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가 피터 브룩 7>
백훈기 교수가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에 2010년 발표 한 바에 따르면 피터 브룩의 작업은 ‘브리콜라주’라는 범주에 있다고 말한다. 논문을 보면서 열린 작업을 지향하는 브룩의 작업이 어떤 고정된 공식에 묶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그것 또한 영원한 전진을 위한 또 하나의 실험과정일 것이므로 피터 브룩의 일곱 번째 이야기로 요약해 보고자 한다.
출처 : 백훈기(2010). 피터 브룩의 연출 작업과 ‘빈공간’에 드러나는 브리콜라주.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10(10), 161-171
피터 브룩은 흔히 현대 서구의 가장 중요한 연극 연출가로 일컬어진다.
그의 모색은 브리콜라주 발상을 노정한다. 브리콜라주는 ⌜야생의 사고⌟에서 소개된 후 학술적으로 관심을 끌게 된 개념이다.
연출가 피터 브룩은 연극과 삶에 대한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그의 ‘빈공간’을 효율적으로 채워가는 열린 작업 방식을 추구해오고 있다. 브룩의 이러한 지속적인 시도는 브리콜라주의 신화적 사고가 지니는 긍정적인 가능성을 드러내며, 연극의 발전적 방향을 제시하는 고무적인 암시인 것이다.
Ⅰ. 서론
피터 브룩은 코미디를 포함한 상업극, 셰익스피어에 대한 현대적 해석과 연출의 실험, 아르토나 브레히트 등 앞선 연극실천가들의 영향력이 엿보이는 연극적 실천들, 그리고 보편 언어의 추구 및 신화적 탐구의 작업, 그리고 I.C.T.C.(International Centre of Theatre Creations)를 중심으로 한 문화상호주의 연극 등을 이어오며 지속적인 활동을 해왔다. 이런 작업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그는 분명히 단일한 연극적 모델을 지향한다기보다 작품에 따라 다양한 스타일을 차용하여 결합하거나 재창조하려는 시도를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절충적이라는 평에도 불구하고 무대의 ‘빈공간’을 다양한 연출적 발상과 방식으로 채워나가는 그의 실천에는 분명히 일관적인 정신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고정된 형식을 거부하는 그의 연출 철학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형식적으로 고정된 것을 거부하고 방법적 절충의 시도를 이어온 피터 브룩의 작업을 ‘브리콜라주Bricolage’의 측면에서 이해하고 분석하고자 한다.
Ⅱ. 본론
브룩에게서 드러나는 발상과 작업의 특성을 브리콜라주 사고와 연계하며 살피면서 우리는 그의 작업이 드러내는 의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브룩의 연극관과 브리콜라주
현대 연극의 고전인 ⌜빈공간⌟을 비롯한 그의 저서를 통해서 우리는 좀 더 명확하게 그가 지향하는 연극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빈공간⌟에서 브룩은 연극을 ‘치명적 연극 deadly theatre’,‘성스러운 연극 holy theatre’, ‘거친 연극 rough theatre’, 그리고 ‘직접적인 연극 immediate theatre’으로 분류하여 제시했다.
피터 브룩이 추구하는 연극은 ‘거친 연극’과 ‘성스러운 연극’을 포함하는 ‘직접적인 연극’이다.
그의 언급을 통해 볼 때 거친 성격이건, 성스러운 성격이건 간에 브룩이 연극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연극의 형식이나 방법론 또는 그것들의 논리적 배경을 제공하는 이론에 있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관객과의 진정한 교감과 세계에 대한 깊은 인식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다.
피터 브룩이 기존의 이론적 성과들의 부분을 재료로 그의 작품을 만들 때, 그 이론들은 완결된 구조로서가 아니라 부품으로서의 기능을 갖는다. 이것은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브리콜라주와 일치한다.
브룩이 만들어가는 작품 속에 결합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으로서 기존의 이론이 이용되는 방법은 ‘동일한 유형에 속하는 것이라면 어떠한 조작에라도 쓸 수 있는 매체’(레비-스트로스 71)가 되는 브리콜라주 메커니즘의 작동이라 할 수 있다.
2. 즉흥을 통한 브리콜라주
브룩은 작품을 연출하게 될 때 미리 그 콘셉트나 구상을 준비해가지 않는다. 이런 성향은 젊은 시절의 경험 이후에 지속되었다고 한다.
정해지지 않은 것들을 통해 작품의 형태라는 구조를 정해가는 과정이 바로 즉흥인 것이다.
브룩은 즉흥 연습이 배우의 몸과 마음의 준비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했고, 그것을 매우 적극적인 리허설의 방법으로 사용했으며, 즉흥을 통해 만들어진 장면들을 공연에 적극 사용했다. 이는 주어진 것들이 ‘현재의 계획이나 어떤 특정한 계획과 관련되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의 산물’(레비-스트로스 91-92)브리콜라주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즉흥극을 통한 연습과정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 수백만 가지의 가능성’(브룩, ⌜열린 문⌟86)의 모색이며, 새로운 구조(작품)의 용도에 맞게 그 가능성이라는 재료를 선별하고 사용하는 브리콜라주가 되는 것이다.
3. 무대 장치와 도구의 브리콜라주
빈공간은 사실적 무대가 보여주는 명확한 배경을 미리 전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브룩은 그 빈공간을 통해 변화되는 구체적 상황들을 제시한다. 이 때 빈 무대는 관객의 상상력이 여백을 채우는 방식을 통해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의미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방식은 현실을 모방하는 재현적 무대가 보여주는 것보다 연극의 이야기를 훨씬 더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것처럼 느끼게 하는 효과를 가진다.
이러한 작업은 ‘거친 연극’의 특성을 이용해 ‘직접적인 연극’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 중략 - 변용된 사물들은 비사실적인 방식으로 극중의 오브제로 재료화되는 것이다. 브룩은 이러한 브리콜라주적 무대 사용을 실제 공연에서도 적극 사용한다.
이러한 빈공간의 브리콜라주는 그가 말한 대로 ‘병이 피사의 사탑’이 되거나, ‘로켓’이 되는 변화를 통해 관객의 ‘참여’를 만들어낸다. 이 참여는 ‘관객이 무대 위로 오르고... 배우들과 어우러지는’방식이 아니라, 상상력을 통해 사물의 변용을 이해하고, 빈공간의 여백을 채우는 방식으로 ‘관객이 극적 행동의 공모자’(브룩, ⌜열린 문⌟42)가 되게 하는 의미의 참여이다.
이러한 도구의 사용은 ‘비사실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무대 장치(혹은 도구)’를 통해 관객과의 효과 있는 관계를 만든다. 곧 연극의 세계에 관객들이 상상력을 가지고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동참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도구의 변용을 요구하는 절제와 여백의 ‘빈공간’은 필연적으로 관객의 관심을 장치가 아니라 배우쪽으로 집중하게 하는 효과를 이끌어내게 된다.
4. 배우의 투명성과 경쾌함을 통한 브리콜라주
브룩의 ‘빈공간’에서는 오브제의 변용과 마찬가지로 배우의 변용이 드러난다. 여기서 배우의 변용이라 함은 전통적 관습에 따라 인종이나 성 역할에 구애받지 않는 배우의 캐스팅과 역할 분담을 뜻함과 동시에, 그것과 연계되면서도 좀 더 심화된 연기의 측면으로 브룩이 강조하는 ‘투명성’이나 ‘경쾌함’과 연관된 요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브룩에게 있어 투명성transparency이란 내적 충동의 궤적을 명확하면서 즉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배우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형식 속에서 요구된 단순성과 경제성을 찾는 것은 바로 증류distillation의 과정이 된다. 또 브룩은 앙상블 속에서 주된 창의력의 원천인 배우(행위자 집단)를 ‘상상력을 지닌 여러 머리의 이야기꾼’으로 보며, 이들에게 경쾌함(혹은 능란함)lightness을 요구한다. 이것은 배우가 무대 위에서 변환해야 하는 요구에 연루되고, 열려 있고,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결국 브룩의 배우에게는 스타니슬라프스키가 요구하는 것 이상의 능력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쇼미트 미터가 풀었던 방식대로 말하자면 브룩은 배우들에게 ‘되기(스타니슬라프스키)’와 ‘되면서 되지 않기(브레히트)’, ‘존재하기(그로토프스키)’의 세 측면을 작품의 성격과 상황에 맞춰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배우는 브룩과 마찬가지로 (연기) 이론의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투명성’과 ‘경쾌함’의 능력을 갖춘 ‘상상력을 지닌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배우의 능력은 여백으로 채워진 빈공간의 연극이라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 ‘손재주꾼’이 미리 ‘수집하여 갖고 다녀’(레비-스트로스 71)야 하는 핵심적인 재료와 도구가 되는 것이다.
5. 피터 브룩과 브리콜라주
도그마가 아닌, 거기에 채워져야 할 수많은 여백을 담은 개념으로써의 ‘빈공간’에 대한 이해는 그가 기존 이론들의 일부분들을 새롭게 범주화해 자신의 ‘빈공간’을 ‘채우기’ 위해 사용해왔다는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않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그 이론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을 변용하고 섞는 등의 방식은 방법일 뿐이고, 궁극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진 연극이 관객과의 만남에서 어떠한 상승효과와 가치를 구현하는지에 브룩은 방점을 찍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관습에 저항하는 도전을 이어온 것이 그의 연극 작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 답은 ‘더 풍부한 경험의 단계를 위해 열려있는, 더욱 깨어있는 형식 속’에 있는 것이며, 이 ‘종착이 없는 일’이 ‘모든 작업의 목적’이 된다.(Croyden, ⌜Conversation with Peter Brook⌟289) 이러한 형식을 찾는 끝없는 과정 속에서, 연극 이론은 도그마로서가 아니라, ‘열려있는 형식’이라는 ‘구조의 배열’을 만들기 위해 이 ‘손재주꾼’에게 수집된 도구와 재료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빈공간의 무대 장치와 오브제, 그리고 그의 연극에 중심에 놓이게 되는 배우의 연기에도 똑같이 적용되어 설명될 수 있게 된다.
Ⅲ. 결론
브룩이 보여주는 실천은 현대의 과학적 사고에 의해 묻혔지만 그 복원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브리콜라주의 ‘신화적 사고’와 맥락을 같이 한다. 브룩은 단일한 이론이나 방법론에 얽매이지 않고, 관습과 도그마에 대항하며, 열린 방식으로 형식과 구조를 만들어가는 식의 작업 방식을 보여 왔다. 이러한 브룩의 발상은 관습이나 과학적 사고로 지칭되는 오늘날의 접극방식이 보여주는 것과는 다른 범주화를 보여주는 브리콜라주의 신화적 사고라 할 만하다. ‘거칠음’과 ‘성스러움’을 적대적 관계로 보지 않고, 관객의 총체적 경험이 가능한 ‘직접적인 연극’으로 ‘범주화’하는 발상이 바로 그 대표적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