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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이 ‘집’으로 가는 길에는 그리움이 가득하다
- 송민수 작가({도대체 내가 뭘 읽은 거지?} 저자)
『사랑의 기쁨』과 <즐거운 나의 집>
“그가 시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을 만든 것처럼 따뜻한 밥그릇 앞에 놓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집으로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복규 시인의 『사랑의 기쁨』을 읽고 쓴 시평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나는 그의 시에서 ‘집’에 주목했다. 그가 시를 통해 표현한 집은 쓸쓸하고, 허전한 곳이었다. 나는 차가운 집안에서 그리움에 울다 지친 그를 응원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시를 잘못 읽었다. 그의 시를 몇 번을 더 읽고 나서야 내가 쓴 시평이 나의 고정관념의 표현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온전하고 따뜻하고 안전한 집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사랑의 기쁨』을 ‘집’으로 가는 여정으로 읽었다. 집은 사회를 이루는 가장 작은 공동체이다. 우리는 안전하고 따뜻한 집을 당연하게 여긴다. 집은 부모와 자식들의 안락한 보금자리로 서로 웃으며 따뜻한 밥을 함께 먹어야 하는 곳이어야 한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노래의 가사다. 하지만 그런 집이 어디 있을까? 예전에는 이 노래처럼 따뜻하고 즐거운 나의 집을 꿈꾸었지만, 지금은 그저 꿈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즐거운 나의 집>을 바라지만, 사실 그런 집은 극히 드물다. 모두에게 자상한 김부장은 가족들 앞에서 권위적이고, 모두의 마음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박여사는 남편과 자식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모두에게 착하고 많은 일에 성실한 서연이는 부모님에게는 답답하게 굴고, 집에서는 게으르다. 하지만 우리에게 가족이 어떠해야 한다는 관념은 뿌리가 깊다. 당위로서 행복한 가족의 모습은 광고와 드라마뿐만 아니라,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옛날이야기들 속에도 넘쳐난다. 어쩌면 우리들은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 가족의 모습에 우리 자신을 구겨 넣으려고 애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각자의 외로운 집
‘좁은 구멍에 끼여 숨을 쉴 수 없었던 아버지의 집’ -<가출>
‘식구들도 없어 끼니도 거르고’ - <마약 같은 봄날>
‘살아서도 컴퓨터 자판 같은 집을 벗어나지 못하더니’ - <천자원(天子園)>
‘집에 오면 보지 않는 텔레비전을 켜놓고 나는 멀리 있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추억에 후회와 외로움을 섞어 보듬으며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별들이 속삭이는 어느 날>
‘우리는 같은 시간과 공간을 사는 게 아니라 다른 공간에서 같은 기억의 방에 머물고 있는 것이지요’ -<여름>
『사랑의 기쁨』에는 마땅히 어떠해야 한다는 틀에 갇힌 가족이 등장하지 않는다. 시인에게 집은 <가출>, <마약 같은 봄날>, <천자원(天子園)>, <별들이 속삭이는 어느 날>, <여름>에서처럼 각자의 공간일 뿐이다. 시인의 집에는 그를 반기는 가족이 없다. 온기가 없다. 그는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 가족이 아니라, 지금 어떠한 가족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보지 않는 텔레비전을 켜놓고, 식구들도 없어 끼니도 거르고, 각자의 외로움을 견디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짧은 미소로 다시 혼자가 되는 것이 우리 주변의 흔한 가족의 모습이다. 우리는 숨쉬기 힘든 컴퓨터 자판 같은 집에서 같은 시간과 공간을 사는 게 아니라 다른 공간에서 같은 기억의 방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의 관찰한 집은 가족 서로가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외로움을 보듬는 곳이다.
<민달팽이의 꿈>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집의 모습을 사람들을 통해 보여준다. ‘집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청소년들’, ‘내 집 마련을 위해 사는 부부들’, ‘불이 난 고시원에서 공기마저도 제대로 마시지 못해 사라진 일용직 사람들’, ‘크레인에 둥지를 틀고 고공농성 중인 노동자들’, ‘세상을 집으로 가진 노숙자들’,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아이들’까지 이들에게 집의 의미는 다 다르지만, 따뜻하고 포근하게 가족들과 함께 쉴 수 있는 집은 아니다. 이들에게는 제대로 된 집이 없다. 시인 역시 <민달팽이의 꿈>에서 ‘비올 무렵 민달팽이 나뭇잎 위를 걷는다 민달팽이 느릿느릿 윤기 나게 걸어가는 생이 환하다. 이 밤 어디서 잘까?’라며 집 없는 민달팽이를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그는 ‘엄마가 없는 집에 딸들을 객지에 두고 민달팽이처럼’ 집으로 돌아간다. 그의 시 <가족>을 보자.
가족
외로움에 면역 된 사람들 외로움이 옷이 된 사람들 홀로 죽음을 맞이하고 죽은 지 한참이 지나 발견되는 사람들
관계란 각자의 외로움을 견디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짧은 미소로 다시 혼자가 되는 변기에 버린 물에 빨려 내려가는 파리처럼 헤어진다
다시 보지 못하는, 탈수기에 빨려나가는 물, 생활비가 통장으로 빠져나가고 가끔씩 잔고를 확인하며 마이너스 통장에서 마이너스 통장으로 옮겨가는 슬픔들의 이삿짐
추억을 공유했던 사람들 조금씩 줄어들고 할 말이 사라지는 즈음 누군가의 부고를 알리는 메시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텔레비전을 켠다 전기장판의 온도를 한 칸 올린다
외로움도 익숙해서 더는 쓸쓸함도 없을 무렵 일회용 컵라면에 물을 붓는다 후후 불어가며 뜨거운 국물을 먹는다
시의 제목이 분명 ‘가족’이다. 신문지상에 나오는 쓸쓸한 죽음들과 의미 없는 미소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관계, 그리고 생활에 치여 사는 사람들이 모여 ‘가족’이라는 시를 이루었다. 그러게 서로가 서로에게 할 말이 사라지는 무관심이 쌓이고, 외로움과 쓸쓸함을 홀로 견디다 그것도 무뎌져버린 사람들이 함께 살며 ‘가족’을 이루고 있다. 참으로 흔한 풍경의 집의 모습이지만,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우리들의 ‘가족’이 발가벗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각자의 외로운 집을 회피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의 시집 『슬픔이 맑다』에서 슬픔을 회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 안은 것처럼, 그는 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는 <마약 같은 봄날>에서 ‘보고 싶은 대로 보지 말고 보이는 대로 보라고 제발 가만히 두란 말이야’라고 외친다. 나는 집은 <즐거운 나의 집>이어야 한다고,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기 위해 보이는 것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나는 보고 싶은 것으로 내 눈을 가리고, 보이는 것에서 괴로움을 키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시인은 온기가 없는 집을 보이는 대로 그대로 보면서 ‘시’를 썼다. 그리고 자신이 쓴 ‘시’들을 모아 ‘집’을 만들었다. 그가 만든 시‘집’은 그의 집과는 다를까?
‘집’에서 ‘시’로 가는 길
나는 이복규 시인의 ‘시집’을 읽고, ‘시’와 ‘집’을 생각했다. ‘시’가 닿을 수 없는 이상이라면, ‘집’은 만들어가야 할 현실이다. 하지만 시인에게 시는 가깝고 집은 멀기만 하다. 어쩌면 그는 시 때문에 집에서 멀어졌을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는 시를 통해서 집으로 가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사랑의 기쁨>에는 ‘시’와 ‘집’을 소재로 한 시들이 많다. <생명의 은인>을 보자.
생명의 은인
정진규 시인은 나를 여러 번 살리셨다 대학교 2학년 때 그동안 써 온 습작시 두 권을 드렸는데 쓰레기통에 버리면 된다고 하셨다,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러 인사동 현대시학 사무실에서 선생님은 아내에게 시를 쓴다며 직장을 그만둔다고 하면 헤어지라고 하셨다, 꿈은 언제나 멀리 있어 밤길을 걸을 때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고 가슴에 새겨 주셨다, 세상의 쾌락에 빠져있을 때 ‘이별’로 경계에서 서성거리는 인간됨을 가르쳐주시며 집으로 눈을 돌리게 하셨다, 시간은 가는 것이라며 ‘몸’의 진실됨을 잃지 말라 하셨다, 내가 별 볼 일 없는 시인이 되었을 때도 현대시학에 부끄러운 시를 실어주시며 시 같은 거 별 거 아니라고, 아니라고 하시며 정작 당신은 숨이 다할 때까지 시를 살리셨다, 그런 그가 떠났다 시만 남기고 시의 몸만 남겨놓고. 어쩔 수 없이 죽을 때까지 시를 쓰도록 하시고.
*‘ ’ 안의 시어는 정진규 시인의 시 제목이거나 시어.
그의 스승인 정진규 시인은 그가 써 온 습작시 두 권을 쓰레기통에 버리면 된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라는 속 깊은 뜻이었다. 너무 이상만을 좇으며 살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스승은 그에게 ‘집’으로 가라고 하면서도 ‘시’를 보여주었다. 스승의 모순된 마음은 ‘시’ 때문에 가능한 것일 아닐까싶다. 현실에 충실한 삶을 통해 평범한 행복을 느끼며 살기를 바라는 스승의 마음도 진실일 것이다. 또한 시를 통해 이상을 추구하는 괴로움과 그 속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던 스승의 마음도 진실일 것이다. 그는 시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집으로 눈을 돌렸다. 결국 어둠이 마땅한 삶 속에서 별거 아닌 시를 죽을 때까지 쓰게 만들고, 시간은 가는 것이라며 ‘몸’의 진실됨을 잃지 말라던 스승이 떠났다. 그리고 아직도 제대로 집으로 가지 못하는 그는 벌써 세 번째 시의 집을 만들었다. 그의 시는 시와 집 사이의 경계에서 흔들리며 쓰였고, 그의 시에는 경계에서 서성거리는 인간됨이 담겼다.
그의 시 <가출>에도 시와 집의 이야기가 담겼다. 머무는 순간 삶이 없기 때문에 새는 집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들이 원치 않는 시들의 집을 짓는다. 새와 시는 집에 머물지 않는다. 머물지 못하는 그의 시들은 먼 산을 보며 그가 만든 집을 떠난다. 아이들이 떠난 집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고 와 비추는 겨울 거실의 햇빛처럼 집은 비어있고, 빈 집에는 그리움이 가득하다. 아마도 한 때, 그와 그의 시들은 서로 뜨거웠을 것이다. 어느 순간일까? 그의 시들이 그를 낯설어 하게 된 것은.
시인은 <별들이 속삭이는 어느 날> 보지 않는 텔레비전을 켜놓고 멀리 있는 사람을 그리워한다. 당신이 멀리 있어 ‘시(詩)’들이 가까워졌다고 말하는 시인에게 집은 후회와 외로움이 가득한 공간일 뿐이다. 차가운 집에서 그는 홀로 그리워하며 그리움에 불을 피우며 손을 데운다. 그리움은 그의 집과 시 모두를 가득 채우고 있다. <사랑의 기쁨> 곳곳에 담긴 그리움은 어쩌면 시와 집이 흔들이며 맞닿은 교집합일지도 모른다.
출렁이고 일렁이며 반짝이는 그리움
‘울어라 귀뚜라미야 너를 찾아, 온 우주가 같이 울어주는 저 울음의 짝을 향해’ -<귀뚜라미>
‘아! 비가 내리는 장마에도 목마름이 우리였죠 꽃잎이 떨어지는 그 해 여름, 우린 함께 비를 불러 가을을 기다렸죠 긴 여름 백일홍이었던 당신’ -<백일홍>
‘나도 보이지 않고 너도 보이지 않는 그 밤에 별들과 함께 눈을 감았다가 뜨면 가끔 눈물이 맺히기도 하지 네가 생각이 나서 그래,’ -<감는다>
‘그리움의 넓이가 / 그 사람의 말을 줄이게 하지 / 말없이 그리워하는 것들 / 마음껏 그리워하며 / 떠도는 섬’ -<지심도>
‘푸른 잎들이 만들어 놓은 / 그리움의 핏줄 / 당신에게 흘러 갑니다’ -<유流월月>
‘오늘은 저녁을 굶고 / 당신만 바라 볼 겁니다 / 꽃 피기 전 그 보드라운 손으로 / 저를 쓰다듬는 그 눈부신 순간을......’ -<꽃 피기 전>
‘피어선 지는 흩날리는 꽃보다 / 꽃 피기 전 당신 바라보는 마음이 더 붉지요’ -<약속>
<사랑의 기쁨>은 그리움의 기쁨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에는 그리움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립다’는 보고 싶거나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상태다. 그리움은 부재를 향한 것이다. 그의 시 <지심도>에서도 ‘쉽게 만날 수 없어야 그리움이 된다’고, <유流월月>에서도 ‘당신이 멀리 있어 그리움이 흐른다’고 했다. 존재하지 않는 것-그것이 지나가 버린 과거의 것이든지 처음부터 존재한 적도 없는 것이든지-을 보고 싶거나 만나고 싶은 마음은 괴로움을 동반한다. 그의 그리움도 애틋함(약속)으로 목마름(백일홍)으로, 그리고 통곡(귀뚜라미)으로 이어지며 출렁인다. <다시 태어난다면>에서 그의 그리움은 강렬한 슬픔이 되어 더욱 출렁인다.
다시 태어난다면
여자로 태어나, 자궁 안에서 너의 잉태된 슬픔을 꼭 껴안아 등을 토닥거려 줄 것이다 네가 태어나도 슬퍼할 겨를이 없도록, 설령 어느 날 세상 일이 그렇듯 너에게 슬픔이 오는 날이면 나는 너의 얼굴을 젖가슴으로 감싸 안아 눈물이 내 살에 닿아 스미도록 안아줄 것이다 슬픔의 슬픔까지도 숨 쉴 수 없도록......내가 여자로 태어난다면 자궁으로 감싸 안아 젖을 물리고 당신은 나의 전부라고,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당신을 낳고 싶다고, 그렇게 고백할 것이다 당신에게 잉태된 슬픔을 꼭 껴안아 당신이 태어나도 슬퍼할 겨를이 없도록, 새가 바람의 알을 품어 바람을 날려 보내듯이.......
그리움과 슬픔 깊이가 얼마나 깊으면, 다음 생의 슬픔까지 숨 쉴 수 없도록 하고 싶은 것일까? 하지만 그의 그리움이 거세게 출렁거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그리움은 부재의 슬픔을 응결시켜 승화시킨다. 그는 ‘슬픔은 기쁨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 저만치서 손을 흔들어-<꽃 피기 전>’ 준다고 이야기한다. 그리움은 ‘주인도 없이 홀로 핀 / 산벚나무 한 그루-<산벚나무>’로, 또 ‘나무가 흔들리며 슬픈 영혼을 감싸면 깎이고 깎-<연인>’인 의자로 승화되기도 한다. 그렇게 그리움의 끝에 서서 그는 ‘당신 만나고 돌아오는 바람에게 / 손을 뻗어’, ‘아무도 모르게 미소 짓는-<유流월月>’다. 그는 그의 시 곳곳에서 ‘바람’을 통해 그리운 대상을 만난다. 결국 슬픔과 ‘그리움의 넓이가 / 그 사람의 말을 줄이게-<지심도>’ 하고야 만다.
따뜻함에 대하여
사람을 만나
슬픔에 대하여 말할 정도로
가까워지면
두렵다
위로할 수 없는 슬픔은
두렵다
위로 받지 못하는 슬픔은
고독하다
슬픔은 슬픔을 부른다
오래된 당신
슬픔을 갈비뼈 안 쪽 끼워놓고
슬픔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당신 만나면
따뜻하다
슬픔이 퇴화되어
슬픔이 슬픔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
당신
만나면 따뜻하다
보이지 않는 슬픔이
슬픔을 위로하고
말없이 건네는 손
따뜻하다
얼마나 수많은 시간을 고독하고, 쓸쓸해야, ‘슬픔이 퇴화되어 슬픔이 슬픔도 아닌 것이’ 될 수 있을까? 슬픔을 드러내지 않는 순간은 슬픔의 해일이 수없이 모든 것을 밀어내고 나서야 온다. 승화란 고체가 액체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기체로 변하는 현상이다. 어쩌면 시인은 외로움과 슬픔이 승화되어 정제된 아름다움으로 반짝이는 순간을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그의 ‘시집’에 담아낸 쓸쓸하고 외로운 집도, 절절한 그리움도, 시에 대한 그의 짝사랑도 모두 그 반짝이는 순간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순아 보름달이다!
순아 보름달이다 산책가자
햇볕에 그을린 잎들 달빛으로 마사지 받는
나무들 사이 에움길 걷자
소리로 더듬으며 사랑을 속삭이는 풀벌레들
달달한 소리들 들으며
손을 잡고 걸어보자 보름달이다 순아
문동저수지에 비추어 매무새 끝내고
새색시처럼 앉아
바람에 머리 풀고 부끄럽게 고개 돌린
보름달을 맞이하자
순아 보름달이다
어느새 아기들 자라 어른이 되어 떠나고
철없던 우리도 가을처럼 비어 있다
가볍게 걸어 보자
미운이 고운이 달 항아리에 담아
달보드레한 식혜 한 잔 나누어
남은 날 두 손 모아 빌어보자
순아 보름달 같은 순아
그는 산책을 가자고 한다. 아기들 자라 어른이 되어 떠나 엄마가 없는 집이 더 편해지고, 철없이 그리움에 울던 우리도 가을처럼 비어 있다. 마침내 그의 그리움은 ‘미운이 고운이 달 항아리에 담아 달보드레한 식혜 한 잔’에 담겨 일렁이며 반짝인다.
사랑의 기쁨
효원동에는 김세중(1928-1986) 미술관 ‘예술의 기쁨’이 있다, 부부가 함께 살던 집을 기증해 2015년 남편의 미술관을 세운 것이다, 광화문 사거리 큰 칼 차고 서 있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새긴, 조각가 김세중 씨의 아내는 시인이었다 시인은 구십이 넘은 나이에도 남편을 시처럼 지키고 계셨다, 미술관 마당 수백 년 넘은 상수리나무 한 그루에는 부부의 정보다 더 깊고 넓은 기쁨 있어 차마 베지 못하고 나무 주위로 미술관을 지었다고 한다, 시인과 조각가의 사랑이 연하고 연하여 나무 옆에 전시된 기도하는 수녀상의 쇠마저 나뭇가지처럼 연하고 연하여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예술의 기쁨’은 사랑의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 그녀의 시는 사랑 때문에 아직 살아 있고 ‘심장이 아프다’, 그것을 ‘아무도눈치채지못한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雅舞道)
*『심장이 아프다』-김남조 시인 17시집 제목.
*아무도눈치채지못한다-미술관 벽면에 걸린 문구.
‘예술의 기쁨’이 사랑의 기쁨을 이기지 못해서일까? 그는 별 볼 일 없는 자신의 ‘시’를 아끼며 사랑하며 살아간다. 그 놈의 사랑 때문에 그의 시는 아직 살아 있고, 그의 심장은 지금까지도 아픈 것이 아닐까?
그는 시와 집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다. 그가 만든 떨림이 그의 시집 곳곳을 흔들어 사람들 마음속에 작은 울림을 만들어 낼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 (출처) 애지 문학회 / 애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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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규 시집 {사랑의 기쁨} 출간
이복규 시인은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고, 고려대학교 국어교육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2010년 {서정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아침 신문}과 {슬픔이 맑다}가 있고 현재 거제도에서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
이복규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인 {사랑의 기쁨}은 예술보다 사랑에 더 강조점을 두고, 한 시인의 남편에 대한 사랑을 시(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사랑과 예술은 둘이 아닌 하나이며, 아름답지 않은 사랑, 즉, 예술로 승화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효원동에는 김세중(1928-1986) 미술관 ‘예술의 기쁨’이 있다, 부부가 함께 살던 집을 기증해 2015년 남편의 미술관을 세운 것이다, 광화문 사거리 큰 칼 차고 서 있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새긴, 조각가 김세중 씨의 아내는 시인이었다 시인은 구십이 넘은 나이에도 남편을 시처럼 지키고 계셨다, 미술관 마당 수백 년 넘은 상수리나무 한 그루에는 부부의 정보다 더 깊고 넓은 기쁨 있어 차마 베지 못하고 나무 주위로 미술관을 지었다고 한다, 시인과 조각가의 사랑이 연하고 연하여 나무 옆에 전시된 기도하는 수녀상의 쇠마저 나뭇가지처럼 연하고 연하여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예술의 기쁨’은 사랑의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 그녀의 시는 사랑 때문에 아직 살아 있고 ‘심장이 아프다’, 그것을 ‘아무도눈치채지못한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雅舞道
*『심장이 아프다』-김남조 시인 17시집 제목.
*아무도눈치채지못한다-미술관 벽면에 걸린 문구.
---[사랑의 기쁨] 전문
사랑과 예술은 어떤 관계일까? 사랑이 더 소중하고 예술은 덜 소중한 것일까? 이복규 시인의 [사랑의 기쁨]을 읽으면서 이러한 생각을 잠시 잠깐해 보았다. 이복규 시인의 [사랑의 기쁨]은 예술보다 사랑에 더 강조점을 두고, 김남조 시인의 남편에 대한 사랑을 시(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사랑과 예술은 둘이 아닌 하나이며, 아름답지 않은 사랑, 즉, 예술로 승화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도 아낌없이 주는 것이며, 예술도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 사랑과 예술이란 무보상적인 것이며, 우리 인간들의 더러운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것을 말한다. 로미오가 죽으면 줄리엣도 죽고, 줄리엣이 죽으면 로미오도 죽는다. 사랑이 죽으면 예술도 죽고, 예술이 죽으면 사랑도 죽는다. 사랑의 미적 형태가 예술이고, 예술의 물적 토대가 사랑이다.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조국을 구한 성웅 이순신의 동상을 제작한 김세중은 김남조 시인의 남편이고, 그 남편의 사후, 김남조 시인은 김세중의 또하나의걸작품인 자택을 나라에 기증하고, ‘예술의 기쁨’이란 미술관을 세운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이복규 시인은 “예술의 기쁨은 사랑의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 그녀의 시는 사랑 때문에 아직 살아 있고 심장이 아프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랑의 기쁨’은 ‘예술의 기쁨’으로 승화되지 않으면 그 생명력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을 모른다. 아니, 이 말은 반어反語가 되어야 하고, 따라서 그는 사랑 때문에 심장이 아픈 김남조의 마음, 즉,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그 마음을 읽고, 이처럼 아름답고 뛰어난 시를 쓰게 된 것이다.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雅舞道, 시란, 예술이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불꽃이며, 가장 우아한 불꽃놀이의 춤인 것이다. 사랑의 기쁨이란 예술의 기쁨 없이 타오르지 못하고, 예술의 기쁨이란 사랑의 기쁨 없이 타오르지 못한다. 이복규 시인의 [사랑의 기쁨]은 예술의 기쁨이며, 조각가 김세중과 시인 김남조의 사랑을 시적으로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라는 반복적인 리듬과 그 무아지경의 황홀 속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예술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하루 종일 컴퓨터 바둑이 유일한 낙인 여든이 넘으신 장인
여든이 넘었다는 말에는 언제나 죽음의 냄새가 난다
중학교 수학여행 때 처음 들어갔던 백제 무녕왕릉은 죽음의 무섭고도 화려한 빛이 가슴을 찔렀다
부여가 고향인 장인어른의 바둑판에는 언제나 마지막일지 모르는 사석이 누워있다
폐렴이 스치고 간 장인의 깊은 기침소리는 백제의 쓸쓸함이 담겨 있다
장인의 눈빛에는 인생의 무의미함이 언제나 있었지만 결코 나에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장모님은 언제나 기도로 그 답을 대신했다
추풍령 처갓집을 다녀오는 날은 어김없이 바람이 따라와 등을 돌렸다
불을 끄고 누우면 아내의 깊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물은 스스로 깊어지고 나무는 스스로 꽃을 피운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있는 봄 그림자가 우리 언저리에서 행복이 불행을 불행이 행복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그러다가 또 꽃봉오리가 맺혔다
---[백제는 쓸쓸하다] 전문
이복규 시인의 [백제는 쓸쓸하다]는 백제와 나당연합군과의 싸움, 나라와 고향을 잃은 장인어른과 동시대와의 싸움, 오랫동안 폐렴을 앓은 장인어른과 죽음과의 싸움 등이 겹쳐져 있으며, 이미 패배가 예정되어 있고, 반전의 역사를 쓸 수 없는 ‘인생의 무상함’이 너무나도 허무하고 쓸쓸하게 배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불을 끄고 누우면 아내의 깊은 숨소리가 들려”왔고, “강물은 스스로 깊어지고 나무는 스스로 꽃을 피운다.”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오며, 행복은 불행을, 불행은 행복을 언제, 어느 때나 되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나 여든이 넘으신 장인어른은 그 사석작전에도 불구하고 대반전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을 것이고, 장인어른과의 인연을 맺은 장모님과 아내의 깊은 한숨 소리마저도 ‘인생무상함’의 쓸쓸함을 어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나라 잃은 백성처럼, 고향 잃은 인간처럼, 또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인간처럼 쓸쓸한 인간이 있을까? 나라 잃은 백성의 쓸쓸함, 고향 잃은 인간의 쓸쓸함,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는 인간의 쓸쓸함, 이 세 가지의 쓸쓸함이 이복규 시인의 [백제는 쓸쓸하다]에는 맑고 투명한 눈물처럼 맺혀 있다.
----이복규 시집 {사랑의 기쁨}, 양장, 도서출판 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