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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yeongnam.com/view.php?key=20220319010002672
[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 교육] '참나'는 내가 아니다
정재걸 (대구교대 명예교수)
깨달은 존재를 '참나(Self)'라고 부른다. 그러나 깨달음을 위해 수행하는 주체는 참나가 아니라 '에고(ego)'다. 에고가 원력(願力)을 세워 수행을 하면 참나가 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는 우리 안에 있는 양심이 곧 참나라고 주장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프로이트가 밝혀냈듯이 양심이나 천사는 어릴 적 엄격한 아버지에 의해 형성된 '슈퍼에고'에 지나지 않는다.
참나를 사랑의 존재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깨달음을 통해 '사랑의 존재'가 되었다는 말은 '내가 사랑의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깨달은 내가 존재할 수 없듯이 '나'는 사랑의 존재가 될 수 없다. 사랑의 존재가 되었다는 말은 '신의 사랑이 내 안에 들어왔다'는 뜻이다. 사랑은 온 우주에 편만해 있다. 그 사랑은 무한해서 끊임없이 내게로 흘러 들어와 다른 존재로 흘러나간다. 바울은 이런 깨달음을 통해 "이제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게 되었다"고 말했다.
수행이란 에고가 에고의 작용을 지켜보고, 스스로의 힘을 무화(無化)시키는 과정이다. 에고의 힘이 무화된 자리에 선물 같이 참나, 즉 신의 은총이 흘러 들어온다. 깨달음은 에고가 참나로 변하는 과정이 아니다. 에고를 넘어서서 에고가 아닌 그 무엇이, 본래부터 존재하고 작용해왔던 그 무엇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수행을 통해 무엇을 깨달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잘못되었다. 지켜보는 마음이 혹시 참나가 아닐까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유식(唯識)의 '사분설(四分說)'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견분(見分)을 보는 자증분(自證分)이나 그 자증분을 보는 증자증분(證自證分) 역시 마음의 주관적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컴퓨터에는 본체가 있고, 중앙처리장치(CPU)가 있고, 프로그램이 있다. 비유하자면 본체는 몸이고 중앙처리장치는 마음이며 컴퓨터를 작동시키는 프로그램은 마음의 작용이다. 그렇다면 참나는 무엇일까. 참나는 바로 전원(電源)이다. 전원이 들어와야만 컴퓨터가 비로소 작동하듯이 모든 에너지의 근원은 전원인 참나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흙으로 빚은 아담의 입에 입김을 불어넣었듯이 우리는 신의 호흡에 의해서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정목 스님은 '비울수록 가득하네'에서 참나의 인식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내가 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꽃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앞산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커피잔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무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모든 대상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관점은 완전히 변화됩니다.// 지배적이고 이기적이었던 마음이 사라지고/ 내 안에 무엇인가 숨기고 속이고 싶은 마음이 멈추게 됩니다./ 동물·식물은 물론 사물에도 모두 눈이 있습니다./ 우주에는 눈이 있습니다./ 내가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대상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내 안의 눈을 뜨게 됩니다.'
<대구교대 명예교수>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2451
“참나 발견하면 삶은 180도 달라진다”
(책) 참나, 명상으로 다가가다
안병근 지음/ 씨마스21
안병근 전 공주교대 총장
‘참나’ 찾아 떠나는 여행
존재하는 자체로 행복해
“참나로 인해 우리 삶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군을 제대하고 복학한 20대 대학생에게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의 허무와 무상((無常)이 엄습했다. 겉으로는 강의를 듣고 친구들과 웃고 어울렸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온통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급기야 그는 출가를 결심하고 이를 부모님에게 알렸지만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고 평범한 일상을 살던 중에도 그는 “이렇게 살려고 태어났는가?”하는 자괴감에 빠져들곤 했다. 세속적 의미를 저버리고 혼자 산으로 갈 만큼 매몰차지도 못했던 그는 세상 속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종교와 철학 서적, 특히 불교경전과 논, 선사 어록, 인도경전 등을 집중적으로 읽었으며 간화선 수행에도 힘썼다. 결국 인간의 육체와 정신작용이 ‘참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점차 무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안병근 전 공주교대 총장이 최근 자신이 깨달은 불교의 가르침을 쉽게 정리한 '참나, 명상으로 다가가다'와 '참나, 명상에서 만나다'를 동시에 출간했다.
안병근 전 공주교대 총장이 최근 자신이 깨달은 불교의 가르침을 쉽게 정리한 '참나, 명상으로 다가가다'와 '참나, 명상에서 만나다'를 동시에 출간했다.
이는 소위 ‘무상병’에 시달리다 경전공부와 명상으로 불교의 진리에 눈떴다는 안병근 전 공주교대 총장의 신행담이다. 현재 한국경제교육학회 부회장을 맡으며 공주교육대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최근 자신이 깨달은 불교의 가르침을 쉽게 정리한 <참나, 명상으로 다가가다>와 <참나, 명상에서 만나다>를 동시에 출간해 주목된다.
먼저 <참나, 명상으로 다가가다>는 20대부터 자신을 옭아맨 무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저자가 세속의 고민을 해결하고 행복을 얻고자 불교공부와 수행을 통해 ‘참나’를 찾은 결과를 정리한 책이다. 재가불자의 길을 걸어온 저자는 어려운 불교 교리를 그림과 표로 쉽게 풀어냈으며 불교 가르침의 체계와 내용을 파악하기 쉽도록 수준에 따라 분류해 논의를 전개하고 정리했다.
‘참나를 찾는 명상여행’ 시리즈의 1권 격인 이 책에서는 생사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고,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으며,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그리고 ‘나’와 ‘이 세상’의 실상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논의해 참나를 되찾는 기반을 다진다. 참나를 찾아가는 과정은 우리 모두의 삶의 고민 해결과 밀접히 연계돼 있다. 저자는 “진리에 눈을 뜬 순간 삶은 180도 달라진다”면서 “참나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한없는 기쁨이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삶에 있어 가장 진귀한 보물인 참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 가장 좋은 길잡이가 될 만하다.
참나, 명상에서 만나다
안병근 지음/ 씨마스21
이와 더불어 시리즈의 2권 격인 <참나, 명상에서 만나다>에서는 참나가 무엇이고, 어떻게 참나로 돌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면서 저자는 참나로 돌아가서 보면 공한 것이라고 했던 ‘나’와 ‘이 세상’의 실상이 무엇이고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하는지 등에 대해 논의한다.
저자는 “사람은 태어나서 살다가 늙고 죽기를 반복한다. 생로병사를 반복하는 인간의 삶과 상관없이 불생불멸하는 하늘과 같은 바탕은 있는 것일까?”라는 물음에 우리의 ‘참나’가 바로 그것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참나는 우리 안에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에 이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어떻게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는 영원한 ‘그것’에 어떻게 이를 것인지 논의하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목적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참나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알아도 좀처럼 그것에 이르지 못한다. 참나는 일체 존재와 모든 현상이 의지해 있는 근원인데,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우리가 참나인 근원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원인을 우리의 마음이 바깥의 대상에 현혹되어 그 모습을 실체로 착각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나’라고 굳게 믿고 있는 몸과 마음, 그리고 우리의 바깥에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대상 사물 역시 공하다는 것을 깨닫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근거로 참나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저자는 “행복이 이미 자신과 함께 있음을 알지 못해 지금 현재가 괴로운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이 존재 자체로 행복한 ‘참나’를 발견하게 해줄 보물지도가 되길 소망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https://naver.me/GRzSvKgg
참나, 궁극의 상태
강병균 교수(포항공대)
2016년 참나선원 참나선사 하안거 결제법어
- 선정 중 경험한 것을 유일무이한 근거로 내세우는 자들은 크게 반성해야 한다
참나는 가아(假我 개별아)가 상락아정(常樂我淨)에 머무는 상태이다. 무분별삼매(無分別三昧 nirvikalpa samadhi) 속에서 가장 높은 의식의 상태에 머무는 것이다. 윤회계의 진흙탕 속에서 뒹구는 가아(개별아)에게는 3가지 (의식)상태가 있다. 각성, 꿈, 숙면이다. 참나의식은 이 모두를 초월하는 4번째 의식이다. 참나의식은 참나이다.
참나는 지혜와 축복의 화신이다. 참나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이다. 참나는 인중인(因中因)이다: 모든 원인을 일으키는 원초적인 원인이다. 참나는 피난처이고, 의지처이며, 일체의 주인이다.
언어는 여럿이 있을지 몰라도 참나는 하나이다. 암소색은 여러 가지일 수 있으나, 우유색은 한 가지이다. 선지식은 많을지 몰라도 가르침의 본질은 하나이고 같다. 공경하는 법은 여러 가지일지 몰라도, 참나는 하나이다.
참나를 찾는 수행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점오(漸悟)이고 다른 하나는 돈오(頓悟)이다. 개미가 느리게 행진을 하듯이, 수행자는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서 염불과 절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사마타수행을 한다. 그러다 마지막에 지혜를 닦아 목표를 이룬다. 이것이 점오 또는 개미의 길이다. 새가 단번에 하늘로 날아오르듯, 상근기 수행자는 곧바로 지혜를 닦아 참나를 찾는다. 이것이 돈오 또는 새의 길이다. 소위 경절문(徑截門)이다.
인간은 식물에 비유할 수 있다. 인간은 식물처럼 자라 번성한다. 그러다 죽지만 완전히 죽지는 않는다. 식물도 자라 번성하다 죽는다. 식물이 죽어도 새 식물을 자라게 하는 씨를 남기는 것처럼, 사람도 죽을 때 업을 남긴다. 선업과 악업을 남긴다. 육체는 죽어 분해될지라도, 업은 살아남는다. 인간은 자기가 씨를 뿌린 업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다시 태어나야 한다. 어떤 생도 첫 번째 생은 아니다. 왜냐하면 금생은 ‘전생의 업’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어떤 생도 마지막 생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번 생의 업이 다음 생에 정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윤회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무시무종(無始無終)이다. 그러나 참나를 찾은 해탈자에게는 더 이상 윤회가 없다. 인간은, 참나에 대한 지식을 얻음으로써, 자기가 뿌린 전생의 업의 열매를 수확하러 이 윤회계로 되풀이해서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 즉, 윤회의 사슬을 깨뜨리고 자유를 얻는다.
대승경전을, 특히 참나경(眞我經 atman sutra)을, 그중에서도 ‘여래장3부경’을 깊이 공부해라. 삼천대천세계에서 이 경전들보다 더 인간에게 유용하고 영감을 주는 경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주문은 ‘심오하고 독창적이고 숭고하고 영혼을 뒤흔드는’ 사상으로 가득 차 있다. 이 경전들은 고대 불교수행자들의 최고지혜의 산물이다. 이 경전들은 독자들에게 위로, 내적 힘, 평화, 용기를 준다. 희망이 없는 이에게 희망을, 약자에게 힘을, 기쁨이 없는 이에게 기쁨을, 마음이 불안정한 이에게 안정을 준다. 참나사상의 체계는 참나경과 여래장3부경에 기원을 둔다. 이 경전들에는 옛 수행자들의 지혜가 오롯이 담겨있다. 이 경전들에 대한 공부는 옛 수행자들이 얼마나 드높은 영적 경지에 도달했는가를 알려줄 것이다. 서구 학자·철학자들은 이들 도인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불경(참나경과 여래장 3부경)의 장엄함과 독창성을 요해(了解)하고 있다.
논쟁하지 말라. 말싸움과 지적체조와 궤변을 버려라. 논쟁과 토론이 인도할 곳은 없다. 모든 곳에 스며있는 불멸의 영원한 브라흐만(梵)의 존재와 선지식의 가르침에 대해서, 살아있는 신심과 부동(不動)의 확신을 가져라. 선지식으로부터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적 자타불이(自他不異)의 참나에 대한 근본적인 교리를 배우라. 자타불이의 참나사상은 6가지 종파를 허용하지만 마지막은 조사어록이다. 조사어록에는 깨달은 자들의 계시와 체험을 담고 있다. 역대 조사들은 항상 참나지식에 대한 설법을 다음과 같이 연다: ‘진리를 아는 데 있어서 논리와 논증은 불필요하다.’ 진리는 몹시 단순하다. 진리는 간단한 참선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 지성(知性)은 유한한 수단일 뿐이다. 지성은 자동적이고 일상적인 능력이다. 지성은 스스로 부양하고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한다. 지성은 종국에는 당신을 배신할 것이다. (참선 중에 현현하는) 직관만이 오류와 실수가 없다. (주: 청화 스님의 스승 금타 화상의 위대한 예를 보라. 참선을 통한 선정 하나로 기세간 우주의 비밀을 밝혔다.)
자격을 갖춘 여법한 구도자는 진실로 탈속(脫俗)의 길에서 이득을 얻는다. 많은 이들이 세상을 버리고 득도하지만, 모두 일시적인 충동일 뿐이다. 그들은 영적인 길에서 진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준비와 자격이 없어서 영적 삶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조용하게 함으로써 앉아있는 이는, 육체적으로 아무 일도 안 하는 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활동적인 사람이다. 이리저리 달려 다니며 늘 몹시 바쁜 사람은, 아무 실한 활동도 하지 못한다. 이것은 이율배반적인 현상으로서,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다.
겨의 존재는 쌀에 자연스럽고 녹의 존재는 구리에 자연스럽지만, 겨와 녹은 노력하면 없앨 수 있다. 가아(假我 개별아)에 대한 집착은 부단히 참나를 찾으면 없앨 수 있다. 무명(無明 Avidya)을 파괴하라.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참나에 조금도 흔들림 없이 안주하기를!
근접삼매나 깊은 잠을 무분별삼매로 착각하지 말라. 참나상태의 영광은 형언할 길이 없다. 그 장엄함은 묘사할 길이 없다. 몸이 가볍고, 마음은 명징하고, 몸과 마음이 즐거우면 참선이 잘 되고 있는 것이며, 몸이 무겁고 마음이 흐리멍텅하면 참선 중에 졸고 있는 것이다.
무지와 탐욕을 통해서 죽음이 온다. 지혜를 통해서 불사(不死)의 참나를 찾을 수 있다. 영원한 생명과 죽음이 동시에 몸 안에 거주한다. 생명은 들숨 날숨 사이의 한순간에 있다. 살아있는 시간은 죽음이 치는 박수인 천둥소리일 뿐이다. 참나 안에 살아라. 그러면 절대로 죽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시간을 넘어가라. 그러면 영원을 얻을 것이다.
밖으로 향하는 빛을 거두어들여라. 참선을 하라. 참나 안에서 살아라. 당신의 전(全) 존재는 일종의 환희 또는 신비한 황홀경으로 고양되리라. 천인(天人)들의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놀라운 평화가 그대를 감쌀 것이다. 축복의 바다에 잠길 것이다. 모든 욕망이 무화되고 모든 이름과 형태는 사라질 것이다. 모든 곳에서 오직 참나만을 볼 것이다. 이 경이로운 상태는 표현할 길이 없다. 직접 느껴봐야 한다. 벙어리가 사탕을 먹고도 그 맛과 기쁨을 표현할 수 없듯이, 삼매의 기쁨과 ‘참나와 하나 됨’의 기쁨 역시 표현할 수 없다. 이 경지를, 유한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언어는 불완전하기에 이 경험을 표현할 수 없다. 이것은 최고의 침묵의 언어이며, 불멸의 참나의 고요함이며,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평화이다. 이것은 참나를 찾은 자의 경지이다.
주: 이 글의 원본은, 불이일원론(不異一元論)적 범아일여(梵我一如)론자인, 힌두교 수행자 스와미 시바난다(Swami Sivananda)의 글 ‘투리야, 네 번째 경지(Turiya or the Fourth State)’이다. 위 번역문에서 ‘참나(眞我 true atman)’를 ‘투리야(Turiya)나 아트만(Atman 아 我)이나 브라흐만(Brahman 범 梵)’으로 바꾸고, ‘참나경 여래장3부경’을 ‘우파니샤드’로 바꾸면 시바난다의 글로 되돌아간다.
윗글을 통해서, 독자들은 한국의 참나불교가 힌두교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시바난다 말처럼 힌두교와 참나불교는 용어가 다를 뿐이지 같은 대상(브라흐만=아트만=참나)을 섬기고 있다.
시바난다는 자신이 선정 중에 경험한 것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한국불교도들 중에서 참나의 존재에 대한 근거로 선정 중 경험한 것을 유일무이한 근거로 내세우는 자들은 크게 반성해야 한다. 불교가 지혜의 종교란 것을 망각하고 벌이는 통탄할 일이다.
투리야(Turiya)는 각성의식·꿈의식·숙면의식 등 모든 의식의 기저(基底)가 되는 근본적인 의식으로서, 우주의 유일무이한 실체인 브라흐만의 의식이다. 이 의식에서 무정물·유정물(물질·생명) 등의 일체 삼라만상이 나온다.
불이일원론(不異一元論)적 범아일여론의 창시자인 베단타 철학자 상카라의 조스승(祖스승 grand guru) 가우다파다(Gaudapada)는 본시 대승불교승려였지만 브라흐만(梵)의 존재를 믿었다. 본시 힌두교철학인 브라흐만을 대승불교승려 가우다파다가 받아들였고, 그의 손제자인 상카라가 ‘현상계는 환영이고 오로지 브라흐만(梵)만 존재한다’고 즉 ‘아트만(我 眞我 참나)만 존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현상계를 허깨비로 만들어 버렸다. 이 사상에 의하면 현상계는 문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밤에 꾸는 꿈과 같은 환영일 뿐이다. 즉, 브라흐만이 꾸는 꿈일 뿐이다. 이에 비해 불교(예를 들어 반야심경)에서 현상계를 ‘허깨비나 꿈’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정말로 꿈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 그 어디에도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허깨비 또는 꿈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꿈을 꾸는 상주불변의 실체로서의’ 브라흐만이나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상이다. 현상계는 연기현상(緣起現像)이라는 것이다. 주체도 연기현상이고, 객체도 연기현상이고, ‘주체와 객체 사이에 벌어지는 일’도 ‘객체와 객체 사이에 벌어지는 일’도 모두 다 연기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는 무아(無我)이자 공(空)이고 무상(無我)이다. 즉, 연기, 무아, 공, 무상 이 넷은 같다. 연기·무아·공·무상·시사무차별(緣起無我空無常 是四無差別)이다.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