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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의 여운
권 성업
오늘은 옛날의 직장 동료들이 정답게 모여 자연의 풍광에 취하는 날이다. 세월의 흔적만큼 깊이 파인 주름살, 노구를 이끌고 동참하신 선배님이 무척 고마웠다. 목적지는 증평에서 출발하여 남원과 내장산의 천년 고찰 백양사였고 가을의 고운 단풍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봄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차창 너머로 다가와 홀연 멀어져가는 풍경이 낭만처럼 흘러간다. 저 멀리 산자락 양지 마을은 한가로이 졸고 연도에 늘어선 높고 낮은 산들이 일행을 반긴다. 가을의 낭만에 젖은 채 묻어둔 세월을 낚아 올려 이야기꽃을 피우며 아련한 꿈의 향수에 젖어 본다. 한 직장에서 때로는 울고 웃으며 신음하고 괴로웠던 일들, 풋풋한 성취감, 사랑스런 과거사가 서로의 가슴속에 용해되어 아름다운 운률을 자아낸다. 꿀물 같은 정의 물줄기가 강이 되어 한 없이 흘러내리는 순간, 벌써 열녀의 고장 남원에 도착했다.
눈에 익은 오작교와 광활루며 잘 가꾸어진 환경들이 돋보였다. 먹이를 던지자 뛰어 오르는 비단 잉어들이 장관이었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월매의 집을 찾았다. 춘향과 몽룡의 애절한 사랑을 키워준 보금자리, 언젠가 관광와서 고인의 정을 그리며 일편단심주를 기울였던 옛일이 살아난다. 마당가에 외로이 선 단풍은 춘향의 일편단심을 대변하듯 불타고, 집을 둘러싼 청청한 대나무 가지에는 천고불변의 파란 절개가 매달려 있었다. 천만사로 늘어진 수양버들은 미인의 머리 결이다. 청청했던 버들도 황금빛이 되었으니 열녀 춘향의 머리 결도 혹 금발이 되어 있지 않을까? 푸른 하늘엔 구름이 한가로이 노닐고 융단잔디의 노랑치마폭엔 뙤약볕이 뒹굴어 이 도령과 춘향의 뜨거운 사랑이 천고에 변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대문을 나오자니 바람 따라 뒹구는 낙엽들이 무상(無常) 시을 들려준다.
‘부귀영화도 덧없는 꿈이거늘 하물며 부질없는 미움 따위랴!’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로 화답하였다.
3시경 내장산 국립공원 입구 주차장에 내렸다. 산채 비빔밥의 독특한 맛과 향으로 허기를 달랜 후 발걸음을 옮겼다, 석양에 물든 고운 단풍은 참으로 환상적인 그림을 연출하였다. 일행은 황홀한 모습에 매료되어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얼마쯤 올라가니 3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아름 들이 떡갈나무 두 그루가 길 가에 의연히 버티고 서있었다. 너덜너덜한 껍질엔 만고풍상의 자취가 역력했다, 나는 잠시 멈춰 그의 역사를 더듬어 보았다. 자그만 도토리 싹이 큰 나무 틈새에 끼어 모진 비바람과 혹독한 추위를 견디어, 이제 아무도 넘보지 못할 개선장군이 되었구나! 무한한 인내 앞에 머리가 숙여졌다. 그에 비하면 칠팔십을 버티기 힘든 우리 인생이 너무 초라했다.
그는 한없는 사연을 감추고 있었다. 톱을 든 나무꾼을 만나 떨기도 했고 새들이 찾아오면 즐거웠다, 구도심에 불타는 스님도 만났고 나물 뜯는 아낙, 조잘대는 어린이, 울부짖는 사람, 구국일념으로 무장한 청년들, 총칼을 멘 적병, 사랑을 속삭이는 청춘 남녀, 헤아릴 수 없는 길흉사를 간직한 채 몸으로 말을 대신라고 있었다.
마침내 백양사가 보였다. 이 절은 백암사, 정토사(1034)로 내려오다가 이조 선조 때 화양 선사가 백련암에서 7일간 백련경을 설할 때 구름같이 모인 대중 옆에 흰 양 한 한 마리가 찾아 와 함께 들었다. 설법을 마치던 날 선사의 꿈에 나타나 나는 축생의 몸으로 선사의 법을 듣고 환생하게 되었다며 감사를 올렸다. 다음 날 죽은 양을 발견하고 화장을 시켜준 후로 백양사로 불렀다고 한다.
여러 종정 스님을 배출시킨 백양사 앞에는 백제 무왕이 창건 이래 1300여년의 역사를 고증이나 하듯이 고승들의 부도와 공덕비가 줄지어 서있었다. 앞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전나무와 노랗고 붉은 단풍이 어우러진 사이로 설법을 들으려는 듯 하얀 하늘이 곱게 내려오고 있었다.
백양사 문에는 고불총림(古佛叢林)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고 옆에는 “이 무엇고?”라는 참선 화두의 탑이 관객을 맞고 있었다. 인간이 도를 깨치고 보면 누구나가 예로부터 부처(古佛)였음을 알게 된다.
어둠이 발걸음을 재촉하니 시간이 아쉬웠다. 총총히 대웅전에 들어가 삼배를 하고 나오니 동행했던 일행 한분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급히 경내를 둘러보니 곳곳에 출입금지의 통제선과 팻말이 있었다. 많은 선각자와 고승을 배출했던 고찰의 서슬 푸른 기강이 엿보였다. 일발필도(一發必倒)의 참구정신(參究精神)이 은은한 향이 되어 뼛속을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말세라 하지만 아직도 세상의 어둠을 밝히려는 선지식의 맥이 면면히 이어지고 잉태되는 감회어린 현장을 만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매점의 노천 의자에 걸터앉아 정겨운 사람과 오손 도손 산천의 아름다움을 안주삼고 그리움과 인정을 잔에 띄워 마시는 동동주의 맛과 향취는 신선 나라의 감로주라 할까? 이 세상의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최상의 진미였다. 어둠의 여운이 스미는 잔잔한 호수에는 한 폭의 산수화가 곱게 드리워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자연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취흥이 어우러지니 발걸음은 홍모처럼 가볍고 정신은 명경지수인양 맑았다. 행여 취선(醉仙)의 경지가 이러함일까? 함께 가는 냇물의 노래가 한층 청아하고 정겹기 그지없었다. 축축 늘어진 가지마다 곱게 물든 단풍잎에 저녁노을이 내려와 얽힌 황홀한 장면은 너무도 환상적이었다. 때마침 고개를 드니 홀연히 나타난 새하얀 초생 달이 임의 모습인양 정겨운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참으로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경이로운 순간들이었다.
이번 가을에 펼쳤던 여행을 통해 세속의 무거운 짐을 훌훌 벗어던지고 자연과 하나가 되어 동료들과 무한한 행복을 만끽함으로써 새로운 생의 활력소를 불어 넣어주었다. 활불(活佛)의 명소 백양사 탐방의 감미로운 여운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데운 맥주
권 성업
옛말에 ‘하늘에 제를 올리거나 조상을 모신 사당에 예를 올릴 때, 술이 아니면 음향하지 않는다(祭天禮廟 非酒不響)’ 이라는 말이 있다. 어른을 모시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다소 서먹한 사이로 처음 만날 때, 손님을 청할 때, 정성을 가득 담아 전하거나 마음을 열고 친교를 맺는 데는 아마 이 음식을 당할 것이 없는 모양이다.
술이란 알맞게 마시면 건강에 좋고 남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니 참으로 유익한 음식이요, 문자 그대로 약주(藥酒)이다. 아득한 옛날 신랑 신부가 첫날밤에 처음 만나 상견례를 올릴 때 긴장의 벽을 헐고 애정의 다리를 놓아준 백년가약주(百年佳約酒)가 그것이오. 웃어른 밑에서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몸을 돌려 마시던 겸양(謙讓酒, 제를 올릴 후 조상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스러운 한잔의 음복주(飮福酒), 할아버님께서 식사 전·후에 즐기시던 한․두 잔의 반주(飯酒) 등이 그 것이다. 이렇듯 귀한 손님을 대하듯 절제한다면 가히 약이라 하겠다. 흔히 쓰는 말 중 ‘약주 한잔 드시지요’ 라는 말의 ‘한잔’ 이 바로 약이라는 뜻이 아닐까?
반면 지나친 술은 화(禍)를 부르는 요물이다. 몸을 망치는 독주(毒酒)가 그렇고 정신을 돌게 하는 발광주(發狂酒), 시비를 걸어 싸워야 직성이 풀리는 호전주(好戰酒), 살림살이를 부수는 파괴주(破塊酒), 고함치며 골목을 휩쓰는 골목 대장주, 어른을 몰라보는 안하무인주(眼下無人酒,) 아내를 두들기는 파렴치주(破廉恥酒,) 길가를 안방으로 삼는 노숙주(路宿酒), 술값에 옷 잡히는 망신주(亡身酒), 가산을 탕진하는 파산주(破産酒), 나라를 망치는 망국주(亡國酒), 혹 아무 데나 일을 보는 멍멍주, 등 처태만상의 모습으로 선량한 사람들을 유혹의 구렁에 떨어지게 하는 주범이 과음이 아닐까?
내가 군을 마치고 공직에 근무하던 60년대 만 해도 술이라야 막걸리가 최상의 애용주였고, 다음이 소주요, 다소 고급스런 것이 약주였다. 당시 수입에 의존했던 맥주나 양주는 평범한 말단 공무원으로는 엄두도 못 냈다. 더구나 인력도 부족하여 보통 12시까지 야근을 했다. 봉급은 겨우 쌀 몇 말 정도요 담배 값도 안 되던 때이니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시절이었다.
나는 주량도 약하여 겨우 한두 잔이 넘으면 손을 젓는 것이 술좌석의 기본 태도였다. 당시 공무원은 퇴근 시간이 되면 주막집 마당에 던져진 마루 위에 걸터앉아 대포 몇 잔으로 시름을 달래고 허허 웃으며 일어서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느 날 나는 시장엘 나갔다가 직장 상사와 동료 몇 사람을 만났다. 내 깐에는 정중히 잘 모셔야겠는데 주머니 사정은 여의치 못했다. 음식점이나 요정으로 갈 수도 없었고 근소(僅少)한 비용으로 접대하자니 부득이 집으로 청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없다 해도 체면문제지 막걸리를 사오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좀 고급스런 술로 모셔야겠기에 아내에게 맥주를 사오라고 부탁하였다.
아내는 급작스런 손님을 맞아 안주장만 등 최선을 다하느라 분주하였다. 이윽고 안방에 안주상이 차려지고 마침내 각자의 앞에는 자그만 잔이 놓여졌다.
아내는 귓속말로 내게 물었다. 술은 데워야지요? 음 그래야지. 조금 후 주전자에 살짝 데운 맥주가 나왔다. 우선 상사의 앞에 놓인 소주잔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맥주를 정중히 부어 올렸다. 잔을 받은 이 어른 하는 말씀이
“어! 이거 맥주 아냐?” 그렇다고 답하며 우선 시음해 주실 것을 간청했다. “아이 권선생, 맥주도 안 마셔봤어?” 라고 물었다. 나는 의아한 모습으로 사연을 물었다. ‘술이란 본래 따끈따끈 해야 되지 않느냐?’ 반문하자, 허허 웃으며 맥주는 시원해야 제격이요, 잔은 커야한다고 일러주었다. 난생 처음 귀한 손님을 모신 자리에서 맥주에 관한 진솔한 비법을 전수 받을 줄이야! 견문이 부족한 자신을 책망하다 보니 어느새 등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요즈음엔 맥주라면 어린이도 알고 있으리만치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당시 수입에 의존하던 고급주가 국내의 자동화된 기술로 값싸게 만들고 마음껏 마실 수 있으니 옛날의 가난과 지금의 풍요를 대비하면 윤택하다 못해 사치스러운 것이 아닐까?
마시다 남기고 버려지는 음식물이나 맥주를 볼 때마다 안타깝기 만하다. 지금도 지구촌 한구석엔 기아에 떨며 죽어가는 생명이 많음에 비긴다면 이 얼마나 행운아일까? 앞으로 낭비를 줄여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을 찾는다면 일석이조의 덕을 쌓는 좋은 결과를 낳으리라.
아내와 나는 어려웠던 그 시절, 수줍은 소녀의 얼굴처럼 붉게 달아올랐던 데운 맥주의 교훈을 회상하며 한바탕 웃고, 아련한 옛 꿈에 잠겨본다. 먼 인생의 초년시절, 순진했던 그 때가 왠지 그리워진다.
22시의 데이트
변 양 섭
동짓달 열나흘 달이 오늘따라 무대 위를 비추는 조명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이 밤은 가슴 시리도록 밝은 달빛이 창가로 스며들고, 내 영혼의 손수건이라도 흔들어주려는 듯 자꾸만 사색의 늪으로 깊이 빠져든다.
22시
이 늦은 시간에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 밖으로 나가는 마음은 가벼운 흥분과 함께 설레기까지 한다. 한겨울 달밤의 데이트라니 이 얼마만의 일인가. 오솔길 옆 산기슭으로 비치는 달빛을 받아가며 앙상하게 빈 몸을 드러내 놓고 추위에 떠는 활엽수들이 안쓰럽다. 빈 가지만 남아 칼바람소리에 울음을 터트리고 있어 더욱 서글퍼지게 한다. 이 겨울을 무사히 넘기고 나면 또 다른 모습으로 피어 날 새싹과 꽃들을 가슴에 품고 추위를 이겨 내며 인고의 세월을 보낼 겨울나무들. 나뭇가지 끝에 걸렸던 조각구름이며, 정겹게 울어주던 매미소리, 새소리가 가지마다 매달려 봄을 기다린다.
저 달이 기울어 다시 올 내일을 기대하며 이 밤은 별들의 속살거림으로 잎눈을 감싸 안고 서 있다. 이렇게 달 밝은 밤이면 언제나 연인과 함께 산책을 즐기던 지난날들이 그리워진다.
오늘 아주 오랜만에 그 기분을 살리며 추억에 젖어 산책을 한다.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 들 무슨 상관이랴. 저 멀리 창가에 어리는 불빛마저 정겹고, 양 볼을 쓸어내리는 거센 바람도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내 가슴에 사랑의 불이 타 오르고 있기 때문인가 보다. 사랑하는 이의 어깨에 살며시 기대고 걷는 머리위로 달빛도 축복 해 주려는 듯 조용히 내려주고 있었다. 우리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걸었다.
힘들고 지친 모습을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어떤 내색도 하지 못한 채 고독을 끌어안고 살았던 내게 구세주처럼 다가 온 분이다. 천천히 걸으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지금까지 혼자 살아 온 분이니 동병상련이랄까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내 마음을 이해 해주고 읽을 수 있었으리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혼자보다는 함께 가 훨씬 살아가기 편한 것이니 언제라도 어려움이 있으면 도움을 청하라 하셨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주인이므로 모든 것은 자기 마음 안에 있는 것이라 했다. 오랜 세월 혼자 살아오면서 터득한 철학이 있었기에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나의 외로움을 충분히 달래주고 고통을 헤아려 주었다. 아마도 혼자 사는 법을 내게 가르쳐 주고 싶었나보다.
한 가지를 잃으면 한 가지를 얻기 마련이라 했던가. 내 생애에 가장 소중한 나의 반쪽을 잃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얻은 것은 나를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깨를 다독이며 들려주는 다정한 말 한 마디가 커다란 용기와 힘이 되어 준다.
‘지금 여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칭찬 해 주는 조용한 음성에 지난날 고독한 아픔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눈물 되어 흐른다. 아직도 죽음을 받아 드리지 못하고 과거에 집착하고,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의 표정만 보고도 금새 내 속마음을 짚어 낸다. 언제나 격려 해 주시고 사랑 주시는 분, 이제는 과거에 집착해 사는 어리석은 삶은 살지 않으리라.
포근하게 내려주는 달빛 따스함에 온 세상이 잠들어 버린 것일까. 오늘따라 동네 개들도 짖지 않고, 숨소리조차 멎을 듯 조용한 산속이다. 아무도 모르게 우리의 사랑은 겨울밤 속으로 깊어가고 있다. 늘 흔들렸던 고독한 삶속에서 오랜만에 주어진 22시의 데이트다. 이날 데이트는 평소와 다른 안정과 행복이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있었다. 자연은 내게 평화를 주었다.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아름다운 것을 감상할 만큼 마음의 여유와 환경이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얼 만큼 시간이 흘렀을까 끝없는 아쉬움 접어 두고 이제는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 대문을 밀어보니 우리가 나간 줄도 모르고 문을 잠가 버렸다. 살다보면 가끔씩 이렇게 난감한 일에 처할 때가 있다. 그래도 오늘 나는 기뻤다. 아름다운 달을 보며 사랑하는 사람과 내 모든 걸주고 받을 수 있었기에 마냥 즐겁기만 했다.
형제자매, 자식들은 물론이고, 고향을 떠나 기숙사에 들어와 어머니처럼 날 의지하는 학생들까지 내가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게다가 이렇게 곁에서 격려 해 주고 사랑해 주는 수녀님도 계시니 참으로 행복한 여인이다.
언제나 지켜 봐 주겠다는 수녀님의 말이 한없이 마음 든든한 것처럼 나도 내가 사랑해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었으면 싶다. 이제는 흔들리지 않으리라고 굳게 약속하고 들어오는 등 뒤로 환한 달빛이 구름을 타고 흘러가고 있었다.
아직도 사랑은 진행 중
변 양 섭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가 계속되더니 바람과 함께 눈이 내렸다.
외출을 하기 위하여 신발장을 여는 순간, 온갖 애환과 추억을 간직한 한 켤레의 신발이 눈에 들어 왔다.
10년도 훨씬 더 지난 신발이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다. 여러 켤레의 신발 중에서 내가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신발이다. 그 신발이 유독 예뻐서도 아니고 발이 편해서도 아니다. 거기엔 사랑했던 사람과의 소중한 나만의 추억이 간직되어 있다.
겨울이 거의 끝나갈 무렵 우리부부는 함께 쇼핑을 하게 되었다. 비싸다고 생각되는 메이커는 가급적 피하는 편이었지만 30% 세일하는 곳이 있어 구경을 하게 되었다. 싼 가격의 반 부츠가 내 눈을 끓었다.
평소 신고 싶었던 것이었기에 사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아 참고 있었다. 20여년을 함께 살다 보니 눈빛만 보아도 서로의 마음이 통할 수 있었는가 보다. 말 하지 않았어도 남편은 나의 마음을 읽고 선뜻 사 주었다. 그 후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다시는 내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고,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십년이 넘게 신었지만 닳고 닳은 신발을 밑창을 갈고 닦으며, 지금도 그 신발을 좋아하고 아끼고 있다. 지난겨울 신었다가 벗어 놓은 것을 막내아들이 아주 깨끗하게 닦아 신발장에 넣어 놓은 것이다. 아들도 내 마음을 알고 있었거나, 아니면 언제나 깨끗하게 구두약을 칠 해 새것처럼 닦아 놓았던 아버지의 마음을 닮아 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따라 신발을 보며 남편 생각이 떠 오른 건 날씨 탓 인가보다. 첫눈이 온다. 아이들을 집에 남겨두고 팔짱을 끼고 낭만을 즐기며 걸었던 하얗게 쌓인 눈 속의 무심천 둑, 순백의 정결한 세상을 축복이라도 하려는 듯 불빛 아래 흐르는 물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함께 했던 소중하고 행복한 순간들을 지울 수가 없다. “청주 댁이 복도 많아 ”정성을 다 해 간호해 주는 남편을 보고 부러워했던 병실 사람들도 떠오른다. 휴일마다 함께 했던 산행, 일요일이면 오늘의 특별 요리로 아이들과 나를 감동시키던 일들도 지워지지 않는다. 설거지를 하고 식탁에 앉아 나누었던 갖가지 이야기들, 신발 안에 가득한 나의 사랑을 어찌 버릴 수 있고 잊을 수 있는가.
지나간 날들은 다 아름다워 보인다고 들 한다. 지나간 날이라서 아름다운 건 분명 아니다. 신이 시샘한다고 적당히 사랑하라던 주위 분들의 말처럼 우린 사랑했다. 서로의 단점 까지도, 더 오래, 더 깊이 사랑하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워 내 곁을 떠나지 못하고 나 또한 보내고 있지 못하고 있다.
문밖을 나서며 나는 말한다. ‘지금 우린 함께 외출을 하고 있다’ 고. 비록 당신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보이지 않지만 눈 위를 조심스레 걷고 있는 내게 한발자국씩 발자국을 떼어 놓을 때 마다 ‘조심해’ 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내 삶의 일부처럼 늘 따라 다니며 조심시키고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다.
나는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 이대로는 안 된다며, 의사 선생님을 붙들고 했던 말, “선생님 살려만 주십시오.” 그 절규가 들린다. 유난히 착하고 선한 사람, 가족을 사랑하고 교직을 천직으로 알고 제자들을 사랑했다. 세상을 떠나고 제자들로부터 안부전화를 받은 몇 년간을 여행 중이라고 얼버무리곤 했었다. 사랑했던 사람들로부터 잊혀져가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그런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듯 10년이란 세월이 훌쩍 넘어 버렸는데도 잊지 않고 안부를 전해오는 제자들이 있어 행복하다. 사랑했던 사람들 어이 잊으며, 남아 있는 식구들이 걱정 되어 맘 놓고 눈을 감지 못했을 남편의 심정을 어찌 다 알며 헤아릴 수 있겠는가.
언제나 덜렁거리고 잊기를 잘 하는 내가 둘이 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일을 혼자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 발걸음마다 남편의 걱정이 가득할 것이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내 곁을 떠나지 못하고 따라 다니며 날 지켜 주고 있다는 생각에 늘 든든하다.
진정 사랑했던 세월들, 나의 행복했던 순간들이 신발 안에 가득히 남아 있다. 아직도 사랑은 진행 중인가 보다.
밀물과 썰물 그리고 갯벌
송유경
고향은 나에게 한 폭의 수채화다.
둑과 둑 사이로 흐르는 하천, 그 위에 사공이 나룻배 저어 가는 모습. 그리고 한 소녀가 밀물과 썰물을 바라보면서 성장해 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러나 하얀 종이 위에 그리고, 다시 지우고 하다 보면 거뭇거뭇 일어나는 종이 결은 자연스럽게 갯벌처럼 변해버리는 내 그림. 선명했던 색감이 점점 바래가는 수채화로 눈가에 젖어든다.
끝없이 펼쳐지는 김제 평야를 따라 가다보면 동진강 줄기와 섬진강 줄기가 만나 이루는 하천, 그 둑 아래 에 백여 채의 가구가 무리 지어 살고 있었다. 황해 바닷물이 동진강을 타고 밀려 올 때면 짠물이 흐르고 썰물 되어 나아갈 때는 섬진강의 민물이 흘러 들어왔다. 그 하천에 띄워진 작은 배는 김제군과 정읍군과 부안군을 넘나들며 생활권을 연결해주었다.
나룻배를 타고 오고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마다 강기슭의 내음 같은 소문들로 늘 술렁거리던 동네. 그래서인지 누군가 내게 고향을 물어오면 ‘부안이요’라고 말하지 않고 ‘元川리요’ 라고 대답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 하천은 칠보 댐으로 인해서, 동진강의 수문에 의해 흐르지 못하고 갇힌 물만 넘실거릴 뿐이다. 썰물과 밀물, 갯벌도 없다. 나룻배도 사라졌다. 각박한 시대의 산물인 웅장한 다리만 버거워 보인다. 그래도 다리아래에 하천은 존재한다. 나는 가끔 그 물위에 낚싯대를 던져 놓고 세월을 낚는다.
갯가는 썰물일 때 몇 시간씩 밑을 드러내 놓곤 했었다. 물이 흐르면서 끊임없이 날라다 주는 퇴적물로 고운 모래가 되고 갯벌이 되어서 많은 생물들의 서식처를 이루었다. 물이 빠지기 시작할 무렵 고깃배가 들어오고 남정네들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 포획물을 날랐고 조개를 캐는 아낙들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와 뜰 채로 고기를 잡는 아이들의 함성소리로 시끌벅적 했었는데... 이제는 바람 따라 물결만 흐른다.
여름밤이면 동네 어른들은 둑에 말리던 보릿대를 깔고 앉아서 생활의 노곤함을 입담으로 풀어내 한편의 소설로 읊었다. 아이들은 달빛 아래에서 숨바꼭질하며 무서움을 경험하고 달리기를 하면서 경쟁의식을 배웠다. 남녀아이들이 엉클어지는 씨름판은 승패의 갈림길이 아차 하는 순간에 결정된다는 것을 자각이나 한 듯 한판만 더 맞붙어 보려 실랑이가 벌어졌다. 무슨, 무슨 놀이에 모기 불은 꺼질 줄을 몰랐지만 나는 늘 이방인이었다.
부모가 만들어 놓은 금기 사항 때문에 또래 아이들과 어우러지지 못하고 그들의 삶을 동경만 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 집 울타리는 전나무로 둘러 쌓여있었다. 나무와 나무사이의 간격을 발견할 무렵부터 나의 화려한 반항은 시작되었다.
처음에 개구멍으로 몰래 빠져나가 교회에 갔었다. 동무가 잡아 끌어내다 싶게 힘들었다. 아니 두근거렸다. 교회에 앉아 기도를 해도 찬송가를 불러도 집에 들키지 않고 무사히 넘어갈 궁리만 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부모님은 몰랐다. 허나 꼬리가 너무 길었다. 내 종아리에는 빨간, 보라색 자국으로 내 마음은 선홍색으로 치밀었다. 그 후 우리 집 담은 빈틈이 없었다.
처음이 힘들지 그다음부터는 대담해졌다. 대문을 열고 동네 언니들 따라 강가로 나갔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내가 자랑스럽게 내 놓은 조개나 물고기가 두엄자리로 내팽개쳐졌다.
하지만 나는 풀 먹인 원피스가 흙탕물에 범벅이 되었을지언정 발바닥에 닿았던 고운 모래의 촉감을 잊을 수 없었다. 그 질벅한 분위기에 이끌려 갯벌 속을 헤집고 다니면서 무언가를 잡아 보는 희열. 그 순간만큼 나는 외로운 아이가 아니었다.
누가 그랬던가. 한 알의 진주를 얻기 위해 갯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야밤에 줄행랑치다 번번이 잡혀 올지라도 그래도 운수 좋은날에는 아이들과 보릿대 위에서 땀에 젖는 줄도 모르고 뛰놀았던 영상. 그때 해보지 않는다면 다시는 할 수 없는 삶이기에 인생을 한 막의 연극이라 했나 보다.
갯벌에 나름대로 형성 방식이 있듯 나도 그때부터 자신에 대한 의식이나 관념을 내 방식대로 쌓아가고 있었던 것 같다.
만약에 부모님이 만들어 준 경계선 안에서 얌전한 소녀로만 살았다면 지금 내 기억 속의 고향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
우리 집의 아래채에는 늘 타지 사람들이 머물렀다 떠나가곤 했다. 어느 산골에서 살다가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들녘으로 나온 사람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또 다시 먹고살기 위해 도시로 떠나갔다. 그럴 때마다 나는 타향살이의 애달픈 심정을 모른 채 자유롭게 이동하는 나그네 같은 그들의 삶을 부러워했다.
전나무로 된 울타리가 벽돌로 높이 쌓아지고 복숭아나무, 살구나무가 잘려나가고 나의 비밀스러운 장소였던 포도나무 터널이 사라진 자리에 새 집이 지어졌다. 새마을 운동 종소리가 울렸다. 동네사람들은 종소리의 환영 따라 하나 둘 떠나갔고 빈집이 늘어날수록 적막해져 가는 동네. 나는 다시 외로워졌다. 또 다른 이탈을 준비했다.
나에게도 집을 떠날 수 있는 명분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처음에는 완강히 반대하시던 부모님도 도시로 나가 공부하겠다는 딸자식을 더 이상 붙잡지 못했다. 나의 타향살이가 시작되었다.
그 타향살이가 몇 년인가. 딸아이가 그때 내 나이가 되었으니......
썰 물일 때는 서서히 물이 나가지만 밀물일 때는 순식간에 들어오는 법. 세월도 순간처럼 흘러가 버렸다. 얼굴에 나타난 나이테는 호기심을 가져갔고 주름진 가슴에 부는 바람은 도전을 잠재웠다. ‘그래 순응하며 살자’ 다짐하며 바람 부는 대로 살다가도 때로 나타나는 삶의 복병에 지치기도 하고 좌절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고달퍼 진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친정으로 달려간다. 나보다 더 친정을 가려하는 남편에게도 고향은 있었다. 하지만 물 속에 잠긴 옛집과 함께 부모님마저 그곳을 떠나서인지 어쩌다 찾아갔던 발길마저 멈추고 말았다. 술에 취해야만 가슴에 담아 두었던 자신의 고향을 회상하지만 몇 번씩 재생해 보았던 필름 마냥 지지직거릴 뿐이다.
그래서 일까. 아버지는 고향에 대한 나의 한정된 시각을 넓혀주려 부안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설명해주시곤 하셨다. 먼 훗날 부모님이 안 계시더라도 빛 바랜 추억으로만 그리워하지 말고 고향을 찾아오라는 당부처럼 들린다.
扶安
황해에 불쑥 나와 있는 반도로 하루에 두 차례씩 어김없이 바닷물이 들고 날 때 드넓은 갯벌이 펼쳐지는 곳이다. 바다에 접해 있으면서 변산 이란 산에 겹겹이 싸여있고 넓고 비옥한 평야를 이루고 있다. 산과 들 그리고 바다가 조화를 이루어낸 수려한 경관으로 노을이 아름다운 고장이다.
어쩌면 부안 이란 지명보다 변산반도로 더 널리 알려졌는지도 모른다. 변산은 산세가 제각기 방향이 뒤틀어져 그 무질서가 파격 미를 이루어 수십 개의 경승지를 안고 있다. 봉래구곡과 가마소 계곡 지포계곡 그리고 유서 깊은 내소사, 개암사, 월명암 등이 으뜸이다. 바다를 보면 변산 해수욕장 하섬 그리고 해식단애가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터 잡은 채석강 적벽강 등 많은 관광 명소가 있고 저 멀리 위도가 곱고 부드러운 모래사장을 펼쳐놓고 태양을 품고서 잠이 든다.
산수가 수려한 곳에서 큰 인물도 많이 난다고 하질 않는가. 그것은 좋은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일 것이다. 다방면에 이름난 인물 중에서도 나는 이매창이란 여인을 흠모 한다
오늘은 매창공원에 갔다. 이 매창, 조선 선조 때 개성의 황진이와 함께 당대 대표적인 여류시인으로 평가받았던 기생이다. 이조시대의 여인으로 살아가기도 한이 많았을 텐데 그 절대적인 관습을 박차고 일어나 한 시대를 풍미하고 간 그녀. 그녀의 갯벌 같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떠나간 님들은 밀물이었을까 썰물이었을까.
새만금 방조제에 거센 바닷바람이 불고 있다. 썰물일 때라 가까이 어선들이 떠있다. 숭어와 농어들이 조여드는 그물을 뚫고 나가려다 뜻대로 되지 않는지 하늘 향해 튀어 오른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지는 곳에 연좌를 벌이고 새만금 간척사업을 포기하라 외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십 년전 정부가 발표했던 금세기 최대, 세계 최장, 서해안의 전진기지 구축이란 대역사, 갯벌을 지키면서 할 수는 없었는지... 무언가 얻기 위해 무엇인가 포기해야 한다면 나는 갯벌을 지키자는 편에 서명하리라.
내 인생 모든 것이 빈약하고 불확실하여 가변적이었던 시절. 명확치 않은 미루어둔 만남을 고대하며 친정어머니를 밀어내었던 나의 반항. 영화의 이미지 같은 대도시의 화려함을 떠올리며 일탈을 꿈꾸곤 했다. 그리고 성공한 줄 알았다. 그러나 좌절이 생략된 연습일 뿐이었다.
일탈이라는 것은 환상적으로 존재 할뿐 일상은 실재적인 현실이었다. 끊임없이 나를 달금질 하고 비약을 품게 했던 그래서 고통스러웠던 원인을 이제야 알 것 같다.
타향살이로 인해 건강상 재정상 혹은 감정상의 불만이 쌓여 자신이 힘겨워지면 나는 숨어버리고 싶다. 그러면 썰물 되어 나왔던 고향으로 돌아가 뒹군다. 아무런 욕망 없이 노닐다가 내가 살았던 곳을 둘러보노라면 가슴 밑으로 내려 앉아버린 의욕이 자신도 모르게 꿈틀거린다.
갯벌이 해양생물들의 휴식 장소이자 산란장소이 듯 나에게 고향은 갯벌 같은 것이었나........
나는 또 다시 밀물과 썰물이 되어 고향을 드나들면서 인생의 퇴적층을 쌓아 가리라.
- 푸른솔 10주년 기념 원고 -
피리 소리
조 경 진
고서화 전시실
이름 모를 화공의 취적도 한 폭
눈에 든다
담채화 풍경 속에
허공을 짚고 울리는 공명
텅 빈 강물에 마음 한껏 적시는
애잔한 흐느낌이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니
그림 속 피리 소리다
도포자락 길게 느리고
비껴 쓴 갓 위에 구름 한 점 얹고
시간이 밟고 간 상처 위에 서서
까맣게 재가 되는
불타는 음률
풀어내지 못한 정한을
바람에 띄우는 비방秘方
내 마음을 훑고 가는
영혼의 소리
- 등단 작품 -
낙타의 길
두바이에서 온 카드 한 장
낙타가 터벅터벅 사막을 걷는다
모래 속에 묻힌 수많은 발자국
먼저 간 발자국을 따라
단 하나밖에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
모래 바람 속에서 멈춘 발걸음들
흥건히 고인 울음소리 들으며
가끔 허기진 허상에 웃고 울다가
운명이란 이름으로 가야할 때를 안다
사막은 낙타를 유혹하고
푸른 하늘이 손짓했으리라
돌개바람의 검은 발톱은
모래 언덕을 허물고 또 쌓는데
낙타가 부여잡은 것은
순한 발바닥과 긴 눈썹 뿐
뜨거워진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으리라
뼈만 남은 죽음의 흔적위로
말없이 걸어가는 숨결 거칠어지고
절망이 깊어져 독한 시름 앓을 쯤이면
불타는 사막 밑을 흐르는 물소리 듣는다
팽팽히 당기는 중력을 느낀다
거실에 앉아 ‘생이 무어냐’고 묻는 나를
낙타가 말없이 등에 태우고
사막 저편으로 걸어간다
묵묵히 뒷모습을 지우며 간다
그리움 찾아 가는 길
달빛이 교교한데 밤이 깊어지면서 바람이 소슬하다. 등불을 끄고 창가에 앉아 가로등에 비추이는 풍경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왠지 가슴이 시려온다. 갑자기 외로움이 밀려들며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인다. 마음은 낙엽을 밟으며 바람소리, 물소리 벗하며 걷는 추억의 길로 달려가고 이런 밤은 으레 미열이 나서 잠을 설치게 된다. 아쉬움과 미련으로 남은 추억의 끈을 잡고 가끔 회상에 젖어보는 것도 늘그막의 여운이련가. 정이 가득한 눈으로 슬며시 잡은 손의 따스함이 아직도 남아있는 느낌을 보듬고 싶어질 때면 그리움을 찾아 나선다.
태성리에 차를 두고 각연사까지 시오리가 넘는 길을 걸었다. 말라가는 들풀과 계곡의 물, 그리고 빛바랜 나뭇잎. 소슬바람에 뒹구는 낙엽들이 내려앉은 우윳빛 하늘에 싸여 숙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계곡물의 청정함은 마음의 때를 깨끗이 씻어 주려는 듯 마음속까지 휘돌려 흐른다. 오솔길로 접어들자 낙엽이 발목을 덮는다. 이윽고 보개산과 칠보산, 가덕산이 품어 안은 골짜기에서 각연사가 자신의 신비로운 설화를 들려주려는 듯 자태를 조용히 드러낸다.
각연사의 오솔길은 내 마음속에 자리한 안식처다. 내가 정신적 공황에 빠져 방황하던 때 마음을 어루만져 사랑의 눈을 뜨게 한 여인과 인연의 끈을 맺어준 곳이다. 옛 오솔길 찾기 탐사에서 김 선생과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그녀의 눈은 맑고 청순했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가슴속에 묘한 떨림이 왔다. 수줍음이 많고 소심한 성격에 말 한마디 못 건네던 참에 김 선생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적극적인 성격이 부럽고 고맙기까지 했다. 옛 오솔길 탐사는 수풀이 우거지고 자취조차 남지 않은 곳이 많아 어려운 노정이었다. 한 여름 열기 속에서 새로 길을 트고 인도하며 우리는 조화로운 협력자가 되었다. 김 선생이 내게 호감을 갖고 있음을 느꼈을 때 내 마음은 마치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나뭇잎을 흔들어 대는 바람은 감미로운 하프를 연주하고 하늘은 갑자기 왜 그리 높고 맑은지. 고개 마루에서 맞는 바람의 시원함은 상쾌함 바로 그것이었다. 그때부터 각연사 오솔길은 우리들 인연의 고향이 되었다.
그날의 인연을 계기로 우리들은 서로를 배려하며 그리움을 키우고 허물없이 속내를 터놓는 사이가 되었다. 휴일이면 예외 없이 한적한 오솔길을 찾아 둘만의 오붓한 시간으로 행복했다. 2년여 세월동안 김 선생이 나의 마음속에 자리 잡아 이제는 미래에 대한 약속을 해야겠다고 벼르던 날도 그 말을 끝내 하지 못하고 말았다. 김 선생이 어느새 내 마음을 짐작이라도 했음인지 자신은 바람이 되고 싶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헤어졌다.
그 후 나는 직장에서 장기 연수에 들어갔고, 연수 중 김 선생의 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동생이 어제 미국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정착할 것이라며. ‘그리움을 가슴에 묻어놓고 추억을 벗하며 살 것’ 이라고 꼭 전해달라는 말을 전 한다며 전화가 끊겼다. 나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이면 상대의 작은 것들도 큰 의미로 받아들이게 마련 일 텐데 말없이 떠나간 심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기대와 환상이 물거품이 되어 소망이 원망으로 변했다. 밤을 낮으로 살며 회의하기 시작했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그리고 자신을 돌아봤다. 내 마음의 진실은 무엇인가? 원망이 되고, 후회가 되고, 다시 그리움으로 되돌아 왔다. 훗날에서야 안 일이지만 그녀는 희귀병을 앓고 있으며 오랜 번민 끝에 떠났음을 알았다. 손을 잡을듯하던 그녀가 말없이 떠난 것은 나를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원망은 삭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가 아픈지, 슬픈지는 느낌으로 알아서 교감해야 할 것 아닌가. 그녀의 가장 큰 아픔을 알지 못한 자책과 슬픔의 늪에서 오랜 시간 헤맸다. 그래서 때로는 손끝 사이로 저미듯 전해오는 그리움에 젖어들었다.
30여 년 전의 세월을 그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각연사에 이르렀다. 각연사를 비껴 오솔길로 들어서는데 절 뒤뜰에서 스님이 비질을 하고 있다. 스님이 말없이 쓸어내고 있는 것은 분명 낙엽만은 아닌, 중생들의 부질없는 욕망도 함께 쓸어내고 있는 것이리라. 청량한 풍경소리에 귀를 씻고 산의 묵언을 듣는다.
세상이 변했듯이 이 오솔길도 많이 달라져있다. 사람들의 발길이 오래전 멈춘 듯 지워져가는 옛길에서 나는 무엇이던가 생각해 본다. 이 길은 나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길에는 나의 웃음이, 한숨이, 옆에서 누가 툭 건드리면 울음이 나올 것 같은 추억이 깃들어 있다. 추억은 흐르는 세월 수없이 떨어진 낙엽 속에 묻혔다가 가끔 튀어나와 나를 맞는 것은 이 또한 삶의 여정 중 한 부분이려니. 그녀가 바람처럼 내 곁에 다가와 옛날을 이야기 하며 함께 걷는 환영에 젖는다.
속내를 드러내 주고받던 깊은 인연의 끈을 놓기가 얼마나 큰 아픔인지는 겪은 사람만이 알리라. 또 아픔을 삭이는데 세월이 얼마나 걸리는지를. 그러나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보면 참고 견디는 시간만큼 인간적으로 성숙 되리라. 사랑도 이별도 초자연적 사랑에 눈을 뜨게 하는 과정이라며 ‘밤새워 울어본 기억이 없는 사람과는 인생에 대해 논하지 말라’고 괴테는 충고하지 않던가.
잊는 것에 길들여진 내 삶의 시간 속에서 아직도 남아있는 흔적, 그녀와의 헤어짐이 한동안 나를 방황하게 하여 버거운 짐이 되었지만 이제는 아픔이 녹아 마음속에 그리움으로 가라앉았다. 추억의 오솔길을 바람을 벗 삼아 걷는다. 낙엽같이 떨어져 뒹구는 그리움의 편린들을 밟으며 나도 바람이고 싶다. 외롭고 쓸쓸해지는 날은 오늘같이 훌쩍 길을 나서 그리움을 보듬으련다. 무엇보다 순수하고 맑은 영혼으로 그리움을 키워낸 이 길을 오래도록 추억과 손잡고 걸을 것이다.
- 등단 작품 -
조 경 진
대한문학 수필 등단
한국문인 시 등단
청주 문인협회 회원
푸른솔 문학회 회원
개신시원 동인
한국문인 추천작가회 회원
저서 : 민들레 홀씨 되어(산문집)
하늘바라기 풀꽃의 노래 (수필집)
목단꽃
전 성 희
만개한 목단꽃에 아버지의 웃음이 배어 있다.
방에 앉아 책을 뒤적이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에 얼른 일어나 분합문을 열었다. 활짝 핀 목단꽃이 걱정되어서다. 심술궂은 빗줄기가 부귀와 영화를 꿈꾸며 하늘거리는 탐스러운 꽃송이의 낙화를 서두르니 얄궂기만 하다.
우리 집 뜰의 목단은 하늘의 뜻을 알아차릴 줄 아는 장년의 나이가 되었어도, 예나 지금이나 고고한 자태를 잃지 않고 매년 오뉴월이면 만개하여 집안에 길한 기운을 서리게 한다. 낡은 한옥의 안뜰에 붉은 꽃이 하나 가득 만발하여 집안을 화사하게 밝혀줄 때 나의 모든 시름이 녹아내리는 듯하다. 모란꽃이 만발하면 내 마음이 즐거움으로 가득히 피어난다. 층층시하에 생소한 농촌살이가 힘겨워도 가풍이 넉넉한 가문으로 시집을 온 듯하여 뿌듯하였다.
삼십 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생생하다. 모란꽃은 함박웃음으로 피어 난 자주 빛 꽃송이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촉촉함과 씩씩한 기상이 넘쳐났다. 어서 오라는 듯이 수줍은 새댁을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친정과 시집의 문화차이로 모든 사물이 낯설어 넓은 황야에 홀로 서 있는 듯 외로울 때면, 목단꽃은 자상한 친정아버지의 웃음으로 다가와 나의 마음을 토닥여 주는 듯했다.
내 어릴 때의 기억이다. 잠에 취해 눈이 게슴치레하고 머리가 무겁고 온몸이 근질근질하여 잠을 못 이루면 아버지의 까칠까칠하고 큰 손바닥으로 나의 좁은 등을 쓸어 주셨다. 그때마다 방안의 천장에 연속으로 이어지는 무늬를 신기한 듯 바라보다 잠이 들곤 하였다. 아침이면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가 다락으로 통하는 벽장문에 그려진 민화와 자개장에 새겨진 풍만한 모란꽃을 좋아하였다.
오지랍이 넓은 아낙네처럼 소탈한 목단꽃은 행운을 가져다 줄 것만 같아 어린 마음에 희망의 꽃으로 피어났었다. 그림에서나 보았던 꽃이 푸른 오월이면 내가 시집와서 살고 있는 마당에 이슬을 머금고 활짝 피어 봄의 향연을 연출하니 천하를 얻은 듯 흐뭇하다.
봄이면 목단은 앙증맞은 가지마다 잎이 발그레한 싸리버섯처럼 삐죽삐죽 싹을 틔우고 있다가 어느새 꽃봉오리를 맺는다. 모란꽃이 만발할 때면 달빛 어린 밤에 소쩍새 울음이 더욱 구슬프던 사연은 무엇일까.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피어나는 꽃은 하고 많은 색깔 중에 하필이면 빨간 바탕에 푸른 멍을 씌어 자주빛을 담아낼까. 한 많은 인생을 살다간 넋의 환생일까.
나는 안쓰러운 마음에 목단꽃으로 다가가 살며시 얼굴을 대어 본다. 둘 만의 은밀한 대화를 나누려는 듯 두 손을 모아 입을 가리고 속삭인다. 한 줌의 달콤한 향도 뿜어 내지 못하는 무언의 몸짓에서 우주를 달관한 군자의 체취가 배어난다. 하염없이 모란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늘 말씀이 적으시고 소박하며 겸허하게 살다 가신 아버지의 성품을 느끼게 한다.
목단꽃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릴 때면 아버지가 흔들의자에 앉아 세상 시름 다 잊으시고 신선놀음 하시는 것 같기도 하다.
어느 때는 아버지가 우울해 계시면 기분을 맞추어 드리려고, 엉뚱하게 우리 조상님 중에 어떤 분이 가장 훌륭하셨느냐고 여쭙고는 했다. 그때마다 즐거워하시며 채마공이라 하셨다. 권력과 세력 다툼에 속세를 떠나 산속으로 피정하셔 나물만 캐어 자시던, 학처럼 고매한 분이라고 이르시며 허탈한 심경을 내보이기도 하셨다. 녹두장군 어른의 이야기도 곁들이셨다.
소담스러운 꽃이 지고 달걀모양의 열매가 맺혀 주머니 속에 둥글고 검은 씨앗을 품어낼 때면 하늘과 바다보다도 넓은 아버지의 자애를 느낀다. 자식들을 위하여 일신의 호사를 마다하시고 지극한 정성과 사랑으로 보듬어 주시던 애끓는 정이 지천명의 중반을 넘어서야 가슴에 사무친다.
내가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투정을 부릴 때면 모진 마음먹지 말라고 이르시던 친정아버지의 말씀에서 세상을 물 흐르듯 살아내신 과묵하시고 거울처럼 맑은 품성이 묻어난다.
아버지께서 끔직이 여기시던 상고머리 남동생은 의젓하게 자라서 만화로 삶의 애환을 그리고 있는데 알고 계실까. 제 아비의 재능을 타고 난 손자가 개울에 잠긴 돌들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대견함에 아버지의 너털웃음이 춘풍의 저고리 춤에 너울거리는 목단꽃으로 다가오시는 듯하다.
회양목 위로 우수수 떨어진 목단꽃잎을 한 장 한 장 주워 담는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가족들을 위하여 애쓰시다 유언도 할 사이 없이 바쁘게 구름 따라 가신 아버지. 뜨락에 서서 바람결에 고개를 흔드는 목단꽃을 바라보며 아버지의 미소를 찾는다.
풍성한 목단꽃은 오늘이 지나면 명년 이 맘 때나 보게 되리라. 나는 딸아이 방에 목단꽃잎 바구니를 갖다 놓는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딸아이에게 목단꽃을 그려 달래야겠다. 싱그러운 목단꽃 향기를 맡으며 기쁨으로 충만한 사랑을 담아 함박웃음을 잃지 않는 영원히 살아 숨쉬는 목단꽃이 되게 말이다.
난초 꽃을 묵향에 담으며
전 성 희
난향십리(蘭香十里)라 했던가.
이른 아침에 방문을 여니 싱그럽고 향긋한 내음이 대청 가득 배어 있다. 바람개비 같다고나 할까. 영락없는 풀포기건만 미색의 날렵한 꽃을 피워 바라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요란스럽지 아니하고 끊어질 듯 은은하게 이어지는 향에 감질(疳疾)이 나 흠뻑 취해 보려 얼굴을 대고 오래도록 흠흠거렸다.
후각은 무디어지고 난향은 수줍은 아가씨마냥 꼭꼭 숨어버리니 소유할 수 없음에 안달이 난다. 손을 내밀어 움켜잡아 보려다 분별을 가린다.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을 혼자 차지하는 것보다 아량을 베풀어 한 발자국 물러서서 관조하는 너그러움도 있지 아니한가. 이슬을 머금은 신선한 대지의 기운을 안겨주려 분합문을 여니 정원의 상큼한 바람이 난향을 채가듯 실어간다.
꽃놀이를 나섰다가 푸르른 산에 군데군데 만개한 산벚꽃이 나의 새치를 연상케 하던 화창한 봄날 허허로운 마음을 달래려고 이정표도 없이 걷다가 세속에 물들지 않은 범인(凡人)을 보았다. 육거리 시장 꽃수레 위에서 길거리 설법을 하는 듯 거추장스럼이 없는 조촐한 모습에서 인간의 고뇌를 벗어버린 수도승을 보는 듯하였다.
달 반이 지났건만 시주를 하듯 한 포기 거두지 못한 연민의 정이 아지랑이처럼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옴을 잠재우듯 지필묵을 찾았던 밤의 서정을 그려본다.
연적을 벼루에 기울여 물을 따르고 먹을 갈기 시작한다. 손이 원을 그리며 움직이니 이조시대의 여인 두향이와 명성황후의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얼비친다.
두향이는 거문고에 능하고 난과 매화를 사랑하였다. 단양군수인 퇴계 이황과 청풍명월의 선경을 즐기다가 선생님이 풍기로 떠나자 사모하는 정을 주체할 수 없어 속앓이를 하였다. 기녀이기에 천대와 멸시를 감내(堪耐)하며 퇴계 선생님이 안동에서 타계하자 강선대 옆에 움막을 짓고 일편단심으로 수절하였다. 시간이 흐르매 먹물이 걸어지는 감각은 두향의 애끓는 정이 시공을 초월하여 전율되는 듯하다. 님을 보듯 오탁(汚濁)에 물들지 않는 절개로 난초와 매화만을 가꾸었을 여인의 애틋함이 벼루에 배어난다.
규중의 처자로 태어났다면 어버이 슬하에서 바른 몸가짐은 물론이요 출가하여 지혜롭게 사는 법도를 깨우쳤으리라. 바느질과 자녀를 양육하는 법 등 대가집 안방마님으로 손색이 없을 규수가 되었으리요. 타고난 운명의 장난으로 노리개 신세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남몰래 흘리는 눈물은 얼마나 되었을까. 긴긴밤 만리장성을 쌓은 정을 접고 떠나는 님을 어이할 수 없어 타오르는 욕정을 꺼억꺼억 삼켰을 게다. 돌아서는 님을 놓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미워하며 바다가 뒤집히는 듯한 슬픔도 맛보았으리라. 매정하다 탓할 바는 아니나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하시던 퇴계 이황 선생님은 두향이를 향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어찌 승화하셨으리오.
여염집 처자는 혼례를 치르면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하여 혼신을 다한다. 황금소심(黃金素心)의 꽃봉오리가 작은 고추 모양으로 하늘을 향한 것은 아들을 잉태하기 위하여 기자(祈子)하는 아낙의 염원이다. 자식을 낳아 마른자리 진자리 가려 뉘우니 무럭무럭 성장하는 기특함은 입가에 웃음꽃을 절로 일게 한다. 적령(適齡)이 되어 우주진리 깨우치러 섭렵(涉獵)함에 우둔함이 있어 훈육을 엄하게 하니 반듯하게 자라서 효를 한다며 자숙하는 의젓함에 여인들의 모든 시름이 녹아난다.
나의 손놀림이 맷돌을 돌리고 있는 듯 묵직하게 느껴지니 서도에 뛰어나신 흥선대원군이 먹갈 듯 한다는 말이 되새겨진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실성한 척 세월을 지고 사셨다고 한다. 양반네들 풍류놀이에 초대받지 못하고 거렁뱅이 대접을 받았던 날이면 사랑채에 홀로 앉아 반딧불과 달빛을 벗삼아 난을 치며 수오지심(羞惡之心)을 다스리셨다고 한다. 어두움은 걷히었으나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개화의 세력에 밀리어 청나라로 납치되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셨으니 애통함을 뉘가 알리오. 이국땅에서 애써 외로움을 참으며 주야장천 필봉(筆鋒)에 힘을 주어 혼을 불어넣으신 한 서림은 날렵하고 우직하다.
화선지를 서진(書鎭)으로 누르고 붓대를 잡아 말총에 먹물을 찍어 강약의 흐름을 타며 줄기 하나를 그었다. 매끄럽지 못하고 울퉁불퉁하니 정서가 안정되지 않은 표출이다. 스승은 이런 나의 그림을 보고 능수능란한 분의 작품이라면 잘 되었다 말 할 수 있지만 아직 멀었다 질책하신다. 노여움에 속이 달아오르지만 나에게 체면을 걸 듯 위로를 한다. 두향이의 움막 앞에 피어오른 난을 꼭 닮았을 것이야. 독수공방 외로움을 마디마디 긴긴 한숨으로 피어 올린 난초를 그려내지 않았는가. 소질이 있지만 시간이 걸림돌이 아니련가.
이 난초 저 난초 다 취하고 싶으나 고르게 호흡할 줄 모르는 나는 흥선대원군의 난을 모방하려는 성급함을 접어 두기로 한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앉아 있으니 채근담의 글귀가 가슴에 와 닿는다.
‘성질이 조급한 사람은 타는 불꽃같아서 만나는 것마다 불태우고, 남에게 은혜 베풀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너무 얼음처럼 맑아서 만나는 것마다 반드시 죽이고 말며, 꼭 막혀 고집이 센 자는 괸 물이나 썩은 나무 같아서 생기가 이미 끊어져 모두 공업(功業)을 세우고 복을 길이 누리기가 어렵다.’ 하였다. 나는 얼마만큼 덕을 쌓으며 살았을까 회한이 든다.
필단(筆端)에 애오욕이 잠재해서는 깨끗하고 조화로운 분위기의 난초를 치기 어렵다. 또한 심신을 닦아 지덕을 계발하면서 오랜 시간을 두고 기예(技藝)를 연마하여야 고고하게 기품을 지닌 난초를 피워낼 수 있지 않을까.
난초의 생명은 굳굳하면서도 부드러움에 있다. 난은 씩씩하고 용맹스럽게 자기 주장을 하다가도 학자처럼 고매(高邁)하게 숨을 쉬며 사양지심(辭讓之心)으로 겸손한 자세를 갖는다. 위계질서가 있어 남의 자리를 탐하지 않으며 시기와 질투를 모르고 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 오만하지 아니하며 희망이 없는 듯 쳐지지도 않는 의연함으로 여유스럽게 잎을 늘인다. 어느 누구에게도 핀잔을 주고 끌어 낮추어 밟아 버리려 하지 아니하니 진정 칠정(七情)을 달관한 성인의 숭고함이다.
하늘은 초생달을 잉태하여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잠을 잊어버리고 묵향과 더불어 청초한 난초의 향기를 누려보았다.
동이 터오니 황금소심이 아침놀에 기지개를 펴듯 달콤하고 생생한 기운으로 나를 휘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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