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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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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none|200px]] 방응모 | |
출생 | 188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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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조선 |
사망 | 1950년 8월? |
사망지 | 북조선 |
국적 | 대한제국, 대한민국 |
학력 |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
직업 | 언론인, 정치가 |
배우자 | 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 |
자녀 | 방재윤(양자), 딸 방재숙, 아들 방재선, 방재효, 방재규 |
친척 | 형 방응곤, 손자 방일영, 손자 방우영 |
별명 | 호, 계초(啓礎), 춘해(春海) |
방응모(方應謨, 1883년 ~ 1950년 8월?)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1933년 3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제9대 조선일보의 사주를 역임하였다. 정치활동으로는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당 재정부장을 역임했다.아호는 계초(啓礎)이다. 별호로 춘해(春海)라는 호도 있었다.[1]
[편집] 생애
[편집] 생애 초기
방응모는 1883년 평안북도 정주군 출생이다. 1923년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다가, 광산업에 뛰어들어 금맥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는 이 재력을 바탕으로 1933년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 초대 부사장은 이광수, 주필은 서춘이었다.
첫 번째 부인 승계도와 두 번째 부인 이인숙 사이에서 자녀가 없자 42세가 되던 해인 1924년 친형인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입양시켰다. 방재윤은 방우영, 방일영 형제의 아버지이다. 그러나 그는 1940년 방응모보다 먼저 요절하였다.
1930년 세 번째 부인으로 배영옥과 결혼하였으나,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222번지 언덕에 만해를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2]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2]
1943년 화신백화점 점원 출신인 노호용과 결혼하였다. 1944년 첫 아들 방재선을 얻었다. 그가 바로 현재 조선일보 사주 일가와 재산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방재선이다. 이후에도 방응모는 노호용과의 사이에서 방재효, 방재규 등 두 아들을 출산하였다.
[편집]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과 한국독립당 재정부장 등을 맡기도 했으며, 김구의 노선변경과 함께 그를 지지하던 세력이 떨어져 나갔고 조선일보도 김구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3] 그러나 김구와의 결별이 괴로웠던지 직접 나서서 <김구선생의 의견에 대한 우리의 취할바 태도>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3]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6월 25일 6.25 전쟁 당시 납북되어 끌려가던 중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고 전해진다.[4]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 기간만료로 실종처리 되었다.
[편집] 사후
[편집] 친일 행적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친일 행위를 한 기록이 있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朝光)》을 창간하였고,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편집] 논란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일부 논란이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5][6]
[편집] 가족
친형 방응곤으로부터 입양한 양아들 방재윤과 친아들 방재선을 두었으며, 이후 조선일보 경영을 맡았던 방일영, 방우영 형제는 방재윤의 아들이다.
- 부 :
- 모 :
- 형 : 방응곤
- 부인 : 승계도, 소생 없음
- 부인 : 이인숙, 소생 없음
- 부인 : 배영옥
- 딸 : 방재숙
- 부인 : 노호용
- 아들 : 방재선
- 아들 : 방재효
- 아들 : 방재규
[편집] 지인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7]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8]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9]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참고자료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4년 3월 1일). 〈방응모 :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청산하지 못한 역사 2》. 서울: 청년사. ISBN 9788972783138.
[편집] 주석
- ↑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 ↑ 가 나 만해와 계초 방응모 선생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 ↑ 가 나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8~70쪽.
- ↑ 신준영. “"누워서도 남쪽하늘만 보십니다" - 평양시 신미리 재북통협 특설묘지”, 《민족21》, 2002년 7월 1일 작성. 2008년 5월 15일 확인.
- ↑ 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
- ↑ "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에서 재인용.
- ↑ 백범어록 참조
- ↑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
- ↑ "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 조선일보, 2008-03-10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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