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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건중 [尹建重]
1897∼1987. 독립운동가·행정가.
전라북도 완주 출신.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소암(昭庵). 아버지는 원병(元炳)이며, 어머니는 권일(權一)이다.
1916년 영명중학교(永明中學敎)를 졸업한 뒤,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의 독립선언서 선포식에 참석하고는 전주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다짐하였다.
〈독립선언문〉 등을 자전거 뼈대 속에 숨겨 전주로 탁송하여 김인전(金仁全) 목사, 김가전(金嘉全), 이수연(李守淵), 최종삼(崔宗三) 등과 모의, 3월 13일 전주장 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에 그는 사건 주모자로 지목되어 피신하던 중 조선총독부 참의원 전라북도대표 김윤정(金潤晶)을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쳐 수배당하였다.
상해로 망명, 이승만(李承晩), 임병직(林炳稷), 김갑수(金甲洙), 정환범(鄭桓範) 등과 사귀는 한편, 1920년 3월 25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참사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22년 이승만의 권유로 독일유학 튀빙겐대학(T0x8057bingen大學)에 입학하였다가 뮌헨대학(M0x8057nchen大學) 정경과로 전학 1927년 5월 졸업하였다.
살인미수죄의 공소시효가 끝난 1929년 겨울에 귀국,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에 봉상산업조합(鳳翔産業組合)을 설립하여 지방특산품인
생강의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거래체제를 통한 소비자가격을 보장해줌으로서 자립경제달성과 민족자본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광복 후 애민애족정신으로 자진해 자작농을 소작인에게 헐값으로 분배해주는 한편, 군산에 있는 농기구 생산공장인 조선이기공업사(朝鮮利器工業社)를 인수, 농경의 근대화에 앞장섰다.
1954년 5월 제9대 농림부장관으로 발탁되었으나 국회에서 농민의 쌀생산비를 보장하기 위하여 쌀값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해
흉년으로 폭등하는 쌀값대책에 큰마찰을 빚은 데다 농림부직원의 독직사건이 겹쳐 재임 56일의 단명으로 사임하고 말았다.
농민에 대한 앞을 내다본 농산물값 안정대책에 대한 굽힘없는 소신이 좌절된 결과였다.
그는 가정과 지역사회에서도 자립정신과 근검절약의 풍토를 다지는데 몸소 실천하였고 전북대학교에서 독일어강사를 하면서
완주군 삼례읍의 삼례여자고등학교(參禮女子高等學校)와 읍사무소 건립에 필요한 토지를 흔쾌히 기부하기도 하였다.
1977년 12월 독립운동유공자로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1990년 12월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하였다.
≪참고문헌≫ 조선민족운동연감(동문사서점, 1946)
≪참고문헌≫ 민족독립투쟁자료-해외편-(여론사, 1956)
≪참고문헌≫ 한국독립운동사자료 7(국사편찬위원회,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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