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이 부처님오신날 행사에 참석해서 참배도 의식동참도 하지 않고 얼굴만 내비치는 정치행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드러난 사실관계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니 그런 문제는 무시하기로 한다.
체험을 하지 못한 이승만 시절의 이야기도 통과하고 김영삼시절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다.
김영삼은 내각을 기독교인들로 채우기로 작정하여 조직력을 갖춘 집단을 우호적으로 만들어 정치를 하고자 한, 한마디로 미디어를 끌어들이는 대중통치술을 구사한 사람이다.
그가 집권한 기간 불교계는 기독교단체들과 열혈 공직자들에 의해 유무형의 피해를 많이 받아야 했다.
어떤 장관은 환경정화라 해서 사찰의 표지판을 없애는 걸로 불교성장의 싹을 꺾었고, 불교와 사촌지간의 신흥 종교에 대학설립을 허용한 것도 모자라 그 대학에 의과대학을 만들어주는 조건으로 거액을 요구했던 적도 있었다.
또한 자기 종교를 위해 무허가 신학교를 정식 대학이 되도록 길을 터주는 행위도 했으며 공직자 승진에 있어서도 종교차별이 노골적으로 시작된 것도 그의 집권시절이었다.
이후 김대중 시기에는 외부적으로는 노골적이지 않았지만 이미 조직내 종교편향 줄서기가 다져졌던 만큼 그 멈춤은 기대할 수 없었다.
노무현시기에도 공개적인 편향은 줄었으나 공직내부의 편향 인사고과 산정의 내부관행은 그들만의 독점과 전횡으로 이어져갔다. 그걸 더 노골화한 대중조직은 호남에 기반을 두고 노무현 정권의 영남 기득권 인재들과 야합을 시도하려는 이른바 노빠들로 내부 정치역량 강화책이 한몫했다.
이명박 정권기에는 노골적인 기독교편향책으로 내외부 동시에 공격적인 편향 차별화를 거침없이 자행했다.
성시화운동이라는 것이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면서 효과를 볼 수 있었던 바탕이 바로 공직자의 자리가 주는 힘에서 가능해졌다. 포항을 중심으로 가장 저열하고 공격적인 성시화 운동의 성공은 타 기관과 지역으로 확대됐다.
이 성시화운동에 동참하는 공직자들은 헌법을 무시하고 교회법을 헌법에 우선하는 행동양식을 버리지 않는다.
황교안은 핵심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교안을 욕할 수는 있겠지만 그를 이해할 수도 있어야 한다.
욕하는 건 쉽고 합당한 판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대비를 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교육의 중요성을 곱씹어야 한다.
현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정교분리를 규정한 법의 명분에 수긍하고 찬성한다.
그런 관점에서 황교안의 행태는 오늘 조계종 출가자들의 유감표명처럼 지탄받을 일이다.
나 역시도 황교안의 행태가 잘못됐다고 말한다.
그런데 차이점이 있다.
조계종단 출가자의 유감내용에는 단순히 종교인으로서 무시받는 입장에서 비롯한 속내가 있다.
이 말은, 대우를 해주면 괜찮아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순화시킨 말로 '타 종교도 존중할 줄 아는 성숙함을 요구하는' 선이다.
정교분리라는 원칙이 왜 생겼는지를 인류사적 기원으로부터 역사적으로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순간부터 종교는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비정치적이었던 적이 없다. 역사적으로 그 연원을 거슬러보면 무려 5천년 이상이다. 말기 청동기 시대에 와서 비로소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기 시작해 철기시대에 본격 분화되었다.
그렇다면 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었는가를 알아야 황교안을 이해할 수 있고, 불자들이 어떻게 정치에 농락당하지 않고 오히려 관리할 수 있을 지 답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부터는 황교안을 고깝게 보기 보다는 거대한 하나의 흐름에 있는 작은 먼지 정도로 생각하기로 한다. 황과 같은 사람은 무수히도 많았었으니 말이다.
고대는 제사장이 모든 걸 주관했다.
즉 정치세력=종교세력이던 시절이다. 권력이 특정 집단(집안)이 대물림 독점하고 있었는데 사회 규모와 인구가 증가해 사고도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종교인을 외호할 세력이 더 많이 필요했다. 그동안 자기 가문 중심으로 무장력을 구성해 보호받았었는데, 사회 활동영역이 확장되고 인구와 가치관이 다양해지면서 군력을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그렇게 중세시대 기사라는 것 같은 무장으로 특화되는 군사세력이 청동기말부터 등장했다. 철기가 발명되고 교역의 확대로 제사장의 신성성도 심각하게 도전받기 시작했다.
제사장이 누리던 막강한 힘,, 그들 곁에서 군사력을 제공하며 보조자로 살던 세력들에게는 탐나는 것이었다.
그들은 제사장의 신성함이 도전받고 있던 시기에, 주술로서 보호받을 수 있다는 믿음보다 현실의 무력을 갖춘 자기들이 지켜주는 것이 더 현실적임을 알게 해주었다.
대중들은 제사장보다 군사력을 지닌 무장세력을 더 필요로하게 되었고 결국 군사력으로 구세력을 외호하던 이들이 반기를 들어 그들이 독점하던 권력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물론 많은 희생과 도전과 좌절을 겪은 후의 결과들이다.
이 과정을 적나라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바로 트로이 전쟁(일리아드)이고 그리스신화를 읽는 핵심 시각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 신화가 그렇게 해서 탄생됐다는 것을 정규 학교교육에서는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정교분리라는 원칙도 왜 생겨났는지를 그 연원과 의도를 소상히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해주면 균형이 위협받기 때문이다.
철기무장세력이 기존의 제사장 세력을 극복하고 권력을 쥐었음에도 여전히 무장력 외에 더 믿음직스런 존경을 얻기에는 역사가 일천했기에 그들로서도 권력적인 위태로움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기존 제사장들에게 특화돼 있던, 천문 역술 의료 교육 등의 영역에서의 권력은 제사장들에게 그대로 남겨주고, 자신들은 군사력을 기반으로 국가를 만들어서 세금을 징수해 권력기반을 확장하고 안정화하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정교분리가 시작된 근본이유다.
중세까지 이어오던 이런 공생의 관계는 시민혁명이후 다시 분화하게 되는데 여전히 제사장쪽 라인은 종교를 우선하고 그걸 위해 권력을 활용하는 고대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병폐를 무수히 체험한 인류가 궁여지책으로 정교분리를 명문화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배워서 당연히 그렇다고 ,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있는 정교분리의 허상이다.
왜 허상이냐고 하면 . 종교우위의 사고를 가진 이들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어쩔 수 없이 정치력에 끌려왔지만 어느 때건 그들의 일순위는 종교였다. 그들의 힘이 강했을 때 그것(종교욕심) 때문에 인류사회에 엄청난 피해를 만들어온 전례가 있다.
인류의 고통이나 대불행의 대부분은 이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에 발생했다.
정교분리를 명문화함에도 제대로 그것이 지켜질 수 없는 이유는 오랜 유전인자와 종교적 세뇌의 힘에 기반한다. 그런 세력이 유구히 존재하며 발악하고 있기에 타종교인들에게 요구되는 정교분리는 그들에게는 기회로 작용한다.
제사장의 시각에서 견지되는 이런 세력은 소수지만 극력하고 극악하고 단결되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정치권력은 늘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고 자기 권력을 지키기에 급급하다.
제사장 세력을 극복했을 때에도 권력의 불안함 때문에 제사장과 권력 영역을 나눠가지면서 안정을 추구했던 것처럼, 오늘날 정치세력도 유사 권력체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다.
해서, 정교분리의 명문화에도 불구하고 결속력이 강한 종교집단(혹은 준권력집단인 시민단체나 노동조합 등)에 손을 뻗어 아부해야 하는 운명을 안고 있다.
즉, 아무리 성문화한 법이 있어도, 정교분리 자체가 애초 기만적인 선언적 규정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나면 권력생태계에서 정치와 종교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발견하기도 쉽다.
이명박을 욕하고 영삼일 욕하고 황교안이를 원망할 수 있다.
그게 틀린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고 지극히 옳은 지적이겠지만, 불자들이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의 태생과 반응하는 양식이어야 한다.
몇 년 전에 봉화에 있는 어느 선승에게 대단히 실망한 적이 있다.
어쩌면 이 글을 그 상좌가 볼 수도 있겠다.
그가 말하길 정치를 종교에 끌어들이면 안 된다는 투였는데, 그렇게 말하는 그 관점 자체가 정치적인 것임을 모르고 그저 배운대로 그럴싸하게 하는 말. 정확한 말을 하는 게 중요하지 배운대로 수긍할 말을 하는 건 가식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는 가장 정치적이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이나 동양이나 예외없었고 지금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은 국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정교분리를 의미한다고 하지만 실재 미국은 바이블에 바탕한 국가 시스템이 주를 이룬다.
미국을 만든 이른바 청교도들은 가장 극렬한 제사장 추종세력이었고 그 지탱력을 군사력이 아닌 돈으로 구축한 세력들이다.
황교안은 그 비슷한 외곽인의 처세로 보면 정확하다.
은해사에서 황을 초청했나본데 우습기 짝이없다.
불자가 아니라도 불제자의 참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 종교를 떠나 한 사람의 일생을 돌아보면 불제자로 손색없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런 사람을 초청하면 된다.
황은 그 범주에는 속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단지 지역 지지기반을 가진 정당의 대표라고 초대해 앉히면 법석이 빛난다고 착각하는 수준인데, 그런 자리에 가서 머리 조아리는 게 오히려 황으로서는 쪽팔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뭐 머리 조아려 줄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나 하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황은 불교행사에 절대 머리 조아리지 않을 것이다.
그걸 지킬수록 조직력을 지닌 기독교의 표를 몽땅 접수하여 게임에서 승산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즉, 황은 이 땅에서 본격적인 종교전쟁을 시도할 위험성이 아주 높은 인물이다.
학력이 높을수록 정교분리가 지켜져야 한다고 이야길 하지만 기독교인 안에서는 철저히 무시된다.
종교도 결집력의 싸움이고 정치도 결집력의 싸움이다.
흩어진 모래알 백만톤이 있어도 시멘트 한 줌과 뭉쳐진 모래와는 쓰임의 용도와 파괴력에서 비교가 안 된다.
불자들이 뭉쳐야 함은 당연하지만 요원하다.
한국 불교가 여전히 정교분리같은 원론에 목메어 대우해주십사 구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걸 앞서서 있다고 주장하는 승려들이다. 어떤 삶을 살아온지도 무시하고 감투만 썼다하면 우러러보는 속물 근성을 보이니 따르는 신도들이 뭐가 되겠는가.
아마 황이 정치차원에서 사과라도 하러 총무원에가서 인사하면 봄눈 녹듯 사라질 일이다. 총무원장은 자기가 대우받아 우쭐해질 것이다. 그게 다루는 기술이기도 하다.
아주 다루기 쉽다. 예전에도 그래왔다. 그 덕에 경상도땅 포항에 성시화 사업까지 성공시킬 수 있었다. 기독교인으로서 정치패륜을 남발하는 사람들의 행태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정치도 망치고 불교도 망치는 일등공신이다.
종교가 정치적이기 때문에 정교분리를 만들었다. 불교가 정치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정치적이어야만 하는 법이다.
그게 정치하라는 말과는 좀 다르다. 정치적으로 판단하고 응해야 한다는 말이다.
은해사에 꽤 유명세를 날린 스님이 있었는데 그 후학들은 뭘 하는고?...황을 모시려고 했다니 참으로 한심한지고!
스승이 그렇게 가르치던가!!!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_()_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소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은해사에서 황교안씨를 부른게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온 것 입니다.
초청하지 않았는데요?? 황교안 씨가 자청해서 왔답니다.그랬던 사람이 무례를 넘어 대놓고 모욕을 하니 방장스님도 비난을 하신 거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