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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권호만barnabak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
요한계시록 1:4-8
오늘로서 2022년 교회력이 마치게 됩니다.
일반 달력으로는 아직도 한 달여가 더 남았지만 교회력으로는 오늘이 2022년 마지막 주일이고 다음주일부터는 2023년 교회력이 시작됩니다.
지난 일 년을 보내는 한 해의 끝자락에서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①먼저는, 다시 한 번 세월의 빠름을 느끼게 됩니다.
②또한 지난 일 년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일 년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국가적으로 크고 작은 일들이 수없이 일어났지만 우리가 여기까지 지내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혹자는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냐면서 우리가 살아온 삶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 절대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절대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여주심을 감사할 수 있기 바랍니다.
③세 번째로,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을 지내면서 역사에는 끝이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작년 이맘때에 우리는 2022년 교회력 첫 번째 주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나면서 교회력 마지막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사관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처음 시작과 나중 마침이 분명한 역사관입니다.
언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무한정 계속되는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역사가 시작되었고 하나님에 의해 역사가 마쳐짐을 믿는 것이
기독교 역사관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속히 될 일들을 계시해주셨고 사도 요한은 이 계시를 편지형식으로 아시아의 7교회에 보내게 됩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7교회에 편지하면서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면서 이 계시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제일 먼저 소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제일 주된 분은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이유는 이 말씀이 사사로운 개인의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말씀임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아야 신앙생활에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아시아의 7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 성도들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9절 말씀에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으니” 했습니다.
사도 요한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증언하는 일로 인하여 지금 밧모섬에 유배를 당하였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말씀처럼 당시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많은 고통과 환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고통과 환난은 크게 3가지에서 왔습니다.
①먼저, 그들은 많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어린 아이를 죽여서 피를 마시는 잔혹한 자들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썼습니다.
바로 성만찬 때문입니다.
성만찬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불신자와 이방인들이 ‘이것은 주님의 몸이다. 이것은 주님이 흘리신 피다. 이것을 먹어라 이 피를 마셔라’는 말을 그렇게 밀어붙였던 것입니다.
②또 하나의 누명은 성적으로 난잡한 집단이라는 누명입니다.
박해와 고통이 심해지니까 자연히 그리스도인들이 예배와 교제를 위해서 한밤중에 만날 수밖에 없었고 만나는 장소도 동굴이나 다락방 같은 곳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일단의 남녀들이 반갑게 서로를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르는 모습이 그들에게 좋게 보일 리 없었습니다.
③그러나 가장 큰 박해와 어려움은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문제에서 나왔습니다.
이 편지가 기록될 때의 황제인 도미티안은 황제예배를 공식화하고 이것을 거부하는 자는 죽이라는 강한 명령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왕비와 더불어 극장에 이르면 관중들은 기립하여 ‘우리들의 군주와 왕비만세’를 외쳐야 했고,
정부의 공문서 첫머리에는 반드시 ‘우리의 주시며 신이신 도미티안 황제의 명령을 따라서’라는 문구를 넣도록 했고,
황제에게 말을 할 때는 ‘우리의 위대한 신이신 도미티안 황제여’하는 호칭으로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인들의 심각한 고민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믿고 고백하고 섬기고 있는데 그 분이 아니라 가이사가, 로마황제가 주님이라는 고백을 강요당하였을 때 기독교인들은 고민과 갈등 속에서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는 황제숭배의 현실을 인정하고 살기 위해서 ‘가이사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므로 예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럴 수 없다. 주님은 오직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 뿐이라’는 고백을 간직하며 가이사가 주님이라는 황제의 명령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방식을 따를 때 그 다음에는 엄청난 고난과 박해와 고통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하여 주님은 사도 요한을 통하여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믿느냐에 따라 신앙생활이 전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나는 하나님을 이스라엘 민족만의 하나님으로 편협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당연히 자신들을 괴롭히는 원수와 같은 나라는 심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에 가라는 명령을 듣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갑니다.
죽음의 위기를 지나 마지못해 니느웨로 갔지만 적극적으로 말씀을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니느웨를 용서하시자 하나님이 못마땅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고 믿는 것이 이만큼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더 잘 믿고 더 축복받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만이 우리의구주가 되심을 믿으면서 끝까지 신앙을 붙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욥과 같이 귀로만 듣는 신앙이 아니라 눈으로 보는 신앙으로 성장하여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올려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요한이 소개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먼저는,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8절 말씀에 보면,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하신 자라 하시더라.” 했습니다.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로서 처음과 끝이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을 또 다른 표현으로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주님은 역사의 시작과 끝이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 의해 인간의 역사는 시작되었고 하나님에 의해 이 역사는 종말을 맞게 됩니다.
우리의 역사는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종말을 향하여, 끝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끝이 언제입니까?
7절에 나오는 대로 ‘주님께서 구름을 타고 이 땅에 재림’하시는 그때입니다.
그때가 되면 주님은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셔서 영벌에 처할 자와 영생에 들어갈 자를 구분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축복으로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제가 가끔 지옥에 대해 설명하면서 지옥이 왜 지옥이냐? 그것은 끝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끝이 있으면 참을 수 있습니다.
군대에서 군인들이 힘든 군 생활을 이길 수 있는 것도 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군인들은 ‘아무리 힘들게 해도 국방부시계는 돌아간다.’는 말로 위안을 삼고 있습니다.
불꽃같은 고통도 끝이 있으면 참을 수 있습니다.
손가락으로 적셔주는 물이 그리운 타는 목마름도 끝이 있으면 참을 수 있습니다.
가장 힘들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은 끝이 없는 고통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때, 영원한 고통같이 느껴질 때, 인간은 절망하고 희망을 포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끝을, 그 마침을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시냐?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메가가 되시는 하나님이 끝내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다.
역사도 하나님이 끝내시면 끝나는 것이고
로마 성도들의 고통도 하나님이 끝내시면 끝나는 것이고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난과 고통도 하나님이 끝내시면 끝나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요한의 편지를 받는 성도들은 로마 황제로 인하여 엄청난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이게 언제 끝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성도들을 향하여 사도 요한은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그 하나님께서 너희들의 고통도 곧 끝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로마 황제가, 아니면 국가의 지도자가, 강대국의 지도자가 역사의 주인공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역사의 주인공은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심을 믿을 때
우리는 어떤 고통 속에서도 위로를 받고 힘을 얻고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5절 말씀에 보면, ‘우리를 사랑하사’하는 구절이 나오는데요,
이 구절을 중심으로 덧붙여 있는 앞뒤의 말씀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 주님께서 하신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①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부활하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②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③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그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지난 1일부터 진행된 다니엘 기도회를 통하여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간증자들이 한 결 같이 간증한 내용은 그들이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주님의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힘을 얻고 위로를 받고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내가 너의 고통을 알고 있다’ ‘내가 너보다 더 아프고 슬프다.’ ‘내가 지금 너와 고통을 함께 하고 있다’는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주님이 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어.’하는 감정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을 잘 알지 못하고 주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고통가운데 함께 하시고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죽은 지 사흘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셔서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녀 삼으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으로 주셨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신다고 하면 여러분 우리가 걱정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가 염려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현실이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참고 인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미래에 대한 아름다운 소망을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세 번째는,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하시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4절과 8절에 보면, 같은 말씀이 반복되는데요, “이제도 계시고(있고) 전에도 계셨고(있었고) 장차 오실 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시간을 말할 때는 일반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순서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현재가 제일 먼저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제도 계시고’ ‘이제도 있고’
이 말씀은 하나님이 지금 이 순간 이 형편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거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 과거의 인물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 이 시간 나와 함께 하시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앞으로 우리와 함께 하실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형편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과거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지금 나와 함께 하시고 나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에게 담대하게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을 믿으시고 구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도우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축복하십니다.
(2022.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