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이 성경 몇장 몇절에 나오나? 를 묻는 분이 계시다. 본인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를 않는다면서..., 하지만 성경 몇장 몇절에 없는게 맞다. 추수감사절이라는 이름 자체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성경에 추수감사절과 가장 의미가 비슷한 절기는 [수장절]이다. 수장절은 추수를 마치고 곡식을 창고에 들인후에 그것에 대해 감사해서 드리는 절기가 수장절이다. 구약적인 의미로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살펴본다면 어떤 결실을 얻고 나서 그 결실을 얻은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이렇게 추수를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햇빛을 주시고, 바람을 주시고, 비를 주셔서 추수를 하는 것이기에 이렇게 곡식을 얻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농사를 짓지는 않지만 지난 일년 동안 우리가 평안하고 은혜롭게 산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함께하심의 증거이다. 그 은혜에 감사하여 오늘 추수감사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럼 왜 수장절이라고 하지 않고 추수감사절이라고 하는가? 추수감사절이라는 말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만들어지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1620년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들이 있었다. 이들을 청교도라고 한다. 이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102명이 미국이라는 신대륙을 향해 출발했다. 오직 신앙의 자유를 찾아 출발한 65일간의 여행기간동안 44명이 죽었다. 이들은 신대륙에 도착하자마자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흉년이 들었다. 그것도 2년 연속.., 굶어서 죽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말 이들에게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들은 이 엄청난 고난을 기도로 극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앞에는 굶주림의 아픔이 이어졌다. 그들이 교회에 모여 기도하는 중 한 성도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일어나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에게 배고픔이라는 아픔이 있지만..,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영국에서 누릴수 없었던 신앙의 자유가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금식하며 울며 기도했지만 올해는 신앙의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잔치를 하는 것이 어떻겠나? 라고 제안했다. 이들은 곡식을 다 거둬들인 풍년 중에 감사잔치를 한 것이 아니라 매해 흉년이 들어 죽을 지경에 금식하며 울며 기도하는 중에 금식 대신에 감사를 하기로 마음을 모인 것이다. 이것이 추수감사절기의 유래가 된 것이고, 미국에서는 일주일을 추수감사절기로 감사하는 시간을 갖는다. 교회에 와서 사람들이 막 웃을 때에 나도 좋을 때도 있지만 그걸 보면 화가 나는 경우도 있다. 그런걸 생각해서 웃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자기는 너무 힘들고 어려운데 다른 사람들이 막 웃고 떠들고 있으면 ‘부럽다’는 단계에서 한단계 더 나아가 화가 치밀어 오른다. 더구나 앞에서는 목사가 ‘하나님 은혜’ 어쩌구 하면서 웃고 있으면 저 목사는 정말 철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성도들을 축복한다. 다른 사람들이 웃을때 화나는 것이 아니라 같이 기뻐하며 즐거워 할 수 있길 바란다. 다른 사람 웃을때에 내 마음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이유가 뭘까? 다른 사람은 다 웃을수 있는 상황인데 나만 힘들게 살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 중에 힘든일이 없는 사람이,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겉에서 보면 저 집에는 아무 문제도 없는것처럼 보여도 알고보면 이런 아픔, 저런 아픔, 이런 말못할 사정, 저런 말못할 사정들이 있다. 우리가 웃을수 있는 이유가 상황이나 여건, 환경이 웃을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웃는다면 그건 예수안믿는 사람도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내 환경이 금식할 상황이고, 철야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웃고, 즐거워할수 있는 것이 성도임을 기억하길 바란다. 지금 우리 가운데는 육신적인 이런저런 연약함을 갖고 이 자리에 나온 분들이 있을 것이다. 또 경제적으로, 직장에, 사업, 장사하는 일에 이런저런 문제들이 있을수 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런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바라보며 울적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힘들어 한다. 몸이 아플 때에 그 아픈 것을 계속 생각해 보라. 자신의 연약함을 계속 생각해 보라. 더 우울해질 것이다. 하지만 주를 믿는 우리가 그런 상황가운데서 주를 바라보고, 주의 은혜를 바라보면 웃게 되는 은혜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웃을수 있는 이유는 예수요, 우리가 행복할수 있는 이유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이 2년 연속 흉년을 경험하며 금식 대신 감사를 하고, 불평 대신 감사를 했는데 그들이 망하지 않고 몇백년 지나지 않아 세계최대강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엄청난 영적인 비밀을 깨닫고 우리 성도들이 힘든 상황 가운데서 ‘더’ 감사하는 은혜가 있길 축원한다. 금식할 수밖에 없는 청교도들이 감사하고, 불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감사했던 청교도들을 하나님이 그 민족을 몇 백 년이 지나지 않아 경제대국으로 만들어 주신 것처럼, 지금 어떤 어려운 상황에 있든간에 하나님 앞에 감사 찬송하는 은혜가 있길 축원한다. 나는 감사는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는다. 우울하면 병이 더 깊어진다. 감사하면 병이 떠나고 감사하면 하나님이 환경을 변화시켜 주신다. 우리가 평소때에 감사하지 않으니깐 오늘 하나님이 추수감사절이라는 날을 주셔서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감사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능력이 어디서 나타나나? 기적이 어디서 나타나나? 감사할때에 지금도 기적은 일어난다. 아픈 분들이 있는가? 감사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그 병을 이길 힘을 주실 것이다. 환경이 어려운 사람이 있는가? 감사하라! 하나님이 그 환경을 이길 힘을 주실 것이다. 2009년 추수감사절에 하나님은 우리교회에 <시133편>을 주셨다. <1절>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2절> 같고, 형제와 연합하여 동거함이 <3절> 같다.” <3절> ‘거기서’란 “형제와 연합하여 동거하는 곳”에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다. 낚시를 할때도 몫(=포인트)이 있다. 아무데나 가서 담근다고 고기가 잡히는 것이 아니다. 낚시를 잘 하는 사람들을 보면 포인트를 잘 잡는다. 사진을 잘 찍는 사람들도 보면 포인트가 있다. 어느 시간때에 어느 자리에서 찍으면 작품이 나온다고 한다. 가끔 여행을 다녀보면 여행 가이드들이 사진 찍으라고 말해주는 곳이 있다. 그 장소가 사진이 잘 나오는 포인트이다. 우리 인생에도 포인트가 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지점(=포인트)가 있다. 지혜로운 성도는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포인트를 정확히 알고 신앙생활한다. <3절>에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다”고 하는데 ‘거기’가 있다. 하나님이 복 주시는 ‘거기’가 있다. 반대로 마치 낚시할 때에 고기도 안잡히고 낚시줄 끊어먹는 포인트가 있는것과 같이 하나님에게 혼나는 포인트가 있다. 하나님에게 복받는 사람은 복받는 포인트에 가서 복받을 짓만 하는데, 하나님에게 야단맞는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혼날 포인트에 가서 혼날 짓만 하고 돌아다닌다. 원망! 그것은 복의 포인트가 아니라 화! 망하는 포인트이다. 이스라엘 40년 광야생활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 무엇인가? 원망하면 망한다. 출애굽기 전체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은 단하나이다. 원망하면 망한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보름이면 가는 거리이고, 쉬엄쉬엄가도 한달이면 가는 거리인데 40년 걸린다. 완전 뺑뺑이 돈 것이다. 그러다 결국 20세 이상되는 어른들은 다 죽고 가나안은 20세 미만의 사람들이 들어간다. 결국 출애굽기의 핵심 포인트는 “원망하면 망한다”이다. 원망은 망하는 포인트이기 때문에 절대 우리는 근처도 가면 안되고 가까이 가도 안된다. 하나님이 복을 주는 포인트는 ‘감사’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복주시고 싶어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감사하면 선순환이 시작된다. 하지만 원망하면 악순환이 시작된다. 우리의 상황이 어려워도 감사하면 선순환이 시작되어서 감사하니깐 감사할 일이 생기고, 잘되고, 잘되니 또 감사하고, 감사하니 또 잘되는 선순환이 진행되는 것이다. 그런데 원망하면 안되고, 안되니 더 원망하고, 더 원망했더니 더 안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해서도, 사람을 향해서도 원망하지 마라. 백성들이 국가 지도자를 향해서도, 학생이 선생님을 향해서도, 자식이 부모를 향해서도, 아내가 남편을 향해서도 원망하지 말고 감사하길 축원한다. 인생에는 잘되는 포인트가 있고, 복 받는 포인트가 있다. 또 인생에는 망하는 포인트, 혼나는 포인트가 있다는걸 명심하라. 원망, 비판, 정죄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그것은 화의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복의 포인트는 용서하는 것이요, 격려하는 것이요, 위로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 <1절>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하나님이 복 주시는 포인트이다. 이 말을 쉽게 풀면 형제가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포인트라는 말이다. 더 쉽게 우리가 사이좋게 살아갈 때에, 싸우지 않을 때에 하나님이 복 주신다. 이것이 화평의 복이다. 다툼과 분쟁하지 마라. 싸움닭이 되지마라. 그곳에는 하나님의 복이 없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곳에 하나님의 복이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야 우리가 잘살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복 주시는 포인트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다. 부부가 연합하여 동거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에 복을 주신다. 그래서 부부지간에 가장 소중한 일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고 안싸우는 것이다. 싸우고 다투는거 정말 바보짓이고 어리석은 짓이다. 싸우고 다투는 곳은 하나님의 징계의 포인트이다. 부모와 자녀가 사이좋게 지낼때, 형제가 사이좋게 지낼때, 목사와 성도가, 성도간에 사이좋게 지낼때에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이다. 우리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일’이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큰 부흥을 선물로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무조건 십자가 세우고 장의자 몇 개 갖다놓으면 거기에 복주시는것이 아니라 그 교회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할때에 하나님이 복 주신다. 목사와 성도가 연합할때에, 성도와 성도가 연합할때에 하나님은 그곳에 복을 주신다. 오늘 하나님에게 복받는 비밀을 깨달아야 한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복받는 비결이다. 우리가 복받으려고 따라다닌다고 복이 오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복주시는 포인트를 알면 쉽게 쉽게 복받고 사는 것이다. 이렇게 인생을 복받는 포인트를 알고 살면 너무 은혜롭게 살수 있는 것이다. 요즘 자녀 때문에 싸우기 좋은 계절이 돌아왔다. 어느 고등학교, 대학을 보낼건가? 어느 학과를 보낼건가? 유학을 보낼건가? 어느 학원을 보낼건가? 등등.., 부부간에 결국 싸움이 난다. 그래서 각방 쓰고 애는 유학 대신에 거실에서 갈길 몰라 방황하고 있다. 정말 어리석인 일이다. 자신들은 자식 잘되게 하기 위해서 하는 짓이지만 이건 자식 망하라고 하는 짓이다. 자녀가 잘되길 원하나? 그렇다면 부부가 연합하여 동거하면 하나님이 자녀를 잘되게 하신다. 결국 인생을 잘사나? 못사나?는 어디에 달렸나? 하나님과 화목하고 사람과 화목한 사람은 인생을 잘살게 되어 있다. 왜? 하나님이 그런 사람에게 복주시기 때문이다. 인생이 잘되길 원하면 어디를 가든지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내라. 싸움닭은 어디가든 싸운다. 어디를 가든 가장 최우선적으로 할 일이 뭔가?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훈련하라. 직장에서도 사이좋게 지내면 그 직장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이다. 성가대가, 교육부서들이 사이좋게 지내면 하나님이 거기에 복을 주시는 것이다. 싸우고 다투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을 걷어차는 짓을 하는 것이다. 전 정말 감사한건 우리교회 부교역자들과 한번도 큰소리 내본 적도 없고, 한 번도 부교역자들이 ‘아니요’를 나에게 한 적이 없다. 맹세컨대 부교역자들 때문에 힘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또 제직회를 하는 과정에서 한번도 얼굴 붉혀본 적이 아직 우리교회는 없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랬기에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복 주신 것이다. 앞으로 우리교회가 부흥하는 비결 간단하다. 다른것 할 생각말고 한가지만 하라. 사이좋게 지내면 된다. 하나님이 그곳에 복 주시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싸우면 하나님이 주셨던 복도 거둬 가신다. 우리 성도들이 할수 있는 최고의 하나님의 일이 뭔줄 아나?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바로 그곳에 복을 주신다. 우리교회를 부흥시키고 싶은 사람은 한가지만 잘하면 된다.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 혹 우리교회를 망하게 하고픈 사람이 있으면 한가지만 하면 된다. 백설공주가 되어서 싸우게 만들어라. 그러면 금새 망할 것이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은 잘 들으라. 성도들에게 교회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교역자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고, 중직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여 성도들에게 흘러내려갈 것이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이 복주시는 포인트를 잘 찾길 바란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1절)”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포인트이다. 혹 형제와 불화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복이 보류중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부부간에 불화하고 있다면, 성도간에 불화하고 있다면 얼른 회복함으로 하나님이 보류하고 계신 복을 받아누리길 바란다. <1절> “형제가~선하고 아름다운고.” 뭐가 아름다운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 너무 아름답다. 몇평짜리 집에 사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집에 사는 가족들이 얼마나 사이좋은가? 가 훨씬 중요하다. 어떤 집은 큰 평수에 인터리어도 잘했는데 가족들이 쓰는 말들이 군대 용어들, 전투적인 용어들이 많다. 정말 선하고 아름다운건 가족간에, 형제간에, 부부간에 연합하는 것이다. 집안에 인테리어를 아무리 잘했어도 부부간에 찬바람이 쌩쌩 불면 아름다운 인테리어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인생이라고 한다. <2절> 아론은 대제사장을 상징하는데 그가 제사장으로 세움받을때에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는다. 그 기름이 머리에서 얼굴로, 얼굴에서 수염으로, 수염에서 옷깃으로 흘러 아래로 내려간다. 이것은 제사장 위임식에서 가장 중요한 예배의식의 장면이며 예배의 클라이맥스와 같은 장면이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것”이 산제사와 같다는 말이다. 즉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 그 어떤 예배보다 아름다운 예배라는 말이다. 그래서 성도가 교회와서 예배하는 모이는 예배도 중요하지만, 각자의 자리에 흩어져서 사이좋게 지냄으로 삶으로서의 예배를 드리길 바란다. 사이좋게 지내는것! 그것이 성도가 드리는 삶으로서의 예배이다. 형제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한사람의 제사장이 기름부음받는것만큼이나 아름답다는 말이다. <3절>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같도다.” ‘이슬’은 수확을 하는데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과 같다. 이슬이 내림으로 그곳에서 나는 과일들이 윤기가 좌르르 흐르고, 정말 달고 맛있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형제가 연합하여 사이좋게 지내면 모든일이 잘된다는 말이다. 풍성하게, 부요하게 되어질 것이란 말이다. 즉 부요의 원천을 설명하는 것이다. 부요의 원천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면 하나님이 잘되게 해 주신다. 우리교회가 잘되는 이유가 뭔줄 아나? 시설이 좋나? 목사가 특출나나? 위치적으로 좋은 여건을 가졌나?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교회가 잘되는 이유는 딱한가지이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잘되게 하신 것이다. 여러분들이 우리교회가 처음 시작했을때의 미약한 모습을 알지 않는가?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통해 일하시는걸 보지 않았는가?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축복하신 한가지 이유는 싸우지 않은 것이고, 목사와 성도간에, 성도와 성도간에 화목한 것이라는 것을 보고 경험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이 중요한 원칙을 가정마다, 직장마다 적용해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곳에 복주신다. 지난 7년동안 나는 우리교회에 줄기차게 한가지를 외쳤다. 싸우지 말자! 싸우려면 일하지 말고 일하려면 싸우지 마라. 이 한가지 복된 말씀 붙들고 지난 7년을 보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헐몬의 이슬’을 주셔서 잘되게 해 주셨다.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싸움터 같은데 이런 세상 가운데서 우리 교회가 진정한 화목과 하나됨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인생 살길 축원한다. 내 인생, 자녀의 인생이 잘되고 못되는 것이 머리에 달렸다! 대학에 달렸다! 소유에 달렸다! 실력에 달렸다! 는 생각을 버리길 바란다. 어떤 집은 “우리 집이 맨날 이렇게 하는 일마다 안되는 이유는 당신 때문이야”라고 말하는 집이 있다. 그런데 그 집이 안되는 이유는 그런 말하며 싸우기 때문이다. 이제 가정들이 하나될때에, 직장들이 하나될때에, 교회들이 하나될때에 하나님이 그곳을 잘되게 하실 것이다.
[출처] 하나됨으로 교회 부흥을 이루라 / 본문 - <엡4:1-6> |작성자 immanuel959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