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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5. 묵상글 ( 부활 제6주일. - 위에서 오는 서로 사랑.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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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5. 부활 제6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5.05 05:55
- 위에서 오는 서로 사랑
오늘 독서에서 요한은 하느님에 대하여 또 사랑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선언이랄까 말을 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이라고 요한이 얘기하는데
제 생각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가 말하는 대로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하느님이 창조한 모든 존재는 사랑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다만 그 사랑이 매우 작거나 크거나 차이가 있고,
사랑의 수준이 낮거나 높거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밖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자기 가족밖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자기 나라밖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자기 민족밖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자기 종교밖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을 사랑할 수 없어 동물이나 사랑하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이것보다는 수준이 높아 휴머니즘적인 인류 사랑을 추구하지만
아직 하느님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서로 사랑’이고,
그래서 저는 오늘 나눔의 주제를 이렇게 잡았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서로 사랑’
풀어서 얘기하면 위에서 오는 사랑을 받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고,
수직적 사랑과 수평적 사랑이 잘 조화를 이루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곧 위로부터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야지만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요한의 권고를 온전히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사도행전의 얘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나는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십니다.
베드로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성령께서 내리셨다.”
어떤 차별도 하지 않고,
어떤 배제도 하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렇게 벽을 허물 때 성령께서 임하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성령을 사랑의 성령이라고 하고,
“오소서 성령이여” 라고도 하지요.
그렇습니다.
어떤 차별도 배제도 없는 하느님 사랑을 우리가 하려면
위에서 오는 성령의 사랑 없이는 할 수가 없는데
위에서 오는 성령을 받기 위해선 우리가 열어야 합니다.
성령의 오심과 우리의 엶이 상호작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냄비의 뚜껑을 열지 않고 국을 받으려고 하거나
창의 커튼을 열지 않고 햇빛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되듯,
그리고 물동이도 없이 내리는 비를 받으려 해선 안 되듯,
우리를 여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주머니를 여는 것보다
나를 여는 것임을 다시 한번 가르침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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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5. 부활 제6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요즘에 스마트폰을 이용하면 거의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재미있는 것도 참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습니다. 사실 미사 때에도 스마트폰에 열중하는 사람을 보곤 합니다. 어떤 청소년의 경우 미사 내내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더군요. 본당 로비에 앉아 열심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청소년에게 “만약 스마트폰이 없으면 어떻겠니?”라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절대 안 돼요.”
캠프에 가서 스마트폰을 반납해야 한다면 캠프 자체를 가지 않겠다고도 이야기합니다. 스마트폰이 그리 대단한 것 같지 않은데 여기에 목숨 걸듯이 하는 모습에서 걱정도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런 모습에 대해 내면을 향하기보다는 다른 방향이나 외부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면은 전혀 보지 않고 외부에만 관심을 두는 모습에서 참 행복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모두 내면을 향하고 있습니다. 사랑, 평화, 믿음, 희망…. 모두 내면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내면이 튼튼해질 때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계속해서 보이지 않는 내면보다는 보이는 외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외적으로 화려하고 풍요로워야 행복한 것처럼 말합니다. 커다란 착각입니다. 외적인 것에 대한 만족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어느 정도 있으면 충분하다고 말하지만, 그 충분한 액수에 도달하면 더 갚고 싶어 합니다. 스마트폰도 한 시간만 하면 충분할 것 같지만, 한 시간이 지나면 그 시간이 너무 짧다고 말합니다.
내면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면,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명령을 내리십니다. 이 사랑은 겉으로 보기에는 실천하기 힘들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큰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사랑받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2)
우리의 내면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사랑. 그 사랑은 받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사랑해야만 합니다. 말로만 사랑한다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행동하는 사랑을 통해 진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내 내면을 더 풍요롭게 만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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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고 내 영혼의 선장이다(윌리엄 어니스트 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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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5. 부활 제6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부활 6주일입니다. 그리고 ‘생명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모든 선물의 기초가 되는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선물을 받습니다. 곧 ‘그리스도를 통해 베풀어진 아버지의 사랑’을 선물로 받습니다.
<제1독서>는 그 선물이 ‘성령을 통하여’ 유대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들에게 베풀어지는 선물임을 보여줍니다(사도 10,44-46).
<제2독서>에서는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것”(1요한 4,10)을 말하며, 우리의 “사랑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1요한 4,7)임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다락방에서의 유언 말씀을 통해서, 당신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장면입니다.
그것은 먼저 당신의 놀라운 사랑의 선포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참으로, 놀라운 사랑의 선포입니다. 이는 첫째는 우리가 이미 사랑받았다는 선포요, 둘째는 그 사랑의 원천이 아버지의 사랑임을 선포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사랑을 받아먹은 존재들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 호의와 자애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미 받은 사랑인,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곧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라고 하시면서,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 안에 하나 되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고,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요한 15,11 참조)이라고 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계명을 선포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되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하지 말고,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 본보기로 보이셨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성부에 대한 지고의 사랑의 표현이면서(요한 14,30), 동시에 당신의 친구로 삼으신 이들에 대한 사랑의 절정(요한 13,1.13)이기도 합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동시에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 그것은 친구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알려주고 흘러들게 하는 사랑입니다. 바로 이 사랑이 제자들이 실천해야 하는 사랑의 바탕이며 규범입니다.
이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13-14)
그런데, 왜 ‘친구를 위한 사랑’이 원수나 죄인을 위한 사랑보다도 더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여 친구로 만들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그것은 우리가 적이 아니라, 서로 친구가 되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곧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알려주는 일입니다.
이를 그레고리오 교종은 이렇게 해설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돌려놓을 때,
우리를 박해하는 이들도 우리의 친구가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려는 말씀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불러 뽑으십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 불렀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5-16)
참으로 큰 은총입니다. 우리를 ‘하느님의 친구’로 삼으십니다. 당신께서 목숨까지 내어주어 아버지의 사랑을 알려주며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선택하신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이요, 우리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얻어주기 위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베풀어진 아버지의 사랑이요, 선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의 권능을 입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도 ‘친구가 되어주라’ 하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알려주어 ‘친구가 되라’ 하십니다. 그래서 단지 우리를 친구로 뽑은 것만이 아니라, “뽑아 세웠습니다.”라고 하십니다. “세웠다”라는 원어의 뜻은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방도까지 보장하면서 어떠한 책임을 지워 내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사랑을 실천하고 선포할 책임을 맡겨 세워놓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의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5,16).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주님!
제 안에는 당신의 숨결이 흐릅니다.
제 안에 새겨진 당신의 사랑입니다.
제 안에 굴을 파고들어 와 빈 무덤으로 모습을 숨긴
그지없이 충만한 사랑입니다.
결코 빼앗길 수도, 빼앗겨지지도 않는 기쁨입니다.
주님! 당신의 기쁨의 숨결이 온 세상에 퍼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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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5. 부활 제6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에는 수고로움이 없다
오래전 일입니다. 노인 요양원에 앞을 보지 못하시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는데 앞을 못 보시니 거동이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주 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계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리가 없으셔서 휠체어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할아버지께서 그 방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 방은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시는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외부 출입을 시작한 것입니다. 하반신이 없는 할아버지는 앞을 보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통해 혼자서 휠체어를 굴리기 힘들어하는 불편을 이겨내게 되었고, 앞을 보지 못하는 할아버지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적당한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로를 위한 소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일생을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말 같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예수님에게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니 얻어야 합니다. 독서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외아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은 어떤 모습일까요? 예수님은“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어주시며 끝까지 사랑을 보여주셨고, 당신의 친구로 사랑하셨습니다. 마침내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바로 그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모두를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헌신과 희생의 삶은 주님을 닮은 사랑으로 수고로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만일 수고를 느끼고 혹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다면 아직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이 어떻게 생겼을까요? “사랑은 남을 돕는 손을 가졌으며,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재빨리 달려가는 발을 가졌으며, 곤란에 처한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졌으며, 사람들의 한숨과 슬픔을 경청하는 귀를 가졌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사랑은 희생을 전제합니다. 이기적인 마음이 있는 곳에는 진정한 사랑이 없습니다. 작은 배려와 희생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말로나 혀로 사랑하지 않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함으로써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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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5. 부활 제6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파티마와 루르드에서 매일 ‘묵주기도와 행렬’이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여러 나라에서 오기 때문에 특정한 언어를 사용하기 어렵습니다. 성지에서는 순례자들에게 신청을 받아서 묵주기도를 진행합니다. 이번 성지순례 중에 파티마에서도 루르드에서도 ‘한국말’로 묵주기도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파티마에서는 영광의 신비 4단을 하였고, 루르드에서는 환희의 신비 2단을 하였습니다. 시작은 한국어로 하지만 후렴은 모두 자신의 언어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도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언어는 다르지만 기도를 통해서 하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체험으로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언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피부색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계층과 세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내려 주신다.” 그렇습니다. 선한 마음이 있으면 진흙탕 속에서도 예쁜 꽃이 피기마련입니다. 악한 마음이 있으면 예쁜 장미 밭에도 가시가 돋기 마련입니다. 성모님의 전구함으로 가정과 본당에 사랑의 꽃이 활짝 피면 좋겠습니다.
오늘 부활 제6주일을 지내면서 지난 5주 동안 있었던 복음 말씀의 주제를 정리해 보고 싶습니다. 부활 제1 주일의 주제는 ‘갈망’입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무덤을 찾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갈망을 아셨고,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그렇게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미주가톨릭평화신문에서 이곳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올 수 있었던 것도 저의 ‘갈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주권을 신청했고, 2년 전에 나왔습니다. 주교님께 보고를 드렸고, 주교님께서는 저를 이곳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보내셨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미사에 함께 하는 것도 주님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 제2주의 주제는 ‘믿음’입니다. 토마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만져보고, 그분의 옆구리에 있는 창 자국을 만져보아야 믿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만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참으로 복되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검증과 사실의 차원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은 믿음과 신비의 차원입니다. 제가 지난 2월 14일에 이곳에 왔을 때, 여러분은 제게 서류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달라스 교구와 서울대교구에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제가 선하게 생겨서 일수도 있습니다.)
부활 제3주의 주제는 ‘말씀’입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는 안토니오 가우디가 시작한 ‘성가정 성당’이 있습니다. 성당에는 탄생의 문과 고통의 문이 있습니다. 이제 곧 영광의 문이 완성될 것이라고 합니다. 고통의 문 정면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는 가시관 대신 ‘성경’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은 성경에 다 있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성경 말씀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들려 주셨을 때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합니다. 저의 서품 성구는 시편 126장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는 말씀입니다. 말씀과 가까이 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부활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부활 제4주의 주제는 ‘착한목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목자의 기준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잘 알아듣는다. 착한목자는 양들을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한다. 착한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착한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소경의 목소리를 들어주셨습니다. 나병환자의 목소리를 들어주셨습니다. 중풍병자의 목소리를 들어주셨습니다. 이방인 여인과 백인대장의 목소리를 들어주셨습니다. 착한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여주셨습니다. 착한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부활 제5주일의 주제는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싱싱한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말라서 버려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전원이 연결되어야만 세탁기도, 냉장고도, 텔레비전도 작동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연결되어야만 비로소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 본당 공동체도 구역 공동체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신심단체들도 본당 공동체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는 사목회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우리 관계의 중심은 성체성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미사입니다. 오늘 부활 제6주일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오늘 성서말씀을 미리 읽고 오셨거나 귀담아 들었다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오늘 성서말씀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온갖 심오한 진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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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5. 부활 제6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서로 사랑하십시오. 예수님의 계명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하십시오.
그런데 이것은 말을 듣는 것에 불과합니다. 알아듣는 것과 아는 것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운전을 예로 들어볼까요? 어떤 사람이 운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말합니다. 키를 돌려서 시동을 걸고, 변속레버를 드라이브에 놓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가속페달을 밟으면 앞으로 가는 거야, 자 여기 키 있으니까, 집에 가보렴.
그럼, 머리로는 알아들을지 몰라도 운전은 할 수 없습니다. 몸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머리와 몸이 하나가 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운전하려면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운전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것인지, 뭐가 위험한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몸으로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사랑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연인이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서로 사랑한다고 이야기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안아주는 것도 없고, 미소도 없습니다. 손을 잡아 주는 것도 없고, 따스한 눈길도 없습니다. 단지 ‘사랑해’라고 이야기만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까?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느끼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일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시간, 그것은 미사와 기도입니다. 미사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체험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만나는 시간이 기다려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미사 시간이 기다려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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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하며 살아가세요.
사실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선택이란 것을 합니다. 그 선택이 자동적인 선택일 수도 있고, 오늘만 선택되는 이벤트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늘 선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필요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안 해도 되는지 선택합니다.
그렇게 수많은 선택 속에서 살다 보면 피로를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놓지 못합니다. 조금은 편하게 놓아도 될 것들 역시 부여잡고 있습니다. 관계에 집중한 나머지 관계를 잃어버릴지 봐 더 애달아합니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신경 써야 하는 관계와 그렇지 않은 관계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집중해야 할 관계가 있고, 덜 집중해도 되는 관계가 있습니다.
그거 아십니까.
관계는 가깝다가도 멀어지기도, 멀다가도 가까워지기도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너무 많은 것에 힘을 쏟지 마세요. 선택하세요. 내가 집중해야 할 관계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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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5. 부활 제6주일. 키엣 대주교님.
주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이라는 말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말입니다. 육체적인 사랑, 감정적인 사랑, 보살핌의 사랑, 영혼의 사랑 등 그 의미도 다양합니다.
‘내가 아버지 하느님을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보다 더 명료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자녀가 되려면 주님과 같이 사랑하고, 사랑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관대한 포용의 사랑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같이 미워하고, 사랑하기 쉬운 사람만 골라 사랑하고, 힘들고 어려운 사랑은 외면하는 우리들, 그러나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은 선과 악을 구별하지 않고 그 누구도 차별하거나 배재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마태오 5:45).
희생의 사랑
하느님께서는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을 창조하셨고,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의 행복을 인간과 함께 누리기 위해 인간인 아들을 얻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하기는커녕 창조주이신 당신을 수 없이 많이 배반하였음에도 변치않고 사랑하셨습니다. 인간에 대한 절실한 사랑으로 인류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 희생시키셨습니다. 이 모두가 아버지 하느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입니다.
용서의 사랑
용서는 바로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서로의 잘못을 기꺼이 이해하고 용서합니다. 복음에는 용서의 사랑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감동적인 것은 ‘인자한 아버지’일 것입니다.
아직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재산을 요구하고 돈을 받아 집을 떠난 아들은 방탕한 생활로 모든 돈을 탕진한 후 굶주림에 허덕이자 그제서야 집을 그리워하고 후회합니다. 그럼에도 당신을 떠난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매일 골목에 나가 기다리던 끝에 드디어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본 아버지는 뛰어가 아들을 포옹하고 좋은 옷과 반지, 신발을 가져다 주고 잔치를 베풉니다.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수없이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후회하고 또 후회한 것도 잊고 다시 잘못을 저질러도 그 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잊어주시고 용서해주십니다. 아니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우리가 먼저 사과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용서하여주십니다.
이 처럼 관대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게 따를 수 있겠습니까? 다만
아버지께서 우리를 대하듯 우리도 차별없는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고 사랑해야합니다. 나약하고 불행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하십시오. 다른 사람의 실수를 용서해주십시오.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한 사랑을 받아들이고 희생을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 역시 그들과 같은 나약하고 실수투성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사랑하신것처럼 사랑하는 거 그것이 바로 진실한 사랑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사랑만이 우리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을 닮고 주님의 사랑을 알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사랑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인지 생각해보십시오.
2. 아버지 하느님의 특별함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까? 아니면 권능입니까?
3.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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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5. 부활 제6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은 무엇인가?”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영어로 하면 “God is Love”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사람은 사랑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정의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질은 사랑인 것입니다. 무지도 탐욕도 허무도 아닌 사랑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를 사랑의 미사잔치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살아있을 때 사랑이요 죽으면 사랑도 못합니다. 사랑하라 주어진 인생이요, 세상 마칠 때의 마지막 아쉬움도 단 하나 더 사랑하지 못했음에 대한 아쉬움일 것입니다. 늦게서야 후회할 것이 아니라, 언젠가 사랑할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사랑해야 합니다. 어느 자매가 들려준 남편의 임종어도 잊지 못합니다.
1.미안하다.
2.고맙다.
3.사랑한다.
우리가 마지막 임종시 주님께 고백할 말마디 셋도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일 것입니다. 만병통치약이 사랑이고 만병의 근원이 사랑결핍이요 만민의 공통보편언어가 사랑입니다. 도대체 우리 일상생활에서 사랑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랑을 숨쉬며 사랑 안에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분명히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사랑도 보고 배웁니다. 아버지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나를 사랑하여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말씀하시며 당신의 사랑을 보고 배우라 하십니다. 참 황송하게도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면 우리는 누구나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있다 하십니다. 그러니 서로간의 깊어지는 사랑과 더불어 친구인 주님과의 우정도 깊어짐을 깨닫습니다. 복음 말미에서도 주님은 못을 박듯이 강조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혼자서는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함께 사는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 깊이에는 사랑의 갈망이 있습니다. 사랑은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행하거나 말하거나 생각하는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 내적자세가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라 다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말도 있듯이 다 아는 사랑같지만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평생 사랑한다 해도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은 무엇인가?”
참 중요한 문제에 대해 함께 사랑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1.사랑은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은총의 선물이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바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사랑의 예수님을 보내 주셨고, 그 좋으신 분을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미사의 힘, 주님의 힘, 사랑의 힘으로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2.사랑은 생명입니다.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사랑할수록 예뻐지는 얼굴이요 사랑할수록 활기넘치는 삶이니 사랑은 생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신록의 푸르른 생명으로,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있는 성모성월 5월입니다.
또 오늘은 고맙게도 생명주일이자 5월5일 어린이날입니다. 대체 공휴일로 내일 쉬지만 오늘 어린이날, 나이에 상관없이 마음은 어린이입니다. 또 하느님 앞에 우리는 모두 어린이입니다. 다함께 생명의 사랑으로 여러분 전 존재를 가득 채우는 마음으로 다음 어린이날 노래를 불러봅시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3.사랑은 선택입니다.
사랑은 선택입니다. 사랑뿐 아니라 모두가 선택입니다. 우리 인생은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선택으로 이뤄진 우리의 평생 삶입니다. 행복도 선택이요 기쁨도 선택이요 믿음도 생명도 희망도 선택입니다. 참으로 좋은 선택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타고난 부정적인 것들에 좌절하고 절망하면 불행합니다.
그러나 날마다 좋은 선택할 기회는 무궁무진 활짝 열려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랑을, 사랑의 주님을 선택하여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선택하신 예수님 말씀을 들어 보세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은 것이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를 뽑아 선택하신 주님께 사랑의 열매로 응답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주님을 선택하는 사람, 정말 살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랑의 주님을 선택하여 오늘 사랑의 미사잔치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오늘 참 좋은 선택을 하신 여러분 축하드립니다. 미사은총이 우리의 사랑의 열매가 참 자라게 할 것입니다.
4.사랑은 배움입니다.
사랑도 배워야 합니다. 세상에 배우지 않고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삶은 배움의 여정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배움입니다. 무엇보다 사랑을 배우고 공부해야 합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우리는 사랑에 영원한 초보자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배워야 할 스승은 주변에 무궁무진 널려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보고 배워야 할 분은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여라 말씀하신 주님이십니다. 이런 사랑은 이기적 사랑이 아니라 이타적 순수한 사랑, 아가페 사랑입니다. 집착없는 초연한 깨끗한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랑, 있는 그대로 예뻐하는 사랑, 주는 사랑, 돌보는 사랑, 나누는 사랑, 섬기는 사랑이 바로 우리가 평생 배워야 할 주님을 닮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요즘 파스카의 계절이자 성모성월인 5월은 온통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으로 가득합니다. 신록의 아름다움에 꽃도 많고 새도 많습니다. 예전 꽃을 들고 온 자매에게 준 덕담의 시를 생각하면 저절로 유쾌해집니다.
“꽃이
꽃을 가져 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예쁨의 비결은 사랑뿐입니다. 사랑하여 웃는 얼굴은 꽃보다 더 예쁩니다. 사랑보다 더 좋은 부작용 없는 화장품도, 성형수술도 없습니다.
5.사랑은 발견입니다.
사랑은 발견이자 깨달음입니다. 눈만 열리면 모두가 사랑의 선물인데 사랑을 옆에 놔두고 눈이 가려 보지 못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만이 아닙니다. 행복도, 감사도, 기쁨도 옆에 놔두고 몰라서 보지 못해 참 어리석게도 어처구니 없게도 불행하게, 불평하며, 슬프게 사는 이들도 많습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마음의 눈이 열려 공평무사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한, 깨달은 베드로의 고백이 참 신선합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여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새삼 우리 삶은 부단히 눈이 열려 “아, 그렇구나!” 깨달아가는 깨달음의 여정, 발견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깨달음과 더불어 이해지평도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무지에서 벗어나 날로 자유롭고 순수한 사람이 됩니다.
6.사랑은 훈련입니다.
사랑의 선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랑 역시 부단한 영적훈련을 필요로합니다. 연주가들, 화가들, 운동선수들이 바로 훈련이 모범입니다. 사랑의 선택에 이어 마음을 담아 의식적 훈련에 이은 습관화입니다. 사랑의 훈련, 사랑의 습관입니다. 좋은 습관이 덕이 되고 좋은 인생을 이뤄줍니다. 나이 먹으면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습관으로 삽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합니다. 오죽하면 사람을 고쳐쓸 수 없다 말하는지요! 굳어진 습관 바꾸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거의 대부분 살아온 대로 삽니다.
그러니 좋은 습관의 형성은, 사랑의 훈련, 사랑의 습관화는 얼마나 중요한지요! 우리 수도자들이 평생 사랑의 훈련과 습관은 날마다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전례공동기도입니다. 날마다 침묵, 경청, 찬미, 감사, 기도, 노동, 겸손, 성독, 회개, 순종등 무수한 사랑의 수행도 참 좋은 영적훈련이 됩니다.
7.사랑은 능력입니다.
사랑은 개방입니다. 개방도 능력입니다. 다 똑같은 사랑의 능력이 아닙니다. 성인의 사랑과 범인의 사랑의 깊이와 능력은 다를 수 뿐이 없습니다. 시냇물 깊이의 사랑이 있는가 하면 태평양 깊이의 사랑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라 하셨으니 사랑의 정상입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듯 사랑의 능력도 도토리 키재기 일 수 있다는 자각이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마다 사랑의 능력은 참 다양합니다. 사랑하고 싶어도 능력이 못 미쳐 사랑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결코 똑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니 서로 이해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희망할 수는 있어도 강요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참으로 사랑의 능력 신장을 위해 은총과 더불어 꾸준하고 항구한 자발적 노력과 훈련이 필요함을 봅니다.
공부중의 공부가, 평생공부가 사랑입니다. 사랑의 학교 공동체에서 주님의 평생 학인으로, 사랑의 평생 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날마다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 사랑 안에 머물로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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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5. 부활 제6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는 벗입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
당신께서 나를 바라보시듯
나 당신을 바라보니
우리는 벗입니다
당신께서 나를 부르시듯
나 당신을 부르니
우리는 벗입니다
당신께서 나를 아시듯
나 당신을 아니
우리는 벗입니다
당신께서 내게 주시듯
나 당신께 드리니
우리는 벗입니다
당신께서 나를 믿으시듯
나 당신을 믿으니
우리는 벗입니다
당신께서 내게 바라시듯
나 당신께 바라니
우리는 벗입니다
당신께서 나를 사랑하시듯
나 당신을 사랑하니
우리는 벗입니다
당신께서 나를 위해 사시듯
나 당신을 위해 사니
우리는 벗입니다
당신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듯
나 당신을 위해 죽으니
우리는 벗입니다
당신께 내가 기쁨이듯
내게 당신이 기쁨이시니
우리는 벗입니다
당신께서 내 안에 계시듯
나 당신 안에 있으니
우리는 벗입니다
당신께서 나와 하나이시듯
나 당신과 하나이니
우리는 벗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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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5. 부활 제6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사랑을 할 때 하느님을 알게되고 사랑을 할 때 하느님의 친구가 됨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처럼 제자들을 사랑한다 하시며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십니다.
1독서에서 보듯 베드로의 성령체험은 곧 주님의 사랑체험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으로써 하느님과 사랑의 대화 안에 살면서 하느님 사랑의 신비 자체에로 접근해 갑니다. 하느님은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시지 않으십니다. 처음에는 그냥 말씀으로 하시고 다음에는 호소로 하시고 마침내 행동으로 계시함으로 인간의 점차적으로 당신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사랑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사랑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심을 스스로 나타내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아무 공도 없는 죄인인 인간 모두를 구하시기 위하여 당신 아들을 무조건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 안에 여실히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만민에게 미치며 사회적 내지 인종적 차별의 벽을 모두 타파하고 어느 누구도 경멸하지 않습니다. 이를 넘어서 원수까지도 사랑합니다. 사랑은 한없이 용서하고 자신과 반대되는 이들과 적극적으로 화해하며 모든 것을 참고 악을 선으로 보답합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이유는 그 사랑이 먼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는 믿음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은 모든 종류의 안락함을 포기합니다. 그의 집과 종족 마을을 떠났을 뿐만 아니라 그의 외아들에 대한 애착마저 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철저한 자기포기와 떠남은 순수하고 꾸밈없는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 사랑을 깊이 체득하게 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통해 아버지의 참된 사랑의 체험을 깨닫는 아들의 아프리가 일화가 있습니다.
아프리카 어느 부족에서는 아들이 어느 정도 자라 성인식을 치를 때가 되면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칠흑같이 어둔 밤 밀림 속으로 가 칼 한 자루만을 주고 돌아옵니다. 아들은 밀림 속에서 혼자 밤을 지새우게 됩니다. 맹수들의 울음소리, 풀벌레 소리,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도 신경을 곤두세워 두려움에 떨면서 뜬눈으로 긴긴 밤을 보내게 됩니다. 그렇게 밤이 가고 어렴풋이 주위를 분간할 수 있는 시간이 오면 아이는 소스라치게 놀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아버지가 완전 무장을 하고 자기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이는 '아하, 나는 혼자서 무서운 밤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아버지가 내 옆에 함께 계셔 밤새 나를 돌보아 주셨구나'하고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후 아이는 어디를 가더라도 두려워 하지 않게 됩니다. 비록 아버지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어딘가에서 항상 자기를 지켜봐 주고 돌보아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 삶의 여정에서 고난, 시련, 박해, 오해받음, 비난과 멸시로 인해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처지를 알아주지 않아 철저히 홀로 버려져 있을때라도 하느님은 늘 곁에서 사랑으로 함께 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 실천합시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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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세계적으로 유명한 암스테르담(Amsterdam)의 기적
네덜란드 - 1345년
이에 깊이 감동한 부인은 곧 무릎을 꿇고 성체에 경배하였다. 그리고나서 그녀는 높이 타오르는 불길에도 상관하지 않고 화덕에서 조심스럽재 성체를 꺼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경외심에 가득차서 부인은 그 성체를 깨끗한 천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급히 자기 남편에게 병자성사를 베풀어 준 그 신부를 찾아갔다. 신부는 그녀에게 소문이 나지 않도록 그 기적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부는 그 기적을 일으킨 성스러운 성체를 성당으로 모시고 갔다.
그러나 다음 날, 부인은 세탁물을 넣어 두는 상자에서 성체를 새로이 발견하였다. 이로 인하여 신부는 이 기적을 감추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주님의 크나큰 영광에 경배하고 신앙을 굳건히 하도룩 이 기적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임 신부는 곧 이 기적을 동료 성직자에게 알렸다. 그러자마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신부와 많은 주민들은 펄럭이는 깃발과 타오르는 촛불을 들고 기도를 드리고, 성가를 부르면서 성스러운 행렬을 지었다. 그리고는 그 기적을 일으킨 성스러운 성체를 모시고 암스테르담의 성 니콜라오 성당으로 갔다.
교회 당국은 그 후 몇 달 동안에 걸쳐 엄밀한 연구를 하였다. 우트레히트(Utrecht)의 주교는 그의 교서에서 이 사건은 곧 진실이며, 그 때문에 자신은 주님께서 베푸신 이 성체의 기적을 널리 알리는 것에 기꺼이 허락한다고 발표하였다.
독실한 신심을 가진 암스테르담 주민들은 초라한 성당의 모습을 바꾸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성체가 타지 않고 그대로 있었던 화덕은 치우지 않고, 그 장소에 그대로 보관하였다.
수백 년이 지난 후 주님께서는 그 이전의 기적을 확증시키기 위해 새로운 기적을 일으키셨다. 1452년 5월 24일 암스테르담에 걷잡을 수 없는 큰 화재가 일어나 거의 온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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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5. 부활 제6주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사랑은 너무나 막연하고 다양하며 개별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바라시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한 것처럼’이라는 예를 들어 알려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가 ……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배워야 할 사랑은 ‘아버지께서 하신 사랑’이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입니다.
제2독서는 그 사랑이 ‘이렇게 나타났다.’고 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소개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살게 하는 사랑’이고, 이를 위하여 당신의 소중한 존재를 ‘내주는 사랑’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사랑은 ‘무상성’이라는 특징을 가지는데, 이를 오늘 독서와 복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그래서 이 사랑의 수혜자인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불리게 됩니다.
친구라고 해서 언제나 우리를 외롭지 않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숨을 내주는 사랑이 아니면 사랑은 늘 의심스럽거나 불충분하고, 타인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사랑은 언제나 외롭고 두렵습니다. 사회 곳곳에서 ‘묻지 마 범죄’가 일어나고, 사회적 고립과 소외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요즘의 현실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오늘 복음이 보여 주는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받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데에 급급하기보다, 거저 내주고 상대를 살리려는 진심에 충실할 것,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상대의 사랑이 가식이나 위선이 아닐까 하는 의심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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