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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문화의 원류 원문보기 글쓴이: 솔롱고
3 마고가 세운 최초의 나라 「마고지나」
우리는 마고의 자손
우리는 “우리가 누구의 자손이냐”고 하는 물음에 대하여 ‘국조 단군의 자손’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 말은 틀린 말이다.
‘국조 단군의 자손’이 아니라 ‘중시조 단군의 자손’이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우리가 국조로 모시는 단군왕검 위로도 조상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학계에서 인정하는 단군왕검에 관한 역사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실린 「단군신화」이다.
개천절이 오면 누군가 기념식장의 단상에 서서 인용하는 글들이다.
매년 되풀이하여 이 글을 인용하면서도 이 역사 기록에 대하여 의문을 갖는 사람은 없다.
이를 정사로 인정한다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기록을 믿으면 우리의 역사가 ‘중시조 역사’로 전락하고 마는 믿어서는 아니 되는 역사
기록이다. 이러한 역사기록이 바로 축소되고 조작된 역사기록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축소되고 조작된 ‘중시조 단군의 자손’이라는 역사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우리에게 마고를 시조로 하는 진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중원 땅에서 태초의 문화를 시작한 사람들이 동이東夷이다.
이 동이의 최고 시조가 마고이다.
마고는 인류문명사에 지구의 동쪽에서 최초로 출현한 문명인이다. 인류의 문화는 마고에서 시작한다.
장자莊子는 그가 쓴 소요유逍遙遊에서 마고에 대하여 기막힌 기록을 남겼다.
“묘고산(막고야산)에 신인이 살고 있는데, 살결은 눈처럼 희고 부드럽기 처녀 같으며, 오곡을 먹지 않고 이슬을 마시며,
구름을 타고 용을 몰아 사해의 바깥을 노닐고 있다.”
마치 UFO를 타고 다니는 젊은 여인을 묘사한 것과 같다. 이 글은 장자가 아마 구전으로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일 것이다.
“구름을 타고 용을 몰아 사해의 바깥을 노닐고 있다”고 한 점으로 보아서, 마고가 무신巫神이나
무조巫祖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지금도 신을 받는 여자들에게 꿈이나 비몽사몽간에 나타나는 환상으로 이와 유사한 장면이 간혹 되풀이
하여 재현되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이다.
묘고산은 봉래 앞 바다에 있는 묘도군도에 있는 산으로 추정한다.
산동반도의 돌출부분과 발해만 사이에 있다.
묘고는 마고와 발음이 닮았다. 그래서 묘고산을 막고산으로 고쳐서 부를 수도 있다고 본다.
역易에는 마고를 상징하는 천풍구天風姤쾌가 있다.
「강희자전康熙字典」에 따르면, 천풍구의 ‘구’는 ‘고’로도 발음이 된다.
천풍구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하늘에서 온 풍이족의 마고라는 뜻이 된다.
하늘은 그가 떠나온 직녀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풍이는 뱀을 종족의 아이콘으로 쓰는 종족이므로, 천풍은 하늘에서 온 뱀이 된다.
신라 때 박제상이 쓴 「부도지符都誌」에는 마고가 무슨 일을 하였는가를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마고는 마고본성과 실달성과 허달성의 주인이었다. 이들 세 성은 직녀성에 비정할 수 있는 성이다.
마고는 직녀성의 화신으로 보인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14,000년 전에서 12,000년 전에 왔다가 사라진 쌍여궁시대에 인류의 문명을 창설
하고 국가를 창설하였다.
이 시대에 마고문화가 있었음을 전하는 징표가 마을 입구에 세운 ‘오리 세 마리가 앉아 있는 솟대’이다.
‘솟대에 앉은 오리 세 마리’는 마고삼신을 의미한다.
그가 이 시대에 창설한 국가의 이름이 「마고지나麻古之那」였다.
마고가 세운 최초의 나라 마고지나
후대에 와서 마고지나에 대한 기록이 <고려사 세가 제 36 충혜왕조>에 보인다.
고려사는 조선조 초기에 고려를 멸망시킨 고려의 유신들이 조선을 세우면서 기록한 고려의 역사이다.
나라의 공식명칭은 태조 왕건이 정한 고려高麗였지만 백성들은 고려를 마고지나로 불렀다.
이 말은 고려가 생겨나기 이전인 삼국시대에도 각 나라의 백성들이 자기가 살고 있던 나라를 고구려 ․
신라 ․ 백제로 부르지 않고 마고지나로 불렸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고려가 원元의 지배를 받았던 고려 말기에 28대 충혜왕은 원나라 사신에게 잡혀간다.
이윤 ․ 조익청 ․ 기철이라는 자들이 원나라와 내통하여 반원反元을 공공연하게 말하는 왕을 원의 사신
으로 온 타적과 내주에게 내주었다.
사신을 맞는 자리에서 현장을 경비해야할 신예라는 자가 병사들을 매복시켜 왕을 납치하러 온 원나라
사신들이 왕을 잡아가도록 도왔다.
충혜왕은 원의 황제에게 끌려가 시종 한 사람 없이 계양현을 거쳐 악양현으로 귀양가다가 독살당했다.
이 소문이 온 나라에 퍼져 백성들 사이에 <아야요阿也謠>라는 노래가 유행하였다.
阿也 麻古之那 從今去何時來
아야 마고지나 종금거하시래
아아 마고의 옛 나라 이제 떠나가면 언제 돌아오려나
고려의 백성들이 부른 한에 사무친 노래 「아야요」에는 우리시조 마고가 세운 최초의 나라 마고지나가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알지 못했다. 이렇게 마고지나가 이미 마고시대에 있었다.
마고지나는 제주도의 옛 이름 영주의 모체
마고지나의 정치체제는 신시체제였다.
육로나 해로로 물건을 가지고 와서 교환하는 시장을 열고, 화백회의를 하여 의사결정을 하고, 신시
개척단을 해외로 내보내어 새로운 땅을 개척하고, 하늘과 조상을 제사를 지냈다.
이 신시체제는 마고족의 후예 뱀을 종족의 아이콘으로 쓰는 풍이에 의하여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우리는 세계 각처에 퍼져 있는 뱀신화와 거인신화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서양의 별자리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험독險瀆은 신시의 도읍이었다.
이들이 신시 밖으로 나갈 때 가지고 다니는 징표가 <천부삼인>과 <오리>였다.
신시의 여자들이 다른 곳으로 나가서 그곳의 사내와 혼인을 하였다.
이러한 역사가 마고 황궁黃穹과 청궁靑穹의 삼신시대를 거쳐서 황궁黃穹시대, 한인桓因시대, 한웅
桓雄시대를 거쳐서 단군시대에 이르렀다. 그 역사가 무려 1만 년이나 되었다.
제주도에 지금도 전해 오는 영주신화瀛洲神話는 이때의 역사가 지금도 신화로 남아 전해 오는 것이다.
영주신화는 삼성혈신화三姓穴神話로도 불린다.
한라산 기슭에 세 구멍이 있는데, 이 구멍에서 고高씨 양梁씨 부夫씨의 삼성三姓이 태어나 각각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 이름을 고을나高乙那 ․ 양을나梁乙那 ․ 부을나夫乙那라고 하였고, 이들 삼성이
고씨와 양씨와 부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 시대에 영주의 동해빈東海濱에 세 여자가 배를 타고 와서 정박하여 이들 삼성과 혼인하였다.
이 기록도 단종 2년에 간행한 「고려사 지리지」에 있다.
세 처녀는 마고삼신의 나라에서 온 여자들이다.
을나乙那는 조선시대초기의 기록이므로 고려를 폄하하고자 하는 의도가 반영된 지나之那의 곡필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之가 乙로 바뀐 것으로 보는 것이다.
高乙那 ․ 梁乙那․夫乙那를 高之那 ․ 梁之那, 夫之那로 바꾸면 이들 나라가 마고삼신을 시집보낸 麻古
之那와 연결이 된다.
乙那 즉 之那가 마고지나의 속국이 되는 것이다.
이로써 마고지나가 우리 역사와 무관한 나라가 아님을 알 수 있다.
之那와 支那
중국을 지나支那라고 한다.
도대체 지나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사전에는 “지나支那는 진秦의 와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진나라에서 유래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의 의미를 추적해 보면 결코 진의 와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지支자는 ‘흩어지다’ ‘여러’ ‘갈려나다’ ‘지탱하다’ ‘사지四肢’ ‘가지枝’ 등 여러 의미를 가진 문자이다.
‘나라이름’이라는 의미도 있다.
본문에서는 지족支族 즉 갈라져나간 혈족血族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갈라져 나갔다고 보아야 하는가?
그 해답은 나那자에서 나온다. 나那에서 갈라져나갔다고 보는 것이다.
나那는 「說文」에 ‘西夷國安定有朝那縣(서이국안정유조나현)’으로 설명이 나와 있다.
‘서이국西夷國이 안정이 되어 조나현에 편입되었다’는 말이다.
조나현朝那縣의 조나朝那1)는 朝鮮那羅를 축소한 말이다.
조선나라는 모두 하화족의 말이 아니라 우리말이다.
이를 해명할 수 있는 기록이 李固善의 「朝鮮紀」에 있다.
단군왕검은 그의 장인 지일홍제가 붕어하자 무진원년(BC2333년)에 단국檀國을 승계하고 나라
이름을 한웅천왕이 나라를 세울 때 썼던 배달나라倍達那羅라 이름을 그대로 썼다.
그로부터 22년 후인 경인 23년(BC2311년)에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으로 고쳤다.
조나현朝那縣이라는 지명에는 우리 상고시대 국호를 제정하고 변경한 역사가 이렇게 그대로 들어가
있다.
지나支那를 중국의 사전에서 ‘진의 와전’이라고 한 것을 그대로 인정을 한다고 해도, 조선이 진시황
에게 멸망당한 때가 진시황 8년이므로, 당시에 선진국이었던 조선의 영향을 모두 없애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인류 문명사에 최초로 출현한 「마고지나」의 반영이 “중국의 조상 나라 마고지나에서 갈라져 나온
지손支孫의 나라”를 의미하는 ‘지나’로 나타난 것이다.
마고지나의 대표적 스타 견우와 직녀
필자는 앞의 장 ‘견우와 직녀’에서 「천상열차분야지도」에 나타난 견우와 직녀가 천문도에 나타난
구국狗國사람이라고 하였는데, 구국은 한웅천왕이 배달나라를 세울 때 나라를 구성하는 데에 주축이
된 오가五加 중에서 구가에 속한 사람이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진의 역사를 하늘에 기록하였다.
그렇게 하기를 한인과 한웅과 단군의 대까지 하였다.
그러나 하화족이 진시황 8년에 조선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석권하면서, 천문에 기록된 마고시대, 한인
시대, 한웅시대, 단군시대의 역사를 진한대의 천문으로 둔갑시켰다.
하화족은 천문을 역사로 해석하지 않았다.
역사로 해석하면 마고와 풍이와 동이의 역사가 천문으로 풀리게 되므로 천문을 점성학의 수준에 머물러
있게 하도록 점성학 쪽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마고지나시대의 국가나 사회체제를 유추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록은 「천상열차분야지도」 뿐이다.
직녀가 마고지나를 창설했으므로, 직녀에 대응하는 견우와 관련이 되는 별자리를 찾아서 그러한 해석이
가능하다.
견우가 매년 칠월칠석날 하나님을 만나러 가지 않으면 아니 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장마를 그치게 하겠다고? 그 일이야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고 무엇인가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견우는 하나님과의 담판이 끝나면 반드시 소를 한 마리 하사받아가지고 돌아온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경운기를 한 대 받아가지고 오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직녀의 배후에 천주天廚와 부광扶筐 별자리가 있다.
그 시대 사람들의 먹는 일과 관련이 있는 별자리로 볼 수 있는 별자리이다.
천주는 6성으로 구성되어 있는 하늘의 주방이다.
부광은 7별자리로 되어 있는 하늘의 광주리이다. 잠자리로 볼 수 있는 별자리이다.
북두칠성은 그 음이 곰이다.
한자로 고마固麻로 쓴다.
고마는 백제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남사백제전南史百濟傳」(「康熙字典」 부수-麻 1622쪽 國際文化出版公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百濟國號王所都城曰固麻邑曰檐魯如中國言郡縣也
백제국호왕소도성왈고마읍왕첨로여중국언군현야
백제의 국호는 왕이 머무르는 도성으로 하는데, 고마읍이라고 하고, 첨로라고도 하고, 중국말로 군현과 같다.
백제의 서울 이름이 고마라는 것이다.
고마固麻는 마고를 좌정시켰다는 말이다.
마고를 국조로 숭상하여 신전을 짓고 신전에 모심으로 해서 고마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해석된다.
또 달리 도성을 첨로라고도 했는데, 첨檐은 처음을 뜻하는 첨僉과 같은 뜻으로 쓴 것이다.
처음 첨로의 책임자로 임면된 사람이 노魯이므로 물고기를 종족의 아이콘으로 썼던 희熙씨2) 계열의
사람으로 보인다.
노魯를 파자하면, 魚 +日이 됨으로 일관日官으로 있는 어씨족魚氏族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백제가 처음 건국했을 때, 위례성으로 불린 그 도성이 고마로 불렸음을 알 수 있고, 고마에
마고를 모셨음을 아 수 있다.
후대에 와서 고려가 백제 땅에서 일어났는데, 충혜왕이 원나라로 잡혀가 독살당하여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백성들이 아야요를 지어 부를 때 무슨 이유로 고려라고 하지 않고 마고지麻姑之那라고
했는지, 그 이유가 고마固麻라는 문자에서 밝혀진다.
또 하나 여기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고마와 검의 관계이다.
고마는 마고를 좌정한 백제의 서울이고, 검은 단군왕검이다.
우리말 처음이라는 문자가 첨檐이라는 문자에서 나오고, 첨僉이라는 문자에서도 나오는데,
첨檐은 마고와 관련되는 문자이고, 첨僉은 단군왕검과 관련되는 문자이다.
첨檐은 파자하면 木+詹이다. 첨詹자는 별을 본다는 뜻의 첨瞻자와 같은 뜻으로 쓴다.
하늘에서 별을 살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마고의 자손인 네 천인天人이다.
이들이 별을 살피는 자리가 점대漸臺별자리이다.
우리는 첨로檐魯라는 문자에서 직녀별자리에 속한 점대별자리를 지키는 종족이 노魯로 표현되는
희熙씨계열의 일관日官임을 알 수 있다.
희씨는 유망의 둘째 아들이다. 유망시대에 그는 일관을 지낸 사람이었다.
검儉을 파자하면 亻+僉이 된다. 검은 처음으로 임금이 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儉은 단군왕검을 뜻한다.
백제 부여에는 부소산扶蘇山이 있다.
‘부여’나 ‘부소’ 두 곳은 모두 다 단군왕검의 두 분 아드님의 이름을 산의 이름으로 쓴 경우이다.
이들 이름에는 단군조선의 문화와 풍물을 승계했다는 의미가 있다.
백제가 조선의 문화와 풍물을 승계했다면, 단군왕검과 관련이 되는 지명이나 유적이 남아 있을 것
이라고 볼 수 있다.
백제 땅에 남아 있는 검단산儉丹山은 단군왕검과 관련이 있는 산들이다.
백제 땅에 단군왕검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단군왕검의 검이 고마 즉 마고의 검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라 이름은 마고지나
고구려 신라 백제 세 나라 중에서, 마고의 적통을 계승한 한인과, 한인을 승계한 한웅과, 한웅을
승계한 단군왕검과, 이분들의 나라를 계승한 나라를 든다면, 백제를 들어야 할 것이다.
이 일을 주도적으로 한 사람이 백제도성의 이름을 마고를 뜻하는 고마로 남긴 초기백제 사람들이었다.
후대에 와서 마고를 국조로 모시는 백제를 계승한 사람들은 고려의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왕이 원에 잡혀가 독살 당했을 때 분명히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하지 않고 마고지나라고 하였다.
이제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누구의 적통을 승계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한국이라는 말에는 정체성이 없고, 역사성도 없다.
지금도 우리는 백제나 고려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마고의 후손이고, 마고지나의 후예이다.
4 단군왕검과 두 부인이 믿은 종교
단군왕검과 두 부인
단군왕검은1) 13세 때 웅심국왕2)의 딸인 웅녀3)에게 첫 장가를 들었다.
왕의 대리권을 행사할 수 있는 비왕4)생활을 하다가 웅심국왕이 죽자, 웅심국왕의 자리를 승계하였다.
이어서 배달나라(단국)5)의 태자로서 무진원년6)(서기전 2333)에 홍제7)의 뒤를 이어 배달나라의
제위도 이어받았다. 그 해에 두 번째 부인 하백녀8)와도 혼인하였다.
이로써 단군왕검은 두 나라의 주인이 되었고, 부인 두 분을 맞아들인 것이다.
그는 경인 23년(서기전 2211) 배달나라의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었다.
그는 아들을 네 분9)을 두었는데, 모두 첫 부인 웅녀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이었다.
단군의 종교적 의미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는 문자에서, 檀자는 木+亶자로, 亶자는 亠+回+旦자로 구성되어 있다.
두 돼지해 밑 두亠자 밑에 돌 회回자가 있고, 돌 회回자 밑에 아침 단旦자가 있다.
“아침에 해가 뜨고 해드는 곳을 향하여 뱅뱅 돌다”는 뜻이다.
해를 향하여 요선腰旋하는 종교의식10)을 나타낸 문자로 볼 수 있다.
목木자는 동쪽 방향에 서있는 나무를 뜻한다.
따라서 단檀자는 해가 뜰 때 동쪽에 서있는 나무 주위를 맴돌고 있는 행위를 나타낸 문자로 볼 수 있다.
정월 초하룻날, 솟대를 세우고, 솟대를 맴돌던 사람이 있었으니 이 사람들이 단군조선 사람들이었다.
해를 숭상하지 않았다면, 솟대를 세우고, 해가 뜰 때, 솟대 주변을 맴돌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대동굿을 할 때, 신대를 들고 굿청을 맴도는 행위를 볼 수 있는데, 이 시대의 유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대 이전 시대인 한인천제가 다스리던 한인시대에 풍물패에 의하여 이미 길굿이 행해지고
있었다.11)
또 단亶자는 그 형상이 뚜껑을 덮은 제단처럼 보이기도 하고, 뚜껑을 덮은 동이12)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금도 굿판에서 일월마지13)를 할 때, 동이에 물을 채우고 무당이 올라서서 일월마지 춤을 춘다.
일월마지는 동맹東盟14)을 거행한 고구려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군君자에는 임금이라는 뜻이 있지만, 세자라는 뜻과 남편이라는 뜻도 있다.
남편을 부를 때 가군家君이라고 하였다. 본문에서는 남편이라는 뜻으로 본다.
남편이 어느 누구의 남편이냐 인데, 단군왕검이 웅녀熊女에게 첫 장가를 들었으므로, 웅녀의 남편이
된다. 그러므로 단군이라는 문자에는 웅녀의 남편으로서 웅심국熊心國의 임금이라는 의미가 있다.
단군왕검이 웅심국의 국왕으로서 일월마지로 요선을 행했음을 단군이라는 문자에서 유추해 낼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 종교행사의 주관자가 여자들이었으므로, 이 종교행사의 실질적인 주관자는 단군
왕검의 첫째 부인인 웅녀로 보아야 한다.
왕검의 종교적 의미
왕검王儉의 왕王자에는 천지인天地人이 하나로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가 있다.
삼三자는 천지인을 의미하는 문자이다.
삼三이 천지인임은 「천부경天符經」15)의 일석삼극一析三極16)이라는 수리체계17)에서 나오고, 일석
삼극은 一이 천지인18)으로 분화한다는 신학적, 철학적 사유체계를 구성하고, 이어서 천문학적, 물리
학적, 화학적, 사유체계19)로 발전한다.
이렇게 一이 삼三으로 분화하여도 서로 이탈하지 않고 하나로 묶이도록 해주는 것이 신을 의미하는
문자인 꽂을 곤丨자이다.
곤丨이 신의 역할을 하여 천지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다.
이를 천지인삼신天地人三神이라고 한다. 왕王자에는 이렇게 천지인 삼신이라는 의미가 있다.
중국인의 조상인 하화족夏華族20)은 천지인만을 인정하고 삼신을 부정하였다.
이미 공자가 괴력난신怪力亂神을 입에 담지 말라고 하며 신을 거론하는 것 자체를 금지시켰다.
그래서 삼신을 삼재三才로 대치시켰다. 삼재는 인간의 재주나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무신론적인 발상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중국 사람은 천지인삼신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천지인삼재라는 말을 쓰고 있다.
우리도 학문하는 사람들이 삼재라는 말을 쓰는데, 이는 하화족의 무신론적인 신관神觀임을 알아야
한다.
온갖 외래신을 모시고 살기를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 삼재를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신론적인 유학의 대가일 가능성이 많다.
문자학에서 왕王자는 임壬와 동일시된다. 두 문자 구별의 실익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왕검이 임금으로 의미가 전성轉成된다.
검儉자는 곰21)자의 변음이고, 곰자는 고마固麻22)의 변음이다.
고마는 마고麻姑를 좌정했다는 말이다. 이 ‘검’자에 마고를 숭상하는 마고신앙이 들어 있다.
백제를 세울 때, 서울에 있는 북한위례성의 도호都號가 고마였다.
나라를 세울 때, 신사를 짓고 마고를 좌정시켜드림으로써 백제의 첫 국도가 고마라는 호를 갖게 된
것이다.
백제는 전국 방방곡곡 좋은 산에 마고신사를 지었다. 마고신사에는 언제나 마고가 모셔져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신사는 신당으로 불리고, 마고는 할미로 불렸다.
그래서 백제의 마고신사는 할미신당이 되었다.
또한 마을의 산줄기 끝에 성황당을 지었는데, 이 성황당에는 한인 한웅 단군왕검을 모셨다.
그래서 성황당의 황자를 황皇자로 쓰게 된 것이다.
여기에 나라에서 세웠다는 의미를 더하기 위하여 읍ꞥ자를 변으로 섰다.
그러나 지금은 서낭당이라고 변음이 된 이름으로 부른다.
이렇게 마고신사는 할미당으로 변하고, 성황당은 서낭당으로 변했다.
이 곳은 철따라 조상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다.
조선의 종교적 바탕
조선이 출범하기 전에 이미 역사적 수명을 다하고 사라진 나라로 제일 먼저 마고지나23)가 있었고,
그 뒤를 이어 한국24)이 있었고, 마지막으로 배달나라25)가 있었다.
조선이 생기기 이전에 이렇게 마고지나, 한국, 배달나라의 세 나라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은 기록상으로 네 번째 나라가 된다.
이들 나라는 각각 그 시대에 맞는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모두 3가지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마고에 의하여 시작된 마고지나시대와 한인시대엔 삼신교26)였고, 한웅천왕에 의하여 시작된 배달나라
시대엔 태백진교27)였고, 단군왕검에 의하여 시작된 단군시대엔 덕교28)였다.
조선의 종교는 덕교였는데, 덕교에서 오늘날의 무교29)가 태어났다.
지금 삼신교, 태백진교, 덕교는 모두 없어졌지만, 무교가 살아남아서 이들 종교가 어떠한 종교이었는
가를 유추할 수 있게 해 준다.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마고지나의 종교이다.
마고는 직녀성이 북극성이었던 시대30)의 사람이었다.
마고가 태어나기 전까지 사람들은 문명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았다.31)
조개를 잡고 굴을 캐어 먹느라고 바닷가 가까운 곳에 살았다.32)
농사기법을 발견하면서 강가를 따라 살기 시작한 사람들도 있었다.33)
이들에게 나타난 마고가 하늘을 이야기하고 선천34)을 이야기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아무에게서도 이러한 놀라운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하늘은 두려운 존재라는 것만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두 딸과 네 사내를 두었는데, 두 딸은 자기가 낳았고, 네 사내는 딸들이 낳았다.
이리하여 마고족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마고는 그가 사는 곳을 마고성이라고 하였다.35)
그는 네 아들에게 별자리를 하나씩 정해주고, 그 이름을 점대36)라고 하였다.
자신은 점대보다 높이 있는 직녀성을 자기의 별자리로 정하고, 그곳을 마고성이라고 하였다.
마고의 손자는 매일 피리를 불어 하늘에서 일어나는 잡다한 소리들을 조율하였다.
마고는 하늘에서 두 종류의 소리가 생겨난다고 믿었다.
한 소리는 해와 달이 만나면서 생기는 소리였다.
이 소리를 양의 소리37)라고 하였다.
또 한 소리는 중력을 돌리는 힘이 북두칠성이 도는 힘과 마주쳐 일어나는 소리였다.
이 소리를 음의 소리38)하고 하였다.
이들 두 소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우주에 재앙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들 두 소리를 조율하는 관을 만들었다. 이 관을 생황이라고 하였다.39)
이들의 창세創世하는 역사가 「부도지符都誌」에 실려 있다.
마고는 마고성40)이 오염으로 운영이 어렵게 되자 폐쇄하였다. 모든 종족은 마고성을 떠나야 하였다.
이 이야기의 서사구조가 창세기와 유사한 점으로 보아서, 원조신화인 마고신화의 모작일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41)
마고에게서 천궁 황궁 백소 흑소의 네 종족이 떠난 후에42) 네 종족을 대표하는 황궁은 마고에게
‘해혹복본解惑復本’을 서약43)하였다.
해혹복본은 원시반본元始返本하자는 종교적 메시지이다.
기독교의 ‘에덴동산복귀’와 같은 가능성이 희박한 꿈의 실현이다.
황궁씨는 ‘해혹복본’의 징표로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유인씨에게 전수44)하였다.
‘해혹복본’은 지구가 우주의 변화로 인하여 뭇 생물들이 멸망하게 되는 이유를 밝히고 다시 옛날 마고
성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었고, 천부삼인은 그들이 마고족임을 밝힐 수 있는 징표와 같은 것으로,
해와 달과 북두칠성을 새긴 돌이었다.45)
이후에 해혹복본은 불교나 기독교의 철학과 사상으로 자리 잡았고, 천부삼인은 기독교의 십자가(十)가
되었고, 불교의 만(卍)자가 되었다.
기독교에서 말세에 천년성이 도래한다는 신화로 발전하였고, 불교에서 서방정토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므로 마고의 메시지는 기독교와 불교의 원형종교46)가 된다고 볼 수 있다.
5 이 시대에 새로운 화두 마고
우리 조상이 역사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는 지금으로부터 14,000년 전 이다.
신라 때 박재상 선생이 쓴 「부도지」에 따르면, 그때, 마고가 마고성을 폐쇄하고, 마고의 후손인 네
종족이 마고성을 떠나서 동서남북으로 흩어지게 되면서 비롯된다.
네 종족의 우두머리인 황궁黃穹이 다른 종족은 비교적 살기가 괜찮은 곳으로 떠나보내고, 마지막으로
황궁부족을 이끌고 가장 자연환경이 열악한 북쪽지방 천산주天山洲에 정착함으로써 잃어버린 마고문명
찾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들이 정학한 곳이 사신도四神圖에서 현무玄武로 표현되는 곳이다.
황궁은 천산주에 다다르자, 그의 부족에게 해혹복본解惑復本할 것을 명한다.
해혹복본은 “그들이 마고성을 폐쇄하여 떠나게 된 원인을 규명하고, 다시 원래대로 마고성으로 복귀
해야 한다.”는 민족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과학적, 종교적 메시지였다.
황궁이 해혹복본을 명령할 때, 이 명령에는 이미 역사인식이 내재해 있었다.
이 시대엔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역사인식이었다.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해야’만 그들이 떠나온 마고성을 복귀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가 반드시 기억
해야 할 시간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해혹’이라는 말은 인류문명의 여명을 의미하는 말이다.
천문학의 시작, 원인규명으로서의 학문의 시작을 의미한다.
‘복본’이라는 말에는 원형에 대한 기억과 회귀라는 의미가 있고, 종족이동과 낯선 환경에의 적응,
새로운 주거, 생활 등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해혹복본’이라는 말에는 인간이 문명을 열고 발전시켜야 하나, 그 문명은 원래부터 있었던
문명에의 복귀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뜻임을 알아야 한다.
인류가 아무리 고도의 문명을 발전시킨다고 해도 그 문명은 마고문명에의 복귀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문명을 주도한 사람들이 모계시대를 열고, 그 시대의 문명을 시작하고 완성한 여성들이었다.
그러나 이 문명은 어느 날 갑자기 마고에 의하여 사라지는 문명이 되었다.
그 원인은 인간성이 패악하게 되었다는 단 하나의 이유였다.
마고의 결정에는 인성이 문명의 존립을 결정한다는 중대한 의미가 있다.
따라서 우리의 역사관은 마고문명으로의 회귀라는 관점에 초점이 모아지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우리의 역사적 사명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마고역사규명은 황궁이 명령한 14,000년 전으로의
회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고작 서기전 3500년경의 신화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 신화라는 것도 마고의 후예인 풍이족이 9,900년 전에 퍼뜨린 풍이문명의 한 분파에 불과한 메소
포타미아 문명이다. 풍이족은 우리의 선조이다.
마고의 후손인 우리는 황궁이 명한대로 마고역사를 규명해야 할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다.
그래야만 우리 조상이 떠나 온 마고성으로의 회귀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교를 믿지 않더라도 우리가 집단무의식으로 받은 기억의 소자에는 이미 이러한 종교적
메시지가 내장되어 있다. 우리 민족이 타민족에 비하여 유별나게 신비주의적인 종교성이 강한 이유는
이러한 기억의 소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서방정토설西方淨土說>이나, 기독교의 <천년성설千年城說>은 모두 마고후손의 마고성
으로의 회귀를 뜻하는 해혹복본에서 파생한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마고를 찾아가는 해혹복본이 타종족에게 넘어가 종교화 하여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마고문명으로의 회귀라는 관점에서, 사라진 마고 역사와 문명의 복원이라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시간대로는 마고문명이 시작된 14,000년 전에서 단군조선의 역사가 시작된 4,300년 전까지
의 10,000년대이다.
편년체의 역사를 규명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고고학적 유물을 찾아서 이 시대의 역사를
마고문명에 귀속시킨다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류 최고의 역사물인 「부도지」 「한단고기」 「천상열차분야지도」 「부소보서」
기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신화와 신화적 유물들이 마고문명과 마고문명을 이어받은 풍이문명,
풍이문명을 이어 받은 배달문명, 배달문명을 이어받은 동이문명을 다소나마 밝혀내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필자나 필자가 알고 있는 몇몇 사람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집단무의식이나, 하늘의 별자리, 문자,
신화와 설화 등에서 역사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심지어 영적인 세계에서도 역사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기도 한다.
필자는 철저하게 그런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영적인 해석능력이 탁월한 사람일수록 미래의 역사학계를 주도해 나갈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점쟁이를 방불케 하는 역사가들이 나오게 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지식이 분단위로 페기처분 되는 시대에 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시간단위로 지식이 폐기처분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학문이 시간단위로 폐기
처분되는 이 시대에 학문의 기득권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의 유물일 뿐이다.
모든 학문은 순간순간 역사에 편입된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유물은 마고문명의 회귀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미 완성된 마고문명으로 다가서는 진일보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미 완성되어 수명이 다한 마고문명의 실체를 확인하는 수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명사가들이 해야 할 일은 이미 완성된 마고문명의 실체를 찾아내는 일이다.
문명은 끊임없이 발전할 것이라는 오만불손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문명의 끊임없는 발전은 결국 마고
시대처럼 마고성의 폐쇄와 추방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깨닫지 않으면 아니 된다.
우리의 배후에는 아직도 마고가 역사라는 이름으로 살아 있다.
그가 언제 또다시 마고성을 폐쇄하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필자는 역사를 해석하고 추리하는 데에 있어서 많은 부분을 문자학에 의지하여 해석하였다.
지구상에는 표음문자와 표의문자 두 종류의 문자만 있다.
한자는 표의문자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지문자이다.
우리의 역사는 대부분 표의문자이자 이미지문자인 한자로 써져 있다.
그래서 숙명적으로 한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한국과 중국 두 나라의 역사가 상대방의 역사에서 떨어져나갈 수 없듯이 문자에서도 떨어져나가지
못한다. 떨어져 나가려고 한다면 그것은 눈을 감고 아웅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한자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한자를 한자漢字로만 인식을 해서는 아니 되고, 한자桓字로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자漢字는 중국인의 문자이다. 그러나 한자桓字는 우리 선조의 문자이다.
역사적으로 한자漢字에 우선하는 문자가 한자桓字이다.
한자桓字가 먼저 생기고, 한자漢字가 나중에 생겼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자桓字는 사라지고 한자漢字만 살아남아 있다.
한자桓字가 한자漢字에 통합되거나 잠식되어 버린 것이다.
필자는 桓字 잠식의 시작을 고조선이 멸망한 진시황 8년을 기점으로 본다.
진시황 8년 이전의 문자를 한자桓字로 보고, 그 이후의 문자를 한자漢字로 보는 것이다.
지금 중국 사람들이 우리가 쓰고 있는 한자漢字를 그들이 쓰지 않는 ‘고어古語’라고 말하기도 하고,
‘사라진 진秦나라의 문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고조선이 진시황 8년에 멸망했다는 점에서 이 말이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자전字典에 보면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문자들이 나온다.
하나의 문자에 두 가지 의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경우가 있다.
이들 문자 중에서, 그 의미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의미로 쓰였다면 한자漢字로 보고, 그 의미가
우리를 불편하지 않게 하는 의미로 쓰였다면 한자桓字로 본다.
지금 우리는 한자漢字를 중국의 문자라고 하여 버리고 쓰지 않는다.
그러나 한자의 역사를 추적해 올라가 보면, 우리의 선조가 중원에 살고 있을 때 쓰던 문자가 그대로
살아 있음을 알 수 있다.
桓字와 漢字가 등을 돌리고 갈라지게 되는 분기점은 후한시대에 허신許愼이 한자 9,358자를 모아
해석한 「설문해자說文解字」가 세상에 나왔을 때이다.
그 이상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도저히 중국인의 문자라고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설문해자」가 후한(後漢, 후한은 전한前漢 다음에 있었던 나라이다. 전한은 서기전 202년부터 기원후 220년까지
중국을 지배하던 왕조이다. 고조 유방이 장안(長安)에 도읍을 정하여 세웠는데, 왕망의 찬탈 기간을 계기로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으로 나뉜다.
25년에, 왕망王莽에게 빼앗긴 한漢 왕조를 유수劉秀가 다시 찾아 부흥시켰으나, 220년에 위魏나라의 조비에게 멸망
하였다.-한컴사전) 때 나온 자전字典이므로, 한대(서기전 202-서기 220)를 한자가 중국의 문자로 정착
하는 시기로 본다면, 그 이전은 한자가 오늘날의 중국인만의 문자가 아닌 시대이다.
오늘날의 중국인의 조상인 하화족夏華族이 없었던 시대이기 때문에 한자가 중국인의 문자가 될 수
없었던 시대인 것이다.
이 시대 이전에 중원을 통일한 진(秦,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 춘추 전국 시대, 지금의 간쑤(甘肅) 지방에서 일어나
서기전 221년 시황제가 주나라 및 육국六國을 멸망시키고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였는데 기원전 207년 한나라 고조에게
멸망하였다. -한컴사전)나라가 중원을 지배하고 있었고, 고조선은 진시황 8년(서기전 213년)에 진에게
멸망하였다. 그러므로 한자는 이 시대에 진과 고조선이 함께 쓰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후한 때 「설문해자」가 나온 것은 후한이 당시에 쓰던 문자에서 고조선의 잔재를 없애기 위하여 자전을
편찬한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이유가 아니라면 구태여 9,353자를 모아서 해석을 시도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설문해자」가 나오기 전의 문자가 하(夏, 우禹가 세운 나라. 439년간 존속하다가 걸왕 때 탕왕에게 망하
였다, -한컴사전), 은(殷, 서기전 1100년까지 중국 황허黃河 강 중류 지역을 지배한 고대 왕조. -한컴사전),
주(周, 서기전 1050년에서 기원전 256년까지 중국을 지배하던 왕조.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건국하여, 호경에
도읍을 정하고 봉건 제도를 시행하였다. -한컴사전) 삼국시대에 이들 나라에서 고조선과 함께 문자를 공유
하였다고 본다.
이 시대에 고조선은 최고 선진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대에 중원에서 유일무이하게 패권을 가진 국가였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문자가 고조선의 문자였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고조선은 마고족-구황-풍이-구려-동이로 이어지는 종족명칭변화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조선시대는 동이의 시대였다.
나라는 마고족의 마고지나, 풍이의 한제국, 구려의 배달나라, 동이의 고조선으로 이어져 왔다.
고조선이 진에게 멸망함으로써 당시에 공유하던 문자가 모두 진으로 넘어갔고, 진을 멸망시킨 한이
이 문자를 승계하였다.
고조선이 쓰던 문자를 한漢의 문자와 구분하면 한자桓字가 된다.
따라서 후한 이전의 문자를 桓字라고 하고, 후한이후의 문자를 漢字라고 말할 수 있다.
한자桓字는 동이의 문자이고, 漢字는 오늘날 중국인의 조상인 하화문자夏華文字이다.
漢字에서 사라진 동이의 흔적을 찾아내기만 한다면, 사라진 桓字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한자桓字로 표현된 말이 한자언어桓字言語이고, 이 한자언어를 완성한 종족이 한제국을 건설한 풍이다.
풍이는 제국을 건설하고 나서 세계 각지로 흩어져 나갔다.
이들은 신화학자들이 인공언어라고 말하는 사라진 한자언어를 쓰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화시대 각국의 언어에 그 흔적이 남아 있으리라고 본다.
그들은 골격이 커서 현지인들에게는 거인으로 불리었고, 스스로를 대인大人이나 발인發人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현지인에게서 신으로 대접을 받았다.
제주도에 남아 있는 비바리(처녀)라는 방언은 발인에서 나온 것이다.
비발인非發人, 즉 발인(골격이 큰 남자)이 아니라는 뜻이다.
본문에서 천문의 해석은 문자해석으로 밝혀지는 역사나 신화를 토대로 하여 별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료를 천문도와 맞추어 해석하였다.
인류의 시조나 견우직녀의 해석, 마고 한인 한웅 단군왕검의 별자리 비정 해석이 그런 해석이다.
이 시대에 이미 인터넷 카페 역사가들이 역사기득권층의 권위의 아성에 도전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기
시작하였다. 나는 인터넷 카페에서 우리 학계의 기득권층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막강한 실력자들을
본다. 그들이 올린 글을 검색하는 사람들은 인터넷 문화를 이끌어가고자 하는 젊은 세대들이다.
그들은 학문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엔 외국에 살고 있는 동족들도 동참하고 있다.
앞으로의 시대는 평범한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시대가 온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마고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