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통보(萬姓統譜)》와 우리나라의 씨족에 관한 책들을 널리 상고해 보면, 본래 공(碽) 자의 성이 없는데, 근세에 나걸(羅杰)이 연경에 들어가서 박명(博明)을 만나 공비에 관한 일을 묻자 박명이 공비는 곧 원(元) 나라의 원비(元妃)로, 그 사실이 《태상시지》에 보인다고 하였다. 박명은 몽고 사람이요 원 세조(元世祖)의 후예로, 벼슬이 주사(主事)에 이르렀고 학문이 넓어 저술이 많은데다가 글씨에도 능하니, 원 나라의 원비라는 말도 상고한 바가 있을 것이다. 대저 경신군(庚申君)이 기씨(奇氏)와 함께 명 나라로 들어갔으니, 원 나라가 망한 뒤에 기씨가 태조의 비(妃)가 된 것을 명 나라 사신(史臣)이 휘(諱)한 것인지, 아니면 본래 공(貢) 자의 성을 석(石) 자 옆에 붙인 것인지 모를 일이다.
'5월 16일에 군사를 거느리고 북으로 사막에 이르러, 응창부(應昌府)에서 원 나라 황제의 손자 매적리팔라(買的里八刺) 및 그 후비(后妃)와 보책(寶冊) 등의 물건까지 얻었는데, 경신군(庚申君)은 벌써 4월 28일에 이질로 응창에서 죽은 것을 알았습니다. 대군이 이르는 곳마다 남김 없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하였으며, 중서성(中書省)에서 아뢰기를, '마땅히 그 손자 및 그 후비와 보책을 태묘(太廟)에 포로로 바쳐야 합니다.' 하였으나 짐이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해 보니 차마 하지 못할 점이 있다. 군왕이 망하는 것은 천운에 달려 있는데, 남은 어린 손자를 포로로 바쳐서 그 몸에 앙화(殃禍)를 내리는 일은 짐이 차마 할 수 없다.
만성통보(萬姓統譜)》 및 우리나라의 씨족(氏族)에 관한 여러 가지 서책을 일일이 상고해 보아도 본디 공씨 성은 없다. 근래에 나걸(羅杰)이 연경(燕京)에 들어가서 박명(博明)을 만나 보고서 공비에 관한 일을 물으니, 박명이 말하기를, ‘바로 옛 원나라의 원비(元妃)로, 그러한 사실이 명나라 《태상시지》에 나온다.’ 하였다. 박명은 몽고인(蒙古人)으로, 원나라 세조(世祖)의 후손이다. 그는 관직이 주사(主事)에 이르렀고, 박학하여서 저술한 것이 많았으며, 글씨에 능하다. 그러니 옛 원나라 원비라고 한 그의 말도 상고한 바가 있어서 그렇게 말하였을 것이다. 대개 경신군(庚申君) 때 기씨(奇氏)와 함께 원나라로 들어갔으며, 원나라가 망한 뒤에 명나라 태조의 비가 된 것인데, 국사(國史)에서 이를 숨긴 것이다. 아마도 이는 공(貢)으로 성씨를 삼으면서 석(石) 자를 곁에 붙인 것인 듯하다.” 하였다.
그런데 근래 어떤 문자(文字)를 보았더니 거기에 성조(成祖 영락황제)는 바로 조선(朝鮮)에서 바친 공비(碽妃)의 소출(所出)이라고 했으니 어떻게 의심치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자전(字典)에서는 《태상지(太常志)》를 인용하여 공비를 명조비(明祖妃)라고만 했을 뿐 그가 성조를 낳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명사(明史)》속의 후비나 외척에 관한 여러 글 가운데 나올지 모르니 살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
원(元) 나라 말기와 명(明) 나라 초기에 조선(朝鮮)의 여인들을 뽑아다가 궁인(宮人)을 삼았다. 원 순제(元順帝)의 셋째 비(妃) 기씨(奇氏)도 비가 된 뒤에 성(姓)을 숙량합(肅良哈)으로, 이름을 완자홀도(完者忽都)로 고쳤는데, 고려 사람 총부 산랑(摠部散郞) 자오(子敖)의 딸이었다. 주헌왕(周憲王 명 나라 종친으로 이름은 유돈(有燉), 시호는 헌(憲))의 원궁사(元宮詞)에,
살구꽃 얼굴 복사꽃 뺨에 허리도 날씬한데 / 杏臉桃腮弱柳腰 복이 도리어 화의 싹일 줄 뉘 알았으랴 / 那知福是禍根苗 고려의 여인을 비로 책봉하니 / 高麗妃子初封冊 유월도 차가워 큰 눈 흩날렸네 / 六月陰寒大雪飄
하였고, 장욱(張昱 원 나라 사람. 자는 광필(光弼), 호는 일소거사(一笑居士))의 궁사(宮詞)에,
궁의가 새로 고려 모양 유행되니 / 宮衣新尙高麗樣 모난 옷깃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반비를 걸쳤네 / 方領過腰半臂裁 밤마다 궁중에서 서로 빌려다 구경하니 / 連夜內家爭借看 그 맵시 일찍이 임금의 눈에 든 때문일세 / 爲曾看過御前來
하였고, 주헌왕은 또,
기씨가 본시 압록강 동쪽에 나서 / 奇氏家居鴨綠東 한창 나이에 중궁 자리 차지하니 / 盛年纔得位中宮 다시 한림에 지시 조서 만들어 / 翰林昨日新裁詔 삼대를 소급 융숭한 작록 내려졌네 / 三代蒙恩爵祿崇 좋은 술 새로 걸러 옥병에 바치니 / 白酒新蒭進玉壺 물가 정자 깊숙한 곳에 더위마저 가시네 / 水亭深處暑全無 임금이 웃음 띠고 기비에게 묻기를 / 君王笑向奇妃問 왜 그리 서량의 타랄소처럼 고우냐고 / 何似西涼打剌蘇 엊그제 들어온 고려의 여인들 / 昨朝進得高麗女 반수 이상이 다 기씨의 족속인데 / 太半咸稱奇氏親 그냥 여관으로 늙히기 싫어 / 最苦女官難派散 또다시 두 궁빈 삼았다네 / 總敎送作二宮嬪
하였다. 유성의(劉誠意 성의는 명 나라 유기(劉基)의 봉호(封號))의 무산고(巫山高)에도 기후(奇后)를 조롱(嘲弄)하였다. 이는 경신군(庚申君)이 고려의 기씨를 총애하여 후(后)로 책봉하자, 기씨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당파를 만들어 궁금(宮禁)을 문란시킨 때문에 무산고를 지어 풍자한 것이다. 그 대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산속의 여우 늙도록 죽지 않고 / 山中妖狐老不死 연꽃처럼 고운 미녀로 둔갑해서 / 化作婦女蓮花腮 자취 감추고 꿈속에 나타나 / 潛形譎跡托夢寐 눈물을 환화(幻化)시켜 좋은 구슬 만드네 / 變幻涕淚成瓊瑰
하였으니, 역시 기후를 읊은 것이다. 사채(司綵) 왕씨(王氏)는 명 나라 선덕(宣德 선종(宣宗)의 연호) 시대의 여관이었는데, 그 궁사에,
구슬 꽃나무 대명궁에 옮겨 심으니 / 璚花移入大明宮 한 그루 엉긴 향기 만향정(晩香亭)을 이웃해 / 一樹凝香倚晩香 능히 임금의 발길 멈추게 하니 / 贏得君王留步輦 은은한 옥소 소리 달밤에 들려오네 / 玉簫吹徹月月中
하였고,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 주이준(朱彝尊)이 지었다. 에,
“원 나라의 세공(歲貢 해마다 연말에 바치는 공물(貢物)) 제도에 고려에서 미녀를 바치게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장광필(張光弼)의 연하곡(輦下曲)에 ‘궁의가 새로 고려의 모양 유행되네.’ 했다.”
하였고, 양염부(楊廉夫 염부는 명 나라 양유정(楊維楨)의 자)의 궁사에,
화림에 거둥할 때 행궁(行宮)도 거창한데 / 北幸和林幄殿寬 고려의 미녀가 여관으로 모셨구나 / 句麗女侍婕妤官 임금이 직접 소군곡 부르면서 / 君王自賦昭君曲 말 위에 올라 비파를 타라고 하네 / 勅賜琵琶馬上彈
하였으니, 명 나라 초기에도 이런 풍조가 고쳐지지 않고 인습되어, 효릉(孝陵 명 태조(明太祖)를 말한다)에게는 공비(碽妃)가 있었고 장릉(長陵 명 성조(明成祖)를 말한다)에게는 권비(權妃)가 있었던 것이다. 권비는 고려 광록경(光祿卿) 권영균(權永均)의 딸로 퉁소를 잘 불었으므로 궁중에서 앞을 다투어 서로 배웠다. 또 영헌왕(寧獻王 명 태조의 아들로 이름은 권(權), 시호는 헌(獻))의 시에,
궁중의 누수는 점차 멎어가건만 / 宮漏已沈參差到 미인은 아직도 퉁소만 배우고 있네 / 美人猶自學吹簫
하였고, 왕사채(王司綵)도 위의 시를 읊었으니, 모두 권 귀비(權貴妃)를 두고 지은 것이다. 《고사촬요(攷事撮要)》 어숙권(魚叔權)이 지었다. 에 이렇게 되어 있다.
“영락(永樂 명 성조의 연호) 6년(1408, 태종 8)에 황제가 태감(太監) 황엄(黃儼)을 보내어 여자를 간선(揀選)하여 바치게 하므로, 공조 전서(工曹典書) 권집중(權執中)의 딸, 인녕부 좌사윤(仁寧府左司尹) 임첨년(任添年)의 딸, 공안부 판관(恭安府判官) 이문명(李文命)의 딸, 시위사 중령호군(侍衛司中領護軍) 여귀진(呂貴眞)의 딸, 중군 부사정(中軍副司正) 최득비(崔得霏)의 딸이 간선되었고, 7년(1409)에 또 황엄을 보내어 예쁜 여자를 바치게 하므로, 지의주사(知宜州事) 정윤후(鄭允厚)의 딸을 간선하여 보내었다. 광록경 권영균이 명 나라에 갔다가 황제의 유시를 받아 돌아올 때 위험한 수로(水路)를 버리고 평탄한 육로로만 왔는데, 영균은 권비(權妃)의 오라비이다.
12년(1414)에 역관(譯官) 원민생(元閔生)이 종전(椶殿) 안에서 황제의 유시를 받았는데 ‘황후(皇后)가 서거한 뒤에 너희 나라의 권비로 하여금 육궁(六宮)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그런데 너희 나라 여씨(呂氏 여귀진의 딸을 이름)가 너희 나라의 내관(內官) 김득(金得)ㆍ김량(金良)에게 부탁하여 은장(銀匠)에게 비상(砒礵)을 얻어다가 호도다(楜都茶) 상고하건대, 호도다(胡桃茶)이다. 에 넣어 권비를 독살시켰으므로, 짐이 이미 내관과 은장 등을 죽이고 또 낙철(烙鐵 불에 달군 쇠젓가락)로 여씨를 한 달 동안 지져서 죽였으니, 너는 이 사실을 영균에게 알리라.’는 내용이었다.
15년(1417)에 원민생이 명 나라로부터 황제의 유시를 받고 돌아와서 종부부령(宗簿副令) 황하신(黃河信)의 딸과 지순창군사(知淳昌郡事) 한영정(韓永矴)의 딸을 간선하여 황엄 등에게 딸려보내었다.
홍희(洪熙 명 인종(明仁宗)의 연호) 원년(1425, 세조 7)에 상보감 소감(尙寶監少監) 김만(金滿)을 보내어 권비의 오라비 영균에게 사제(賜祭)하였고, 선덕(宣德) 2년(1427)에 황제의 칙명으로 공조 판서 성달생(成達生)의 딸,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차지남(車指南)의 딸, 우군사정(右軍司正) 오척(吳倜)의 딸, 우군사정 안복지(安復志)의 딸, 시위사 우령호군(侍衛司右領護軍) 정효충(鄭孝忠)의 딸, 중군부사정(中軍副司正) 최미(崔瀰)의 딸, 좌군사직(左軍司直) 노종득(盧從得)의 딸을 간선하여 흠차(欽差 황제의 명으로 보낸 차견사(差遣使)) 창성(昌盛) 등에게 딸려보내었다.
3년(1428)에 황제의 칙명으로 지순창군사 한영정의 딸을 간선하여 창성 등에게 딸려보내었고, 선덕 4년(1429)에 황제가 소감 김만을 보내어 최씨의 아버지 득비에게 사제(賜祭)했다.”
《동사습유(彤史拾遺)》 모기령(毛奇齡)이 지었다. 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권비는 조선 사람으로, 영락 7년(1409, 태조 9) 5월에 조선에서 바친 여인인데 액정(掖庭 비빈ㆍ궁녀들이 거처하는 궁전)을 채울 때 권비도 여러 여자들을 따라 들어왔다. 임금이 권비의 하얀 얼굴에 체질이 순미(純美)함을 보고 무슨 재주가 있느냐고 묻자, 권비가 가지고 있던 옥피리를 꺼내어 불었다. 그 소리가 요묘(窈渺)하여 멀리까지 메아리치므로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바로 다른 여자들보다 높이 선발하였다가 한 달쯤 지나서 현비(賢妃)로 책봉하고 권비의 아버지 영균을 광록경으로 삼았다. 8년(1410)에 권비가 임금을 모시고 북정(北征)하였다가 개선(凱旋)하는 길에 병이 발생, 임성(臨城)에 당도하여 ‘다시는 폐하를 모실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고 드디어 훙(薨)하므로 임금이 매우 애도하여 손수 제사를 지내고 공헌(恭獻)이란 시호를 내린 다음, 영구(靈柩)를 역현(嶧縣)에 안치하고 현관(縣官)을 명하여 지키도록 하였다. 그때 조선에서 바친 여자 중에 그 위호(位號)가 드러난 자로는 또 임 순비(任順妃)ㆍ이 소의(李昭儀)ㆍ여 첩여(呂婕妤)ㆍ최 미인(崔美人) 네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버지에게 모두 명 나라의 관직을 내려주었다. 즉 순비의 아버지 첨년은 홍로시경(鴻臚寺卿), 소의의 아버지 문(文) 문 자 밑에 명(命) 자가 탈락되었다. 과 첩여의 아버지 귀진은 광록소경(光祿少卿)을, 미인의 아버지 득림(得霖) 임(霖) 자는 비(霏)자의 잘못이다. 은 홍로소경(鴻臚少卿)을 삼았다. 그 뒤에 영균이 선덕(宣德) 혹은 홍희(洪熙)로 되어 있다. 연간에 죽어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임금이 그의 은혜를 생각하여 중관(中官)을 보내어 사제(賜祭)하고 그의 집에 백금(白金) 2백 냥과 문백(文帛 무늬 있는 비단)으로 된 겉옷감 ㆍ안옷감을 골고루 하사했다.”
《성호사설(星湖僿說)》 이익(李瀷)이 지었다. 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명신록(名臣錄)》에 ‘여비(驪妃) 상고하건대, 비(妃)의 호(號)에 여(驪) 자를 놓은 것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한씨(韓氏)는 청주(淸州) 한영정(韓永矴)의 딸이다. 영정이 두 딸을 낳아 모두 명 나라의 간선에 들어, 큰딸이 성조(成祖)의 후궁으로 여비에 봉해지고 여비의 오라비 확(確)은 19세 때에 태종의 명으로 명 나라에 들어가 특별한 은총을 받아 광록시 소경(光祿寺少卿)에 제수되었다. 우리나라 세종(世宗)이 즉위할 당시에는 확이 책봉정사(冊封正使)로 들어갔다가 황제의 명으로 그곳에 머물러 돌아오지 않고 부사(副使) 유천(劉泉)만 보내어 복명(復命)하게 하였다. 그 뒤에 또 그를 불러들여 인종(仁宗)의 딸을 아내로 삼아주려 했으나, 늙은 모친을 봉양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양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선덕 3년에 지순창군사 한영정의 둘째딸을 간선하여 선종(宣宗)에게 바쳤는데, 선종은 바로 성조의 손자이다. 한씨의 두 딸은 모두 들어가 후궁이 되었으니 색다른 일이고, 확은 바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으로 그 딸이 또 우리나라의 장순왕후(章順王后)가 되었으니 한씨의 존귀함이 이와 같다.
《감주별집(弇州別集)》에 ‘영락 연간에 권 귀비ㆍ임 순비ㆍ이 첩여(李婕妤)ㆍ최 부인(崔夫人) 상고하건대, 비(妃)의 호가 모씨(毛氏)의 기록과 다르고 또 여 첩여가 빠졌다. 은 다 조선 사람이었고, 권비(權妃)의 아버지인 광록경 영균 등은 다 열경(列卿)의 귀(貴)에 올랐는데 그대로 본국에서 살았다.’ 하였으나, 영균은 권비의 오라비이다. 상고하건대, 주씨(朱氏)ㆍ모씨ㆍ왕감주(王弇州)는 영균이 권비의 오라비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감주는 한비(韓妃)의 사적에 언급하지 않았으니 미비된 점이 있다 하겠고, 또 영균 등이 광록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없으니 반드시 서원부원군의 사적을 그들의 것으로 오전(誤傳)한 것이다.” 상고하건대, 어씨(魚氏)와 모씨의 기록에 다 영균이 광록경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이씨(李氏)가 미처 상고하지 못하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덕무(德懋)가 상고하건대, 이는 다 우리나라의 여자들이 중국으로 들어간 사적의 대략인데, 공씨(碽氏)의 사적이 더욱 기이하여 다른 나라에서 아는 자가 적기 때문에 지금 표명하려 한다. 《자휘(字彙)》 매응조(梅膺祚)가 지었다. 에,
“공(碽)은 성(姓)이다.”
하였고, 《태상지(太常志)》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명 태조의 비(妃) 공씨 상고하건대,《집운(集韻)》에 “공(碽)의 음(音)은 공(公)인데, 돌을 치는 소리이다.” 하였다. 이다.”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에 이렇게 되어 있다.
“명 나라 남경(南京)에 있던 태묘(太廟)가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연간에 벼락에 맞아 소각되자, 상사(尙事) 담약수(湛若水)가 다시 짓기를 주청하였으나 하언(夏言)이 세종의 비위를 맞추어 혁파하기를 주청하므로, 유시를 내려 위패를 모두 봉선전(奉先殿)에 모시도록 하였다. 상고하건대, 장릉(長陵 명 성조를 말한다)은 항상 ‘짐은 고황후(高皇后) 마씨(馬氏)의 넷째 아들이다.’고 자칭했다. 그러나 봉선전의 제도에 고황후의 위패를 남향하여 모신 다음, 여러 비빈(妃嬪)의 위패는 다 동렬(東列)에 모시고 서열(西列)에는 공비의 위패만 모셨다. 이 말이 《남경태상시지(南京太常寺志)》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대저 고황후는 끝내 임신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장릉만이 고황후의 소생이 아닐 뿐이겠는가. 의문태자(懿文太子 태조의 장자(長子)요 건문제(建文帝)의 생부(生父)이다)도 그 소생이 아니다. 세상에서 이 일을 사실이 아니라고 의심하는데, 심 대리(沈大理)의 시를 보면 명확한 증거가 될 것이다. 《명시종(明詩綜)》 주이준(朱彝尊)이 지었다. 에 심현화(沈玄華) 자는 수백(邃伯)으로 가흥(嘉興) 사람인데, 가정(嘉靖) 41년(1562)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벼슬이 대리소경(大理少卿)에 이르렀다. 의 ‘삼가 남경 봉선전에서 제사를 올리다’라는 시가 있는데,
미신이 제사를 올리고 / 微臣承祀事 태묘에 들어 부예를 노래하니 / 入廟歌鳧鷖 고황후는 고황제를 짝하여 / 高后配在天 어악에 남향으로 모시고 / 御幄神所栖 여러 비빈은 동쪽 서열에 모셨는데 / 衆妃位東序 공비만이 서쪽 서열에 모셔졌으니 / 一妃獨在西 성조가 그 생모(生母) 존중하여 / 成祖重所生 공비의 덕 높이 드러냈네 / 嬪德莫敎齊 한 가지 일이 천 가지로 다르니 / 一見異千聞 실록인들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 實錄安可稽 그래서 이 시로 전고를 서술해 / 作詩述典故 후세의 의혹 없애려 하네 / 不以後人迷
하였다.”
《동사습유(彤史拾遺)》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고황후 마씨가 의문태자 표(標)ㆍ진왕 상(秦王樉)ㆍ진왕 강(晉王棡)ㆍ성조 문황제(文皇帝)ㆍ주왕 숙(周王橚), 그리고 영국(寧國)ㆍ안경(安慶) 두 공주를 낳았다. 마 황후가 막 성조를 낳았을 때 용(龍)이 침전(寢殿)에 나타난 꿈을 꾼 적이 있었고 또 도적을 만났을 때 성조가 말을 가지고 와서 마 황후를 부축하여 말에 태우고 굴레를 잡으므로 도적이 성조를 보고 피해 달아나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이런 까닭에 마 황후가 성조를 가장 사랑해 오다가 태조가 태자의 유약함을 싫게 여기자, 마 황후가 비로소 그 꿈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그뒤에 마침내 정난(靖難)의 공(功)을 이루게 되었다.”
덕무가 상고하건대, 모기령이 《명사(明史)》 편수(編修)에 참여하였으니, 그의 수록을 거의 믿을 수 있다. 하지만 주이준도 사관(史官)으로 있었으니, 그의 고거(考據) 역시 정확하여 믿을 수 있으므로, 고황후가 끝내 임신하지 못하였다는 말은 반드시 그만한 소견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태상시(太常寺)의 기록이 있고 또 심현화의 시까지 명백하여 의심이 없음에랴. 《만성통보(萬姓統譜)》와 우리나라의 씨족에 관한 책들을 널리 상고해 보면, 본래 공(碽) 자의 성이 없는데, 근세에 나걸(羅杰)이 연경에 들어가서 박명(博明)을 만나 공비에 관한 일을 묻자 박명이 공비는 곧 원(元) 나라의 원비(元妃)로, 그 사실이 《태상시지》에 보인다고 하였다. 박명은 몽고 사람이요 원 세조(元世祖)의 후예로, 벼슬이 주사(主事)에 이르렀고 학문이 넓어 저술이 많은데다가 글씨에도 능하니, 원 나라의 원비라는 말도 상고한 바가 있을 것이다. 대저 경신군(庚申君)이 기씨(奇氏)와 함께 명 나라로 들어갔으니, 원 나라가 망한 뒤에 기씨가 태조의 비(妃)가 된 것을 명 나라 사신(史臣)이 휘(諱)한 것인지, 아니면 본래 공(貢) 자의 성을 석(石) 자 옆에 붙인 것인지 모를 일이다.
○ 가을 7월에 홍무(洪武) 연호를 처음 시행하였다. ○ 삼사좌사 강사찬(姜師贊)을 명 나라 서울에 보내어 책명(冊命)과 새서(璽書) 준 것에 사례하고, 아울러 원 나라에서 준 금인(金印)을 바치게 하였다. 그리고는 탐라의 일을 아뢰고, 악공을 청하였다. ○ 황제가 중서성 선사(中書省宣史) 맹원철(孟原哲)을 보내 와서 조서를 내렸다. "짐은 본래 농가에서 나서 원 나라의 세상에서 편안히 살았는데, 경신군(庚申君 원 나라 순제(順帝))이 어찌나 황음하고 혼약(昏弱)하던지 기강이 크게 무너지고, 이로 인하여 호걸이 모두 일어나 국내가 갈가리 나누어졌다. 원 나라 군사가 중원 여기저기서 싸웠으나 끝내 능히 다스리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 그러나, 난리를 일으킨 무리들이 맨 먼저 천하에 화를 끼치고, 강토를 빼앗아 왕자(王者)와 패자(霸者)가 되려고 하였지만, 그들의 소행을 보면 예에 합당하지 못하였기에 모두 멸망되었으니, 이것 역시 하늘의 뜻이다. 이때 짐의 나이가 24세였는데, 요란한 시기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난리를 피하였으나 마침내 편안히 살 수 없어서, 몸을 군중(軍中)에 의탁하였다. 전쟁에 종사한 지 3년 동안, 많은 영웅들이 성공하지 못하고 백성들만 소란하게 한 것을 보고, 짐이 군사를 거느려서 강(江 양자강(揚子江))을 건너 장수를 훈련하고 군사를 조련하여, 하늘의 명령을 받들고 정토(征討)한 지가 지금 16년이 되었다. 강포한 자를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대통(大統)이 이미 바르게 되니 백성들이 모두 편안하여졌다. 금년 6월 10일에 좌부장군(左副將軍) 이문충(李文忠)과 부장군(副將軍) 조용(趙庸) 등이 사자를 보내와서 아뢰기를, '5월 16일에 군사를 거느리고 북으로 사막에 이르러, 응창부(應昌府)에서 원 나라 황제의 손자 매적리팔라(買的里八刺) 및 그 후비(后妃)와 보책(寶冊) 등의 물건까지 얻었는데, 경신군(庚申君)은 벌써 4월 28일에 이질로 응창에서 죽은 것을 알았습니다. 대군이 이르는 곳마다 남김 없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하였으며, 중서성(中書省)에서 아뢰기를, '마땅히 그 손자 및 그 후비와 보책을 태묘(太廟)에 포로로 바쳐야 합니다.' 하였으나 짐이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해 보니 차마 하지 못할 점이 있다. 군왕이 망하는 것은 천운에 달려 있는데, 남은 어린 손자를 포로로 바쳐서 그 몸에 앙화(殃禍)를 내리는 일은 짐이 차마 할 수 없다. 더구나 짐도 본래 원 나라 백성이며, 천하를 요란스럽게 만든 것은 실로 짐이 시작하지 않았다. 지금 사해를 평정하고 우리 백성들을 전리에서 휴식시키는 것도, 짐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고 역시 천운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아직 신민이 짐의 뜻을 알지 못할까 염려되므로 천하에 널리 알리는 바이다."
○ 원나라에는 해마다 고려에서 미녀를 조공으로 바치는 제도가 있었는데, 명나라 초기에도 원나라 때의 제도를 고치지 않고 이어받은 듯하다. 이에 효릉(孝陵)에게는 공비가 있고, 장릉(長陵)에게는 권비(權妃)가 있게 된 것이다. 《온광루잡지》 ○ 장릉이 매번 스스로 칭하기를, “짐은 고황후(高皇后)의 넷째 아들이다.” 하였다. 그러나 봉선전(奉先殿)의 묘제(廟制)에, 고황후가 남쪽을 향하여 있고, 여러 후비들은 모두 동쪽 열에 있으며, 서서(西序)에는 오직 공비(碽妃)만이 있는 것이 《남경태상시지(南京太常寺志)》에 갖추어 실려 있다. 고황후는 회임(懷妊)한 적이 없으니, 장릉뿐만이 아니라 의문태자(懿文太子) 역시 고황후의 소생이 아니다. 의심컨대 이 일은 사실이 아닌바, 심대리(沈大理)의 시(詩)를 읽어 보면 그런 사실을 분명하게 징험할 수가 있다.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 ○ 《남경태상시지》에 이르기를, “효릉의 비(妃)는 다음과 같다.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고황후(高皇后) 마씨(馬氏), 왼쪽 1위(位) 이 숙비(李淑妃), 왼쪽 2위 황비(皇妃), 왼쪽 3위 황 귀비(皇貴妃), 왼쪽 4위 황 귀인(皇貴人), 왼쪽 5위 황 미인(皇美人), 오른쪽 1위 공비(碽妃), 공비는 성조 문황제(成祖文皇帝)를 낳았다.” 하였다. ○ 《명시종》에 들어 있는 심현화(沈玄華)의 경례남도봉선전기사(敬禮南都奉先殿紀事) 시에 이르기를, “미천한 몸 제사하는 일을 맡아서, 묘 들어가 부예(鳧鷖) 시를 노래하누나. 고후께서 태조황제 짝해 있으니, 어악에는 신령께서 깃들인 바네. 여러 후비 동쪽 행랑 자리했는데, 한 비만이 홀로 서쪽 자리하였네. 성조께서 소생모를 중히 여기사, 다른 비빈 덕 나란히 못하게 했네. 한번 보매 듣던 것과 전혀 다르니, 실록인들 그 어찌 다 믿을 것인가. 시를 지어 옛날 사실 서술하여서, 뒷사람들 미혹되지 않게 하누나.[微臣承祀事 入廟歌鳧鷖 高后配在天 御幄神所棲 衆妃位東序 一妃獨在西 成祖重所生 嬪德莫敢齊 一見異千聞 實錄安可稽 作詩述典故 不以後人迷]” 하였다.
주이존(朱彝尊)이 남경태상시지발문(南京太常寺志跋文)에 이르기를,
“해령(海寧) 사람으로 자가 유목(孺木)인 담천(談遷)의 《조림잡조(棗林雜俎)》 가운데 기술하기를, ‘효자 고황후(孝慈高皇后)는 자식이 없다. 그러니 장릉(長陵)만이 고려(高麗) 공비(妃)의 소생이 아니라, 의문태자 및 진왕(秦王)과 진왕(晉王)도 모두 이 숙비(李淑妃)가 낳은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앞 다투어 해괴하게 여겼다. 사국(史局)이 처음 설치되었을 적에 나 주이존이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총재관(摠裁官)이나 선배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실록(實錄)에 기술되어 있는 대로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제 천계(天啓) 3년(1623, 인조1)에 만들어진 《남경태상시지》를 보니, ‘효릉과 고황후가 주(主)이고, 좌배(左配)는 자식을 낳은 비(妃) 5인이며, 우배(右配)는 공비 1인이다.’라고 크게 쓰여 있는바, 일이 족히 믿을 만하였다. 그렇다면 실록은 사신(史臣)의 곡필(曲筆)에서 나온 것이니, 따를 것이 못 된다.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스스로 말하기를, ‘짐은 고황제(高皇帝) 측실(側室)의 자식이다.’ 하였으나, 의리에 있어서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봉천정난기(奉天靖難記)》에서는 매번 장릉이 올린 궐하서(闕下書)와 선유신민서(宣諭臣民書)를 기재하면서 말하기를, ‘짐은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와 효자 고황후(孝慈高皇后)의 적자(嫡子)이다.’ 하면서 고비(考妣)를 반드시 아울러 거론하여 반란을 일으킨 사실을 숨기려고 하였으나, 그 자취가 더욱더 드러나게 되었다. 《남경태상시지》는 모두 40권이며, 가선대부(嘉善大夫) 심약림(沈若霖)이 편(編)하였다.”
하였다. 《폭서정집(曝書亭集)》
○ 나 서건학(徐乾學)이 실록 및 여러 야사(野史)를 살펴보건대, 모두 의문태자, 진왕(秦王), 진왕(晉王) 및 문황제(文皇帝)가 고황후의 소생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유독 《남경태상시지》에서만 이르기를, “공비가 문황제를 낳았다.” 하였다. 상숙(常熟) 사람 전겸익(錢謙益) 선생과 흥화(興化) 사람 이청(李淸) 선생이 일찍이 침묘(寢廟)에 들어가서 위차(位次)를 살펴보니, 과연 《남경태상시지》에서 말한 것과 같았다. 그렇다면 실록도 다 믿을 것은 못 되는 것이다. 《독례통고(讀禮通考)》
살펴보건대, 《자휘보(字彙補)》를 보면 “공(碽)은 성(姓)이다.” 하였고, 《태상시지(太常寺志)》에는 “명나라 태조의 비 공씨가 있다.” 하였다. -《집운(集韻)》에 이르기를, “음(音)은 공(公)으로, 돌을 치는 소리이다.” 하였다.- 이덕무(李德懋)의 앙엽기(盎葉記)에는 이르기를, “《만성통보(萬姓統譜)》 및 우리나라의 씨족(氏族)에 관한 여러 가지 서책을 일일이 상고해 보아도 본디 공씨 성은 없다. 근래에 나걸(羅杰)이 연경(燕京)에 들어가서 박명(博明)을 만나 보고서 공비에 관한 일을 물으니, 박명이 말하기를, ‘바로 옛 원나라의 원비(元妃)로, 그러한 사실이 명나라 《태상시지》에 나온다.’ 하였다. 박명은 몽고인(蒙古人)으로, 원나라 세조(世祖)의 후손이다. 그는 관직이 주사(主事)에 이르렀고, 박학하여서 저술한 것이 많았으며, 글씨에 능하다. 그러니 옛 원나라 원비라고 한 그의 말도 상고한 바가 있어서 그렇게 말하였을 것이다. 대개 경신군(庚申君) 때 기씨(奇氏)와 함께 원나라로 들어갔으며, 원나라가 망한 뒤에 명나라 태조의 비가 된 것인데, 국사(國史)에서 이를 숨긴 것이다. 아마도 이는 공(貢)으로 성씨를 삼으면서 석(石) 자를 곁에 붙인 것인 듯하다.” 하였다.
영락황제(永樂皇帝 명(明)의 제3대 황제)는 의문태자(懿文太子 명 태조(明太祖)의 아들)와 함께 마황후(馬皇后)의 동복(同腹)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명사(明史)》의 연왕(燕王 의문태자)이 올린 글에 ‘신(臣)과 폐하는 함께 고황제(高皇帝)와 고황후(高皇后)에게서 태어났으니 친속으로는 가장 친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곡응태(谷應泰)의 《기사본말(記事本末)》이라는 책에도 역시 ‘신은 효강황제(孝康皇帝)와는 부모를 함께 한 형제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믿을 만한 글임이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근래 어떤 문자(文字)를 보았더니 거기에 성조(成祖 영락황제)는 바로 조선(朝鮮)에서 바친 공비(碽妃)의 소출(所出)이라고 했으니 어떻게 의심치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자전(字典)에서는 《태상지(太常志)》를 인용하여 공비를 명조비(明祖妃)라고만 했을 뿐 그가 성조를 낳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명사(明史)》속의 후비나 외척에 관한 여러 글 가운데 나올지 모르니 살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나의 조고 청장관 선생의 《앙엽기(盎葉記)》에 공비(碽妃)와 오 황후(吳皇后)에 대한 사실이 있는데, 명 나라 역사에는 이 또한 휘하고 기록하지 않았다. 《앙엽기》에 “상고하건데, 《자휘(字彙)》에 ‘공(碽)은 성이니, 《태상시지(太常寺志)》에 《명 태조의 비(妃)가 공씨다.》했다.’하였다. 주이준(朱彝尊)은 말하기를 ‘명 나라의 남도(南都)에 있는 태묘(太廟)가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때에 벼락으로 불타자, 상서(尙書) 잠 약수(湛若水)가 중건할 것을 청하였으나, 하언(夏言)은 세종의 뜻을 맞추기 위하여 그만둘 것을 청하니, 황제는 명을 내려 함께 봉선전(奉先殿)에 모시게 하였다. 상고하건데, 장릉(長陵 명 성조(明成祖)를 가리킨다)은 매양 자칭하기를 《짐(朕)은 고황후(高皇后)의 넷째아들이다.》하였다. 그러나 봉선전의 묘제(廟制)에 고황후는 남향하여 있고 제비(諸妃)들은 동으로 나란히 있는데, 서쪽에는 오직 공비 하나만이 있으니 《남경태상시지(南京太常寺志)》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대개 고황후는 끝내 아기를 낳지 못하였으니 어찌 장릉뿐이겠는가. 의문태자(懿文太子) 역시 고황후의 소생이 아니다. 세상에서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의심하는데, 심현화(沈玄華)의 시(詩)를 읽어보면 분명한 증거가 된다.’ 하였다. 주이준의 《명시종(明詩綜)》에 대리소경(大理少卿) 심현화의 경례남도봉 선전기사 (敬禮南都奉先殿紀事) 시(詩)가 실려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낮은 신하가 제사를 받들려고 / 微臣承祀事 사당에 들어가 부예를 노래하네 / 入廟歌鳧鷖 고황후 황제와 배위(配位)되어 / 高后配在天 어악에 깃들여 있네 / 御幄神所樓 여러 비들 동쪽에 나란히 있는데 / 衆妃位東序 한 비만이 홀로 서쪽에 있구나 / 一妃獨在西 성조께서 소생모(所生母)를 높이시니 / 成祖重所生 빈의 덕 그 누구도 따를 이 없네 / 嬪德莫敎齊 한번 보는 것이 천 번 듣는 것보다 나으니 / 一見異千聞 실록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 實錄安可稽 시 지어 옛 일을 기록하여 / 作詩述典故 후세 사람들 미혹하지 않게 한다오 / 不以後人迷
《동사습유(彤史拾遺)》에 ‘마황후(馬皇后)는 의문태자 표(懿文太子標)ㆍ진왕 상(秦王樉)ㆍ진왕 강(晉王棡)ㆍ성조문황제(成祖文皇帝)ㆍ주왕 숙(周王橚)ㆍ영국공주(寧國公主)ㆍ안경공주(安慶公主)를 낳았다. 처음에 마황후가 성조를 낳을 적에 용이 침소(寢所)에 나타났으며, 한번은 꿈에 도적을 만났는데 성조가 말타고 나와서 황후를 부축하고 고삐를 잡자, 도적은 성조를 보고 피하여 도망쳤다. 황후는 이 때문에 몹시 성조를 사랑했었다. 태조가 태자의 유약한 것을 싫어하자 황후는 비로소 꿈 얘기를 했었는데, 그 뒤에 마침내 정난(靖難)한 공을 세웠다.’ 하였다. 상고하건데 모기령(毛奇齡)은 함께 《명사(明史)》를 편찬하였으니, 그의 기록은 믿을 만한 것이겠으나 주이준 역시 사관(史官)이었고, 그의 고거(考據)한 것은 확실하여서 믿을 만하다. 더욱 심현화의 시가 명백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지 않는가. 우리나라 나걸(羅杰)이 연경에 들어갔을 적에 박명(博明)을 보고 공비의 사실을 묻자, 명은 대답하기를 ‘곧 옛 원 나라 원비(元妃)이니 명 나라 《태상시지》에 보인다.’ 하였다. 박명은 바로 몽고(蒙古) 사람으로 원 세조(元世祖)의 후손이다. 학식이 풍부하고 저서가 많으며 서화에 능하였는데, 원 나라의 원비라고 대답한 것도 또한 증거가 있다. 이는 대개 경신군(庚申君)이 기씨(奇氏 기황후(奇皇后)를 가리킨다)와 함께 원 나라에 들어갔었는데, 원 나라가 망하자 기씨는 명 태조의 비가 되었던 것이다. 이곳을 역사의 기록에는 휘(諱)하였는데, 어쩌면 성이 공(貢)씨인 것을 옆에 석(石)을 붙여 공(碽)으로 하였나보다.” 하였다.
@궐한이조선이 한반도에 있지않았다는 얘기하다가 무슨 자다가 봉창두드리는 소리를!!! 말문 막히면 딴소리하는 것은 아주 비겁한 행동이죠.
울아부지가 그러셨어요. 좀 이상한 사람은 상종을 말고 아예 피하라고요. 남의 야기는 안듣고 본인 야그만 주구장창 늘어놓는 님의 글에는 이제 관심을 끊기로 했습니다.
개독들 말예요. 자기들끼리만 예수 잘 믿다가 천국들 가시면 되는데 그 "전도"를 나서는 순간 또라이가 되는거 아시죠? 대륙에 조선이 있었다고 믿는 곳에 가시면 환영받고 대우받으실 분이 전도를 나오셨으니 사람들이 귀에 손가락대고 돌리는거 보일겁니다. 관심병이라는게 있나보더라구요.
잘보고갑니다 확실히 역사는 어느 주장도 있듯이 배척하면 안되는거죠 대륙조선사나 그런것들도 근거가있기에 의견이 나오는것이니 가끔 의견 나눴으면 싶네요 대륙조선사에 대해서요 개인적으로는 고대사위주를 공부 or 연구하지만요 대륙조선사 얘기만 나오면 까이는건 참 싫습니다 역사라는것도 의문속에서 행적을 찾아야하는거라고봅니다
첫댓글 무슨 이야기 인지....!
글 다 쓰지도 않었는데...꾀 급하십니더...
ᆞ
아직 다 쓰지도 않은 글을,,,빈 칠판 처다보며 졸고 있느 학생...
학교가면 그런 애기들이 더러 있지여...다시, 본문글 보세여..오늘 숙제입니다.
@궐한 이조선이 한반도에 있지않았다는 얘기하다가 무슨 자다가 봉창두드리는 소리를!!!
말문 막히면 딴소리하는 것은 아주 비겁한 행동이죠.
울아부지가 그러셨어요. 좀 이상한 사람은 상종을 말고 아예 피하라고요. 남의 야기는 안듣고 본인 야그만 주구장창 늘어놓는 님의 글에는 이제 관심을 끊기로 했습니다.
개독들 말예요. 자기들끼리만 예수 잘 믿다가 천국들 가시면 되는데 그 "전도"를 나서는 순간 또라이가 되는거 아시죠? 대륙에 조선이 있었다고 믿는 곳에 가시면 환영받고 대우받으실 분이 전도를 나오셨으니 사람들이 귀에 손가락대고 돌리는거 보일겁니다.
관심병이라는게 있나보더라구요.
@영희 내 보기엔 님이 이 싸이트 잘못 오신겁니다...
삼태극은 민족역사찾기의 역사연구싸이트지 ...정치홍보싸이트 아니거든여...
개구리들이 나타날 때가 됐는데...?
잘보고갑니다 확실히 역사는 어느 주장도 있듯이 배척하면 안되는거죠 대륙조선사나 그런것들도 근거가있기에 의견이 나오는것이니 가끔 의견 나눴으면 싶네요 대륙조선사에 대해서요 개인적으로는 고대사위주를 공부 or 연구하지만요 대륙조선사 얘기만 나오면 까이는건 참 싫습니다 역사라는것도 의문속에서 행적을 찾아야하는거라고봅니다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저정도라면 우리 집안의 희빈장씨 할머니 보단 많이 떨어집니다 ㅋㅋㅋ
주원장도 한반도 출신이고 그 부인 중 하나도 고향 어린시절 첫사랑이엇다는 주장이 ~~~
기황후의 관상을 다시 보니 요즘 드라마 흐름처럼 말년운이 좋고 또한 심약한 황제의 정신적
기둥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