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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욕망의 종착점
승패와 현재
1971. 12. 5.
한국 본부교회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하는 가정과 동네와 사회가 있습니다. 나아가 망하는 나라가 있는 가 하면 흥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잘사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울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엇갈리고 상반된 환경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환경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슬픈 상황을 동경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고통의 길을 가고자하는 사람도, 고독한 환경을 희망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즉, 자기 홀로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전체와 더불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기쁨을 찾고, 영광의 자리를 찾고, 뭇사람보다 더 높은 자리를 바란다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의 상황을 통해서나 마음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사실일 것입니다.
개개의 사람들이 이러하기 때문에 어떤 가정도 그러한 자리에 서려 하고, 어떤 사회도 다 그러한 자리에 서려 하며, 어떤 나라도 다 슬픈 나라가 아닌 영광의 나라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세계도 그러한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인류와 이 세계를 주관하고 있는 어떤 중심적인 존재가 계시다면, 그분도 역시 슬픈 나날을 보내고 싶어하지 않으실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분도 역시 승리와 영광이 깃들 수 있는 가운데서 만물을 치리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를 바랄 것입니다. 그 최고의 자리란 위험스런 자리나 고독한 자리나 슬픈 자리가 아니라 그 반대의 자리요, 전체와 관계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하나님도 이러한 자리를 추구하신다는 것은 두말할 바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도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계시더라도 고독하고 슬픈 자리에서 사랑하고 싶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자유로운 자리, 평화가 깃든 자리, 만인이 그 사랑을 영광과 더불어 찬양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서 사랑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랑의 길을 찾으실 것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을 통해 미루어 알 수 있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그런 자유스러운 환경, 그야말로 평화의 천국에서 사람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사랑을 하려고 하실 것이냐? 최고의 사랑을 하려고 하실 것입니다. 하늘 땅이 그 사랑 앞에 머리 숙일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하고 싶어하실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개인은 어떤 사람일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여러분은 조용한 가운데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어떤 영광을 획득한 개인이 있다면 그는 그 영광이 자기 개인의 영광으로서 끝맺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더 발전되어 보다 고차원적인 영광으로 연속되길 바랍니다. 우리 인간에게 이와 같은 소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도 어떤 개인을 사랑하며 주관하시더라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을 원하시지 않고 개인을 넘어서서 가정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실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 가정이 열이 있다면, 한 사람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던 이상의 사랑을 가지고 그 열 가정의 한 가정 한 가정을 다 사랑하고 싶어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즉, 첫사람을 사랑하던 사랑을 전체에게도 할 수 있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첫사람을 사랑하던 것보다 낮은 자리가 아닌 더 높은 자리에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예로 들어 말한다면, 어떤 남편이 있어서 자기 아내를 사랑했다 하더라도 그 아내에 대한 사랑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그 남편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낮을 것이냐?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에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 플러스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던 그 자극적 본질을 빼놓고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새로운 사랑의 내용을 가중시켜서 새로운 사랑으로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던 진지한 입장보다 못한 자리가 아닌 더 진지한 자리, 더 깊은 자리에서 자식에게 더 가치적인 사랑을 하고 싶은 것이 남편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래서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사랑하고 두 사람을 사랑했다면, 두 사람을 사랑한 내용을 빼버리고 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의 인연을 기반으로 해서 세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또 이런 사랑을 합한 사랑을 가지고 열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야 될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이고 행복스럽지 못한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면, 누구나 그렇게 사랑하려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타락한 인간의 욕망을 통해서도 내릴 수 있는 타당한 결론일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이 있다면, 그리한 가정을 중심삼은 종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종족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자기 가정을 사랑하면서 체휼된 모든 내용들을 빼버리고 사랑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종족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종족을 진짜로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종족을 사랑하고 나서 민족을 사랑할 때에도, 종족을 사랑한 내용을 빼버리고 민족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종족을 사랑한 것을 모태로 하여, 거기에 플러스시켜 가지고 민족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이 민족, 이 나라는 하늘 땅 가운데 영원히 남아야 할 민족이요 영원히 남아야 할 나라라고 하면서 사랑하고, 또 그 사랑을 중심삼고 세계를 사랑하고 싶다면,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터전을 빼놓고 사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세계를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국가를 사랑한 이하의 마음을 가지고 세계를 사랑하려 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욕망의 법에 배치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한 국가를 사랑한 사람이 세계를 사랑하려고 한다면, 국가를 사랑하던 모든 체휼적인 내용을 가지고 그 이상 사랑하고 싶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욕망이라는 기준을 중심삼고 볼 때, 국가보다도 세계를 사랑하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기에, 국가를 사랑하던 내용을 가지고 세계를 더 사랑하는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세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세계를 사랑하던 것을 떼어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를 사랑하던 것을 누룩으로 해서, 터전으로 해서 하나님을 세계보다 더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자리를 찾으실 것인가? 세계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자리를 찾으실 것인가, 그렇지 않은 자리를 찾으실 것인가? 이것은 물어볼 것도 없습니다. 세계보다 더 사랑하는 자리를 찾는 것이 사랑의 욕망의 종착점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자식을 많이 키워 본 부모는 그 무엇인지 모르게 사랑의 심정이 넓고 큰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자식을 많이 기른 사람은 원수를 스스로 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무엇인지 모르나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고 넓은 법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사랑의 주체이십니다. 그래서 누구나 사랑의 주체되시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자칫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는 다 빼놓고 하나님과 자기만의 사랑의 관계를 맺으려고 하기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자를 바라시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모시라면 공평한 마음을 가지시고 주체적인 입장에서 공평하게 사랑을 분배하시고 싶은 마음을 갖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의 부모의 입장에 설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이렇게 될 때, 세계는 빼놓고 자기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겠다는 사람을 하나님은 용납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와 더불어 사랑받겠다는 것은 용납받을 수 있을지 모르나, 대한민국과 더불어만 사랑받겠다는 것은 용납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관념을 떠나서 세계와 더불어 사랑받겠다고 해야 될 것입니다.
‘나만 사랑해 주십시오!’ 이것은 본질적으로 용납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것은 다 이방 사람들이나 염려하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먼저 개인을 위하고 가정을 위하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와 그 의라는 것은 개인이 먼저 가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가질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욕망을 가지신다면 그 나라에 대한 욕망과 그 의에 대한 욕망을 가지실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터전 위에서 사랑을 성립시켜야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욕망이나 소원 성취의 길을 다 빼버리고는 기쁨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혼자만 살기를 원하거나 잘되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잘되더라도 끝내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저들과 더불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혼자만 잘되기를 바라면 망하는 것이고, 저들과 더불어 잘되고 흥하기를 바라면 저들이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저들이나 민족에 남아 있는 한, 나는 저들이나 민족과 더불어 같이 있기 때문에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를 위주로 인륜 도덕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공사(公私)라는 말을 하게 될 때에도 공을 먼저 하게 되어 있지 사를 먼저 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공이라는 것은 그대라든가 전체라든가 하는 상대권(相對圈)을 인정해 놓는 데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권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상대권은 공이 거하는 곳이고, 공이 거하는 곳에는 그대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대들이 소원하는 것은 개인적인 소원이 아니고 전체의 소원입니다. 전체가 소원하는 자리를 중심삼고 기뻐하는 자리는 개인의 슬픔으로는 좌지우지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어떤 잔치가 벌어져서 모든 사람이 기뻐할 때에 그 가운데 어떤 개인이 자기에게 슬픈 일이 있다 해서 슬퍼하면 그 자리에서 제거되는 것입니다. 기쁜 날을 맞이했으면 전체에 기쁨을 더할 수 있는 주체적인 자리에 서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 개인에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기쁜 자리를 삭감시키면 추방당하는 것입니다. 전체의 기쁨을 고취시키고 자극시킬 수 있는 데서만 연속적인 주체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하나님은 공적인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승패와 현재’인데, 승리는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이냐? 지금까지 말씀한 견지에서 보면, 자기를 위주한 승리가 아닙니다. 자기를 위주한 승리는 자기 개인의 울타리권 내에서는 필요할지 모르나 전체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앞날을 헤아려가는 것입니다. 앞날을 헤아리는 데에 희망이 깃드는 것입니다. 희망도 개인적인 희망이 아닌 전체적인 희망이 깃드는 것입니다. 또 희망을 가진 사람은 지혜로운 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은 벌써 지혜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지혜로운 생활은 어떤 생활이냐? 현재의 승리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미래의 승리를 위해서 사는 생활입니다. 현재의 승리도 승리지만 현재의 승리를 어떻게 미래의 승리로 남기겠느냐라고 고심하면서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현재의 제한된 개체를 중심삼은 승리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전체와 인연된 승리권을 위해 사는 것을 말합니다. 전체와 인연된 승리권은 어디까지나 공적인 승리권을 말하고, 공적인 승리권은 전체적인 승리권을 말합니다.
그래서 선이라는 것은 사적인 기준에서는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공적인 기준에서만 성립되는 것입니다. 선은 전체를 상대하는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열 사람을 대해야 할 입장이면 열 사람의 상대역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백 사람을 공적인 대상으로 삼았으면 백 사람의 상대역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과 국민을 중심삼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겠다고 하면서 공적으로 살게 되면 대한민국 전체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가 아니라, ‘너자 나요 나자 너다’가 됩니다. 애국자의 인연이 여기에서 맺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승리를 표방하고 나서게 될 때 개인의 승리만 표방하고 나서면 안 됩니다. 개인적으로만 승리해 놓고 좋아하면 안 됩니다. 개인적인 승리는 지극히 일반적인 것입니다. 360도에서 1도는 아주 작은 것입니다. 개인적인 승리는 지극히 제한된 범위에서의 승리입니다. 그런 승리로는 360도(전체)와 인연을 맺어서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는 둘을 위해 있는 단위이기 때문에 하나는 둘과 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은 또 셋과 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만의 승리는 하나를 셋과 연결시켜 줄 수 있는 다리인 둘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제한된 다리, 나만을 위한 다리는 될 수 있지만 전체와 인연맺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승리하더라도 그것을 내 것만으로 생각하지 않고 전체 앞에 돌리면 개인적인 승리가 공적인 승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희생하는 것입니다. 희생은 또 하나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희생하는 것은 현실무대에 승리를 연결시키는 비결인 것입니다.
그래서 도의 세계의 주인인 하나님이 도의 세계를 주관하시기 때문에 선의 길을 가려는 사람에게 희생하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내 것을 내 것만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위해 바칠 때, 전체를 위해 희생할 때 귀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희생해야 합니다.
사적 기준을 중심삼고는 공(公)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희생의 과정을 거쳐야 공이 성립됩니다. 그래서 도의 길은 희생의 길입니다. 희생이 도의 본질입니다. 도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라를 위해 정성을 들이고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도 도인인 것입니다. 도인은 자기가 기뻐하기 전에 대한민국이 기뻐할 수 있는 날을 위해서 사는 사람, 삼천만이 웃기 전에는 절대로 내가 먼저 웃을 수 없다고 하면서 일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웃어본 적이 없는 얼굴, 보기 싫고 추악한 얼굴, 찡그린 얼굴이지만 대한민국이 기뻐할 수 있는 날을 바라보며 웃지 않고 찡그린, 그래서 보기 싫고 추한 얼굴이라면, 그 얼굴이 보기 싫게 되면 될수록 다 대한민국이 좋아할 수 있는 얼굴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나타난 그 얼굴이 흉할수록 배척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비참할수록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비참하게 된 것이 자기를 위해서 살다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살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면, 그렇게 될수록 그것은 대한민국 국민의 애국정신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모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길이 희생을 각오하고 나서는 길이라는 것은 정당한 이치입니다. 사랑의 길은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는 못 가는 길입니다. 진실되고 심각한 자리에서 희생을 각오하고 나서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렇지 않은 자리에서 갔다면 그것은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보다 심각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앞에 인계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승리를 했다 하더라도 인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는 슬픔을 맛볼 것입니다.
이렇게 헤아려 볼 때, 우리는 어떠한 자리에서 승리를 원해야 되겠습니까? 개인적인 승리가 귀하냐, 가정적인 승리가 귀하냐 할 때, 가정적 승리가 더 귀하긴 하지만 그것 가지고 동네방네 자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가정적인 승리를 했다고 해서 동네를 다니며 우리 가정의 승리를 찬양해 달라고 하면, 즉 그 승리가 동네와 아무 상관이 없으면 찬양은커녕 비웃음만 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정의 승리가 그 동네와 인연되게 될 때는 그 동네 사람들이 모두 찬양할 것입니다. 그 승리에 절박한 사연이 깃들어 있으면 동네 사람들은 절박한 마음으로 찬양할 것입니다. 이런 것은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보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승리를 표방하고 나서는 사람은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愛の最後の終着駅
御旨と世界 94
我々の周囲には悲しい人々が多い。また反面、そうでない人たちもいる。我々の、家庭、都市、また、国家もまたそうである。発展するものがあると思えば、そうでないものもある。笑う人があると思えば、泣いている人たちがいる。
このように一様でない現在・・・ところが人間は、皆が悲しみを嫌う、と同時にまた孤独な場所を嫌う、喜びと栄光、そして幸福を追求する。家庭と社会、そして国家もみな同じである。みなが悲しみを避け、栄光を迎えようとして、闘っているのである。世界もそうだ。もし、このような全体のものを支配するある存在がいるとするならば、その存在もまた同じではなかろうか!天のお父様も、間違いなく我々人間と同じはずだ。
愛は、孤独なそして苦しいところで与えられるべきものではない。あくまでも自由な、そして栄光ある場所で与えられるべきものである。そういう環境のもとで最高の愛を思う存分に与えたい。それが神の心情なのだ。
今、この地上にそういうことができる人間がいるのだろうか?我々はそういうことに対して考えてみなくてはならないのである。そのような最高の愛は、ある個人だけに与えられるべきものではない。家庭を越えて、さらにまた、世界を越えてより高き次元のものに与えられなければならない。これが愛の本質なのである。
一人よりは二人、二人よりは三人・・・そしてまた十人・・・このようにして拡大して、その対象を追求するのが愛の本質なのだ。それゆえに人類愛というのがこの地上にあり得るのである。自分の国家よりも世界を愛することができる力が、ここより発生する。愛の最後の終着駅、それは最大のものでなくてはならない。多くの子供たちを養った経験をもった親たちは、この深い心情をよく理解するだろう。そのような人たちは敵をもつことができない。そういう内容を分かるようになる。その理由は、すべての人はみな愛を受け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事実を知るようになるからである。
世界を除外して私たちだけが愛を受けたい・・・このような思考方式がここから破壊されるのである。
神の欲望はある個人にだけ限定されない。全体にわたるということを天は望む。「公」と「私」とが、ここから分別される。「公」というものは全体のためのものである。それゆえに、全体が望むもののために尽くすのが、「喜び・・・であるということができるのだ。私、一人だけの喜びというものはあり得ない、それは全体的な喜びから追放されるのである。天の願いと内容というものは、こういうものだと私は思う。それゆえに知恵のある人々は将来のために生きる。現在のためにのみ生きられるものではない。それで、そのようなところから信仰というのが必要になるのである。そこに希望というようなものがあり得る。ゆえに勝利というのは個人的なものであってはならない。あくまでも全体的なものでなくてはならない。
君は君である。私は私である・・・そういうものではない。君は、私であり、私は君である。そういうところまでいかなければ駄目だ。個人の勝利においては、個人だけしか喜べない。二人が喜ぶということはできないし、また全体も喜ぶことができない。だが、個人的な勝利も、これを全体の前に棒げれば全体のためのものになる。それで、犠牲ということが生ずる。
犠牲によって、我々は公的な勝利を追求することができる。それは範囲が広くなればなるほど、その価値が増大する、ここに世界の絶頂がある。そこで愛の道には必ず犠牲というものが同伴する。ところが手段や方法をえてしてはこのような道は歩けない。純粋でなければならない。そうでなければ人に笑われる。個人的な人とではお互いが喜べない。このような意味において、勝利というのはある個人のためのみにはあり得ないのである。
それゆえに宗教においては、個人主義というものはあり得ない。もちろん、我々はあくまで個人として存在する。しかし、その個人というのはあくまでも国家のためにあるいは、全体のためにある個人であるという事実を我々は、はっきりと理解していなければいけない。そこで、我々個人というものは世界を象徴する存在でなければならない、ゆえに個人は、より公的なもののために生きなくてはいけない。
このように果てしなく拡大していくのが神の愛である。我々は、統一教会のためにのみ生きてはならない。家庭のためのみに生きてはならない。世界のために生き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たとえ、犠牲になることがあっも、我々は、この道を歩まなければならない。このようにして個人は生きのこれる。美しい黄昏(たそがれ)を見る時、自分だけ見たいと思う人がいるだろうか?そういう美しいものは、あらゆる人が眺めて喜んでほしいと思うのが人間の本情であろう。
永遠なる天国というものは、ある個人の内にだけにはあり得ない。永遠なる天国というものは全体においてのみあり得る。
The Ultimate Destination of Love
God’ Will and the World
Victory or Defeat and the Present Time, December 5, 1971
There are many sorrowful people around us, and there are many who are not sorrowful. Our families, cities and nations are either sorrowful or they are not. Some are developing and others are not; some people are smiling and others crying.
In this way everyone is different, yet everybody dislikes sorrow and a place of solitude. Everyone also seeks joy, glory and happiness. The same is true with every family, society and even every nation. Everyone tries to avoid sorrow, seeking glory, and for that purpose everyone endures hardships. The same is true with the world. If there is a being who controls the whole, then that being should definitely be the same as human beings. Heavenly Father is definitely the same as human beings.
Love wasn't meant to be given in a lonely, suffering place but in a free, glorious place. God's heart is such that He wants to give His utmost love in such a receptive environment.
On earth, is there any human being who can do that? We have to think about it. That utmost love is not to be given only to a certain individual; rather it is to be given to families and to the whole world. This is the essence of love.
The nature of love is such that it is given to two people rather than one person, and it is given to three people rather than two people, and to 10 people. Thus, the force of love reaches toward the whole world rather than toward a certain nation. This is the way love works. Therefore, it is possible for love to flow toward human beings here on earth. The ultimate destination of love should be the greatest of all things. A parent with many children would be able to understand this deep heart. Such a person cannot have an enemy. All human beings have to receive love. If you think that you alone should receive love and not the world, then this way of thinking would be destructive.
God's desire is not confined to a certain individual. Heaven seeks the whole, hence, the distinction between public life and private live. Public life is for the sake of the whole. Therefore, to serve the expectations of the whole is to lead a public life. Joy cannot exist only for yourself. It would be chased away by the joy of the whole. I think God is that way. Therefore, those who are wise live for the future, not only for the present. Hence, you see the necessity of faith. Once you have faith, hope can exist. Victory should not be confined to the individual level; it should be for the whole.
It is not good to think that you are you and I am I. The truth is that you are me and I am you. We need to attain that level of awareness. Individual victory can only bring forth individual joy. However, if individual victory is dedicated to the whole, then it can belong to the whole. Therefore, individual sacrifice can bring about public victory.
The greater the sacrifice, the greater the value. By following this principle, the world can prosper. Sacrifice for others always accompanies the path of love. We cannot walk that path by any other method. We cannot rejoice as individuals. In this sense, victory cannot exist in religion. Of course we exist as individuals, but we as individuals exist for the sake of our nation and for the sake of the whole world. We must understand that clearly. We as individuals should symbolize the world. Hence, individuals should live for the public.
It is in this way that God's love expands infinitely. We must not live only for the sake of the Unification Church but for the sake of our nation and for the sake of the world. Although we may have to sacrifice ourselves, we must walk this path. This is the way we as individuals should live. When you see a beautiful sunset, do you want to see it only by yourself? In your truest heart you would want everyone to see such a beautiful thing. So the eternal Kingdom of Heaven cannot exist only within an individual. It can exist only within the whole.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