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완구 전 총리의 1주기 추모식 열려생전 고인과 가까운 지인들 추모집 《길》 펴내
글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충청 대망론의 꽃을 피웠던 고(故) 이완구 전 국무총리(李完九, 1950~2021)의 1주기 추모식이 14일 충남 청양군 비봉면 고인의 선영에서 열렸다.
기자는 4년 전인 지난 2018년 《월간조선》 8월호를 통해 생전 삶을 더듬었었다. 당시 기사 제목은 <목숨 걸고 돌아온 李完九 전 총리>였다.
성완종 회장의 죽음으로 70일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2017년 12월 22일 대법원 무죄 확정판결까지 긴 은둔의 시간을 보내고 언론과 처음 만나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눴었다.
당시 10여 시간의 마라톤 인터뷰 뒤 기자는 이렇게 썼다.
<…이완구는 긴 시간을 거쳐 죽었다가 살아났다. 현실 정치인으로 돌아와 새로운 운명과 맞닥뜨려야 한다. 진실은 오직 신(神)만이 알겠지만 법적 무죄를 사람들이 양심의 진실로 믿어줄까. 김종필·반기문·안희정도 없는 충청대망론의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릴 수 있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끝내 불씨를 살릴 수는 없었다. 꼭 1년 전 다 완쾌 됐다는 암이 재발해 타계(他界)하고 말았다.
이완구 전 국무총리 1주기 추모식 모습이다. 사진=충남도
이날 1주기 추모식에는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김태흠 충남지사, 최민호 세종시장, 김돈곤 청양군수, 박수현 전 국회의원을 비롯해 ‘이완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완사모)’ 회원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덕수 국무총리는 조화를 보내 이 전 총리를 추모했다.
이날 기자 앞으로 책 한 권이 배달되었다. ‘이완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펴낸 추모집 《길》(홍성신문 출판부)이었다. 책 서문에 ‘이완구라는 한 인간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소소한 일상의 모습과 큰 생각, 그리고 철학과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을 더 늦기 전에 보고 듣고 느낀대로 기록하기로 뜻을 모았다’고 적혀 있었다.
<이완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헤로도토스와 예수의 제자도 김부식도 아니다. 다만 그들이 그 옛날 기록했던 그 때의 심정으로, 우리는 이완구 국무총리의 삶과 철학을 기록한다.>
334쪽의 두툼한 책 속에 기자가 쓴 글도 담겨 있다. 자연스레 기자도 ‘이완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일원이 되었다.
추모집 《길》에 실린 친구 김태일씨의 <나의 영원한 친구! 그 이름 이완구>, 이경현 홍성신문 대표의 <운명이었다>, 보좌관을 지낸 유병로씨의 <진보와 보수는 수레의 양 바퀴와 같은 것>을 소개한다. 이경현 대표는 고인이 국회의원과 충남도지사 재직 시 비서실장을 지냈다.
---------------------
나의 영원한 친구! 그 이름 이완구
친구 김태일
내가 처음 이완구를 만난 것은 1966년 고등학교 1학년 때다. 이완구는 우리 반 반장이었다. 2021년 10월 14일 친구가 저세상으로 떠나기 전까지 헤어져 본 적이 없는 한결같은 친구였다. 안 보이면 보고 싶은 친구, 서로 만만한 친구, 서로 가슴 깊이 이해해 주는 친구, 어려울 때 의논하는 친구, 그런 친구 이완구를 생각하면 나는 지금 너무 힘이 든다. 다발성골수종이란 병, 딛고 일어설 줄 알았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지난날을 생각하며 퍼즐을 맞춰봐도 정말로 열심히 반듯하게 살아온 친구 이완구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우리 반 반장인 이완구는 학생 생활도 남다른 생각과 행동으로 학생회장을 직접선거를 통해 당선되어 모범적으로, 강한 지도력으로 학생회를 이끌어 왔다. 나는 연식정구 선수 생활을 했다. 내가 한일고교 교환경기대회, 한국 대표로 선발되어 일본에 시합하러 (68년도) 가기 전 ‘일본학생은 한국 학생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지, 일본은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사는지, 시민의식과 사회일반 구조도 잘 살피고 오라’는 부탁을했다. 한국도 일본처럼 발전하고 국민이 잘사는 나라가 되어야 하지 않겠냐며 사고력이 일반 학생들의 생각을 뛰어넘어서 미래를 위한 꿈과 계획을 생각하는 친구로 항상 의논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토론하는 친구가 되었다.
고교 시절 이완구는 등산을 하지 못하고 체육 시간에 축구 등 심한 운동을 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평발이라며 본인 스스로 주의를 하곤 했다. 국무총리 청문회에서 왜 방위병으로의 근무했는지 병역 관련 무슨 문제가 있는지 질타와 함께 오해를 받을 때 신체적 결함을 알고 있는 나는 참으로 안타까웠다.
태일아 이쁘지?
결혼만큼은 순수한 결혼 즉 정략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경제기획원 사무관 시절 결혼과 관련한 다양한 소개가 있었다. 사회적 저명인사 추천 등이 있었으나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병현 엄마에게 첫눈에 반해 결혼하게 되었다. 병현 엄마를 처음 만나고 와서 “태일아 이쁘지?”가 내게 한 첫마디였다. 성격도 급하고 완고하고 강한 성격이었으나 해외 생활을 통해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양정고등학교를 빛낸 사람으로 연말에 총동창회 송년회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본인은 학교와 후배를 위해서 크게 한 일이 없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총동창회에서는 상장과 상패 인쇄물도 모두 되었다며 난감함을 표시했고 결국 병현 엄마를 설득 대리 참석하기로 하였으나 차도 내주지 않아서 나는 내 차로 수상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골프를 너무 좋아했던 이완구
골프만큼은 바쁜 가운데도 실력으로 양보하지 않는 승부사 기질이 탁월했다. 특히 집중력 강하고, 이론과 노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운동 때 드라이버가 잘 맞지 않으면 운동 후 집에 가는 길에 연습장에 들러 드라이버만 한 시간 동안 치고 가는가 하면 운동 후 스코어 카드는 어김없이 본인이 가져갔다. 그것을 뭐하러 가져가냐고 물어보면 집에 가서 그날 운동을 복기한다나 그렇게 지독한 노력파였다.
골프장 가는 원칙은 나의 차를 타고 골프장 이용료는 본인이 부담해야지 접대를 받는 골프는 철저히 배제하는 원칙을 고수했다. 골프 하고 난 후 식사비용 또한 본인이 제공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불편해하는 그런 친구가 이완구였다.
남서울 땅
외할아버지가 사위 도와준 것 없다고 증여해준 땅, 골프 치고 오갈 때마다 가끔 이 골치 아픈 땅 우리는 이런데 살 여건이 되지 않아서 팔려고 해도 살 사람도 없고 비용과 세금만 발생해서 마음고생만 한다며 걱정하던 중 작은아들에게 증여하여 아들에게 증여세 5억만 부담시켰다고, 아들은 아들대로 투덜댄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국무총리 청문회에서는 부동산 투기를 목적으로 샀다는 오해를 받을 때 정치의 비정함에 다시 한번 아쉬움이 컸다고 친구인 내게 하소연하던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성완종 사건
“태일아, 너한테는 거짓말 못 하는 거 알지? 솔직히 말하는데 받지 않았어, 정치자금 잠깐 실수해서 받았다고 너한테 말할 수 있는데 받지 않았다”고 하며 고백했다? “참으로 정치가 힘들구나”라고 말했다.
------------------------------
운명이었다
비서실장 이경현
그분을 만난 것은 내 인생의 운명이었다.
그분과 나와의 첫 만남은 1981년인지 1982년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당시를 기억하는 친구들 말로는 그분이 서른한 살 애기 서장으로 홍성에 부임해 왔을 때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홍성고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 학교에서 특강을 했다고 한다. 그때가 아마도 첫만남이었을테지만 솔직히 그 때의 기억은 없다.
경찰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시간이 흘렀다. 80년대 초반, 시골촌놈은 대학에 들어갔다.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다. 5.18 광주 민주화 항쟁, 전두환 대통령독재등 사회 정의를 부르짖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값비싼 수업료를 내고 입학했지만 수업다운 수업은 거의 듣지 못했다. 매일같이 최루탄 연기 속에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학생운동권이 되어가고 있었다. 경찰에 대한 이미지가 좋을 리 없었다.
이완구가 대체 누구야?
졸업 후 홍성YMCA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1년쯤 지나자 홍성에서 전국 최초로 지역신문이 창간되었다. 당시 홍성에서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홍성신문에서 활동하라는 권유가 들어왔다. 본격적인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1990년 초인 것으로 기억된다.
기자로서 홍성에서 활동하기 시작하고 1992년인지 93년 즈음, 홍성사회 다방에서 한 가지 화제거리가 들려왔다. 이완구라는 사람이 전국최연소 경무관으로 승진했다는 이야기였다. ‘이완구가 대체 누구야? 경무관이 뭐 그리 대단한 건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난 대수롭지 않게 생
각했다. 경찰 계급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얼마 후 우연히 사무실 책상에 나뒹구는 《주간조선》 잡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것저것 뒤적이던 중에 다방에서 들은 이완구라는 이름 석 자가 눈에 들어왔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서른아홉에 경무관에 승진한 대단한 인물이라는 내용이었다. ‘아, 이 사람 홍성 출신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던 중 누군가 “이기자. 그 사람 한번 인터뷰 한 번 따봐야하지 않을까?”하고 물어왔다. “글쎄... 이런 대단한 사람이 인터뷰에 응할까?”라고 대답하려던 찰나, ‘그래 밑져야 본전이지 한번 연락이나 해 보자’하고 114에 연락해 난생처음 경찰청 전화번호를 찾았다.
처음 수화기를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완구 경무관하고 통화할 수 있냐고 하니 별다른 물음없이 순순히 연결해주었다. 연결되기까지 10초 남짓한 시간, 나는 엄청나게 떨리기 시작했다. 전화는 연결되었고 나는 간단한 소개 후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러더니 “나는 인터뷰할 만큼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네”라면서 정중히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나와 그분의 첫 대화였다.
오기가 발동했다. 다음 날 다시 전화를 걸어 고향 어르신들이 많이 궁금해하니 반드시 인터뷰해야 한다고 강짜를 부렸다. 마지못해 그럼 언제 올라올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약간의 희열을 느끼며 내일이라도 당장 올라가겠다고 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서울역 시계탑 앞으로 오후 3시까지 올라오라는 것이 그가 나에게 내린 첫 지시였다.
2020년 2월 수덕사에서 처음으로 함께 찍은 사진
첫 만남에 통일을 준비하란다.
다음날 오후 3시, 시계탑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오더니 혹시 누구 아니시냐고 물어왔다. 맞다고 하자 이완구 치안본부장 보좌관께서(지금은 경찰청장이지만 당시는 치안본부장이었다) 모셔오라고 했다면서 자동차에 타라고 했다. 자동차를 타고 난생처음 경찰청을 들어가는데 정문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사람들이 자동차를 보자마자 일제히 거수경례를 하더라. ‘아! 높긴 높은 사람인가 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수갑 차고 경찰서를 들어갔던 생각이나 만감이 교차했다.
한 시간가량의 인터뷰가 끝이 나고 20분 정도 개인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이날 그분이 내게 한 말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어쩌면 이때의 그분과의 대화로 인해 그분을 평생 존경하며 살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당시 그분이 20여 분간 진지하게 말씀하신 요지는 이렇다. “지금이야 남북이 분단돼 있지만 언젠가 하루빨리 통일돼야 하지 않겠는가, 통일을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도 젊지만, 당신도 젊으니 통일을 위해 차근차근 무언가를 준비하며 살아가자.”라는 것이었다.
경찰청을 걸어 나오면서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 같은 기분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경찰 하면 늘 적대적 관계로 생각하며 살아온 내가 그날 따라 얼굴이 화끈거리며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돌멩이를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며 민주화 운동을 한다고 했는데 사실 그때까지 통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미래의 통일을 걱정하며 준비하라는 그분의 한 말씀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다만 내 아들 이름을 통일이라 지은 그것 외에는 실제로 통일을 걱정하며 준비한 것이 별로 없다는 게 늘 죄송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우리 같이 한번 일해 볼 의향은 없는가?
이후 그분은 충북지방경찰청장과 경찰청 기획관리관, 충남경찰청장을 지냈고, 출세한 출향인으로 인터뷰를 몇 번 더 가질 기회가 있었다. 1995년 3월 초, 그분은 충남경찰청장직을 끝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위해 공직에서 물러난다. 홍성에 사무실을 마련한 그는 열흘쯤 뒤에 나를 만나고 싶다며 연락을 취했다. ‘왜 나를 만나자고 할까?’ 사무실을 찾은 나에게 그는 깜짝 놀랄 제안을 한다.
“우리 같이 한번 일해볼 의향은 없는가? 나는 같이했으면 좋겠는데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이에 난 이렇게 되물었다.
“저는 학생운동권 출신인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출신이 뭐 그리 중요한가? 뜻이 맞으면 같이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일주일 후에 대답하겠다는 약속을 하며 그분의 사무실을 나왔다.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분과 몇 번 만나면서 경찰에 대한 거부감이 약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가슴 속 깊이 자리 잡은 경찰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학생운동권 출신과 지방경찰청장 출신이 한 배를 타고 살아간다고 생각하자 운동권 선후배들의 비난 목소리가 가장 두려웠다. 홍성신문 식구들은 나를 두고 또 뭐라 할까 심히 염려되었다.
복잡한 근심과 걱정이 뒤엉켜 고민하길 일주일,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뚜렷한 결론이 나질 않았다. 그리고 최후통첩의 시간이 왔다. ‘그래, 한번 해 보자.’라는 결심이 서고 그분에게 먼저 뜻을 전달했다.
그리고 홍성신문 식구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알렸다. 모두 나보고 미친 것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홍성신문에 다시 돌아왔다
이렇게 시작된 이완구 전 총리와의 인연은 국회의원 비서관과 보좌관을 거쳐 도지사 비서실장, 국무총리 정책보좌관까지 이어졌다. 그분과 함께 하는 시간은 솔직히 고통스러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생각해보면 그 시간은 모두 나를 연단하는 시간이었다.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27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난 홍성신문의 대표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먼 길을 돌고 돌았다. 하지만 그 모든 여정이 있었기에 나는 성장할 수 있었고, 고향 홍성신문에 대표이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대표이사로 취임이 결정되었을 때, 이완구 전 총리는 내게 새 양복 한벌해 입으라고 용돈을 보내주었다. 취임 날에는 귀한 난까지 보내 주었다. 그 난은 내 사무실 원탁 탁자 위에 지금도 잘살고 있다.
-------------------------
진보와 보수는 수레의 양 바퀴와 같은 것
보좌관 유병로
사람은 누구나 존경하거나 믿고 따르고 싶은 신(神)이나 스승이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필자인 나에게는 이완구 국무총리(이하: 총리님)가 그런 분입니다. 총리님을 처음 뵌 것은 95년 7월쯤으로 기억됩니다.
첫 인상부터 풍기는 강한 카리스마에 군더더기 없이 핵심을 찌르는 언변은 나뿐만 아니고, 그 분을 만나본 사람들은 “이완구! 똑소리 나”라는 말로 그분을 함축해 표현했고, 이후 총리님의 별명이 “똑소리 이완구”가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총리님께서 너무 이른 연세에 돌아가신 후 사람들은 “참 아까운 분인데,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라는 말로 안타깝고 슬픈 감정을 표현하는 걸 듣곤 합니다.
가까이에서 수년간 총리님을 보좌(補佐)했던 나는 그분을 통해 수많은 지혜와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요즘처럼 비상식이 상식이 되고, 편을 갈라 죽기 살기로 갈등만 증폭시키는 정치권을 보며, 선출직 공직자가 가져야 할 자세(Attitude)와 철학(哲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 볼까합니다.
보수와 진보가 매일처럼 싸움을 벌이는 요즘에 총리님께서는 ‘진보도 시간이 흐르면 보수가 된다. 진보와 보수는 수레의 양 바퀴와 같은 것이지 무엇이 선(善)이고, 무엇은 악(惡)이라는 프레임은 옳은 것이 아니다’라시며, 제1의 길 사회민주주의를 거쳐 제2의 길 신자유주의도 가고 제3의 길(The third way)인 중도실용주의가 대세로 자리 잡고 있으니, 자신은 특정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로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던 게 기억납니다.
약속을 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
두 번째는 약속입니다. 총리님께서는 "약속을 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라는 관념이 지나칠 정도로 강하셨던 분이라 다들 알고 있을 겁니다. 남들은 못해서 안달인 도지사직을 세종시 원안 관철을 위해 헌신짝처럼 던지는 것을 보며, 당시 저는 홍수로 물이 차오르고 있음에도 불구, 연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리 밑에서 끝까지 연인을 기다리다 익사한 노나라 미생을 이야기하며 총리님의 결심을 철회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도민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그분의 확고한 의지를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세 번째 포용력입니다. 선거는 총과 칼만 안 들었지 피를 말리는 전쟁입니다. 전쟁에는 늘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선거가 끝나면 앙금도 남게 마련인데 총리님은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반대하고 찍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다 이유가 있고, 내 노력이 부족했으니 더 열심히 하면 그 분들도 마음이 바뀔 것 아니냐” 하시며 더욱 일에 매진하는 것을 보며, 칭기즈칸이 자신의 이었던 제베와 수부타이 등 적 장수들을 포용하여 세계를 정복한 생각이 났던 기억이 납니다.
마지막으로 청렴함입니다. 한 가지 사례를 들면 ‘부관부 어업면허’라는 것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조건부 면허라는 것이지요. 어업면허를 내주긴 하는데 정부나 관련 공사(公社)에서 사업을 진행하면 어업권·소유권 및 보상을 청구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를 두고 어민들과 농업진흥공사가 지리한 법정공방을 벌였고, 결국 지역 국회의원이던 총리님을 찾아오게 된 겁니다. 민원을 접수한 총리님은(당시 국회의원) 며칠의 시간을 달라고 말씀하시곤 중앙부처를 뛰어다니며 어민들의 민원을 해결해 줄 수 있었습니다. 어민들께서 고마움의 표현으로 십시일반 후원금을 거두어 갖고 오셨지만 “고마운 마음만 받겠다” 하시며 돌려보낸 적이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 시키고 인간이 문명사회의 수혜를 받도록 한 수많은 선각자,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저는 감히 말하자면 충청도를 넘어 대한민국 발전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던 분이 이완구 총리님이라 생각합니다. 생전에 계실 때 전화라도 한 번 더 드리고 찾아뵙지 못한 것이 많이 후회됩니다.
입력 : 2022.10.14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