비롭고 인자하면 못 산다는 생각 말고 부처님, 예수님말씀 따릅시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태오 12,7)”
응원 긍정 믿기 지원 이런 말들이 폐품처리 통에 버려진 지 오래 됐거든요.
이젠 꺼내어 깨끗이 빨아 다시 입읍시다. 실은 우리 민족 정든 옷이니까요.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근본을 잊지마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7월15일 금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 마태 12,1-8
근본을 잊지마라.
가끔은 많은 것을 아는 척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면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무안을 주면 다음부터는 좀 겸손해 질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마음의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고
넘어갑니다. 그야말로 시쳇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그를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을 터인데 잊고 삽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이삭을 뜯어 먹은 행위에
대해서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당시 안식일 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해서는 안 되는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 항의하자 “성전 보다 더 큰이가 여기에 있다”
하시고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이시고 안식일의 주체이십니다. 그러니까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밀이삭을 잘랐다는 것은 안식일에 추수를 하지 말라는 규정을 어긴
것이고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면 타작하지 말라는 조항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손으로 비벼서 후후 불어 껍질을 털어냈다면 키질을 하지 말라는
법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편지를 뜯는 것도 불을 지피는 행위도
금지사항입니다. 닭이 안식일에 알을 낳았다면 그 역시 먹을 수
없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렇게
철저히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한 법이 오히려
올가미가 되고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중요시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요? 사람을 우선시 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관대 하고 소위 힘 있는 사람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엄격해야
하겠습니다.
어느 날 유다인이 살고 있는 이웃에 계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문을
두드려서 나갔더니 자기 집의 가스 불을 꺼 달라고 부탁을 하더랍니다.
가스 불! 자기가 끄면 되지 그런 부탁을 하러 오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안식일이 되기 전 불을 켰는데 끄기도 전에 안식일이 온 것입니다. 불을
지피는 일을 금지하고 있으니 안식일이 다 가기까지 켜 놓을 수도
없고……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부탁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겉모양에 묶여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당신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법조문을 지키기에 앞서 법의 의미와 내용을
살리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이웃에게 자선을 베푼
다음 의식상의 규정을 준수하라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알맹이 보다는
껍데기에 충실해서 야단을 맞았다면 오늘 우리는 알맹이를 빌미 삼아
규정을 무시하고 소홀히 하여 꾸중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주님의 날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찾기 보다는 내 취미와 즐기는
일을 더 우선시 하고 기도와 미사는 뒤로 미루고 있으니 말입니다.
주님의 날은 주님과 함께 쉬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면 거룩함이 넘쳐나게 되고 이웃도 우리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폼 잡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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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포함하여 용서, 그리고
가지치기를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예수님을 찾으면서 기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그것은
성사에 다가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체성사, 고해성사 말입니다. 쉽지
않은 이것,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분이 하신 것을 행하는 것을
뜻하고 예수님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들은 ‘무덤에 묻어버릴 때’, 예를 들어서 그들에
대해서 나쁘게 말할 때, 뒤에 이야기할 때 우리는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런 것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짓말을 할 때 우리는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이런
거짓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모든 이에게 있을 수 있는 이 더러운 짓으로 다른 사람들을 속일 때
우리는 죽음의 가지들이 되고 그분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분이 하셨던 것과 같은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 다른 사람을 돕는 것,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것,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성령의
기쁨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오스티아 평화의 모후 성당, 2015, 5 3).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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