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팀장
미주의 변이세포는 Bio칩의 신소재로 상품화되었다. 신제품 M칩은 히트했고 개발자 오 선임은 일약 책임급 연구원으로 승진했다.
그는 미주와 지오를 집으로 초대해 아내와 가족에게 소개했다.
미주에 대한 감사를 그런 식으로 드러낸 그는 객지에서 홀로 아이를 키우는 그녀의 후견인이 되겠노라 스스로 다짐하고 있었다.
M칩을 도입한 신형 양자컴퓨터는 성능이 현격히 뛰어나 2세대로 분류되었다. 세상은 기존 모델과 차별화된 2세대 모델의 등장에 열광했다. 하지만 막상 중요한 대목은 놓치고 있었다. 바로 2 세대 모델의 학습능력...!
훗날 빌리의 자의식을 각성시킨 그 기능이야말로 1 세대 모델과의 근본적 차이였다.
워낙 고가라 망설이던 연구소는 ‘신제품 적용모델’ 이라는 논리에 밀려 2세대 모델을 구입했다. 양자컴퓨터 도입에 고무된 연구원들은「빌리」라는 이름까지 지어주며 반겼다.
신설된 빌리 운용팀은 오 책임이 맡았다.
생체 칩을 장착한 양자두뇌는 진동에 취약했고 섬세한 관리가 필요했다. 가벼운 진동조차 치명적일 수 있었다. 그래서 본체는 내진설비로 보호된 지하에 모셔야 했다.
자연광 조명까지 갖춘 산소 탱크 속에... 엄중히 통제되는 그 장소는 허가를 받고 드나들어야 했다.
기기전담 관리자는 반드시 필요했다. 오 팀장은 AS 담당자 미주의 파견을 원했고 지원실은 AS업무도 가져가는 조건으로 협조했다.
PC AS라는 신규보직을 만들고 포상까지 받은 미주는 이제 지원실의 당당한 중견사원이다. 하지만 지원실은 담당업무만 마치면 칼 퇴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일단 상황이 터지면 전원이 매달려야 한다. 제 할일만 마쳤다 해서 모르쇠 여유부리기는 어려운 분위기다.
그러나 빌리팀의 분위기는 확 달랐다. 일일 점검과 PC AS 업무만 마치면 얼마든지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미주는 그 여유시간을 이용해 빌리를 관찰하고 매뉴얼 작성자료들을 수집했다. 빌리에게는 Test 매뉴얼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매뉴얼이란 곧 사용 경험의 축적물인데 신모델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도입 6개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빌리는 아직 Test 중이었다. 언제 끝날지도 몰랐다. 양자역학을 본격 적용한 2세대 모델의 Field Test에는 창의력이 필요했다. 동일 작업을 반복시키며 오류 여부를 지켜보는 Test는 의미가 없었다.
도입 초기에 전자키 보안의 기초인 소수素數 암호를 풀게 해보았다. 그 결과는 허무했다. 제 아무리 난해한 암호도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다.
입력과 동시에 암호를 풀어버리는 빌리 앞에서 뻘쭘해진 연구원들은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수퍼 컴퓨터로도 족히 몇 년은 걸릴 작업이었다. 소수 암호가 밥줄인 전자보안업체들이 안다면 헤까닥 뒤집어질 대 사건이었다.
빌리를 과소평가 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연구원들은 보다 난이도 높은 Test 방식을 찾기 위한 워크숍을 열었다. 참신한 Idea를 얻기 위해 주요 방송국들의 몇몇 과학부 기자까지 참가시킨 회의였다. 빌리팀은 전원이 참가했고 미주도 참석했다.
참석한 과학부 기자는 공영 TV에서 2명, 종편 TV에서 1명, 그리고 내셔널 지오그래픽 등 잡지사에서 1명씩 모두 5명이었다. 그중 2명은 여 기자였다.
평소 세포연구소에 관심이 많았던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활발하게 취재를 벌였고 세미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연구소 측의 홍일점 미주는 그들의 주목을 받았다.
너무 어려서 처녀로 짐작했던 기자들은 아기 엄마라는 사실에 놀랐고 연구소 PC들의 AS 책임자이자 빌리의 관리담당자라는 말에 감탄했다.
특전사 장교처럼 야무져 보이는 K방송국 기자 이민우는 점심 때면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식의 전당, 연구소를 집으로 삼아 아기와 살아가는 그녀의 삶이 가을햇살처럼 맑아 보인다.
방송국에 넘쳐나는 화려한 성형미인들에 식상한 그의 눈에 아기와 그녀는 프레스코 화의 성 모자상처럼 청순했다. 사내가 여인에 혹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 없는 법. 벼락이 치듯 한 순간이면 끝난다. 사진밖에 모르던 일벌레 청년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었다.
2박 3일의 워크숍 동안 기자들과 연구원들의 대화는 수시로 이어졌다.
“빌리의 능력은 어느 정도인가요?”
“기존 컴퓨터는 64비트 숫자를 한 번에 1개씩 다루지만 빌리는 그걸 동시에 다룹니다. 2의 64승, 즉 20자리 숫자를 동시처리한다는 뜻인데 이건 기존컴퓨터가 5천 년 계산할 문제를 1초에 풀어내는 혁명적 위력이지요.
전에는 풀 엄두조차 못 내던 고차원의 미분방정식도 풀어서 보다 정확한 예측, 이를테면 주가나 날씨도 예보할 수 있구요. Bio 공학이나 탄소 튜브 등 나노소재 개발에 필요한 시뮬레이션도 보다 복잡한 인자를 첨가해 거의 실제상황으로 재현할 수 있습니다.”
연구원들은 초청자인 기자들 발언에 주목했다. 현미경 사진작가 이민우는 세포 사진때문에 몇몇 연구원과는 안면이 있던 처지다. 그는 프랙탈 이론과 Bio 공학을 엮은 의견을 제시했다. 자연의 디자인인 카오스의 패턴을 찾아내는 도구로서 빌리의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다. 유전자 배열과 프렉탈 무늬의 신비한 유사성을 아는 연구원들은 그 제안을 진지하게 토의했다.
“ 그러니까 모든 카오스 속에는 프렉탈전인 질서가 있을 수 있다는 거지요?”
“ 예, 아마도 거의 대부분...”
“ 어떤 방법으로 그걸 찾을 수 있지요?”
“ 그건 찾아지는 게 아니고 그냥 올 뿐입니다. 깨달음처럼 어느 날 번쩍 오는 겁니다.
형장으로 떠밀려가는 사형수의 눈에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던 풀꽃이며 무당벌레의 날갯짓이 선명하게 꽂혀 오듯이... 늘 그곳에 있지만 보지 못하던 것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일단 눈이 트이면 온 세상이 그런 무늬로 가득한 걸 보게 됩니다. 현미경이나 망원경 속까지 그런 무늬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 그리고 분석이겠죠. 나노 수준에 이르기까지의 철저한 분석.
아울러 후뚜루 마뚜루 전체도 살펴야 합니다. 독수리의 눈에 개미의 촉각이 필요한 작업이라고나 할까요.”
워크숍이 끝날 무렵 『프렉탈』이 빌리의 새로운 활동영역으로 탄생해 있었다.
프랙탈은 시각 언어다.
연구원들은 빌리에게 우선 이동식 카메라부터 달았다. 이어서 3차원 스캔기능도 추가했다. 그리고 카메라로 의자를 비치자 빌리는 의자를 수치화된 입체 형상으로 인식했다. 영상이 잡히는 순간 의자의 높이, 폭, 두께가 표시된 3D 형상을 순식간에 만들어 화면에 띠웠다. 지켜보던 연구원들은 일제히 탄성을 울렸다.
재미를 붙인 그들은 온갖 대상을 입력했고 빌리의 메모리에는 잡다한 기물들의 수치 정보가 차곡차곡 축적되어갔다.
어느 날 김 병식 연구원이 줄무늬 고양이 한 마리를 연구소 정원에 데려다 놓았다.
“ 빌리를 고양이 생태학자로 만들어 보려구요.”
그날부터 고양이 추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상대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엉뚱한 장소에 불쑥 나타나곤 하는 신출귀몰한 녀석이다. 카메라 한 대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연구소 곳곳의 ccTV 카메라가 총동원되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2586D47579500290E)
당직 날 새벽,
오 팀장은 컴퓨터의 멜론(음악 site)을 열고 헤드폰을 끼었다. 왕가위의 94년작 중경삼림 OST. 영화 마니아인 그는 장면들 대부분을 기억한다.
믹스 커피를 홀짝이며 캘리포니아 드림을 거듭거듭 들었다.
패스트푸드점 알바 왕비王菲(왕페이)가 캘리포니아 드림의 선율을 타고 건들건들 양 조위 순경의 주문을 받으러 간다.
해맑은 얼굴의 도시남녀들,
하지만 막상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는 오리무중이던 명장면이었지...
커피를 마시니 담배가 당긴다.
봄날이라지만 새벽 공기는 제법 선득하다. 오리털 파카를 껴입고 연구소 정원으로 나서 마일드 세븐을 피워 문다.
검푸른 바탕에 북두칠성이 선명하다. 별을 보고 있노라면 수정체 깊숙한 곳까지 한껏 시원해진다. 고개를 발랑 잦히고 천천히 연기를 뿜으며 아득한 별 바라기를 한다.
어디선가 쓰윽 하니 줄무늬가 나타난다. 번쩍이는 두개의 푸른 야광에 시선을 맞춘 오선임은 천천히 감았다 떴다 해주었다.
그건 고양이 언어였다.
‘난 널 해치지 않을 거야.’
이윽고 경계를 푼 녀석은 슬며시 다가오더니 바지에 부비 부비를 한다. 그리곤 빤히 올려다보며 냥냥 거린다.
‘뭐-- 먹을 거? 임마, 너도 머리란 게 있으면 생각 좀 해 봐.
이 꼭두새벽에 뭘 들고 왔겠냐?’
고양이는 상대의 무관심을 반긴다.
비벼도 모르쇠 해주니 꼬리를 깃대처럼 곧추 세운다. 이건 기분이 제법 좋다는 얘기다.
‘늘 거만 떠는 이 녀석도 이따금씩은 외로운 건가....’
발라당 누워 뒹구는 고양이는 먹이를 조르거나 놀자는 거다.
또 항복 선언이기도 하다. 이런 때는 슬쩍 보드라운 배를 쓰다듬어 봐도 된다. 하지만 녀석은 항복이면 됐지 배는 왜 만져? 식으로 만지는 손을 앙칼지게 할퀸 적도 있다. 일단 경계태세에 들어가면 녀석은 뾰족한 마징가 귀가 된다. 그러다가 납작하게 만든 귀를 깻잎처럼 머리에 착 붙이면.... 이크! 이건 공격 직전이다.
줄무늬는 그렇게 고양이 말들을 하나씩 가르쳐주었고 오선임은 수업료 조로 말린 멸치나 크래커 따위를 이따금씩 상납하곤 했다. 그렇게 사귄 둘은 때로는 복도에서 때로는 이런 새벽에 간간이 조우한다.
줄무늬가 싸돌아다니는 모습은 어느 덧 연구소의 일상으로 자리잡아갔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지오 덕분에 미주 역시 자주 어울린다.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낼 뿐 귀찮게 굴지 않는 아기를 줄무늬는 친구로 여긴다. 그래서 ccTV에는 줄무늬와 아기가 함께 찍힌 장면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몇 주일이 흐르자 이윽고 고양이 팬클럽이 생겼다.
멤버들은 줄무늬의 표정과 몸짓을 관찰하고 ccTV에 잡힌 웃기는 장면에 낄낄대면서 서서히 고양이 행태의 달인이 되어갔다. 녀석이 물끄러미 응시하는 방향, 귀의 움직임, 수시로 달라지는 울음소리 그리고 다양한 바디 랭귀지를 그때그때의 상황 스케치와 함께 입력시켜갔다. 줄무늬의 언어는 소리만이 아니었다.
입과 수염, 귀, 허리와 꼬리로 벌이는 팬터마임 역시 언어다. 자면서도 귀를 움직인다. 듣고 있다는 증거다. 갑자기 쫑긋 세우면 반응하는 것이다. 쥐가 기어가거나 위험요소가 나타났을 때는 귀를 바짝 젖힌다.
동화상과 사진들이 기존 컴퓨터로는 불감당 수준으로 쌓여갔지만 빌리에게 그쯤은 문제도 아니다. 표정 관찰은 이윽고 고양이 독심술로 이어졌다.
이따금씩 열리는 팬클럽 간담회에서 어느 날 김병식 연구원이 말했다.
“ 줄무늬 그 녀석 말이죠. 저희랑 썩 닮았습니다.
우선 도도해요. 절대로 누구한테 기대거나 복종하는 법이 없습니다. 주인이랍시고 암니옴니 떠들어봤자 같은 레벨 또는 아래 것의 주절거림 정도로 치부하고는 귓등으로 흘려들어요. 소장님을 우습게 여기는 우리랑 비슷하지 않습니까?”
다들 낄낄 대며 끄덕였다. 다른 멤버가 이어갔다.
“ 맞아요. 싸돌아다니다 심심해지면 이따금씩 다가와 슬쩍 비비죠. 하지만 이내 혼자만의 시간으로 되돌아갑니다. 깔끔 떨며 먹을 때면 교양 있는 여염집 부인처럼 우아하고 품위가 넘치지요. 게다가 먹는 양까지 조절할 줄 압니다. 먹이만 보면 껄떡대며 단번에 다 해치우는 식탐의 대가, 개와는 수준부터 달라 오래먹지도 않아요.”
김 병식이 마무리 결론을 내렸다.
“ 우리랑 닮고 여염집 부인네도 닮았다면... 줄무늬 그 녀석도 결국 엉큼 대왕과科라는 얘기잖아?”
한바탕 웃고 치웠지만 오 팀장은 생각에 잠겼다.
‘이 정도면 거의 독심술 아닌가?
어쩌면 사람한테도 써 먹을 수 있지 않을까?’
고양이 행태분석으로 자신을 얻은 그들의 관심이 ccTV 영상의 엑스트라 지오에게 옮겨간 것은 빌리를 공개하기 9개월 전이었다.
'고양이를 이 정도 알 수 있다면 명색이 인간인 아기 옹알이쯤이야....'
전부터 옹알이의 정체가 궁금하던 그들이다. 행태연구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것은 유아 언어의 AI(인공지능)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우선 의료용 뇌파 측정기를 구해 빌리에게 달아주었다. 그리고 듣고 말하는 기능에 촉감 센서까지 추가했다. 이윽고 빌리는 아기의 뇌파를 영상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기분 좋을 때면 밝은 색의 부드러운 이미지, 싫으면 어두운 계열색의 날카로운 이미지가 나타나는 단순한 형태였다. 뇌파감지는 전극을 머리에 부착해야한다. 그러니 움직이는 인간을 관찰하기에는 무리다.
'전극을 달지 않는 측정방법은 없을까? 줄무늬처럼 표정과 바디 랭귀지를 이용하면 어떨까?'
빌리가 각성을 체험한 시점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6446649579500A008)
멤버들은 독심술 자료를 뒤졌다. 눈동자 위치 또는 팔짱 낀 모양새로 심리를 읽는 방법...등등. 하지만 자료는 대부분 황당했고 사기에 가까운 내용도 많았다.
실망한 그들은 실생활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상사 앞에서 김밥 마는 데 일가견이 있는 게 공무원 사회다.
아부에는 고도의 세련미가 필요했다. 어설프게 하다 동티내지 않으려면 상대의 마음을 잘 읽어야 한다. 국립연구소 역시 준공무원 집단이다.
눈치 9단인 그들 중에는 심지어 얼굴의 작은 근육들이 연출하는 7천여 가지 표정에 통달한 경지에 이른 사람까지도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쯤 되면 얼굴 어느 부위가 어떤 감정에 반응하는지도 안다고 했다. 이를테면 내측 전두근으로 불리는 눈썹 안 쪽 근육이 약간 움직이면 그건 슬프다는 뜻. 그 정도면 임상 심리학자고 걸어 다니는 거짓말 탐지기 아닌가! 표정으로 뇌파를 감지하는 능력이나 진배없었다. 알아갈수록 연구소야 말로 살아있는 독심술 자료의 보고였다. 게다가 실생활에서 얻은 자료들이라 신뢰도마저 높았다. 입이 떡 벌어진 멤버들은 차곡차곡 수집한 그 자료들을 빌리에게 입력해갔다. |
첫댓글 꿀잼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