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37]시와 노래 <부용산>을 아시나요?
친구가 툭 던져준 문예잡지 「경기작가」(통권 2호)의 목차를 보고, 김학민(경기아트센터 이사장)의 <발굴현대사>코너가 흥미를 바짝 당겼다. 김학민이면 <학림출판사>의 그 김학림? <시詩 「부용산」에 얽힌 75년의 사연>의 「부용산」 시도 듣느니 처음이었다. 처음엔 시였는데, 노래가 되어 한국전쟁 이후 감옥에서 비전향 장기수들이 즐겨 불렀고, 60년대부터는 민주화 운동권이나 통일운동가, 문화예술인 등 진보적 지식인 사회에서 널리 회자됐다고 한다. 그러니까 작사·작곡가도 모르는 가운데 구음口音(구전口傳이 아님) 전수돼 왔다는 것. 그러다, 1997년 가수 안치환이 신곡 앨범에 ‘작자 미상의 구전가요’라며 녹음해 넣었다고. 그런데, 그 다음해 김효자 교수(박기동 시인의 제자)에 의해 <부용산>의 원곡 악보가 발굴되고, 여수 출신의 박기동 시인이 작사, 나주 출신의 안성현이 작곡했다는 사실이 처음 밝혀졌다고 한다.
일단 시 1연을 감상해보자.
<부용산 오리 길에/잔디만 푸르러 푸르러//솔밭 사이사이로/회오리바람 타고//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너는 가고 말았구나//피어나지 못한 채/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부용산 봉오리에/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https://youtu.be/BrmTjkC-UKw
박기동(1917-2004) 시인의 휴먼스토리가 재밌기도 하고 너무 짜안해 내내 마음이 아팠다. 일본 관서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1947년 순천사범학교 선생님 때였다. 남북협상차 북으로 향하는 김구 선생에게 <밤중이라도 어서 가야지>라는 헌시를 보냈다 경찰에 끌려갔다니, 정치의식도 대단했던 것같다. 그해에 사랑하는 누이(박영애)가 결혼직후 24세로 폐결핵으로 숨졌다. 벌교 근처의 야산 부용산(해발 183m)에 묻고 사무치는 슬픔에 쓴 시가 바로 <부용산>(노래가 되기 전의 1절). 이후 목포 항도여중 국어선생으로 전근, 동료 안성현(아버지 안기옥은 월북한 가야금 명인) 음악선생과 친하게 지냈는데, 안선생도 사랑하던 동생 안순자가 그해 15세 나이로 숨졌다고 한다. 그러던 중, 서울에서 전학온 공부도 잘 하고 문학에 소질이 있던 16세 김정희가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이에 안선생이 박기동의 시 <부용산>에 선율旋律을 입혀 탄생한 것이 노래 <부용산>이라는 것.
훗날 박시인이 지은 2절의 노래말은 이렇다.
<그리움 강이 되어/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재를 넘는 석양은/저만치 홀로 섰네//백합일시 그 향기롭던/너의 꿈은 간 데 없고//돌아서지 못한 채/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부용산 저 멀리엔/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러니까 이 노래는 10대 중반에 요절한 박영애, 안순자, 김정희, 이 세 여자의 죽음을 기리는 신판 <제망매가>였던 것. <삶과 죽음의 길은 이승에 있음이 두려워/간다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 가버렸는가/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한 가지에 나고서도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아, 극락세계에서 만나볼 날을 도 닦으며 기다리노라>라는 신라때 월명사가 지은 향가, 딱 그짝이지 않은가. 빨치산이나 운동권 노래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슬픈 노래가 ‘그리움’을 주제로 탈바꿈돼 긴 세월 동안 불려졌던 것.
아무튼, 98년 목포 출신 연극인(김성옥)이 두 선생님을 수소문, 박기동은 생활고를 견디다못해(한때 출판사를 하며 일본소설 ‘빙점’을 번역 펴내기도 했다는데, 중학교때 ‘빙점’을 읽은 기억이 있어 새로웠다) 호주로 이민을 가 어렵게 살고 있음을 알아내, 직접 찾아가 <부용산> 2절의 작사를 요청했다고. 안성현은 월북, 북한 공훈예술가로 활동하고 국립교향악단장도 역임했는데 2006년 86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김소월의 시‘엄마야 누나야’를 작곡). 2절이 추가된 노래 <부용산>은 99년 목포에서 열린 ‘부용산 음악제’에서 처음 공개됐는데, 이후 안치환 한영애 이동원 윤선애 등이 2절짜리 <부용산>을 불렀다.
아, 노래 하나에도 우리 현대사의 굴곡된 사연들이 굽이굽이 쌓여 있지를 않는가. 김학민씨의 글로 알게 된 노래 <부용산>을 유튜브에서 곧장 검색해보니, 안치환 한영애의 노래도 압권이지만, 심지어 도올 선생이 '여순항쟁' 특강 중 이 노래를 부른 동영상도 있어 더욱 놀랐다. 음악에 문외한인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같아 속까지 상했지만, 뒤늦게라도 시와 노래로 얽힌 <부용산>을 알게 돼 기쁘고 다행이라 생각했다.
부기 1: 2000년 보성 벌교읍 부용산에 박기동 시인의 시비를 세웠는데, 시인도 참석해 여러 제자를 만났으며, 2000년 목포여고 교정에 ‘부용산 노래비’도 세워졌다한다. 또한 KBS 광주방송에서는 99년과 2000년 다큐멘터리 <부용산을 아십니까?>를 제작 방영했다. 2002년 박기동 시인의 유일한 에세이집 <부용산>의 출판기념회가 목포에서 있었는데, 일시 귀국하여 시를 낭독하고 노래도 불렀다는 후문이다. 2004년 87세로 별세. 작가 정도상과 최성각은 동명同名의 소설을 지었다.
부기2: 시와 노래 <부용산>의 모티브가 됐던 세 청춘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고, 그 시와 노래로 위로를 받았던 우리 현대사의 숨은 주역들 그리고 평생 굴곡진 삶을 산 박기동과 안성현도 한 편의 영화처럼 흘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노래 <부용산> 만큼은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연꽃(芙蓉)처럼 살아남아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 않은가. 나무관세음보살!
첫댓글 (프로 가수보다) 부용산을 가장 부용산스럽게 소화해낸다!
이 양반, 강의 때의 그 직설과 탁성은 어디로 가고 어디서 이렇게 많은 恨을 삼킨 듯 슬픈 미성이 나오는가?
감정의 디테일이 마이크로 단위로 절절하게 표현되고, 아마추어적인 느낌이 오히려 당사자의 흐느낌인 듯 더욱 슬픔이 고조된다.
준비없이 들었다가 코끝이 찡해졌던 곡으로 쉬운 곡이 아닌데 참 잘하네요....
아쉬운 듯한 기타 반주까지 의미를 부여하게 만든다.
요즘 말로 '디테일이 쩐다!'
https://youtu.be/0QgUKP2NzFw?si=qzrGcnX5ZmfcuW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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