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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13일 특강교재 금요 반)> - 3 -
편집자는 프로를 원한다
―편집자로서 나는 이런 수필을 원한다―
이정림 (≪에세이21≫ 발행인 겸 편집인)
아무리 으리으리하게 지은 백화점이라도 상품의 질이 좋지 않으면 손님은 찾지 않는다. 또 아무리 역사가 깊은 상점이라 해도 상품의 질이 전만 못하면 손님의 발걸음은 끊어지게 마련이다.
잡지는 백화점이요 상품은 글의 수준이다. 잡지가 잘 되느냐 못되느냐 하는 것은 발행인이 문단 정치를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잡지에 좋은 글이 얼마나 많이 실려 있느냐에 좌우되는 것이다.
필자였을 때는 내 글만 잘 쓰면 되었다. 그러나 잡지의 발행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글 잘 쓰는 사람이 어디 없나 찾아보는 데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물론 필자를 선정할 때 일차적으로 꼽는 이는 아는 작가이다. 안다는 것은 개인적인 친밀도가 아니라 그 작가의 작품 수준을 파악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글에서 더 이상 치열성을 찾지 못할 때는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눈 품을 판다.
새로운 작가를 찾을 때 중견이냐 신인이냐 하는 것은 문제삼지 않는다. 또 등용문이 어디인가 하는 것은 불문에 붙인다. 어디까지나 글이 우선이지만, 작가가 문단 정치에 능한 사람이거나 인격의 바탕이 겸손하지 않으면 필자로 영입하지 않는다.
수필 쓰는 사람은 순수해야 한다. 순수성은 작가의 혼이요 정신이기 때문이다. 허구가 아닌 수필은 작가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 수필과 작가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편집자로서 나는 이런 수필을 원한다.
첫째, 문장이 완벽한 글
문단 경력이 높고 수필집까지 서너 권 냈으면서도 의외로 문장력이 약한 작가들이 많다. 그러면서도 지금껏 작품 활동을 해 왔다는 것은 그들의 글을 누군가 고쳐 준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허명(虛名)인 줄도 모르고 청탁을 했을 경우 그 비문(非文)에 당혹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다. 문장력은 글쓰기의 기본이자 기초다. 작가로서 문장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결함이다. 내용 이전에 문장이다. 문단의 경력이 이 문제에 고려 사항이 될 수는 없다.
둘째, 주제가 있는 글
소설은 입담으로 끌어가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수필은 그 이야기 속에 의미가 들어 있어야 한다. 수필에는 소설 같은 이야기가 들어 있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의미만은 반드시 들어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아무리 가벼운 소재라 해도 그 속에 당의정처럼 주제를 심어 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작가들이 글 속에 주제를 담지 못하는 것은 처음부터 주제 의식을 지니지 않고 글을 쓰기 때문이다.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노변정담이 아니라 삶의 소재에서 의미를 생각해 보는 철학적인 글이다.
셋째, 함축과 절제가 잘된 글
수필은 짧은 글이다. 길이는 짧지만 문장 속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소설은 싱크대 앞에서 바퀴벌레를 잡는 이야기를 40장 끌어갈 수 있어도, 수필은 주제와 상관없는 이야기는 절제하고 함축시켜야 한다. 나무를 그리려 했다면, 옆으로 길게 뻗어 나간 가지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그 가지 때문에 작가는 무엇을 그리려 했는지 잊어버리게 되고, 독자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하는 데 혼동을 일으키게 된다. 설명적이고 평범한 문장은 매력이 없다. 수필 문장의 묘미 또한 함축과 절제에 있기 때문이다.
넷째, 편집 의도에 맞는 글
작가가 임의로 소재를 잡아 쓰는 글에는 부담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편집자가 특별히 기획한 원고를 청탁 받게 되는 경우는 대개 당혹스러워한다. 게다가 편집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니 엉뚱한 글을 쓸 수밖에 없다. 봄 이야기를 써 달라고 했는데 겨울 이야기를 쓴다든지, 여행 이야기를 쓰라 했는데 딸 이야기나 늘어놓고 있으면 편집자는 난감해진다. 작가는 어느 주제의 글을 청탁받든지 그 편집 의도에 꼭 맞는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공동제를 줄 때 작가의 우열이 확연히 드러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섯째, 청탁 조건에 충실한 글
편집자는 글을 몇 페이지에 앉힐 것인가 계획을 세워 놓고 청탁을 한다. 그래서 200자 원고지로 몇 장을 써 달라고 못을 박아 청탁서를 보낸다. 그런데 대부분의 작가들은 편집자의 이런 주문에 매우 무신경하다. 그래서 10장을 쓰라 했는데 15장을 넘기거나, 13장을 쓰라 했는데 8장 정도로 써서 보낸다. 이렇게 되면 줄이거나 더 보태야 한다. 줄일 데가 있는데도 본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짧은 글을 늘이자니 끌어나갈 힘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편집자는 주문에 정확히 맞춰 글을 쓰는 작가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필자가 자신이 애써 쓴 글을 발표하고 싶은 지면을 고르듯이, 편집자는 좋은 글을 쓰는 작가를 고르게 된다. 잡지가 많은 것처럼 필자도 많다. 그러나 그 많은 필자들 중에서 편집자가 원하는 이는 프로 작가이다. 프로 작가란 자기 이름 석 자에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다. 또한 어떠한 주문에도 정확히 응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 없는 글은 내지 말아야 한다. 자신 없이 낸 글을 누군가 처음 보고 실망하는 독자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니까. (2009)
목욕탕, 그 인생의 탐구장 김 학
나는 나를 만나러 목욕탕을 자주 찾는다. 시도 때도 없이 대중탕을 드나든다. 새벽이거나 출근 전이 다반사고, 어떨 땐 일과시간을 쪼개어 들르기도 한다. 목욕탕에 가면 나는 나를 만난다. 과거의 나를 만나기도 하고, 또 미래의 나를 만나기도 한다. 언제나 어김없이 만나는 것은 현재의 나이고.
목욕탕에 가면 먼저 탈의실에서 옷을 벗는다. 남을 의식할 필요도 없이 활활 벗는다. 부끄러움도 없다. 유심히 쳐다보는 이도 없다. 벌거벗은 맨몸의 자유로움이 나를 감싸고 돈다. 쏴하고 쏟아지는 샤워기의 강렬한 물줄기에 몸을 맡긴다. 물줄기가 몸의 구석구석을 핥는다. 어느 여인의 애무(愛撫)가 이보다 더 감칠맛 나랴. 머리를 감고, 면도를 한다. 거울 속에서 면도를 하고 있는 나를 만난다. 듬성듬성 섞여 있는 흰 머리카락이며, 모발이 빠져 헤성헤성 해진 정수리가 눈에 잡힌다. 이마엔 주름살이 내천자로 석삼자로 그어져 있다. 변해버린 나를 확인한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언제나의 코스대로 온탕에서 냉탕으로, 냉탕에서 열탕으로, 열탕에서 냉탕으로 옮겨 다닌다. 물 속에 잠겨 있을 때의 그 기분은 참으로 삽상하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노닐던 태아시절의 즐거움 그대로다. 냉탕에서 식힌 몸을 사우나실에 내맡긴다. 모래시계가 제 임무를 다하는 순간까지 참고 견디노라면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노곤하다. 다시 샤워를 한다. 그때의 그 기분을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좋을까. 냉탕에서는 어린이들이 물장구를 치며 깔깔거린다. 그들의 모습에서 옛날의 나를 만난다. 아득한 옛날이 불쑥 현재로 다가선다. 6·25전쟁과 잇단 흉년으로 굶기를 피자 먹듯 하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초근목피 목숨을 부지하던 그 시절의 아픔을 저들이 어찌 알 수 있으랴.
다시 온탕에 들어가 몸을 담근다. 따뜻한 물이 목까지 감싸준다. 눈을 지그시 감고 사색의 나래를 편다. 옛날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수업료를 제때에 내지 못하여 교실에서 쫓겨났던 중학시절의 일이며, 명절 무렵이 되면 쇠죽솥에 물을 데워 목욕을 하던 일들이 줄지어 떠오른다.
슬며시 눈을 떠본다. 노, 장, 청 3대가 서로 등의 때를 밀고있는 모습이 눈에 잡힌다.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다. 70대 할아버지의 등은 50대의 아들이, 또 그 아들의 등은 20대의 손자가 밀고 있다. 자주 그래 왔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표정들이다. 이들 3대의 얼굴이 닮았다. 세월의 흔적만 다를 뿐 윤곽이 너무도 비슷하다.
머리카락, 얼굴, 몸매 심지어는 고추까지도 비교해 본다. 20대의 손자가 앞으로 30년후 50년 후에는 저런 모습으로 변화되겠거니 미루어 짐작해 보는 일도 흥미거리다. 반대로 저 할아버지의 모습이 20년 전에는 저 아들 같았을 테고, 50년 전에는 저 손자의 모습이었으리려니 싶어 세월의 무상을 실감할 수 있었다.
카메라를 준비할 수 없어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이들 3대의 목욕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더라면 훌륭한 예술작품이 되려니 싶었다. 아니 광고사진 작품으로 써도 걸작이 분명했다. 비누나 타올 광고로도 그만이겠고, 경로효친(敬老孝親)의 공익광고로 사용해도 히트작이려니 싶었다.
목욕탕에 가면 노인들을 자주 만난다. 벌거벗은 노인의 모습에서 나는 미래의 나를 떠올린다. 10년 후, 20년 후의 나도 저렇게 변하려니 여긴다. 어쩐지 허허롭고 쓸쓸한 기분이다. 당장 “시간이여, 게 섯거라.” 명령을 내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욕이요, 헛수고일 뿐인 것을….
목욕탕을 자주 찾는 일은 좋은 일이다. 황태자에게 단 한번 목욕을 시키려고 50만 달러를 들여 황금사(黃金寺)를 세웠다는 태국의 쥬라름 국왕의 사치까지는 바랄 일이 아니다. 동네 대중탕이 제격이다. 날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 40분 간 뜨거운 물 속에서 목욕을 하며 책을 읽었다는 간디를 흉내낼 일도 아니다. 대중탕에서 이웃을 만나고, 그 이웃들을 통하여 나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읽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요, 보람있는 일이다.
나는 또 목욕탕에서 내 젊음을 앗아가 버린 세월을 만난다. 허겁지겁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세월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모성애처럼, 세월도 나를 그렇게 감싸주려니 여겼던 것이다.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세월은 냉정했다. 사관학교 생도들처럼 절도가 있는 게 세월이었다. 세월은 그 누구도 편애하지 않는다. 햇볕보다도 더 공평하고, 저승사자보다도 더 냉혹한 것이 세월이다. 세월은 떡값도 받지 않는다. 나는 그 세월을 혼자서 짝사랑하며 살아왔다. 세월은 앞으로도 나에게 한눈을 팔지 않을 것이다. 석녀(石女)처럼 그렇게 제 할 일을 할 것이다. 세월을 향한 나의 짝사랑은 영원히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그것이 설사 잃어버린 사랑이라 해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세월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 삶을 기름지고 풍요롭게 가꾸려는 내 의지의 표출이 아니던가. (1995)
동짓날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신팔복
아내가 사온 팥죽에서 김이 모락모락 솟는다. 팥죽을 한 수저 입에 넣었다. 따뜻함과 부드러움이 가슴으로 파고든다. 동지에 먹는 팥죽은 여느 때 먹는 것보다 훨씬 더 입맛을 돋운다. 새알심을 씹고 싱건지국물도 떠먹었다. 추위가 어느덧 저만치 물러서는 듯싶다.
국민학교 6학년 때 동짓날이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선생님과 함께 밀린 사친회비(’53∼’62)를 받으러 가정방문을 갔었다. 진안군 진안읍 군상리 생지골을 찾아갔다. 아주머니들은 팥죽을 쑤느라 한창이었다. 산언덕으로 난 길을 올라가 친구네 집 좁은 마당에 도착했을 때 친구 어머니가 금방 끓인 팥죽을 벽과 부엌문에 뿌리고 있었다. 벽에 달라붙은 팥죽에서 김이 솟았다. 우리는 그 모습이 하도 우스워 마구 웃어댔다. 왜 그렇게 뿌리는 줄도 몰랐다. 갑자기 닥친 일에 당황한 친구 어머니는 팥죽 바가지를 냉큼 놓고 나와 선생님과 인사를 했다. 선생님이 말씀을 끝내고 나오실 때 우리는 우르르 따라 내려왔다. 그 뒤로 몇 집을 더 다닌 뒤 가정방문을 마쳤다.
눈발이 슬슬 날리는 추운 날씨였다. 먼 길을 걸어오면서 친구들과 눈으로 장난을 치며 집으로 왔다. 얼른 가서 팥죽을 먹고 싶었다. 당산나무에는 벌써 금줄이 처졌고 일찍 팥죽을 끓인 아주머니들이 다녀간 흔적이 있었다. 정갈하게 짚을 깔고 그 위에 팥죽을 뿌려 놓았다. 집에 도착하니 장독과 마당, 조왕(竈王)에도 팥죽이 놓여 있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마당에서 사방으로 절을 하며 두 손을 모아 빌고 계셨다. 지난날의 무사함과 내년의 가족건강을 비는 듯했다.
동지팥죽을 쑤면 우선 성주, 조왕, 삼신에게 올려 동지고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다. 방과 마루, 마당 같은 여러 곳에도 한 그릇씩 떠다놓고 대문이나 벽에다 팥죽을 뿌리고 난 다음에 식으면 먹었다. 팥죽을 뿌리는 것은 붉은 색을 가진 팥이 액을 막고 잡귀를 물리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잡귀를 몰아낸다는 축귀(逐鬼)의 뜻이다.
동지는 일 년 중에 해가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로 우리 조상들은 음(陰)의 기운이 성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성한 음의 기운을 억제하기 위해 양(陽)을 상징하는 붉은 팥죽을 쑤어 먹게 된 것이다. 음식을 보약으로 알았던 조상들의 건강에 대한 지혜다. 팥죽엔 찹쌀가루로 만든 단자를 넣는데 새알크기로 만든다하여 새알심이라 부른다. 새알심은 나이 수대로 먹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작은설로 불리어지기도 한 동지를 쇠면 나이도 한 살 더 먹는다. 몇 십 년 전만해도 팥죽은 집집마다 쑤어서 이웃과 나눠먹기도 했다. 추운 겨울철 시골의 훈훈한 정이었다. 동짓날 날씨가 따뜻하면 다음 해에 질병이 많고, 눈이 오고 추우면 풍년이 든다고도 했었다.
지금은 팥죽을 쑤는 집이 드물다. 편리함의 추구와 서구화 되어 가는 생활상으로 우리의 전통 세시풍속이 사라지고 있어 아쉽다. 동지가 지나면 막바지 추위가 온다. 동지팥죽을 먹고 몸을 보양(保養)하며 긴 추위를 이겨낸 선인들의 지혜를 배워야겠다. (2011. 12. 22.)
한량무(閑良舞)와 탈춤
전주안골노인복지관·꽃밭정이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김상권
참으로 오랜만에 춤 공연을 관람했다. 아니 처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KBS텔레비전에서 토요일마다 방송하는 ‘우리 국악 한마당’프로그램에서 춤추는 모습은 보았지만 극장에서 관람한 것은 처음이다.
저녁 7시부터 공연이 시작하기 때문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 시내버스를 타고 남부시장에서 내려 어둡고 한적한 전주천변을 끼고 전주전통문화센터까지 걸었다. 가랑비가 내린 끝이라 그런지 날씨가 어설프고 쌀쌀했다.
날씨 탓인지 객석은 한산했다. 왠지 불안했다. 자리가 꽉 차야 신바람이 날 텐데, 그러나 괜한 걱정이었다. 시작시간이 가까워지자 객석은 훈훈해졌다. 주위를 살펴보니 젊은 여성들과 여학생들 그리고 출연진들의 가족들인 듯싶은 부인들과 어린이로 객석이 채워졌다.
공연이 시작됐다. 군무(群舞)로서 꽹과리 춤인 진쇠춤, 북의 대합주인 삼고무(三鼓舞), 장구춤, 소고춤이 공연됐다. 그리고 독무(獨舞)로서 호남살풀이, 한량무(閑良舞), 호남산조, 예기무(藝妓舞)가 1시간 반 동안 펼쳐졌다. 이들 춤 가운데 내 시선을 끈 것은 한량무였다.
갓을 쓰고 소매가 넓고 긴 도포차림의 춤꾼이 무대에 섰다. 장단에 맞춰 오른발을 크게 내딛고 오른쪽으로 돌고, 왼발을 크게 내딛고 왼쪽으로 돌고서 살금살금 걷다가 뒤로 돌았다. 오른손에 든 부채를 위로 올려 폈다 접었다 하면서 위아래로 흔들고는 발을 앞으로 크게 내디디더니 다시 부채를 펴고 옆으로 돌고 양손을 들어 그 자리에서 빙 돌았다. 이어 느린 장단에 맞춰 오른쪽 발과 왼쪽 발을 번갈아가며 천천히 내딛다가 잠시 멈춘 뒤, 살금살금 걸으며 뒤로 앞으로 펄쩍 뛰면서 돌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 폈다 했다. 양팔을 옆으로 들고 어깨를 비스듬히 하면서 어깨춤도 추었다. 멋진 춤사위였다. 발 디딤이 크고 손끝과 발놀림과 어깨 놀림이 아름다웠다. 부채와 어깨놀림 그리고 팔놀림과 발놀림이 어우러진 멋과 흥이 돋보이는 활달한 춤이었다. 한량무는 풍류를 즐기는 한량의 멋스런 모습을 묘사한 춤으로 절제된 기교가 그 특징이며 호탕한 남성적 기개가 돋보이는 남성 춤의 백미라고 한다.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으쓱해졌다. 배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사실 나는 3년 전 탈춤을 배운 적이 있다. 전주안골노인복지관에서 실버플래너교육을 받을 때였다. ‘행복탈춤이 노인건강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주 3회 10주 동안 35명이 탈춤을 배웠다. 우리가 실험대상이 된 셈이다.
행복탈춤은 봉산탈춤을 뿌리로 하여 전북대학교 예술대학 무용학과 이경호 교수가 고안한 춤이다. 이를테면 자진모리장단에 맞춰 고개잡이, 다리 들기, 얼쑤, 박수치기 등 다섯 가지 동작과 굿거리장단으로 허리감기, 허리 돌리기, 얼쑤, 다리 들고 한삼 올리기 등 여섯 가지 동작 그리고 휘모리장단에 신나게 흔들며 뛰기, 엇갈려 뿌리기, 돌아 뛰기 등 다섯 가지 동작이 어우러진 춤이다. 행복탈춤을 배우면서 우리 춤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그 보다도 흥겹고 운동량도 많아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사)춤 • 전라북도 이경호무용단의 2011 정기공연에 초대를 받은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가령 대인관계에서는 대화로, 글을 쓰는 사람은 글로, 화가는 그림으로, 음악가는 악기나 목소리로 자기의 감정을 표현한다. 대사와 몸짓으로 하는 연극, 한 사람의 배우가 모든 배역을 혼자 맡아하는 모노드라마, 대사 없이 몸짓과 얼굴의 표정만으로 내용을 전달하는 무언극(無言劇)도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리고 무용가는 춤사위로 자기감정을 나타낸다. 춤사위가 그들의 언어인 셈이다. 이처럼 모든 장르가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는 방법만 다를 뿐, 관객에게 전달하고자하는 메시지는 같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가운데서 춤이 어느 장르보다 자기의 감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안성맞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춤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즐기게 하기 위해서는 좁은 공간이 아닌 넓은 마당에서 여럿이 어울려 함께 추는 한바탕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요즘 이른 아침이나 해질녘에 학교운동장과 천변 빈터에서 생활체조나 에어로빅을 하는 것을 종종 본다. 우리 춤도 이렇게 할 수는 없을까? 여러 춤 가운데서 탈춤은 가능하리라 본다. 그래서 우리 국민을 모두 춤꾼으로 만들자는 얘기다.
한국 춤은 우리 민족의 몸짓이며 감정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감정을 익살과 해학, 풍자와 저항을 춤으로 표현했으며 우리 민족의 생활을 그대로 춤으로 나타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노래와 춤을 즐겼다. 즐거운 얼이 있을 땐 으레 노래를 부르고 어개를 들썩거리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어찌 보면 우리 민족은 모두가 한량이지 싶다. 아마 우리 국민은 춤꾼의 잠재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삶이 고달프지만 다시 일어나 신명나게 춤을 추자.
"얼씨구, 지화자 좋다." 하고……. (2011.11.23.)
꽃 파는 남자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이의
나뭇잎이 서그럭거리기 시작하면 겨울이 바짝 다가온다. 그러면 난 베란다 화분의 겨울 날 채비로 마음이 부산해진다. 어떻게 하면 새 식구까지 무사히 새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추위 적응능력은 어느 정도인지, 물은 얼마나 좋아하는지 개성을 몰라 실패할 때마다 속이 아리다. 작은 분 금전수의 새 가지가 늘어나 비좁아 보여 널찍하게 살라고 분 쪼개기를 했다. 그런데 뭉쳐 있기를 좋아하는 특성을 모르고 억지로 뜯어 펼쳐 심었으니 뿌리내리기를 그토록 힘들어해 애가 탔다. 그리고 물도 가끔 주어야한다는데 다른 화초들과 함께 자주 주었으니 이래저래 나의 무지가 그들을 힘들게 해 미안했다. 그래서 아무리 바빠도 아침저녁으로 베란다 초록식구들과의 소통은 나의 중요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5월 어느 날 오후, 주택가 네거리 건물 1층에 꽃가게가 문을 열었다. 출입문에는 앳된 남자의 웃는 얼굴이 그려져 있는데 간판은 ‘꽃 파는 남자’다. 언 뜻 봐도 길 가는 사람들이 한 번쯤은 궁금증을 가질만한 상호다. 외손녀 서영이를 3층 학원에 데려다 주고, 꽃가게를 기웃거렸다. 점포 앞의 잘생긴 큰 화분들이 눈길을 끌었다. 근처 꽃집에서는 볼 수 없던 아름다운 화분에 담겨진 화목들이 싱싱해 보였다. 거리에 내다 놓은 화분들의 위치도 각각의 특성과 눈높이를 염두에 두고 배열했지 싶다.
‘꽃 파는 아가씨’라는 노랫말은 들었어도 ‘꽃 파는 남자’라니 상호가 눈길을 끌었다. 어디 그뿐이랴. 그 옆 미용실 남자미용사의 가위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미용실에 남자들이 예사로 드나들고, 금남의 영역인 줄 알았던 간호사 속에 버젓이 남자간호사가 눈에 띈다. 직업관이 많이도 변했다. 이토록 자기 적성을 찾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세상이 왔으니 남녀평등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 게 아닐까?
내 무지로 1년 동안 고생시킨 금전수가 생각나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안쪽에서 문에 그려진 청년이 얼굴을 내민다. 1m80cm는 족히 넘어 보이는 등치에 어울리지 않는 동안이다. 성인 남자의 얼굴이 5살 어린이 얼굴처럼 천진무구한 표정이었다. 뒤따라 한 여자가 들어오더니 개점축하 화분을 샀다. 생각 보다 싼 값으로 팔리는 걸 보며 나도 선물할 화분도 살 겸 궁금하던 걸 이것저것 물어봤다. 일주일에 한 번 직접 수도권화원에 가서 물건을 구입해 중간 마진이 없으니 딴 집보다 싸다고 한다. 다른 화원과의 차별화를 위해 고급스러운 용기를 과감히 사용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단다. 또 큰 나무에 아기자기한 용기를 매달아 예쁘게 장식해 보는 이에게 미소를 머금게 한다. ‘집안 인테리어는 화분으로’라고 써 붙인 광고가 어울리는 꽃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서울의 이름난 꽃집을 찾아 이런 저런 노하우를 벤치마킹한 것이란다. 금전수의 특성도 이곳에서 알았으니 베란다 초록식구들을 위하여 자문할 곳이 생겼으니 큰 행운이라도 잡은 것 같은 기분이다.
청년의 아버지는 농사꾼이면서 분재를 취미로 하셨다고 한다. 오래 하다 보니 소문이 퍼져 일부러 분재를 구경 오기도 하고 사가는 이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청년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 분재는 돌보는 손길이 끊어지자 균형이 깨지며 아름다운 조화가 무너지는 걸 보며 학생은 아버지 대신 분재에 빠져들었단다. 아버지가 분재하시는 걸 못 마땅하게 여겼던 아들은 분재를 돌보며 나무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화원에서 기술을 전수받는 조건으로 3년을 꽃과 나무속에 파묻혀 지냈다고 한다. 준비된 꽃 파는 청년은 지금은 꽃을 팔지만 장차 나무와 꽃을 기르는 농원을 만들어 지구정원사를 꿈꾸고 있었다. ‘꽃 파는 남자’의 순박한 얼굴은 꽃을 닮아서인지 꽃처럼 환했다.
밖은 꽁꽁 얼어붙어 회색빛이어도 베란다에 싱싱한 초록가족이 있어 마음은 항상 봄날이다. 정월이 오면 고귀한 향으로 집안을 가득 채울 난이 화촉을 내밀고, 개발선인장도 예쁜 꽃망울을 매달기 시작했다. 이래서 살아있다는 건 축복이고 환희라고 하는 모양이다.
앙코르 내 인생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이강애
잘난 것도 없고, 잘한 것도 없으며, 애교도 없고, 상식과 지식도 모자란 내게 무엇이 그리 잘 살았다고 앙코르 인생인가? 하지만 나는 내가 나름대로 앙코르 인생을 살았노라고 자부한다.
내 인생를 살펴 보면 기쁜 일보다 어렵고 힘든 일이 더 많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일에 집착이나 후회보다 더 좋은 일만 생각하기로 했더니 생각지도 않은 기쁘고 감사한 일들이 더 많아서 마음이 설렜다. 슬픈 일만 생각하면 한 없이 슬픈 일뿐이고 후회한 일만 생각하면 한 없이 후회할 일뿐이다. 긍정적인 생각에 행복이 따르는 것임을 안다. 언제까지나 부정적이고 나태하고 안 된다고 실의에 빠져 절망만 하면 진짜 그렇게 되는 것이리라. 나는 행복하다. 나는 부러워 할것이 없다. 나는 할 수 있다. 두려움이 없이 용기와 열정을 가지고 사는 나였노라고 자부한다. 나는 왜 이렇게 예쁘지도 않고 애교도 없고 영리하지도 않고 잘난 것이 없이 늘 그늘에서만 살까 하는 생각에 미치면 한 없이 나락에 빠져 영 실패의 삶이 될 것이다. 나도 그런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모두 남의 탓으로만 돌리고 원망만 하고 세상이 싫어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겨내고 오늘에 이르렀다.
나를 이렇게 씩씩하고 건강하게 달려올 수 있게 한 것은 오히려 많은 시련과 병마가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들판에 한 없이 비 바람과 폭풍우만 치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고 새도 운다. 학력에 대한 열등감으로 주눅들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고 살려고 안간힘도 써보고 결점없이 살려고 노력했다. 이 나이에 혼자 울어도 보고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도 쉬며 살 때도 있다. 이젠 혼자 많이 살았노라고 자부하며, 세상에 웃음을 주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도 한다. 지금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항상 즐겁게 산다. 하늘의 비는 무엇을 바라지 않고 내리고 찬란한 햇빛 또한 아무런 대가 없이도 만물을 따뜻하게 한다는 의미를 알게 되었다. 행복은 언제나 내 안에 있어 나에겐 다른 사람이 갖지 않는 또 다른 꿈과 또 다른 결심과 열정이 있다.
긍정적인 생각이 행복인 것을, 날마다 비추는 저 햇살, 하늘에서 누부시게 내리오는 첫눈, 꽃과 잎 그리고 겨울 나목을 보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살려고 한다.
올해는 최고의 다이어트도 해야겠다. 탐욕과 집착의 뱃살을 빼고, 성냄과 질투의 속살도 빼며, 아집과 허영의 얼굴살도 빼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니 이렇게 편하다. 나는 얼마 전 갑자기 오른 쪽 눈이 잘 안보여 눈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았다. 그때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하고, 두 손이 있어 부드러움을 만질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하고, 따뜻한 가슴이 있어 기쁨과 슬픔을 느낄 수 있는 것도 감사하다. 내게 주어진 일이 있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며,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어서 감사하다. 내가 갈 곳이 있어 날 반겨 줄 소중한 이들이 기다린다면 그 이상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내게는 모두가 소중하고 감사한 것 뿐이다. 정말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내고 싶은 악몽의 병원생활이 이제는 추억이 되었다. 그 아픔 뒤의 진한 행복이 나에게 와 있다. 이대로 주저앉아 죽을 수는 없다. 그렇게 어려웠던 병마를 이겨내고 다시 찾은 행복에 하루하루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간다. 세상의 어려운 이웃 모든 분들도 용기를 잃지 말고 희망을 갖고 도전하여 꼭 행복을 만들기 바란다.
나는 축복받은 자다. 나는 행복하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일진대 감사한 것 뿐이다. 나는 몇 년 전 암을 치료하기 전까지는 감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병원에 한 번 가본 적도 없다. 치아가 나빠 치과에 가본 적도 없이 건강하게 잘 살았다.
하고 싶은 것을 다하고 사는 것이 큰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이것도 갖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여행도 가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은데 못했을 때 얼마나 불행한가? 어려서부터 배운다는 것에 집착이 참 많았다. 자전거를 지금도 잘 타고 다니는 것도, 30여년 전에 운전면허증도 1급보통을 따서 트럭이나 택시운전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다 배움에 대한 욕심 때문이다. 30여 년 전에는 여자가 운전을 한다는 것이 드문 일이었지만 나는 도로가 포장도 안 되어 울퉁 불퉁한 거리에서 트럭으로 운전연습을 하며 트럭에 앉으면 다리가 짧아 의자뒤에 방석을 놓고 털털거리는 트럭으로 면허증을 땄다. 나는 컴퓨터가 무엇인지도 모를 때 동사무소에서, 전북대학교 전자컴퓨터실 젊은 사람들 틈에서 애를 태우며 배웠다. 그렇게 배워놓았더니 지금 이렇게 잘 써먹지 않는가? 도둑질만 빼고 무엇이든지 다 배우라는 말이 나에게는 교훈처럼 따라 다닌다.
옛날에는 바둑판이나 바둑 알도 없어 두꺼운 종이에 바둑판을 그리고 바둑 알은 검정고무신과 흰고무신을 썰어 바둑 알처럼 바둑을 두었다. 바둑에 몰두하다 보면 교회에 가서 기도하다가도 아까 그 자리에 놓았으면 그 아까운 대마가 죽지 않았을 텐데 생각하고, 내가 이기는 바둑인데 왜 내가 졌지 하며 아쉬워했다. 장기도 처음에는 차 떼고 포 떼고부터 배우기 시작해서 지금은 누구와도 맛수로 뒨다. 낚시도 한 번 낚시줄을 드리우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찌만 바라보다 남편 밥을 차려주지 못한 때도 있었다. 무엇이든 무식은 면할 정도로 배우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 그런 열정이 있었기에 오늘의 나는 그 무서운 병마를 이기고 행복한 삶을 산다. 이제 꼴값 그만 떨고 조용히 되돌아보며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을 반추해 본다. 새해에는 못다 이룬 것들을 다 이루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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