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요 <아리랑>의 가사에 나오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에서 유래된 아리랑고개 말이다. 성북구 돈암동사거리에서 정릉동으로 이어지는 고개의 원래 이름은 정릉고개였다. 1984년 11월 7일부로 이곳은 ‘아리랑고개’라 불리기 시작했다. 춘사 나운규가 제작한 영화 <아리랑>이 이곳에서 크랭크인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서 붙은 지명이다.
<나운규가 제작한 영화 아리랑의 한 장면>
춘사 나운규는 누구인가? 1902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시절부터 연극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를 맞은 그는 3‧1운동에 가담했다가 러시아로 도피, 독립군비밀조직원 등으로 활약했다. 때문에 감옥살이를 하는 시간도 보내야 했다. 국경을 드나들면서 방랑생활을 하던 그는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단역배우로 시작해 1926년 영화 <아리랑>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영화에 등장했던 영진이네와 천가네 집을 재현해 놓은 아리랑고개 테마공원>
그가 제작했던 무성영화 <아리랑>. 1926년 10월 무성영화 <아리랑>은 단성사에서 성황리에 개봉됐다. 춘사 나운규는 영화주제가 ‘아리랑’을 직접 편곡했고 극중 변사 역할까지 맡았다. 영화를 보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영화관으로 몰려들었고 영화 감상이후에는 주제가 ‘아리랑’을 외쳐 불렀다. 영화를 통해 우리 민요 아리랑이 전국으로 전파됐다. 사람들은 민족혼을 아리랑 노래에 담았고 노래를 부르며 나라 잃은 설움까지 불태웠다. 나운규의 영화 한 편이 우리의 민요 아리랑을 대중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던 대사건이었다. 이러한 배경이 뒷받침되어 영화 촬영지인 정릉고개가 ‘아리랑 고개’로 탄생한 것이다.
1927년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하고 3년 만에 총 5편의 영화를 제작해 조선의 무성영화전성기를 펼쳤던 나운규는 방탕한 사생활과 독선적인 영화사 운영으로 인해 영화사 문을 닫고 말았다. 불운하게도 36세의 아까운 나이로 그는 세상을 떠나기까지 했다. 우리 영화사에서는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아리랑테마공원 전경>
아리랑 고갯길은 성신여대입구 6번 출구에서부터 시작해 아리랑고개마루에 들어선 아리랑시네센터까지 1km 정도 이어진다. 이 길은 ‘영화의 거리’라 불린다. 거리 보도블록에는 <쉬리>,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등 우리 영화와 <벤허>, <사운드 오브 뮤직> 등 세계적인 영화의 제작연도와 감독, 주연배우를 새긴 동판이 깔려있다. 아리랑씨네시티 관계자에 따르면 이 동판은 9월 즈음 철거될 예정이라 한다. 겨울에 눈이 내릴 때마다 동판 주변이 미끄러워 주민들에게 불편을 주기 때문이다. 철거된 동판들은 차차 아리랑시네시티의 외벽을 장식할 것이라고 하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해마다 5월이면 이 길에서 아리랑 축제도 열려 한국영화의 개척자인 나운규의 삶과 영화를 반추하게 된다.
<아리랑테마공원 전경>
영화의 거리 중간쯤에 나운규 테마공원이 들어서 있다. 나운규의 유작과 영화 포스터 그리고 그의 모습들을 담은 그림이 타일로 장식됐다. 공원 내에는 영화에 나왔던 영진네와 천가네의 집 모형이 오도카니 들어서 있다.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는 길목에서 잠시 쉬면서 춘사의 삶과 우리 민요 아리랑을 되새기기 좋은 곳이다.
<아리랑고개 마루에 들어선 아리랑씨네시티 전경>
<아리랑씨네씨티 1층의 한국영화 갤러리 코너>
아리랑 고갯마루에 아리랑시네센터와 아리랑 정보 도서관이 들어섰다. 아리랑씨네시티는 지하2층 지상 4층 규모로 일반영화 개봉관과 독립영화 개봉관을 두루 갖췄다. 건물 1층 입구에는 나운규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비가 서있다.
<아리랑씨네씨티 2층에 자리한 독립영화관>
<독립영화관에서는 우리 영화의 발전을 위해 독립영화를 꾸준히 상영하고 있다.>
<아리랑시네시티&미디어센터>
서울시 성북구 아리랑로 82, 02-3291-5540,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 2번 출구에서 1212,1014번 버스 이용, 6번 출구에서 20, 162번 버스 이용