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목소리 /권종숙
창밖은 짙은 어둠이 내리고 있다. 왠지 가슴이 설렌다. 내일 10시, 강변 전철역에서 미란이를 만나기로 되어 있다. 약속 확인 차 조금 전에 간략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41년간의 세월을 얼굴에 한껏 발라 나오겠다더니, 지금은 나와의 재회를 위해 미용실에 앉아 머리를 매만지고 있단다. 난 내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보름 전에 애용하던 핸드폰과 결별하고 ‘갤럭시노트’와 첫 대면을 했다. 사용법을 간단히 배웠지만 익숙하지 못해 구닥다리 늙은이 기분이 들었다. 밤늦도록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며 짜증 섞인 호기심으로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잠시 후 첫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메시지를 읽는 순간, 공중에 부웅 뜨는 느낌이 들었다. “종숙아, 나 미란이야. 남미란, 서울에 있다는 걸 들었어. 나 안 보고 싶니? 나는 네가 보고 싶어 죽겠다. 아주 아주 많이…. 우선 목소리라도 들어보자.” 울컥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얼마나 부르고 싶던 이름이며 보고 싶은 얼굴이었던가? 그동안 친구들을 통해서 혹은 교육청을 통해서 되는 대로 알아보았지만 결국은 허사, 문득문득 너를 생각할 때마다 온몸에 좀이 쑤셨다. 하늘로 솟았니, 땅속으로 꺼졌니, 미란아! 너의 소식을 듣기가 왜 이리 힘이 드니. 그럴수록 궁금함은 더해지고, 지난날의 짙은 잔상이 가을 하늘 아래 나풀거렸다.
다음 날 아침, 남편이 아파트 문을 나서는 것을 확인하자 나는 스마트폰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심호흡을 했다. 흥분되어야 할 그 순간에 미세한 불안감이 밀려드는 건 웬 조화 속인가? 그렇다. 나의 블랙박스 속에 41년간 저장된 미공개 사연을 열어보려는 순간이기 때문일 게다. 미묘한 심정을 다독이며 기나긴 세월의 강물 위에 놓인 그리움의 다리를 일단 건너고 보자 하면서 통화버튼을 눌렀다.
상상했던 목소리와는 달리 초로의 얌전하고 의젓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얘가 여고 시절 내 친구 미란이 맞긴 맞나?’ 하는 의구심이 나는 순간, “종숙이지. 그래, 그래, 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여직 변함이 없군. 너네 할머니 아직도 살아계시니?” 미란이가 확실하다. 무역관계 공기업에 근무했던 남편의 임지를 따라 국내외를 수없이 이동하며 마치 배낭 여행객처럼 살아오는 동안, 홍시만 보면 우리 할머니 생각만 나더란다. 가을-홍시-종숙 할머니-시루떡-반김-고향-뿌리로 이어지는 마인드맵을 가슴 밑바닥에 수없이 그리며 살았단다. 타국과 객지에서의 외롭고 허허로운 삶을 그런 뿌리가 지탱해주었기에 견뎌낼 수 있었단다. 여자의 굴레, 세월의 굴레가 앗아간 인생길을 돌고 돌아 잊은 듯 덮어둔 옛 친구를 이제야 찾게 되어 미안하단다. ‘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소식 두절된 친구가 혹시나 반평생 고난에 허덕이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나 보다.
어린 시절 뇌리에 깊숙이 각인된 장면은 문신처럼 가슴에 새겨져 인생길 굽이굽이마다 아름다운 감동으로 피어났더란다. 고등학교 2학년 가을에 미란이와 효순이가 우리 집에 놀러왔던 기억이 난다. 동생들을 데리고 서울에 사시던 부모님 대신 조부모님이 친구들을 맞아주셨다. 시제를 지내고 남겨둔 시루떡을 쪄서 홍시에 찍어먹으라고 주셨나보다. 난 비슷한 경험이 많아서 잊고 지냈는데 미란에겐 특별한 체험이었던 모양이다. 그 홍시, 그리고 할머니의 따스한 모습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단발머리 여고생이었던 미란이가 이제 초로의 여인이 되어 수화기 저쪽에서 속삭이고 있다. 빨리 만나고 싶다. 하지만 만나고 싶은 사람일수록 아껴두는 것이 좋다는 생각은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마침 추석 명절이 코앞이라 그 이후 만나기로 약속하고 통화를 끝냈다. 최근에 배운 카카오톡 덕분에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남의 연습을 주고받았다.
드디어 오전 10시, 전철역에서 그녀를 만나기로 되어 있다. 우성아파트 앞에서 갈색 옷을 입고 서 있는 예쁜 여자를 찾으라는 메시지를 못 봤다면 그녀를 바로 옆에서 지나칠 뻔했다. 우리는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우선 얼싸안았다. 손등을 쓰다듬으며 뚫어지게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친구가 41년 전의 그 단발머리 친구란 말인가. 한참 만에 서글서글하던 눈매와 곧은 콧날을 보고 그녀를 확인했다. 풋풋한 복숭아빛으로 오동통 부풀어 올라 있던 그 귀여운 볼은 대체 어딜 갔나. 친구를 옆자리에 앉혀 놓고 보고 또 쳐다본다. 마침내 누구라 할 것 없이 서로 피식 웃고서는 오늘의 행선지를 의논한다.
미음나루 어느 찻집의 창가에 앉아 강동대교 밑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있다. 마치 강물 속에 그동안의 사연이 담겨 있는 것처럼. 그동안 한 번도 풀어보지 못했던 각자의 그 블랙박스, 41년간 매듭을 알 수 없어 풀어보지 못했던 기나긴 이야기를 풀어놓으려는 것이다. 강물을 바라보며 담담히 얘기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얼마나 많은 사연이 맺혀 있는가. 그녀는 나의 사연에, 나는 그녀의 사연에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다. 굽이굽이 살아온 친구의 사연을 듣다 보니 여고 때의 그 깜찍한 모습이 되살아나고 있다.
그 시절 그 사회에서 살았다면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들은 억울하게 살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가부장적 이념이 철두철미하게 스며있던 영남의 반촌, 1960년대까지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남녀의 차별이 뚜렷했고, 우리는 그 차별에 반항하는 여학생들이었다. 하지만 그 반항은 언제나 우리들끼리의 입속에서만 존재했다. 우리가 교육대학에 진학한 것도 순전히 우리들의 의사만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는 잘한 일인지는 몰라도 그때 우리가 바라던 직업은 교사가 아니었다. 오색 무지개가 피어날 때였으니까 말이다. 어른들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서였다.
미란이는 서울에 있는 교대로 진학해서 올라가 버린 후 소식이 끊어져 버렸다. 내가 교직에 내내 몸담고 있는 동안 미란이는 몇 년 만에 교직을 그만두고 남편을 따라 외국으로 나갔다. 그 후 나도 교사 남편과 결혼해서 초년에는 고생도 좀 했지만 큰 기복 없이 37년간 변함없이 같이 살고 있다. 때로는 고달프기도 하고 때로는 보람을 느끼기도 했지만 나 자신을 위해서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회의감이 들 때도 많았다. 그래서 2년 전에 명예퇴임을 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지금은 너무 많은 일을 벌이고 있어 정신이 없는 편이다. 지금은 내게 맞는 것을 선택해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중이다.
남편 덕에 외국생활을 두루 경험할 수 있어서 좋았겠다고 미란에게 말했다. “참 멋지게 살지 않았니? 남들은 다 너를 부럽다고 그럴 걸.” 미란이는 우리 부부가 오히려 부럽다고 했다. 연금을 부부가 함께 받으면서 노후에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하고 싶은 취미생활을 마음껏 즐기고 있으니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냐고 말했다. 사실 풍족하지는 않지만 우리 부부의 노후 생활은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우리들의 행복은 우리가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안분安分 자족自足하면 그게 행복 아닌가. 우리는 서로에게 그동안 잘 살아왔다고 격려해 주었다. 점심을 먹고 강변역 앞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이제부턴 자주 만나자고……. “너와 이렇게 만나고 나니 41년간의 회포가 한꺼번에 풀리는 것 같아.”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아쉬움의 눈길을 던지면서 헤어졌다.
집에 돌아오니 메시지가 뜬다. “꿈속같이 널 봤다. 종숙아! 왕년에 네가 뿜어내던 그 분위기 그대로더라. 소설같이 재미있는 네 얘기, 가을 정경이 분위기를 자아냈고, 맛난 음식을 먹었으니. 지금 나의 울렁거림이 멀미 탓만은 아닌 것 같구나! 고마웠다. 친구야.”
나는 그 자리에서 답신을 보냈다.
“미란아, 난 삶의 깊이와 폭이 넉넉한 사람과 대화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더라. 오늘 너를 만나고 나니 내 기분이 왜 이리 좋노!”
경북 안동 출생
전 초등학교 교사
원석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